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적이고 자기성찰적 목소리 vs 초월적이고 전능한 목소리: 고다르와 뒤라스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일반적으로 보이스오버는 텍스트적인 말로서 특정 단어나 문장의 발화만으로 자기가 거론하는 영상을 불러낼 수 있다.미셸 시옹, 『영화, 소리의 예술: 역사, 미학, 시학』, 114쪽. 이 때문에 영상은 텍스트에 순응해 말과 영상의 간극을 메우려하거나, 거꾸로 말과 영상의 간격을 강조해 두 차원 사이에서 충돌과 공백, 부조화를 창조해내기도 한다. 그중 〈프레디 뷔아쉬에게 보내는 편지〉는 영상이 음성에 지배받지 않고 자유롭게 부유하는 특별한 사례로 언급된다.미셸 시옹, 『오디오-비전』, 234–235쪽. 여기서 음성과 영상은 서로를 의식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진행하다 어쩌다 가끔 마주친다. 감독 본인의 목소리인 음성은 로잔시(市)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청탁받은 영화의 뒷이야기를 말한다. 주최 측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유감, 촬영 비화에 대한 이야기, 무엇을 하고 싶었는가에 대한 토로 등 내용은 두서없고 자유롭게 흐른다. 영상은 음성과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다. 경찰이 고속도로변에서 촬영팀을 취조한 내용을 이야기할 때 실제 녹화분으로 보이는 장면이 지나가고,물론 이 둘의 지표적 일치 여부는 알 수 없다. 네모와 돌로 이루어진 미들 숏 이야기를 할 때 주차 구획선의 격자와 콘크리트 바닥이 비춰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상은 발화되는 단어 혹은 문장과 직접적 대응을 이루기보다 느슨하게 연결된다. 카메라는 “가다가 빈둥거리기도 하고 그 자신만의 사고도 겪으면서 도중에 발견하는 나무들, 표지판들, 땅 위의 선들에 혹했다가 싫증도 내는데, 그것은 예측했던 것 같지 않다. … 때로는 비틀거리다가 뭔가를 발견한 것처럼도 보이는데, 마치 우리가 산책하다가 문득 돌, 자갈 혹은 죽은 짐승의 시체를 눈여겨보게 되는 것과 같이 느껴진다.”미셸 시옹, 『오디오-비전』, 237쪽. 흥미로운 것은 별도의 자율성을 지닌 채 자신만의 리듬으로 움직이는 영상이 종국에는 음성에 구조적으로 조응하는 지점이다.시옹은 말과 영상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와 의미상의 동기화가 별로 없고 단지 몇 번의 만남, 몇 개의 일반적인 수렴 지점이 있다고 보나, 영상은 실시간으로 동기화되지 않을 뿐 제 나름의 속도로 음성에 반응한다. 일례로 목적 없이 도시 풍광을 기록한 것처럼 보이던 영상은 내레이션이 진행되면서 대상을 보여준 이유를 슬며시 드러낸다. 로잔시와 그 근방 시골 풍경을 수평 혹은 수직 이동하는 패닝 숏은 하늘, 숲, 물, 돌, 군중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이어지는 음성은 로잔이라는 도시를 하늘(산)과 물 사이, 녹색과 파랑 사이의 무언가(회색)로 요약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아래쪽 로잔은 물에서 시작하고, 위쪽 로잔은 하늘과 산에서 시작하며, 사람들은 그 사이에서 모인다. 결국 영상에 등장하는 하늘과 숲, 물은 각각 ‘위’와 ‘아래’를 상징하고, 도시의 회색빛 돌(건물)과 그 사이를 바쁘게 움직이는 군중은 위와 아래의 ‘사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로써 영상은 실시간 동기화되지 않을 뿐 구조적으로 긴밀히 음성에 반응한다.
〈프레디 뷔아쉬에게 보내는 편지〉의 말과 영상의 관계는 제작 시기도, 분량도, 장르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의 〈세자레(Césarée)〉(1979)를 떠올리게 한다. 〈세자레〉 역시 감독이 직접 내레이션을 행하며 영상이 음성에 종속되지 않는다.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읊조려지는 텍스트는 로마 황제 티투스와 예루살렘 멸망, 유대의 여왕 베레니스의 서사다. 구체적인 상황이나 인명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 채 고대의 멸망한 제국과 축출된 여왕에 대한 추상적인 기억 혹은 역사가 꿈결처럼 단속적으로 낭송된다. 마치 시편이나 오디세이아처럼 들리는 이야기는 보이는 영상과 거의 무관하다. 폐허의 흔적, 해변의 모래가 된 대리석 가루를 이야기하는 뒤라스의 목소리에 보수 중인 고전적 대리석 조상의 흰색이 아주 잠깐 겹쳐 보일 뿐이다. 실은 이마저 연관성이 없는 것을 연결 지으려는 관객의 시각적 환유일 수 있다. 실제로는 베레니스 여왕과 무관한 여신의 조상(彫像)을 이야기의 주인공과 겹쳐 상상하는 것처럼 말이다. 시처럼 끊어져 파편적으로 제시되는 말과 달리 영상은 비교적 연속적으로 제시된다. 콩코르드 광장에 있는 보수 중인 여신의 조상과 오벨리스크의 표면, 튈르리 정원의 마이욜 조각이 번갈아 보이지만, 각 장소에서 카메라의 움직임은 부드럽고 요철이 적다. 여기서 카메라의 시선은 산책자의 시선이다. 정원을 거닐며 조각상을 스쳐 지나가고, 잠시 멈춰 한 바퀴 돌거나 시선을 위아래로 움직여 조각상을 자세히 바라보는 인간의 시점.〈프레디 뷔아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지붕과 지붕 사이를 빠르게 건너뛰거나 나무나 건물 위로 급속한 수직적 상승을 하는 카메라 움직임은 그런 점에서 〈세자레〉보다 비인간(카메라)의 시점이며 매체 특정적이다. 산책하며 눈앞의 조각상을 바라보다 상념에 빠져 고대의 폐허를 상상하는 인간은 대상을 보고 있지만 보고 있지 않다. 〈세자레〉에서 목소리와 영상 사이의 단절은 상상의 공간과 현실의 공간 사이의 간극이다. 발화되는 이야기와 화면에 보이는 영상의 불일치는 뒤라스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특징이다. 앞서 제작된 〈인디아 송(India Song)〉(1972)에서 영상은 이야기의 주인공이나 관련된 공간을 보여주지만 말해지는 내용과 직접 결부되지 않는다. 도입부에서 여자들이 거지 여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영상은 태양이 점차 사라지는 광경을 줄곧 보여줄 뿐이다. 남자가 거실로 들어오고, 담배를 피우며, 인도인 하인이 쟁반을 들고 거실에 들어오는 장면이 보이는 가운데, 들리는 것은 화면과 일치하지 않는 이야기(안느 마리와 남편, 애인인 라호르 부영사와 관련된 일화와 소문)뿐이다. 영상은 분위기나 인물의 심리를 느슨하게 암시한다.
❙누가 말하는가
〈프레디 뷔아쉬에게 보내는 편지〉와 〈세자레〉는 모두 감독이 직접 내레이션하므로 누가 말하는지는 표면적으로 분명하다. 하지만 문제는 화자가 누구냐가 아니라 누가를 어떻게 구현하는 가다. 〈프레디 뷔아쉬에게 보내는 편지〉는 “나는 당신(프레디 뷔아쉬)에게 이 단편영화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는 감독의 말로 시작된다. 로잔시가 영화를 제작하라고 돈을 주었는데 일이 잘 성사되지 않았음을 토로하고, 이 영화는 아직 표면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사물의 바닥에 있다는 철학적 고찰을 하는 내레이션의 내용 역시 이 목소리가 작업의 동기와 경과, 결과를 알고 있는 저자의 목소리임을 증명한다. 목소리는 나직하지만 완결되어 있지 않고 정처 없다. 두서없이 “꾸물꾸물 기어가는”미셸 시옹, 『오디오-비전』, 237쪽. 내레이션은 리듬이라는 점에서 로잔의 풍광을 이리저리 주유하는 영상의 움직임에 동조한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비완결적인 음성과 영상의 형식이 저자로서의 고다르 특유의 양식이 아니라 로잔이라는 주제를 형식적으로 가시화한 작업의 구조라는 점이다. “이 도시에는 똑바른 선이 없다. 여기서 영화는 출발한다. … 똑바른 선 사이를 왕복한다”는 내레이션의 내용은 이 비틀거리며 우왕좌왕하는 음성과 영상의 양식적 특징이 주제에 대한 해석이요 내용에 대한 형식의 합목적적 조응임을 가리킨다. 종종 등장하는 고다르 자신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시각적으로 감독이 보이지만 말을 하고 있는 직접적인 모습이 등장하지는 않고 이것은 나다라는 지시어도 없으니 이 작업에서 고다르의 영상은 물리적으로나 효과면으로나 아쿠스마틱하다. 그런데 아쿠스마틱의 목적에 있어서 고다르의 목소리는 원론적 의미의 음성존재(acousmêtre)와 좀 다르다. 여기서 고다르의 음성과 영상은 모든 것을 주재하는 절대적 존재로서 현현하기보다 작업의 구조를 드러내고 영화 자체에 대한 사유를 촉발하는 메타적 장치로 작동한다. 찍고 녹음하며 이를 직조하는 자로서의 저자는 구조를 부여하는(reframing) 수행적 주체다. 이미지 바깥에서 말하지만 작업을 설계하는 자로서 구성하는 행위를 드러내는 고다르의 목소리는 “수행적 보이스오버”다.‘수행적 보이스오버’는 아녜스 바르다에 대한 이나라의 논문에서 가져왔다. 하지만 이나라의 논문에서 수행성은 매체적 자기반영성보다 육체의 현전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나라, 「아녜스 바르다 영화의 목소리 연구」, 『프랑스문화예술연구』 77집 (프랑스문화예술학회, 2021), 114쪽.
고다르의 목소리가 영화라는 매체특수적 장치로서의 저자를 지칭한다면, 뒤라스의 목소리는 가장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음성 존재다. 〈세자레〉에서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 보이스오버의 주체는 모든 것을 주재하는 절대적 존재다. 음유시인의 태도로 사라진 팔레스타인의 고대 도시 세자레에 대해 이야기하는 보이스오버는 모든 점에서 추상적이다. 누가 이야기하는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왜 이야기하는지 모두 모호하다. 허구이기는 하나 구체적인 이야기가 존재하던 〈인디아 송〉의 보이스오버 역시 모호하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다. 〈세자레〉와는 달리 〈인디아 송〉의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다. 다수의 제3자들이 주인공 여성과 그녀 주변의 남성들을 둘러싼 정황을 이야기하는 내레이션은, 시제가 섞여 있고, 독백과 대화가 교차되며, 기억과 현황 묘사가 뒤엉켜 있어서 소문인지 목격담인지, 현재인지 과거인지, 사실인지 허구인지가 불분명하다.〈인디아 송〉의 내레이션 번역은 다음을 참조했다. 조혜정,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인디아 송 스타일 분석」, 『영화연구』 29집 (한국영화학회, 2006), 303–320쪽. 가끔 주인공인 안느 마리와 라호르 부영사의 대화가 내레이션될 때도 있지만 그 경우에도 내화면의 인물들은 말하지 않는다. 정황상 그들의 대화임에도 그들의 말은 화면 밖 목소리의 힘을 빌어 전달됨으로써 영상과 분리된 소리 공간은 일관되게 유지된다. 발화의 주체와 시점이 불분명한 채 초월적 공간을 떠도는 추상적인 목소리는 도처에 존재하고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며 전지전능한 신의 음성이다. 추상성은 역으로 그 무엇으로도 구체화될 수 없는 절대성을 뜻한다. 이는 가장 강력하며 전능한 문학의 저자성이다. 실로 뒤라스는 단 한 번도 영상이 말의 전능한 힘을 압도하게 놓아둔 적이 없다. 〈인디아 송〉과 같은 사운드 트랙을 사용한 〈캘커타 사막의 베니스라는 그의 이름(Son nom de Venise dans Calcutta désert)〉(1976)에서 영상은 목소리와 완전히 단절된다. 그래도 영상이 이야기의 배경으로는 작동하던 〈인디아 송〉과 달리, 〈캘커타 사막의 베니스라는 그의 이름〉에서 보이는 것은 무너진 건물 잔해, 공원, 빈 살롱 등 폐허와 무생물뿐이다. 이후 뒤라스는 보는 영화가 아니라 읽는 영화로 넘어간다. 보이는 것이 있기는 하나 의미적으로는 볼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나비르 나이트(Le Navire Night)〉(1977), 아예 영화의 반 이상이 검은 화면인 〈대서양의 남자(L’Homme Atlantique)〉(1981)는 영화를 통해 다시 쓴 텍스트의 글쓰기에 다름 아니다.이지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영화적 글쓰기: 〈나탈리 그랑제〉에서 〈대서양의 남자〉까지」, 『프랑스학연구』 42집 (프랑스학회, 2007), 488–496쪽.
❙무엇을 말하는가
결국 모든 문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로 귀결된다. 표피적 층위에서 화자가 이야기하는 담화의 소재가 아니라, 심층에서 보이지 않는 저자의 목소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말이다. 이들의 목소리는 결국 무엇을 말하는가.
〈프레디 뷔아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음성은 본 바를 어떻게 구조화시키는가와 관련한 자기 지시적(self-referencial)인 매체적 성찰로 향한다. 음성과 영상, 음악 등 영화의 모든 요소는 로잔을 시각적으로 구조화시키는 방식과 연결된다. 예를 들어, 수평과 수직 두 가지 방향으로 움직이는 카메라 워크는 로잔을 찍기 위해 고다르가 이동한 경로와 관계된다. 동서로는 브베와 제네바 사이에 있고 남북으로는 두 도시보다 위에 있는 로잔의 위치는 고다르에게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가는 수평 방향의 이동과 올라갔다 내려오는 수직 방향의 이동을 요구했다. 로잔을 관찰하며 이 도시가 하늘과 물 사이에 존재하고 그 중간을 사람과 돌이 채우고 있다고 파악한 감독은 이미지와 텍스트의 운동을 수평과 수직의 두 축으로 설정한다. 하늘(녹색)에서 물(파랑)으로의 움직임은 수직성이고 그 사이에서 이동하는 군중의 움직임은 수평성이다. 수평과 수직, 그리고 “그 둘 사이의 대각선과 망설임”은미셸 시옹, 『오디오-비전』, 236쪽. 모두 로잔이라는 도시의 이미지를 압축적으로 추출한 구조에서 유래한다. 고다르는 주제의 형식적 매칭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수직성과 수평성에 대한 고찰은 영화 일반에 대한 고찰로 확장된다. “도시를 설계한 건축가의 돌이 지닌 기하학의 정신을 벗어나려 했다, 다큐멘터리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이 군중의 움직임에서 픽션의 출발을 발견하고 싶었다 …”로 두서없이 이어지는 고다르의 독백은 건축(기하학)과 다큐멘터리(사실과 정확성)가 상징하는 수직적인 근대성에서 벗어나 픽션으로 대변되는 역동적인 수평의 에너지를 담고 싶다는 영화적 성찰로 이해된다. 상영 시간 내내 울리는 라벨의 볼레로는 좌충우돌하는 음성 및 영상과 달리 영화에서 유일하게 간단없이 직진한다. 전개 방향으로 멈춤 없이 나아가는 음악과, 멈칫거리고 흔들리며 우왕좌왕하는 음성과 영상은 영화를 구축하는 두 개의 움직임이다. 사실을 기록하는 카메라로 허구를 담아내고도 싶고, 구조를 모색하면서도 다른 한편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이원적 욕동 말이다. 결국 고다르가 만든 것은 또 다른 버전의 영화에 대한 영화, 메타-영화가 아닐까.
고다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지금 네가 보는 것의 구조적 지반이자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기 성찰이라면, 뒤라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영상과 분리되어 무한, 장소 없는 곳, 보이지 않는 곳에 거하는 뒤라스 영화의 목소리가 향하는 곳은 형상화할 수 없는 곳, 재현이 없는 곳이다. 〈세자레〉에서 비춰지는 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심상 이미지, 즉 부서진 푸른 기둥과 대리석 가루가 모래가 되어 하얗게 변한 해변을 떠올리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목소리는 스크린이라는 제한된 영역 너머의 모든 신비로움과 초월성으로 나아간다. 텍스트의 상상력을 제한해 텍스트를 파괴하는 영상의 힘에 저항하다 종국에는 영상 자체를 파기하기로 한 것이다. 배우의 부재, 영상과 음성의 불일치, 느린 속도 등 온갖 방식으로 재현을 피하던 뒤라스의 영화는 결국 텅 빈 검은 화면으로 회귀한다.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전혀 아무것도. 어떤 이미지도 없네요. 나비르 나이트는 시간의 밤에 대면해 있고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채 전진하죠. 검은 잉크의 바다 위로요.”Marguerite Duras, Le Navire Night (Gallimard, 1973), p. 28 (이지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영화적 글쓰기: 〈나탈리 그랑제〉에서 〈대서양의 남자〉까지」, 493쪽 재인용).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은 채 검은 잉크의 바다 위로 전진하는 것은 배가 아니라 뒤라스의 영화다. 영화의 실패를 선언하고 영상을 거부하며 영화를 쓰인 텍스트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결론지은 뒤라스는 다시 검은 잉크의 저자로 돌아간다. 마지막 영화 작업인 〈대서양의 남자〉는 검은 화면으로 점철된 영상의 부재를 보여준다.50여분의 러닝타임 중 이미지가 들어간 것은 20분 남짓이고 나머지는 검은 화면이다. 이지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영화적 글쓰기: 〈나탈리 그랑제〉에서 〈대서양의 남자〉까지」, 494쪽. 이는 곧 재현의 거부다. 뒤라스는 자신의 목소리를 영상이 구현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영상이 부재한 검은 화면은 형용할 수 없는 모든 것, “내면의 그림자”, 문학적 근원이다. 이 지점에서 의문이 발생한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거나 텍스트만 보여주려면 글을 쓰지 왜 영화를 만드는가? “영화는 끝이다. 나는 다시 책을 쓰겠다. … 나는 이 실패를 얻었다 … 드디어 영화를 만들 수 없음에 도달한 승리.”Marguerite Duras, Le Navire Night (Gallimard, 1973), p. 13 (이지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영화적 글쓰기: 〈나탈리 그랑제〉에서 〈대서양의 남자〉까지」, 496쪽 재인용). 그럼에도 뒤라스의 마지막 영화들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소리다. 허스키한 뒤라스의 음색이라는 물성이 깃든 소리. 그것이 재현이 제거된 뒤라스의 영화와 육체성이 거세된 문학 텍스트의 차이다. 결국 뒤라스가 돌아간 곳은 글의 기원으로서의 음성, 모든 창조의 기원인 태초의 말씀, 창조자로서의 저자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