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7
ESSAY
배은열

INK: 영화와 아이들

뒤로가기
ISSUE 7
ESSAY
배은열

INK: 영화와 아이들

출처, INK 블로그

이 글 내용은 2021년 11월, 대덕 FILM 영상제에서 발제한 김선호 님과 금동현 님에게 많은 부분 빚지고 있음을 미리 밝힌다.


INK(Image & Kids)란?

: 대전권역 (대전 충남 세종) 청년 (만 15세 이상 만 39세 이하) 영상창작자 (영상제작, 연기, 영상비평 등) 커뮤니티다. INK는 다음과 같은 활동을 진행한다.

(1) 지역 영상창작자들의 등장, 연결, 지원을 위한 워크숍을 진행한다.

(2) FILM IN DAEDEOK의 주최다. INK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이 소개되는 자리이다. 지역 청년 영상이란 주제에 맞는 작품 상영과 프로그램들이 진행된다.

(3) 지역 청년 영상창작자들의 작품을 보존하고 소개한다.

(4) 지역 청년 영상창작자들 간의 네트워크와 플랫폼 역할을 수행한다.


1.

한참 바쁜 시기다. 며칠 후인 8월 13일부터 14일까지 영화제가 열린다. 올해로 두 번째이다. 작년 영화제 때 지역 청년 영상창작자 커뮤니티 INK가 처음 공적인 자리에서 언급된 후, 이제는 어엿한 단체가 되어 여는 영화제다. 감회가 새로울 틈도 없이 부산하다. 이제 본격적으로 한 걸음씩 내딛고 있는 INK다. 보다 먼 과거부터 차근차근 되돌아본다.


 모든 일은 어린 시절 기억 하나에서 시작한다. 모든 어린아이가 그렇지는 않지만, 유년시절 텅 빈 집은 내겐 공포가 감돌던 곳이었다. 그 두려움을 잊게 만들어주는 건, 환한 빛이었다. 그중에서도 ‹쥬라기 공원›(1993)은 무척이나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생명체들의 빠르고 무거운 움직임은 혼자 있단 사실에서 나를 떼어놓았다. 전혀 다른 세상으로 인도했다. 이후 한동안 영화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거리에 있었다. TV에서 볼 수 있던 영화들과 극장에서 본 몇몇 영화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영화는 남다른 애정의 대상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생활에 영화는 다시 찾아왔다.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야간 자율 학습과 엄격한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던 중 인터넷 강의라는 명분으로 몰래 보던 영화는 내 자신이 누구인지 잊게 해주는 도피처였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나고 또 한 해가 지날수록 ‘영화’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는 무거워졌다.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주변에서도, 스스로도 영화와 나 자신을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려워졌다.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평생 살아온 대전에서 영화와 관련된 여러 가지 활동을 하게 된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문제는 어느 사회 초년생에게 그렇듯이 사회에 내딛고 처음 몇 년은 세상이 녹록치 않다고 깨닫는 시기다. 지원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만들었던 영화들은 모조리 실패했다. 그 사이 몸도, 마음도 많이 병들었다. 경제적으로도 쉽지 않았다. 의욕도 꿈도 사라졌다. 거짓말처럼 영화에 대해 차곡하게 쌓여온 애정은 2년도 되지 않아 빠르게 무너졌다. 같이 시작한 동료들 중에서 가장 먼저 포기하는 사람이 나일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직장인이 되었다. 언젠가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지만, 확신은 없었다. 거짓말과 같은 밀고 당기는 힘이라도 있는 것일까. 문제는 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만나게 된 사람들이다. 감히 삼국지에서 도원결의보다도 극적인 만남이랄까. 마치 누군가 정해준 느낌까지 드는 만남이랄까. 지역 콘텐츠 생산이 목표인 청년기업 대표. 대학 시절 때부터 영화 이야기로 같이 밤 지새우던 청년공유공간 운영자. 그리고 연기도 하고 영화도 만들고 하는 가장 친한 동생. 나까지 해서 공교롭게도 넷은 대전 대덕구에서 활동 중이었고 영화라는 공동의 관심사로 빠르게 우정을 쌓았다. 술로 얼룩진 만남들 가운데 어느 누가 먼저 입 밖으로 내뱉었는지 알 수가 없다. 대전 지역 청년 영상창작자들끼리 하는 영화제가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가 불현듯 등장했다.


2.

이때만 하더라도 지역 영화 버전의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은 머릿속에 없었다. 단순한 발상이었다. 영화 찍고 싶다. 영화제 하면 재밌겠다. 한참 활동할 때 친분이 있던 감독들에게 연락이 갔다. 급박한 작품 제안에도 모두가 흔쾌히 수락해주었다. 5편의 영화가 새롭게 만들어지고, 총 6편이 상영되기로 결정되었다. 바쁜 직장 생활과 병행하면서 영화도 찍어냈고 영화제도 준비했다. 간만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게 느껴졌다. 처음 아트시네마에 갔던 때, 처음 부산국제영화제에 갔던 때, 처음 영화 현장에서 스태프로 일하던 때, 씨네클럽 운영하던 때의 감정이 살아났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직접 겪고 부딪히는 과정은 영화와 나, 혹은 영화와 우리 사이에 가장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지점이 어디인지 일러주는 듯했다. 숱한 논의 끝에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운영에 필요한 단체 설립까지 확정했다. 거세고 빠른 과정이지만, 겁나지 않았다. 기세가 좋았다. 허황된 약속은 게으르기 쉬우니 영화제 마지막에 단체 설립에 대해 던져버리는 퍼포먼스까지 계획했다.


준비과정은 배움의 시간이었다. 알고 있었지만 까먹은 정답이 가슴 속에서 새록새록 피어났다. 영화제 준비와 영화 작업에 진척이 생길수록, 우리가 모인 까닭에 하나하나 의미가 덧붙기 시작했다.


INK는 지역 청년 영상창작자 커뮤니티로 정리되었다. 단어 하나하나에 지향하는 바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지역’은 정치권에서 부르짖는 부질없는 구호와는 다르다. 이주의 논리, 경제의 논리, 노동력의 논리에 맞서는 의미다. 내 삶의 근거지에서 밀려나지 않겠다는 의지다. 청년은 단지 삶에서 한 단계가 아니다. ‘청년’은 아이와 어른 중간이다. 반항적이지만 맹목적이지는 않다. 다시금 정의하는 사람이다. 어른이 만든 세계에서 떠나지 않지만, 제멋대로 머물면서 부순다. ‘창작’은 현실적이고 확실한 성공이 아니라 가능성과 불확실함으로 가득한 실패다. 창작은, 기계적이고 고정적인 소비재가 아닌 유기체이며 변화하는 생산수단을 만드는 일이다. ‘커뮤니티’는 목적이 없다. 목표가 있다면 결합 자체가 목적이다. 그 외에 목적은 없다. 시네필은 수단도 목표도 아니다. 자연발생적이다. 사랑은 의지나 선택이 될 수 없다.


무엇보다 INK가 품은 가장 강렬한 문제의식은 왜 그 많던 씨네키드들은 어느 순간 다 사라지고 없는가, 다. 다들 나이를 먹으면서 한때의 첫사랑으로 아련하게 추억할 뿐이다. 그런 선배는 숱하게 봤다. 영화가 직업이 되는 게 목표였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랑으로 비유하자면, 결혼이 꼭 모든 사랑과 연애의 결과가 되어야 하는가. 폭력적인 발상이지 않은가. 내가 영화가 아닌 다른 직업이 있고, 내가 학교에 다니고 있더라도 내가 아끼는 영화와 ‘어떻게 계속’ 가까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왜 쉽게 찾아볼 수 없는가.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 같이 결합하고 연대한다면, 아니 그래야만 헤쳐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덧붙여 여기엔 한 명의 영화애호가로서 최근 한국에서 청년들이 만들었다는 단편영화에 대한 깊은 불신도 있다. 흥미가 생기지 않고 실망스럽다. 빗대어 말하자면 마테리알의 지향점이 ‘스루패스로서의 비평’이라면 INK는 온라인 축구 커뮤니티에서 떠돌던 표현 ‘축구 3으로서의 창작’이다. ‘축구 3’은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규칙인 득점/실점, 승리/패배는 존중한다. 그렇지만 반칙 관련 규칙은 신경쓰지 않는다. 거칠고 폭력적인 축구다. INK도 엇비슷하다. 분명 영상창작물이라 부를 수 있는 결과물이지만, 기존 영상 문법과 제작 방식은 무시한다. 우후죽순으로 찾아볼 수 있는 당대 정치적 유행에 휘둘리는 작품, 아카데미에서 양산품마냥 만들어내는 기술적으로 문제가 없는 작품은 거부한다. 야무지지 못하고 손상된 결과물이 INK가 애틋하게 느끼는 작품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 제목처럼 ‹산책하는 침략자›(2017)와 같은 작품이다. 산책, 가장 힘들지 않은 길로 정처 없이 나아가는… 침략, 어른의 세계를 우리가 마음대로 정의하는… 다만 기존 개념은 잊고, 사랑(신체 간 부딪힘)은 기억하는 영화.


창립준비위원회들 간 소통이 계속 이루어지고 합의가 하나하나 이루어지면서 이런저런 살이 붙었다. 작게나마 내용이 생기니 이걸 간단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는 허들과 원칙도 필요했다. 앞으로 이 공동체에서 비평, 연기, 제작 등 전반으로 함께 활약할 구성원들에게 필요할지도 모르는 안내와 지침이랄까. 모든 게임 시작에 튜토리얼이 있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 INK 작품의 조건

1. 특정한 지역(기초단위)에서 절반 이상 로케이션 진행

2. 제작자와 출연자의 절반 이상 청년(만 15~ 39세)


□ INK의 가치

1. 돈이 아니라 관계로 만든다.

2. 진정한 창작의 자유가 목표다.

3. 구성원 간에 무엇이든 공유한다.

4. 모든 청년 문화예술인들의 친구다.


INK 작품의 조건은 물리적으로 지역과 나이라는 두 가지 핵심적인 정체성이 보호받아야 하기 때문에 생겨났다. 보다 힘준 것은 INK의 가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다. 어느 순간 독립영화 진영은 ‘돈’에 기묘할 정도로 집착하기 시작했다. 이번 작품이 실패한 이유도 누르면 나오는 자판기처럼 정해진 답변이 있다. 장비가 부족해서, 원하는 로케이션에 실패해서, 경험 있는 배우 없이 찍어서… 더 많은 돈이 없어서. 당연시 된 제작지원 때문일까. 이들은 창작자라기보단 능숙한 공모사업 사냥꾼이 되고 있다. 창작자로서 창작에 대한 즐거움이나 의지는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다윈주의적으로 말하면, 강자가 되는 것보단 생태계에 적응하여 살아남는 개체가 승자다. 환경에서 살아남는 연습 대신, 따뜻한 온실 속 화초가 아니면 창작 자체가 진행되지 않는 상황은 전혀 바람직하게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영화는 제작비를 얻기 위한 명분이 될 수 없다. 이건 적어도 시네필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불건강하고 불공정한 관계다.


이런 현상 가운데 커뮤니티에 기초한 모델은 좋은 사례가 될 수도, 훌륭한 돌파구가 될지도 모른다. 거대 자본으로부터 벗어나자는 독립영화가 정작 지원금에 가장 휘둘리는 가운데, 품앗이와 구성원 간 공유로 만드는 영화는 ‘진정한 창작의 자유’에 보다 다가설 수 있다. 차라리 이러한 ‘돈’과의 영화적 거리 두기는 경제적인 이유로 지역에서 밀려나지 않고 만들어내는 기성의 방식과 구별되는 청년적인 창작. 지속가능한 씨네필, 씨네키드에게 알맞은 그림일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린 다른 기준으로 바라볼 것이다. 아니, 봐야 한다. 앞서 말한 성공한 영화, 인정받은 영화의 기준 자체가 지금 세상에 말하는 것과 엄연히 다르고 우리만의 의미가 계속 부여될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하다. 모두가 갸우뚱하더라도 소중한 영화들을 만나고 만들어낼 것이다. 그 첫 시도였던 2021년 첫 번째 영화제는 기대보다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50여 명. 대부분 창작자와 창작자 지인들이었지만, 분명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가능성이 보였다. 모르고 있었을 뿐이지 이런 작업에 흥미가 있는 청년들이 제법 있구나.


영화제가 끝났을 때는 두 번째 영화제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의심치 않았다. 게다가 단지 지역에서 만들어진 청년들의 영화가 소개되는 게 아닌, 창작자들이 서로 알게 되어 발생한 네트워크와 신뢰로 만들어내는 영화 창작 커뮤니티도 허황된 꿈은 아니겠다는 믿음. 그리고 이들끼리 고유한 문화와 방식으로 만나고 서로의 작품과 만나게 하는 축제가 역사가 생기고 자리 잡는다면 어떨까. 커뮤니티는 생산하고 영화제는 소비하는 상호보완적이고 작지만 확실한 생태계가 유지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차올랐다.


3.

2022년도는 목표가 확실했다. 영화제(FILM IN DAEDEOK)와 더불어 이젠 제작 워크숍 진행. 연초에는 집행부 구성원들이 모두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여러 청년단체와 만나고 홍보했다. 제작비로 쓰일 적은 금액은 집행부가 각자 품앗이와 재능 나눔으로 종잣돈이 생겨났다. 큰 희생과 결정이었다. 덕분에 워크숍엔 총 8개조 영화 제작팀과 연기할 배우들이 모였다. 대부분 대학생 혹은 사회초년생 직장인들이었다. 아직 영화 현장 경험은 없거나 부족할지라도 열의와 호기심만큼은 장난감 쥔 어린아이만큼이나 부족함이 없었다. 5월부터 7월까지 워크숍이 진행되었다. INK 구성원들이 만들어낸 8개 작품. 그리고 전년도 영화제에서 ‹개물과 냥자›(2021)로 심사위원상을 받은 김진형 감독의 신작과 필자가 만든 작품 ‹등대로›(2022)엔 제작지원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다른 지역 청년들이 많은 좋은 작품들이 소개되는 초청 부문에서 총 4개 작품. 지역 · 청년 · 영화란 키워드로 진행되는 4개의 프로그램. (이 중 작품심사와 발제 프로그램에는 감사하게도 마테리알 편집자분들이 수고해주셨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금 제안에 응해주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총 14편의 영화와 4개 프로그램이 곧 영화제 FILM IN DAEDEOK 2022에서 공개된다. 지금껏 달려온, 그리고 처음으로 가동된 지역 청년 커뮤니티의 결과물이다.


INK는 개인적으로 밟아온 경력의 종합에 가깝다. 아트시네마에서는 시네마테크의 의미와 역할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지역통화운동단체 한밭 LETS에서는 신뢰와 공유로 움직이는 커뮤니티가 무엇인지. 그리고 중간지원조직에서는 지역 내 다양한 네트워크가 어떻게 구축되고 성장될 수 있는지. 아마 앞으로의 INK 방향은 이 세 가지 단체에서 배운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역 청년들이 만든 작품이 보존되고 소개되는 자리. 지역 청년 영상창작자들이 신뢰하고 공유하는 플랫폼. 이 창작 작업에서 형성되는 다양한 조합, 그리고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한 조력 기구. 올해도 아직 기획하고 마무리 짓지 못한 일들이 많다. 지역 청년 영상창작자들의 전작 아카이브 및 인터뷰 아이템, 가을 워크숍으로 기획 중인 10만 원 지역 로케이션 SF 영화 워크숍 등등. 영화제 준비가 막바지인 지금에도 앞으로 INK가 갈 길이 멀다는 느낌에 아득해지기도 두근거리기도 한다.


부침이 없지는 않다. 아니 너무 많은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짚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지역에서 선거 결과는 여러가지를 요동치게 만든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청년벙커라는 든든한 청년공유공간에서 언제까지 머물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그렇다면 지금 사용하고 있는 FILM IN DAEDEOK이란 이름도 수명이 위태롭다. 지금은 고맙게도 이 공간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지만, 조건이 바뀐다면 당장 내년엔 어디서 워크숍 진행할까도 큰 고민이다. 최소한의 공간 유지비가 발생한다. 이 돈은 어디서 끌어올 수 있을까. 후원자? 참가비? 이뿐만 아니라 이번 워크숍 진행에서 절실히 깨달았지만 최소한의 상주 인력이 필요하다. 인건비가 필요한데 어디서 확보할 수 있을까. 계속 필요한 기술적인 질문들과 각종 지원과 플랫폼 역할에 필요한 상근 근무자가 없으면 원활하게 돌아가기가 도저히 힘들다. 적어도 프리랜서로서라도 각자도생해야 한다.


 보다 근원적인 질문도 가시지 않는다. INK 구성원 중 30대는 거의 없다. 대부분 그 나이대가 되면 현실에서 직장 생활에 휩쓸린다. 대전 대학생 동아리 네트워크가 INK는 아니다. 이 시도가 과연 유의미한 모델이 되거나, 아니면 생존하여 계속 나아갈 수 있을지도 불분명하다. 어떤 축이 INK 구성원들이 강력하게 엮을 수 있는 끈이 될 수 있을지도 절박하게 모색해야 한다. (이전 사례들에서 생존하거나 의미가 있던 커뮤니티는 대부분 신념 중심적이거나 결국엔 비즈니스 모델로 도약했다. 물론 INK는 이와 다른 방향으로 도약에 성공해야 할 것이다.) 이 커뮤니티는 확고한 목적의식으로 결합하지 않았다. 아니면 분명 큰 파도엔 쉽게 무너진다.


제일 큰 고민거리는 주체적인 창작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긴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자신의 관점, 자신의 프로세스, 자신의 고유한 목적이 부재한 가운데 결합은 공동체적 모습이 아닌, 집단주의적이거나 느슨하다 못해 이익에 따라만 반응하는 네트워크에 지나지 않는다. 정답이 있는 영역이 아니라 더더욱 섬세하고 어려운 문제다.


당장은 답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다. 흔들리는 가운데에 우린 보다 나은 선택에 다가서리라는 자기최면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럼에도 INK 집행부는, 번쩍이고 있는 구성원들과 함께 쓰고 있는 역사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 보다 주목하고자 한다. 상반된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4.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로 마치려고 한다. 앞서 언급했던 바처럼 운 좋게도 폐막작을 연출할 기회가 있었다. ‹등대로›(2022)라는 영화다. 사사로운 감회이지만, 영화 편집이 끝나고 최종 편집본을 보기 직전까지도 내가 이 영화에서 하고 싶었던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가 훨씬 많았다. 최종본을 보고서야 그제야 ‘아 이런 건 아니었을까…’라고 조심스레 추측해볼 뿐이다. 이번 추측은 이 영화가 INK 단체 대표가 되기로 마음먹으며 적어낸 퇴사이유서가 아닌가 싶다. 항상 같은 해변으로 돌아오는 사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존재에게 홀린 사람, 그때 본 등대의 순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정작 내가 아니었을까. 다시 돌아온다는 지역에서 영화 찍자는 약속은 그때 동료들이 아니라 영화에게 한 약속이었던 건 아닐까. 아무튼 이렇게 지켜졌으니 신묘할 따름이다.


이 글 처음에 언급했던 ‹쥬라기 공원›은 시간이 꽤나 흐른 지금 종종 헷갈리는 사건이다. 지금 이 마음은 어린 시절 열병처럼 빠졌던 공룡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하는가 아니면 영화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하는가. 쉽사리 구분할 수 없다. 둘은 내게 떨어뜨려 놓고 생각하기엔 무척 닮아있다.


어린시절 ‹쥬라기 공원›에 대한 마음, 영화에게 쌓인 겹겹의 감정이 지금은 전과 같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미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고, 유령 같은 무언가에 집착하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공룡은 멸종하지 않는다. 공룡은 멸종하지 않았다. 공룡은 살아있다. 새(鳥), 그들은 이제 자유롭게 하늘에서 날고 있다. 마찬가지로 영화도 그렇다. 내겐 그렇다. 커다랗고 장엄한 움직임은 없어도, 당장 눈앞에 숨 쉬며 움직이는 작고 복슬거리는 생명체가 보인다. 공룡이라 믿기 힘들지 모르지만 분명한 공룡과 함께하려 한다. 겉모습은 영화라 믿기 힘들지 모르지만 분명한 영화와 함께하려 한다. 강하고 커다란 영화가 아니라 작지만 살아있는 영화와 함께하려 한다. 숱한 실패와 직장인이란 대멸종 이후 숨어든 방공호. 그런 모든 이들에게 지금 우리가 머무는 (청년)벙커는 티렉스가 살기에 부족할지 몰라도 소소하지만 확실하고 지속가능한 생태계가 자리하기엔 부족함이 없다.


이젠 벙커는 안전할 수 있을까도 모른다. ‘축구 3’은 득점에 성공할 수 있을까. 머릿속이 뿌옇게 바뀔 때면, 속으로 읊조린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1980). 버겁지만, 할 수 있는 바는 아직도 차고 넘친다. 떨어지는 펜에 자기도 모르게 뻗어지는 손 같이 쉽게 멈추지 않는다. 비틀거리는 자전거도 밟으면 여차저차 나아간다. 이 가운데에도 워크숍도 영상제도 진행된다. 할 수 있는 자는 능력자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무언가 하려는 사람 아닌가. 눈치챌 사이도 없이 이미 그렇게 움직이는 사람 아닌가? ‘인생’도 ‘영화’도 아니다. 움직이는 건 우리다. 둘 사이 관계가 건강하고 길게 이어질 자리로 내가, 우리가, 움직이는 중이다.


그러기에 각종 피로가 덮쳐오고, 근심이 늘어가는 시기. 파도에 익숙해지려 한다. 어쩌면 각자 마음 속 쥬라기 공원을 가꾸며, 산책하는 침략을 이어나간다면, 할 수 있는 자가 ‘인생’과 ‘영화’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중 겪는 파고는 높아도 짜릿하지 않을까. 진정 그럴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