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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혜진

목소리는 어떻게 말해지고 어디를 보는가: 보이스오버에 대한 몇 가지 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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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는 어떻게 말해지고 어디를 보는가: 보이스오버에 대한 몇 가지 사색

함혜경, 〈나의 첫사랑〉, 2017, 단채널 비디오, 컬러, 11분 27초. 스틸컷. (출처: 청년예술청 홈페이지) https://www.sapy.kr/SC26_11

*본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의 ‘2025 한국미술 비평지원’ 사업의 후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목소리의 힘

탁월한 영화학자이자 음악학자인 미셸 시옹(Michel Chion)은 영화를 음성 중심주의(voco-centreiste), 좀 더 엄밀히 말해 말 중심주의(verbo-centriste)라고 단언한다.미셸 시옹, 『오디오-비전』(윤경진 옮김, 도서출판 한나래, 2004), p. 19. 영화의 소리에 대한 이론을 집대성한 영화사운드 학자의 발언이라기엔 의아해 보일 수 있는 이 말은 영화가 인간의 음성을 다른 소리보다 우선시한다는 의미다. 발성영화(talkie)라는 용어가 암시하듯, 녹음 기술의 진보는 언어적 표현 매체로서의 음성 중심이고 그 목적은 발음된 말소리를 힘들이지 않고 재인식하는 것이었다.미셸 시옹, 『오디오-비전』 20쪽. 이는 극영화가 서사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애초에 예견된 현상으로, 발성영화가 나오면서 목소리는 시각을 주도하며 구축하는 역할을 해 왔다. 그중에서도 보이스오버는 무성영화 시절의 삽입 텍스트처럼 이야기를 열고 영상을 불러오는 전능성을 지닌다.소리와 대비되는 영화의 시각적 대상인 경우는 이윤영 교수의 번역을 따라 영상이라고 지칭했다.

그렇다면 보이스오버는 영화의 다른 소리와 비교해 어떻게 다른가. 시옹은 1985년 『영화에서 소리(Le son au cinéma)』에서 소리와 영상의 관계를 세 가지로 분류했다.Michel Chion, Le son au cinéma (Editions de l’Etoile, 1985). 인 사운드(son in), 외화면 사운드(son hors-champ), 오프 사운드(son off)가 그것이다.영어로 번역 시 각각 ‘onscreen sound’, ‘offscreen sound’, ‘non-diegestic sound’로 칭해진다. 인 사운드는 소리의 출처가 영상에서 보이는 소리를 뜻한다. 배우가 말하는 장면과 대사가 함께 들리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외화면 사운드는 소리의 원인이 영상에서 동시에 보이지는 않지만, 소리가 제시된 행위 및 공간과 인접한 공간에 놓여 있다고 관객이 상상하는 소리다. 화면에 보이지는 않지만 등장인물이 있는 거실의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한 예다. 오프 사운드는 영상에 제시된 행위와 다른 시공간에 위치한 보이지 않는 출처에서 나오는 소리다. 악단석 음악이나 보이스오버를 예로 들 수 있다.용어에 대한 설명은 다음의 책에서 가져왔고, 사례는 필자의 것이다. 미셸 시옹, 『영화, 소리의 예술: 역사, 미학, 시학』(이윤영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24), 383–384쪽. [Michel Chion, Un art sonore, le cinéma: histoire, esthétique, poétique, (les Editions de l’Êtoile, 2003).] 보이스오버는 오프 사운드이므로, 대개 비(非)디제시스적이면서 아쿠스마틱(acousmatique)하다.아쿠스마틱은 소리는 들리지만 그 소리를 내는 원인이나 출처는 보이지 않는 상황을 뜻한다. 위의 책, 「용어해설집」, 737쪽 참조. 다시 말해, 이야기가 전개되는 영화속 시공간과 무관하며 소리의 출처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마치 신의 시점처럼 가장 전능하면서도 모호하고 신비로운 소리다.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보이스오버의 압도적인 힘은 “일순간 모든 창조물을 솟아오르게 하는 말씀의 담지자, 로고스의 담지자”라는 데서 온다.미셸 시옹, 『영화, 소리의 예술: 역사, 미학, 시학』, 114쪽. 이는 시옹이 텍스트적인 말(parole-texte)을 설명하며 한 말이다. 시옹은 영화에 나오는 목소리를 세 가지 용법으로 구분한다. 첫째는 대사에 해당하는 연극적인 말(parole-théâtre), 둘째, 말소리가 텍스트 자체의 가치를 지니는 텍스트적인 말, 셋째, 대화가 영화의 진행에 기여하지 않고 영상을 간접적으로 보완하는 발산의 말(parole-émanation)이다.미셸 시옹, 『영화, 소리의 예술: 역사, 미학, 시학』, 113–116쪽. 이 중 가장 강력한 텍스트적인 말은 주로 보이스오버나 내레이션에 쓰인다. 이때의 목소리는 순수한 의식 그 자체로, 주체의 직접적 현전이자 음향적 실체나 물리적 목소리가 아닌 초월적 육성이다.자끄 데리다, 『목소리와 현상』(김상록 옮김, 인간사랑, 2006), 26–28쪽, 116–119쪽. 이 목소리는 데리다가 음성중심주의로 부르는 형이상학의 근거다. 물론 여기서의 음성중심주의는 앞서 언급한 시옹의 용어와 맥락이 전혀 다르다. 의식의 직접적 현전으로서의 목소리는 너무나 힘이 세서, 사실상 시각적인 것의 자율성을 부정하고 영상을 언어의 의미 아래 종속시켜버리기 때문에, 발성영화는 텍스트적인 말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럼에도 문학과 비교하면 영화의 경우 텍스트적인 말이 영상으로 이중화되므로, 영화의 목소리는 결코 완전히 추상적일 수 없다. 이를 시옹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텍스트가 자기 마음대로 영상을 창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상은 곧바로 텍스트에게 이렇게 말한다. ‘넌 내게 모든 걸 다 말할 능력이 없다.’” 텍스트적인 말이 한 여인의 이름을 부를 때 영상 속 여인이 두른 스카프의 구체적인 질감과 분위기를 목소리만으로 담아낼 수 없는 것이다.미셸 시옹, 『오디오-비전』, 234쪽.

이 글은 보이스오버를 주된 장치로 채택한 몇몇 작업을 중심으로 무빙 이미지 속 목소리의 역할과 의미, 상호작용에 대해 생각해보려는 시도다. 가장 전능한 힘을 지닌 소리지만, 그럼에도 영상과 복잡하게 교류하며 시옹이 말하는 ‘시-청각 환영’을 나름의 방식으로 구축하는 보이스오버의 작동방식은 상당한 매력을 지닌다. 이를 위해 감독/작가의 목소리라는 점에서 유사하면서도, 말하는 방식과 목적, 영상과의 상호작용 면에서 결을 달리하는 작업을 선정했다. 대상은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의 비디오 작업 〈프레디 뷔아쉬에게 보내는 편지(Lettre à Freddy Buache)〉(1982),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의 〈세자레(Césarée)〉(1979), 한국 작가 함혜경의 작업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우선 고전에 해당하는 고다르와 뒤라스의 작업을 살펴보고, 이후 함혜경의 보이스오버를 이들과 비교하며 분석하기로 한다.

자율적이고 자기성찰적 목소리 vs 초월적이고 전능한 목소리: 고다르와 뒤라스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일반적으로 보이스오버는 텍스트적인 말로서 특정 단어나 문장의 발화만으로 자기가 거론하는 영상을 불러낼 수 있다.미셸 시옹, 『영화, 소리의 예술: 역사, 미학, 시학』, 114쪽. 이 때문에 영상은 텍스트에 순응해 말과 영상의 간극을 메우려하거나, 거꾸로 말과 영상의 간격을 강조해 두 차원 사이에서 충돌과 공백, 부조화를 창조해내기도 한다. 그중 〈프레디 뷔아쉬에게 보내는 편지〉는 영상이 음성에 지배받지 않고 자유롭게 부유하는 특별한 사례로 언급된다.미셸 시옹, 『오디오-비전』, 234–235쪽. 여기서 음성과 영상은 서로를 의식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진행하다 어쩌다 가끔 마주친다. 감독 본인의 목소리인 음성은 로잔시(市)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청탁받은 영화의 뒷이야기를 말한다. 주최 측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유감, 촬영 비화에 대한 이야기, 무엇을 하고 싶었는가에 대한 토로 등 내용은 두서없고 자유롭게 흐른다. 영상은 음성과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다. 경찰이 고속도로변에서 촬영팀을 취조한 내용을 이야기할 때 실제 녹화분으로 보이는 장면이 지나가고,물론 이 둘의 지표적 일치 여부는 알 수 없다. 네모와 돌로 이루어진 미들 숏 이야기를 할 때 주차 구획선의 격자와 콘크리트 바닥이 비춰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상은 발화되는 단어 혹은 문장과 직접적 대응을 이루기보다 느슨하게 연결된다. 카메라는 “가다가 빈둥거리기도 하고 그 자신만의 사고도 겪으면서 도중에 발견하는 나무들, 표지판들, 땅 위의 선들에 혹했다가 싫증도 내는데, 그것은 예측했던 것 같지 않다. … 때로는 비틀거리다가 뭔가를 발견한 것처럼도 보이는데, 마치 우리가 산책하다가 문득 돌, 자갈 혹은 죽은 짐승의 시체를 눈여겨보게 되는 것과 같이 느껴진다.”미셸 시옹, 『오디오-비전』, 237쪽. 흥미로운 것은 별도의 자율성을 지닌 채 자신만의 리듬으로 움직이는 영상이 종국에는 음성에 구조적으로 조응하는 지점이다.시옹은 말과 영상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와 의미상의 동기화가 별로 없고 단지 몇 번의 만남, 몇 개의 일반적인 수렴 지점이 있다고 보나, 영상은 실시간으로 동기화되지 않을 뿐 제 나름의 속도로 음성에 반응한다. 일례로 목적 없이 도시 풍광을 기록한 것처럼 보이던 영상은 내레이션이 진행되면서 대상을 보여준 이유를 슬며시 드러낸다. 로잔시와 그 근방 시골 풍경을 수평 혹은 수직 이동하는 패닝 숏은 하늘, 숲, 물, 돌, 군중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이어지는 음성은 로잔이라는 도시를 하늘(산)과 물 사이, 녹색과 파랑 사이의 무언가(회색)로 요약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아래쪽 로잔은 물에서 시작하고, 위쪽 로잔은 하늘과 산에서 시작하며, 사람들은 그 사이에서 모인다. 결국 영상에 등장하는 하늘과 숲, 물은 각각 ‘위’와 ‘아래’를 상징하고, 도시의 회색빛 돌(건물)과 그 사이를 바쁘게 움직이는 군중은 위와 아래의 ‘사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로써 영상은 실시간 동기화되지 않을 뿐 구조적으로 긴밀히 음성에 반응한다.

〈프레디 뷔아쉬에게 보내는 편지〉의 말과 영상의 관계는 제작 시기도, 분량도, 장르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의 〈세자레(Césarée)〉(1979)를 떠올리게 한다. 〈세자레〉 역시 감독이 직접 내레이션을 행하며 영상이 음성에 종속되지 않는다.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읊조려지는 텍스트는 로마 황제 티투스와 예루살렘 멸망, 유대의 여왕 베레니스의 서사다. 구체적인 상황이나 인명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 채 고대의 멸망한 제국과 축출된 여왕에 대한 추상적인 기억 혹은 역사가 꿈결처럼 단속적으로 낭송된다. 마치 시편이나 오디세이아처럼 들리는 이야기는 보이는 영상과 거의 무관하다. 폐허의 흔적, 해변의 모래가 된 대리석 가루를 이야기하는 뒤라스의 목소리에 보수 중인 고전적 대리석 조상의 흰색이 아주 잠깐 겹쳐 보일 뿐이다. 실은 이마저 연관성이 없는 것을 연결 지으려는 관객의 시각적 환유일 수 있다. 실제로는 베레니스 여왕과 무관한 여신의 조상(彫像)을 이야기의 주인공과 겹쳐 상상하는 것처럼 말이다. 시처럼 끊어져 파편적으로 제시되는 말과 달리 영상은 비교적 연속적으로 제시된다. 콩코르드 광장에 있는 보수 중인 여신의 조상과 오벨리스크의 표면, 튈르리 정원의 마이욜 조각이 번갈아 보이지만, 각 장소에서 카메라의 움직임은 부드럽고 요철이 적다. 여기서 카메라의 시선은 산책자의 시선이다. 정원을 거닐며 조각상을 스쳐 지나가고, 잠시 멈춰 한 바퀴 돌거나 시선을 위아래로 움직여 조각상을 자세히 바라보는 인간의 시점.〈프레디 뷔아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지붕과 지붕 사이를 빠르게 건너뛰거나 나무나 건물 위로 급속한 수직적 상승을 하는 카메라 움직임은 그런 점에서 〈세자레〉보다 비인간(카메라)의 시점이며 매체 특정적이다. 산책하며 눈앞의 조각상을 바라보다 상념에 빠져 고대의 폐허를 상상하는 인간은 대상을 보고 있지만 보고 있지 않다. 〈세자레〉에서 목소리와 영상 사이의 단절은 상상의 공간과 현실의 공간 사이의 간극이다. 발화되는 이야기와 화면에 보이는 영상의 불일치는 뒤라스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특징이다. 앞서 제작된 〈인디아 송(India Song)〉(1972)에서 영상은 이야기의 주인공이나 관련된 공간을 보여주지만 말해지는 내용과 직접 결부되지 않는다. 도입부에서 여자들이 거지 여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영상은 태양이 점차 사라지는 광경을 줄곧 보여줄 뿐이다. 남자가 거실로 들어오고, 담배를 피우며, 인도인 하인이 쟁반을 들고 거실에 들어오는 장면이 보이는 가운데, 들리는 것은 화면과 일치하지 않는 이야기(안느 마리와 남편, 애인인 라호르 부영사와 관련된 일화와 소문)뿐이다. 영상은 분위기나 인물의 심리를 느슨하게 암시한다.

❙누가 말하는가

〈프레디 뷔아쉬에게 보내는 편지〉와 〈세자레〉는 모두 감독이 직접 내레이션하므로 누가 말하는지는 표면적으로 분명하다. 하지만 문제는 화자가 누구냐가 아니라 누가를 어떻게 구현하는 가다. 〈프레디 뷔아쉬에게 보내는 편지〉는 “나는 당신(프레디 뷔아쉬)에게 이 단편영화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는 감독의 말로 시작된다. 로잔시가 영화를 제작하라고 돈을 주었는데 일이 잘 성사되지 않았음을 토로하고, 이 영화는 아직 표면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사물의 바닥에 있다는 철학적 고찰을 하는 내레이션의 내용 역시 이 목소리가 작업의 동기와 경과, 결과를 알고 있는 저자의 목소리임을 증명한다. 목소리는 나직하지만 완결되어 있지 않고 정처 없다. 두서없이 “꾸물꾸물 기어가는”미셸 시옹, 『오디오-비전』, 237쪽. 내레이션은 리듬이라는 점에서 로잔의 풍광을 이리저리 주유하는 영상의 움직임에 동조한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비완결적인 음성과 영상의 형식이 저자로서의 고다르 특유의 양식이 아니라 로잔이라는 주제를 형식적으로 가시화한 작업의 구조라는 점이다. “이 도시에는 똑바른 선이 없다. 여기서 영화는 출발한다. … 똑바른 선 사이를 왕복한다”는 내레이션의 내용은 이 비틀거리며 우왕좌왕하는 음성과 영상의 양식적 특징이 주제에 대한 해석이요 내용에 대한 형식의 합목적적 조응임을 가리킨다. 종종 등장하는 고다르 자신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시각적으로 감독이 보이지만 말을 하고 있는 직접적인 모습이 등장하지는 않고 이것은 나다라는 지시어도 없으니 이 작업에서 고다르의 영상은 물리적으로나 효과면으로나 아쿠스마틱하다. 그런데 아쿠스마틱의 목적에 있어서 고다르의 목소리는 원론적 의미의 음성존재(acousmêtre)와 좀 다르다. 여기서 고다르의 음성과 영상은 모든 것을 주재하는 절대적 존재로서 현현하기보다 작업의 구조를 드러내고 영화 자체에 대한 사유를 촉발하는 메타적 장치로 작동한다. 찍고 녹음하며 이를 직조하는 자로서의 저자는 구조를 부여하는(reframing) 수행적 주체다. 이미지 바깥에서 말하지만 작업을 설계하는 자로서 구성하는 행위를 드러내는 고다르의 목소리는 “수행적 보이스오버”다.‘수행적 보이스오버’는 아녜스 바르다에 대한 이나라의 논문에서 가져왔다. 하지만 이나라의 논문에서 수행성은 매체적 자기반영성보다 육체의 현전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나라, 「아녜스 바르다 영화의 목소리 연구」, 『프랑스문화예술연구』 77집 (프랑스문화예술학회, 2021), 114쪽.

고다르의 목소리가 영화라는 매체특수적 장치로서의 저자를 지칭한다면, 뒤라스의 목소리는 가장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음성 존재다. 〈세자레〉에서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 보이스오버의 주체는 모든 것을 주재하는 절대적 존재다. 음유시인의 태도로 사라진 팔레스타인의 고대 도시 세자레에 대해 이야기하는 보이스오버는 모든 점에서 추상적이다. 누가 이야기하는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왜 이야기하는지 모두 모호하다. 허구이기는 하나 구체적인 이야기가 존재하던 〈인디아 송〉의 보이스오버 역시 모호하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다. 〈세자레〉와는 달리 〈인디아 송〉의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다. 다수의 제3자들이 주인공 여성과 그녀 주변의 남성들을 둘러싼 정황을 이야기하는 내레이션은, 시제가 섞여 있고, 독백과 대화가 교차되며, 기억과 현황 묘사가 뒤엉켜 있어서 소문인지 목격담인지, 현재인지 과거인지, 사실인지 허구인지가 불분명하다.〈인디아 송〉의 내레이션 번역은 다음을 참조했다. 조혜정,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인디아 송 스타일 분석」, 『영화연구』 29집 (한국영화학회, 2006), 303–320쪽. 가끔 주인공인 안느 마리와 라호르 부영사의 대화가 내레이션될 때도 있지만 그 경우에도 내화면의 인물들은 말하지 않는다. 정황상 그들의 대화임에도 그들의 말은 화면 밖 목소리의 힘을 빌어 전달됨으로써 영상과 분리된 소리 공간은 일관되게 유지된다. 발화의 주체와 시점이 불분명한 채 초월적 공간을 떠도는 추상적인 목소리는 도처에 존재하고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며 전지전능한 신의 음성이다. 추상성은 역으로 그 무엇으로도 구체화될 수 없는 절대성을 뜻한다. 이는 가장 강력하며 전능한 문학의 저자성이다. 실로 뒤라스는 단 한 번도 영상이 말의 전능한 힘을 압도하게 놓아둔 적이 없다. 〈인디아 송〉과 같은 사운드 트랙을 사용한 〈캘커타 사막의 베니스라는 그의 이름(Son nom de Venise dans Calcutta désert)〉(1976)에서 영상은 목소리와 완전히 단절된다. 그래도 영상이 이야기의 배경으로는 작동하던 〈인디아 송〉과 달리, 〈캘커타 사막의 베니스라는 그의 이름〉에서 보이는 것은 무너진 건물 잔해, 공원, 빈 살롱 등 폐허와 무생물뿐이다. 이후 뒤라스는 보는 영화가 아니라 읽는 영화로 넘어간다. 보이는 것이 있기는 하나 의미적으로는 볼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나비르 나이트(Le Navire Night)〉(1977), 아예 영화의 반 이상이 검은 화면인 〈대서양의 남자(L’Homme Atlantique)〉(1981)는 영화를 통해 다시 쓴 텍스트의 글쓰기에 다름 아니다.이지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영화적 글쓰기: 〈나탈리 그랑제〉에서 〈대서양의 남자〉까지」, 『프랑스학연구』 42집 (프랑스학회, 2007), 488–496쪽.

❙무엇을 말하는가

결국 모든 문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로 귀결된다. 표피적 층위에서 화자가 이야기하는 담화의 소재가 아니라, 심층에서 보이지 않는 저자의 목소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말이다. 이들의 목소리는 결국 무엇을 말하는가.

〈프레디 뷔아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음성은 본 바를 어떻게 구조화시키는가와 관련한 자기 지시적(self-referencial)인 매체적 성찰로 향한다. 음성과 영상, 음악 등 영화의 모든 요소는 로잔을 시각적으로 구조화시키는 방식과 연결된다. 예를 들어, 수평과 수직 두 가지 방향으로 움직이는 카메라 워크는 로잔을 찍기 위해 고다르가 이동한 경로와 관계된다. 동서로는 브베와 제네바 사이에 있고 남북으로는 두 도시보다 위에 있는 로잔의 위치는 고다르에게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가는 수평 방향의 이동과 올라갔다 내려오는 수직 방향의 이동을 요구했다. 로잔을 관찰하며 이 도시가 하늘과 물 사이에 존재하고 그 중간을 사람과 돌이 채우고 있다고 파악한 감독은 이미지와 텍스트의 운동을 수평과 수직의 두 축으로 설정한다. 하늘(녹색)에서 물(파랑)으로의 움직임은 수직성이고 그 사이에서 이동하는 군중의 움직임은 수평성이다. 수평과 수직, 그리고 “그 둘 사이의 대각선과 망설임”은미셸 시옹, 『오디오-비전』, 236쪽. 모두 로잔이라는 도시의 이미지를 압축적으로 추출한 구조에서 유래한다. 고다르는 주제의 형식적 매칭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수직성과 수평성에 대한 고찰은 영화 일반에 대한 고찰로 확장된다. “도시를 설계한 건축가의 돌이 지닌 기하학의 정신을 벗어나려 했다, 다큐멘터리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이 군중의 움직임에서 픽션의 출발을 발견하고 싶었다 …”로 두서없이 이어지는 고다르의 독백은 건축(기하학)과 다큐멘터리(사실과 정확성)가 상징하는 수직적인 근대성에서 벗어나 픽션으로 대변되는 역동적인 수평의 에너지를 담고 싶다는 영화적 성찰로 이해된다. 상영 시간 내내 울리는 라벨의 볼레로는 좌충우돌하는 음성 및 영상과 달리 영화에서 유일하게 간단없이 직진한다. 전개 방향으로 멈춤 없이 나아가는 음악과, 멈칫거리고 흔들리며 우왕좌왕하는 음성과 영상은 영화를 구축하는 두 개의 움직임이다. 사실을 기록하는 카메라로 허구를 담아내고도 싶고, 구조를 모색하면서도 다른 한편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이원적 욕동 말이다. 결국 고다르가 만든 것은 또 다른 버전의 영화에 대한 영화, 메타-영화가 아닐까.

고다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지금 네가 보는 것의 구조적 지반이자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기 성찰이라면, 뒤라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영상과 분리되어 무한, 장소 없는 곳, 보이지 않는 곳에 거하는 뒤라스 영화의 목소리가 향하는 곳은 형상화할 수 없는 곳, 재현이 없는 곳이다. 〈세자레〉에서 비춰지는 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심상 이미지, 즉 부서진 푸른 기둥과 대리석 가루가 모래가 되어 하얗게 변한 해변을 떠올리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목소리는 스크린이라는 제한된 영역 너머의 모든 신비로움과 초월성으로 나아간다. 텍스트의 상상력을 제한해 텍스트를 파괴하는 영상의 힘에 저항하다 종국에는 영상 자체를 파기하기로 한 것이다. 배우의 부재, 영상과 음성의 불일치, 느린 속도 등 온갖 방식으로 재현을 피하던 뒤라스의 영화는 결국 텅 빈 검은 화면으로 회귀한다.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전혀 아무것도. 어떤 이미지도 없네요. 나비르 나이트는 시간의 밤에 대면해 있고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채 전진하죠. 검은 잉크의 바다 위로요.”Marguerite Duras, Le Navire Night (Gallimard, 1973), p. 28 (이지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영화적 글쓰기: 〈나탈리 그랑제〉에서 〈대서양의 남자〉까지」, 493쪽 재인용).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은 채 검은 잉크의 바다 위로 전진하는 것은 배가 아니라 뒤라스의 영화다. 영화의 실패를 선언하고 영상을 거부하며 영화를 쓰인 텍스트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결론지은 뒤라스는 다시 검은 잉크의 저자로 돌아간다. 마지막 영화 작업인 〈대서양의 남자〉는 검은 화면으로 점철된 영상의 부재를 보여준다.50여분의 러닝타임 중 이미지가 들어간 것은 20분 남짓이고 나머지는 검은 화면이다. 이지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영화적 글쓰기: 〈나탈리 그랑제〉에서 〈대서양의 남자〉까지」, 494쪽. 이는 곧 재현의 거부다. 뒤라스는 자신의 목소리를 영상이 구현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영상이 부재한 검은 화면은 형용할 수 없는 모든 것, “내면의 그림자”, 문학적 근원이다. 이 지점에서 의문이 발생한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거나 텍스트만 보여주려면 글을 쓰지 왜 영화를 만드는가? “영화는 끝이다. 나는 다시 책을 쓰겠다. … 나는 이 실패를 얻었다 … 드디어 영화를 만들 수 없음에 도달한 승리.”Marguerite Duras, Le Navire Night (Gallimard, 1973), p. 13 (이지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영화적 글쓰기: 〈나탈리 그랑제〉에서 〈대서양의 남자〉까지」, 496쪽 재인용). 그럼에도 뒤라스의 마지막 영화들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소리다. 허스키한 뒤라스의 음색이라는 물성이 깃든 소리. 그것이 재현이 제거된 뒤라스의 영화와 육체성이 거세된 문학 텍스트의 차이다. 결국 뒤라스가 돌아간 곳은 글의 기원으로서의 음성, 모든 창조의 기원인 태초의 말씀, 창조자로서의 저자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자전적이나 보편적인 익명의 목소리: 함혜경의 양가적 보이스오버

첫 작업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2003) 이래 함혜경의 모든 작업은 사실상 보이스오버로 구성되었다. 물리적으로 보이스오버가 아닌 형식은 자막으로 내레이션이 서술되는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과 〈모든 사람은 수수께끼〉(2019) 뿐으로, 이 작업들 또한 음성이 아닐 뿐 1인칭 화자의 독백이라는 점에서 묵음 보이스오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혹 〈어둠이 사라지고〉(2016) 같은 대화 형식의 작업도 있지만, 이 경우도 ‘나’를 자칭하는 대화를 주도하는 화자가 존재하기에 변형된 보이스오버라고 보는 것이 옳다.

함혜경이 보이스오버를 선호하는 이유는 아마도 작업이 작가가 겪은 삶의 파편에서 소산하고 그 경험을 곱씹으면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모든 작업은 자전적인 한편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기도 하다. “고작 이 정도의 삶이 내 미래일지라도 누군가를 위해 애쓰며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신념 같은 것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내가 가진 것은 언제나 인상뿐이지”, “작업을 하며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인생을 살기가 쉬워지는 것도 아닌데”첫 번째 것은 〈나의 첫사랑〉(2017)의 내레이션 중 일부, 뒤의 두 개는 〈거짓말하는 애인〉(2014)의 내레이션 중 일부. 같은 독백을 듣는 관객은 저 말이 캐릭터의 것일지 작가의 것일지 생각하다가, 이내 자신의 삶에 비추어 상황에 이입하게 된다. 여기서 저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발화의 주체라는 점에서 함혜경의 보이스오버는 모호하다. 우선 발화자가 작가가 아니다. 자신의 표류하는 삶에 대해 토로하는 〈평온의 섬〉(2020)의 여성, 예술가와 그녀의 파트너 간 충돌이 드러난 〈냉정한 동반자〉(2018)의 남녀, 과거의 첫사랑과 성공의 기회에 대해 회상하는 〈나의 첫사랑〉(2017)의 남성은 모두 1인칭 시점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독백이라는 설정 때문에 모든 이야기는 화자의 실제 경험처럼 느껴지고, 스토리텔링이 서사 내부에서 정합적이기 때문에 사운드 트랙 차원에서는 이야기의 환영이 깨지지 않는다. 허구의 매끄러운 봉합을 깨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이야기에 부합하지 않는 영상으로, 특히 초기 작업에 자주 등장한다. 전파상을 운영한 아버지와 어린 시절 좋아하던 미국 문화를 회상하는 〈럭키맨〉(2015)에서 일본인 화자의 이야기는 관객이 일본의 과거 풍광들 사이에 삽입된 삼풍 백화점 붕괴 사진과 중국의 농촌 풍경, 홍콩의 시장 풍경을 발견한 후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파리 유학생이 화자로 등장하는 〈나는 나일 뿐〉(2014)에서도 불어로 이야기하는 화자의 말을 홍콩과 싱가포르를 찍은 영상은 증명해주지 않는다. 이음매를 드러내는 또 다른 요소는 내레이터의 음색이다. 함혜경의 모든 작업의 내레이터는 원어민이 아닌 외국인이다. 〈거짓말하는 애인〉(2014)의 남성은 영어로 이야기하지만 발음이나 억양에서 무언가 다르고, 〈나는 나일 뿐〉의 여성은 프랑스어로 말하지만 어색한 발음과 특유의 어투에서 한국인임이 느껴진다. 〈터널 끝의 빛〉(2017)의 화자는 영어로 말하지만 비영어권 외국인임이 명백하다. 이들은 실제로 한국계 영국인, 한국인, 네덜란드계 남아프리카공화국인으로 원어민이 아니다. 후기작인 〈평온의 섬〉, 〈벌이 없으면 도망치는 재미도 없다〉(2018), 〈냉정한 동반자〉의 경우 말이 상당히 유창해 거의 분간하기 어렵지만 이 역시 순수한 원어민이 아니다.내레이터는 각각 베네수엘라 국적의 여성(영어), 혼혈인 재일교포 여성(일어), 한국인 남녀(영어)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전달하는 이야기는 이야기의 진실성에 제동을 건다. 억양과 발음에서 느껴지는 모종의 이질성은 내레이터의 육성이 지닌 신체성을 부각시킨다. 이는 모국어가 프랑스어인 화자만 등장하는 뒤라스와의 차이다. 함혜경의 목소리는 로고스를 대변하는 초월적 음성이 아니라, 화자의 정신적·신체적 타자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육체의 목소리다. 논리적으로 균질한 서사는 화자의 음성 언어가 지닌 질감의 차이로 금이 간다. 내레이션의 두드러지는 육체성은 1인칭 독백이라는 형식이 지시하는 자전성과 저자성의 개념을 애매하게 만든다. 함혜경의 모든 이야기는 작가의 실제 경험과 주변에서 듣거나 읽은 이야기, 꾸며낸 허구의 이야기가 뒤섞인 것이다. 그녀의 모든 작업은 사적이고 내밀하며 개인적인 독백의 형태를 띠기에, 한편으로는 전부 작가 본인의 일기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 모든 것은 허구기도 하다. 실재와 허구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이어진다. 이는 마치 타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주체의 본성을 가리키는 것 같다. 외견상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 외부의 내사(introjection)라는 과정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구성할 수 있는 것이 주체의 자리다. 나와 타자, 세계와 내가 한 몸을 이루며 상호 의존하는 함혜경의 보이스오버는 그런 점에서 절대적인 목소리와 정반대의 지점을 가리키며 포스트 구조주의 이후 해체된 저자의 자리에 놓인다.

각본을 먼저 쓰고 여기에 어울리는 영상을 구상하는 함혜경의 작업 과정은 텍스트가 영상보다 우위를 점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을 일으키기도 한다.혹자는 이 때문에 그의 작업을 문학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의 내러티브가 인과적이고 정합적인 것은 아니나, 내적 성찰 같은 고백의 목소리는 말에 힘을 실어준다. 하지만 그의 작업을 뒤라스처럼 영화를 통해 다시 쓴 텍스트라고 볼 수는 없다. 함혜경 작업에서 영상은 음성에 반응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심하게 흘러가기도 하며, 텍스트에 종속되지 않는 독립적 구성 요소로 음성과 대등한 지위를 유지한다. 특이한 점은 작업마다 영상과 음성의 거리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고다르처럼 영상이 자율적으로 흘러가다 음성을 느슨하게 따라가며 조응해주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뒤라스처럼 아예 평행 세계로서 자신만의 길을 가기도 한다. 한 예로 〈평온의 섬〉에서 작가는 고다르에 가까운 입장을 취한다. “무엇을 포기하면 과거를 돌려받을 수 있을까?”라고 회상하는 주인공의 독백은 음성과 관계없이 나른하게 헤엄치는 해파리를 배경으로 하지만, 이후 빠르게 뒤로 감기한 파도 장면은 “그 시절을 다시 불러오는 것”이라는 텍스트에 대한 직접 반응이다. 영상이 음성을 묘사하지는 않더라도 암시하거나 은유하는 장면은 그 밖에도 많다. “마음으로 행복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곧 그 행복을 잡아 둘 수 없음에 절망한다”는 내레이션은 버터가 녹고, 우유에 거품이 가득하며, 믹서기로 모든 것이 갈리고, 과일이 썩는 장면으로 간접적으로 시각화된다. 음성과 동기화되지는 않지만 로잔의 풍경이기는 한 고다르의 영상에 비해, 여기서 함혜경의 영상은 물리적으로는 영상과 무관하지만 내용적으로 음성을 툭툭 건드리며 약간의 유머와 함께 음성에 훨씬 친근하게 다가온다.

한편 서로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연인의 이야기를 표방한 〈냉정한 동반자〉에서 여성 주인공의 내레이션 뒤에 펼쳐지는 방콕의 풍경은 음성의 내용과 거의 상관없다. 비 내리는 방콕의 풍경과 교통 체증,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의 모습은 음성의 배경일 뿐이지, 홍콩이나 도쿄 혹은 서울이어도 무방하다. 간혹 아주 약하게 음성과 매칭되는 경우도 있지만 필연성은 없다.작업이 너무 주관적이고 감상적이며 취미생활 같다는 혹평에 대한 이야기의 배경은 방콕 문화예술센터의 전시 장면이다. 어쩌면 〈냉정한 동반자〉는 〈세자레〉의 경우보다 영상과 음성의 거리가 더 멀 수도 있다. 〈세자레〉의 배경이 되는 조각 정원은 음성과 무관할지언정 시간의 흐름에 버티고 있는 오래된 조상이 고대의 멸망한 제국에 대한 상념을 촉발한 계기는 될 수 있다. 반면 〈냉정한 동반자〉에서 방콕의 풍광은 대체 가능한 배경일 뿐이다. 이런 특성은 강릉 바닷가가 배경인 〈나의 첫사랑〉(2017)이나 야간 운전하는 장면을 배경으로 한 〈멀리서 온 남자〉(2015)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영상은 화자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는 익명의 풍경으로 조용히 물러난다. 추상적 심상 풍경으로서 영상은 화자나 관객의 상념을 그저 뒤에서 묵묵히 지원한다.

뒤라스는 텍스트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영상의 힘에 저항하다 영화 자체를 포기하고 텍스트로귀환했다. 그것은 언제나 글의 기원으로서의 음성, 원론적 의미인 음성 존재였던 뒤라스의 목소리가 암시하는 결론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함혜경의 목소리는 어디로 향하는가? 함혜경의 이야기는 일상에서 발견하거나, 언젠가 본 영화에서, 혹은 지인과 나눈 대화에서 온다.「함양아와 함혜경의 인터뷰」, 『UNDER MY SKIN』(하이트컬렉션, 2016), 54쪽. 그렇기에 함혜경의 목소리는 늘 구체적인 일상 속 심상에서 떠오른다. 그것은 기억 속에 남은 추억과 상념,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이다. 그 손에 잡히지 않지만 생생한 구체적인 정서들을 함혜경은 가까이서 친밀하게 다룬다. 이때 가까이라 함은 함혜경에게 저자로서 작가의 존재와 내레이터인 환영 공간의 화자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며 심지어 뒤엉켜서 구분되지도 않는다는 의미다.“내 작업은 작가인 함혜경이 만든 하나의 가설이다. 이것은 내가 만든 것이지만 결코 나라고 할 수는 없다. 나의 작업은 실제의 경험이 픽션으로 보이도록 만들기도 하고, 허구의 이야기를 현실로 가져오기도 한다. 그러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작가인 나 자신이 보이기도 하고 숨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함양아와 함혜경의 인터뷰」, 56쪽. 실패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멀리서 온 남자〉에서 함혜경은 한편으로는 화자인 딘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헤어진 여성이다. 〈냉정한 동반자〉 첫 장면에 등장하는 공격적인 면접관과 당황해서 횡설수설하는 지원자의 에피소드는 작가의 경험이자 주변 동료 일반의 경험일 것이다.이 장면은 영국 드라마 〈IT Crowd〉(2006–13)의 한 에피소드에서 따온 것이다. “무엇이 나를, 이곳에 존재하는 지금의 나로 만들어 버린 것일까요? 이것은 과연 나의 인생일까요? 아니면 내가 미끄러져 들어가버린 누군가의 인생일까요?”를 되뇌는 〈터널 끝의 빛〉(2017)의 내레이션은 함혜경의 작업 전체를 요약하는 말이다. “나는 나 자신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때가 있었다.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지금의 나라는 사람에 갇혔고 결코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깊은 무력감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함혜경 작가노트, 2025. 아마도 함혜경이 타인과 낯선 장소를 늘 궁금해하는 것은 자신의 껍질을 넘어 다른 누군가에 가닿고 싶은 지향 때문일 테다. 현실이기도 허구이기도, 나의 이야기이기도 너의 이야기이기도 한 함혜경 작업의 이중적인 존재론은 역설적으로 타자화가 불가능하다는 존재론적 딜레마의 소산이다. 그런 점에서 외견상 심상의 목소리라는 점에서 흡사하지만, 저자의 자리라는 점에서 함혜경과 뒤라스의 목소리는 대립한다. 함혜경의 전시 제목이기도 했던 ‘보이스 오프’라는 개념은 이 차이를 설명해준다. 전지적 시점의 보이스오버와 달리 보이스 오프는 화자가 영상에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내화면 바로 옆에 존재함을 뜻한다. 함혜경은 등장인물의 위가 아니라 옆에 혹은 안에 있다. 말씀의 담지자가 아니라 이야기의 편집자로서 그녀는 텍스트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북돋고, 화자의 위에 재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곁에서 함께 발을 맞춘다. 모든 것이 지워진 검은 화면이 아니라 무엇이든 가능한 흰 화면이 함혜경 목소리의 음색이다. 이때 자신의 경험을 투사해 화자에 이입하는 관객은 보편적 화자에 동참하는 익명의 또 다른 누군가다. “‘누군가’의 (감내해 온/하고 있는/해야 할) 시간들은 ‘누군가’가 (사후적으로, 기억들로, 과거로서) 돌아보아야만 볼 수 있는 것이 된다. … 누군가란 항상 화자로 시작해 작가로 이해되었다가, 마침내 보는 자를 통해 영상 그 자체가 된다.”곽노원, 「과거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자, 다른 상념들은 사라진다」, 《의문의 가장자리》(갤러리 룩스) 서문, 2019. 그 익명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는 잠시나마 페소아가 말한 감옥에서 탈출한다.“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탈출할 수 없다. 우리들 자신의 감각과 상상력을 이용해 스스로를 다르게 하는 것을 제외하면, 우리는 결코 다른 누군가가 되지 못한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배수아 옮김, 봄날의 책, 2014), 251쪽. 우리들 자신의 감각과 상상력을 이용해 스스로를 다르게 함으로써 다른 누군가가 되어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