창립준비위원회들 간 소통이 계속 이루어지고 합의가 하나하나 이루어지면서 이런저런 살이 붙었다. 작게나마 내용이 생기니 이걸 간단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는 허들과 원칙도 필요했다. 앞으로 이 공동체에서 비평, 연기, 제작 등 전반으로 함께 활약할 구성원들에게 필요할지도 모르는 안내와 지침이랄까. 모든 게임 시작에 튜토리얼이 있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 INK 작품의 조건
1. 특정한 지역(기초단위)에서 절반 이상 로케이션 진행
2. 제작자와 출연자의 절반 이상 청년(만 15~ 39세)
□ INK의 가치
1. 돈이 아니라 관계로 만든다.
2. 진정한 창작의 자유가 목표다.
3. 구성원 간에 무엇이든 공유한다.
4. 모든 청년 문화예술인들의 친구다.
INK 작품의 조건은 물리적으로 지역과 나이라는 두 가지 핵심적인 정체성이 보호받아야 하기 때문에 생겨났다. 보다 힘준 것은 INK의 가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다. 어느 순간 독립영화 진영은 ‘돈’에 기묘할 정도로 집착하기 시작했다. 이번 작품이 실패한 이유도 누르면 나오는 자판기처럼 정해진 답변이 있다. 장비가 부족해서, 원하는 로케이션에 실패해서, 경험 있는 배우 없이 찍어서… 더 많은 돈이 없어서. 당연시 된 제작지원 때문일까. 이들은 창작자라기보단 능숙한 공모사업 사냥꾼이 되고 있다. 창작자로서 창작에 대한 즐거움이나 의지는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다윈주의적으로 말하면, 강자가 되는 것보단 생태계에 적응하여 살아남는 개체가 승자다. 환경에서 살아남는 연습 대신, 따뜻한 온실 속 화초가 아니면 창작 자체가 진행되지 않는 상황은 전혀 바람직하게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영화는 제작비를 얻기 위한 명분이 될 수 없다. 이건 적어도 시네필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불건강하고 불공정한 관계다.
이런 현상 가운데 커뮤니티에 기초한 모델은 좋은 사례가 될 수도, 훌륭한 돌파구가 될지도 모른다. 거대 자본으로부터 벗어나자는 독립영화가 정작 지원금에 가장 휘둘리는 가운데, 품앗이와 구성원 간 공유로 만드는 영화는 ‘진정한 창작의 자유’에 보다 다가설 수 있다. 차라리 이러한 ‘돈’과의 영화적 거리 두기는 경제적인 이유로 지역에서 밀려나지 않고 만들어내는 기성의 방식과 구별되는 청년적인 창작. 지속가능한 씨네필, 씨네키드에게 알맞은 그림일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린 다른 기준으로 바라볼 것이다. 아니, 봐야 한다. 앞서 말한 성공한 영화, 인정받은 영화의 기준 자체가 지금 세상에 말하는 것과 엄연히 다르고 우리만의 의미가 계속 부여될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하다. 모두가 갸우뚱하더라도 소중한 영화들을 만나고 만들어낼 것이다. 그 첫 시도였던 2021년 첫 번째 영화제는 기대보다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50여 명. 대부분 창작자와 창작자 지인들이었지만, 분명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가능성이 보였다. 모르고 있었을 뿐이지 이런 작업에 흥미가 있는 청년들이 제법 있구나.
영화제가 끝났을 때는 두 번째 영화제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의심치 않았다. 게다가 단지 지역에서 만들어진 청년들의 영화가 소개되는 게 아닌, 창작자들이 서로 알게 되어 발생한 네트워크와 신뢰로 만들어내는 영화 창작 커뮤니티도 허황된 꿈은 아니겠다는 믿음. 그리고 이들끼리 고유한 문화와 방식으로 만나고 서로의 작품과 만나게 하는 축제가 역사가 생기고 자리 잡는다면 어떨까. 커뮤니티는 생산하고 영화제는 소비하는 상호보완적이고 작지만 확실한 생태계가 유지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차올랐다.
3.
2022년도는 목표가 확실했다. 영화제(FILM IN DAEDEOK)와 더불어 이젠 제작 워크숍 진행. 연초에는 집행부 구성원들이 모두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여러 청년단체와 만나고 홍보했다. 제작비로 쓰일 적은 금액은 집행부가 각자 품앗이와 재능 나눔으로 종잣돈이 생겨났다. 큰 희생과 결정이었다. 덕분에 워크숍엔 총 8개조 영화 제작팀과 연기할 배우들이 모였다. 대부분 대학생 혹은 사회초년생 직장인들이었다. 아직 영화 현장 경험은 없거나 부족할지라도 열의와 호기심만큼은 장난감 쥔 어린아이만큼이나 부족함이 없었다. 5월부터 7월까지 워크숍이 진행되었다. INK 구성원들이 만들어낸 8개 작품. 그리고 전년도 영화제에서 ‹개물과 냥자›(2021)로 심사위원상을 받은 김진형 감독의 신작과 필자가 만든 작품 ‹등대로›(2022)엔 제작지원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다른 지역 청년들이 많은 좋은 작품들이 소개되는 초청 부문에서 총 4개 작품. 지역 · 청년 · 영화란 키워드로 진행되는 4개의 프로그램. (이 중 작품심사와 발제 프로그램에는 감사하게도 마테리알 편집자분들이 수고해주셨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금 제안에 응해주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총 14편의 영화와 4개 프로그램이 곧 영화제 FILM IN DAEDEOK 2022에서 공개된다. 지금껏 달려온, 그리고 처음으로 가동된 지역 청년 커뮤니티의 결과물이다.
INK는 개인적으로 밟아온 경력의 종합에 가깝다. 아트시네마에서는 시네마테크의 의미와 역할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지역통화운동단체 한밭 LETS에서는 신뢰와 공유로 움직이는 커뮤니티가 무엇인지. 그리고 중간지원조직에서는 지역 내 다양한 네트워크가 어떻게 구축되고 성장될 수 있는지. 아마 앞으로의 INK 방향은 이 세 가지 단체에서 배운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역 청년들이 만든 작품이 보존되고 소개되는 자리. 지역 청년 영상창작자들이 신뢰하고 공유하는 플랫폼. 이 창작 작업에서 형성되는 다양한 조합, 그리고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한 조력 기구. 올해도 아직 기획하고 마무리 짓지 못한 일들이 많다. 지역 청년 영상창작자들의 전작 아카이브 및 인터뷰 아이템, 가을 워크숍으로 기획 중인 10만 원 지역 로케이션 SF 영화 워크숍 등등. 영화제 준비가 막바지인 지금에도 앞으로 INK가 갈 길이 멀다는 느낌에 아득해지기도 두근거리기도 한다.
부침이 없지는 않다. 아니 너무 많은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짚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지역에서 선거 결과는 여러가지를 요동치게 만든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청년벙커라는 든든한 청년공유공간에서 언제까지 머물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그렇다면 지금 사용하고 있는 FILM IN DAEDEOK이란 이름도 수명이 위태롭다. 지금은 고맙게도 이 공간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지만, 조건이 바뀐다면 당장 내년엔 어디서 워크숍 진행할까도 큰 고민이다. 최소한의 공간 유지비가 발생한다. 이 돈은 어디서 끌어올 수 있을까. 후원자? 참가비? 이뿐만 아니라 이번 워크숍 진행에서 절실히 깨달았지만 최소한의 상주 인력이 필요하다. 인건비가 필요한데 어디서 확보할 수 있을까. 계속 필요한 기술적인 질문들과 각종 지원과 플랫폼 역할에 필요한 상근 근무자가 없으면 원활하게 돌아가기가 도저히 힘들다. 적어도 프리랜서로서라도 각자도생해야 한다.
보다 근원적인 질문도 가시지 않는다. INK 구성원 중 30대는 거의 없다. 대부분 그 나이대가 되면 현실에서 직장 생활에 휩쓸린다. 대전 대학생 동아리 네트워크가 INK는 아니다. 이 시도가 과연 유의미한 모델이 되거나, 아니면 생존하여 계속 나아갈 수 있을지도 불분명하다. 어떤 축이 INK 구성원들이 강력하게 엮을 수 있는 끈이 될 수 있을지도 절박하게 모색해야 한다. (이전 사례들에서 생존하거나 의미가 있던 커뮤니티는 대부분 신념 중심적이거나 결국엔 비즈니스 모델로 도약했다. 물론 INK는 이와 다른 방향으로 도약에 성공해야 할 것이다.) 이 커뮤니티는 확고한 목적의식으로 결합하지 않았다. 아니면 분명 큰 파도엔 쉽게 무너진다.
제일 큰 고민거리는 주체적인 창작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긴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자신의 관점, 자신의 프로세스, 자신의 고유한 목적이 부재한 가운데 결합은 공동체적 모습이 아닌, 집단주의적이거나 느슨하다 못해 이익에 따라만 반응하는 네트워크에 지나지 않는다. 정답이 있는 영역이 아니라 더더욱 섬세하고 어려운 문제다.
당장은 답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다. 흔들리는 가운데에 우린 보다 나은 선택에 다가서리라는 자기최면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럼에도 INK 집행부는, 번쩍이고 있는 구성원들과 함께 쓰고 있는 역사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 보다 주목하고자 한다. 상반된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4.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로 마치려고 한다. 앞서 언급했던 바처럼 운 좋게도 폐막작을 연출할 기회가 있었다. ‹등대로›(2022)라는 영화다. 사사로운 감회이지만, 영화 편집이 끝나고 최종 편집본을 보기 직전까지도 내가 이 영화에서 하고 싶었던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가 훨씬 많았다. 최종본을 보고서야 그제야 ‘아 이런 건 아니었을까…’라고 조심스레 추측해볼 뿐이다. 이번 추측은 이 영화가 INK 단체 대표가 되기로 마음먹으며 적어낸 퇴사이유서가 아닌가 싶다. 항상 같은 해변으로 돌아오는 사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존재에게 홀린 사람, 그때 본 등대의 순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정작 내가 아니었을까. 다시 돌아온다는 지역에서 영화 찍자는 약속은 그때 동료들이 아니라 영화에게 한 약속이었던 건 아닐까. 아무튼 이렇게 지켜졌으니 신묘할 따름이다.
이 글 처음에 언급했던 ‹쥬라기 공원›은 시간이 꽤나 흐른 지금 종종 헷갈리는 사건이다. 지금 이 마음은 어린 시절 열병처럼 빠졌던 공룡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하는가 아니면 영화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하는가. 쉽사리 구분할 수 없다. 둘은 내게 떨어뜨려 놓고 생각하기엔 무척 닮아있다.
어린시절 ‹쥬라기 공원›에 대한 마음, 영화에게 쌓인 겹겹의 감정이 지금은 전과 같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미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고, 유령 같은 무언가에 집착하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공룡은 멸종하지 않는다. 공룡은 멸종하지 않았다. 공룡은 살아있다. 새(鳥), 그들은 이제 자유롭게 하늘에서 날고 있다. 마찬가지로 영화도 그렇다. 내겐 그렇다. 커다랗고 장엄한 움직임은 없어도, 당장 눈앞에 숨 쉬며 움직이는 작고 복슬거리는 생명체가 보인다. 공룡이라 믿기 힘들지 모르지만 분명한 공룡과 함께하려 한다. 겉모습은 영화라 믿기 힘들지 모르지만 분명한 영화와 함께하려 한다. 강하고 커다란 영화가 아니라 작지만 살아있는 영화와 함께하려 한다. 숱한 실패와 직장인이란 대멸종 이후 숨어든 방공호. 그런 모든 이들에게 지금 우리가 머무는 (청년)벙커는 티렉스가 살기에 부족할지 몰라도 소소하지만 확실하고 지속가능한 생태계가 자리하기엔 부족함이 없다.
이젠 벙커는 안전할 수 있을까도 모른다. ‘축구 3’은 득점에 성공할 수 있을까. 머릿속이 뿌옇게 바뀔 때면, 속으로 읊조린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1980). 버겁지만, 할 수 있는 바는 아직도 차고 넘친다. 떨어지는 펜에 자기도 모르게 뻗어지는 손 같이 쉽게 멈추지 않는다. 비틀거리는 자전거도 밟으면 여차저차 나아간다. 이 가운데에도 워크숍도 영상제도 진행된다. 할 수 있는 자는 능력자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무언가 하려는 사람 아닌가. 눈치챌 사이도 없이 이미 그렇게 움직이는 사람 아닌가? ‘인생’도 ‘영화’도 아니다. 움직이는 건 우리다. 둘 사이 관계가 건강하고 길게 이어질 자리로 내가, 우리가, 움직이는 중이다.
그러기에 각종 피로가 덮쳐오고, 근심이 늘어가는 시기. 파도에 익숙해지려 한다. 어쩌면 각자 마음 속 쥬라기 공원을 가꾸며, 산책하는 침략을 이어나간다면, 할 수 있는 자가 ‘인생’과 ‘영화’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중 겪는 파고는 높아도 짜릿하지 않을까. 진정 그럴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