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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ISM
진세영

대결은 없다: 2025 타이틀 매치 《장영혜중공업 vs. 홍진훤: 중간 지대는 없다》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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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세영

대결은 없다: 2025 타이틀 매치 《장영혜중공업 vs. 홍진훤: 중간 지대는 없다》 비평

*본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의 ‘2025 한국미술 비평지원’ 사업의 후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전시는 장영혜중공업의 섹션 “실험은 민주주의다. 파시즘은 제어다.”를 시작으로 홍진훤의 “사진은 내란만큼 세계를 각성할 수 있는가”로 끝맺는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섰을 때, 내부 공간은 (인파가 지나치게 많은 경우가 아니라면) 물리적 규모에 비해 텅 비어있다. 이는 장영혜중공업이 그동안 견지해온 제도와 규범에 대한 위반의 제스처로 이해할 만하다. 이들은 그동안 여타의 그룹 전시에서 미술관 화장실 복도를 비롯하여 락커룸 인근, 계단 아래와 비상구 주변 등에 작품을 설치하는 제도 비판적 실천을 묵묵히 고수하며 화이트큐브 속에 쉽게 편입되는 것에 그 누구보다 열심히 몸부림쳤다. 이번 전시에서도 이 태도는 지속되어, 전시장 좌측과 우측의 ‘가장자리’ 공간, 그리고 전시장 중앙에서 약간 벗어나고 다소 물러난 ‘애매한’ 위치, 이렇게 총 세 군데에 걸쳐 각각의 영상 디스플레이 장비를 설치해두었다.입구에 들어섰을 때 오른편으로 5채널 모니터에 여러 개의 대나무를 덧붙인 십자형 설치가 공중에 하나 있고, 중앙으로 한글과 영문 텍스트를 각각 제공하는 앞뒤로 된 2채널 설치가 이어지며, 마지막 반대편 벽에는 스크린이 하나 놓여있다. 전시 서문에서는 각 영상 장비를 기준으로 하여 그 위치를 “스테이션”이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이 각각으로부터 여러 작품을 순차 상영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 순차 상영으로 인해서, 작품 하나가 재생되고 있을 때 나머지 두 디스플레이 장비는 ‘꺼져있는 상태’로 전시가 이루어진다. 작품은 공간 내부에서 물리적으로 주변화되고, 전시장의 넓은 화이트큐브는 어두침침한 허공에서 검은 화면의 모니터들과 백색으로 비어있는 스크린을 전면화시킨다.

장영혜중공업이 채택한 이와 같은 관습 저항적이고 이탈적인 설치방식과 공간 조성은 다수의 영상 작품이 정해진 동선과 구역에 산발적으로 설치되어, 개별적으로 동시/루프 재생되는 보편의 전시 연출 방식에 대한 거부가 되기도 한다. 이런 지점에서 관람객은 한 번에 한 작품씩만을 볼 수 있는 환경을 갖게 되고, ‘지금’ 송출되고 있는 작품 앞에서만 몰입하면 된다. 다른 선택지라면 가끔 불 꺼진 디스플레이 장치를 멍하니 바라볼 수만 있을 뿐이다. 벗어나고 이탈할 관람 동선, 한 작품을 보는 중에 다른 작품으로 접속할 여지가 없다. 엄밀하게 따졌을 때, 별도 공간에 마련된 〈그들은 내가 자는 동안 문을 부수고 쳐들어왔다 / 우리는 문을 부수는 일이 거의 없다〉(2025)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별도의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점을 유념해달라. 플레이리스트 역할을 하게 되는 캡션은 다음 작품을 기다리게 하며 보상 심리를 심어주기도 한다. 관람객은 정해진 대로 반복할 뿐인 상영 순서를 따라 각 “스테이션”으로 이동하고 그 앞에 멈추길 반복하면서, 전시를 유쾌한 “실험” 감각의 장으로 이해하기도, 혹은 반대로 작가로부터 놀아나고 있는 듯한 “제어”감각에 휩싸이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장영혜중공업이 콘셉트로 삼는 타이틀은 관람객의 신체를 “실험”과 “제어” 사이에서 조절하며 안정적으로 구현시킨다.

1997년 작가로 데뷔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장영혜가 1999년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앉고, 마크 보주(Marc Voge)가 지식총괄책임자(CIO)를 맡아, 설립 이래 지금까지 장영혜중공업이 유지되고 있다. 20여 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산전수전을 겪어왔을 이 선배 작가 격의 듀오에게 혹자는 어쩌면 이 정도의 타이틀-콘셉트의 구상과 실현은 가뿐했을 것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결성 이후 비물질 기반의 ‘웹아트’ 혹은 ‘넷아트’를 선보인다고 곧잘 알려졌던 이들이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미술 작업”“장영혜중공업(YOUNG-HAE CHANG HEAVY INDUSTRIES)은 1999년에 장영혜와 마크 보주(Marc Voge)가 결성한 서울 기반의 넷 아티스트 그룹이다. 기계, 선박, 건축 등과 관련된 대규모 산업을 일컫는 중공업이 장영혜중공업에서는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미술 작업으로 변용되어 사용되고 있으며, 내용은 성욕이나 음식 등 원초적인 욕망, 대기업이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으로 되어 있다.” 위키백과, ‘장영혜중공업’, 링크 주소 생략.으로 ‘플래시(Flash)’를 매체로 활용했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사실 우리한테 그런 기억이 부재할지도 모르겠지만….) 인터넷 도입 이후로 이들에게 가장 잔혹했을 때는 바야흐로 2020년, “어도비사(Adobe Inc.)가 12월 31일부로 플래시 플레이어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을 때일 것이다. 이들은 그 위기의 국면을 “‘플래시’에서 동영상 플레이어로 전환”시키면서 이를 극복, 즉 작품세계의 수명을 연장해냈다.윤충근, 「주력 상품의 유통 방식 변화에 대응하기 — 플래시 플레이어 지원 종료 이후의 장영혜중공업」, 『BE(ATTITUDE)』, 2021.10.14. https://magazine.beattitude.kr/review/report-yoon-chung-geun/ 때문에 이 듀오는 예정대로라면 장례식을 치루었어야 했는데, 죽지 않고 혹은 죽지 못한, 아직 덜 죽은 상태를 정체성으로 가진다. 후술하겠지만, 홍진훤은 이와 대조적으로 예술가 주체로서의 자살, 즉 온전히 맞이할 죽음을 열렬히 갈망한다. 홍진훤에게 장영혜중공업이란 마치 망령처럼 귀환한 치사량 부족의 언데드, 즉 깨어나고 싶은 꿈과도 같은 현실이다.

원래 하고 있던 얘기로 돌아가자. 장영혜중공업이 ‘웹/넷 아티스트’로서 ‘소프트웨어의 폐지’라는 사태를 겪어낸 고초에 비하자면야 심각하진 않았을 테지만, 이들은 이번 신작들에서도 또 한 차례 기업의 수명 연장을 위한 전략과 쇄신을 담고 있다. 이들은 그간 텍스트로 승부를 보던 지점(그리하여 시각디자인의 세계에서 타이포그래피가 지닌 문자의 시각적 감수성을 일깨우며, 많은 창작자, 특히 디자이너 영혼에게 영감과 용기를 주었던 지점)에 단순하게 머물러 있지만은 않은 것이다. 이들은 또 한 번 시류에 과감히 올라타 새로운 에너지원을 동력으로 삼고 있는데, 바로 챗GPT 등을 연상시키는 인공지능 기술과 ‘릴스’나 ‘쇼츠’라고 불리는 형식이 그것들이다.

작가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아폴리네르의 타이포그래피적 자유로 시작된 프랑스 구체시(concrete poetry) 전통과 친숙하다, 물론 구체시랑 비교하는 건 부적절하겠지만. (…) 좀 더 나은 쪽으로 말해보자면, 말라르메의 「주사위 던지기」와 더 잘 맞겠다”본 원고를 작성하기 위해 장영혜중공업 특유의 감각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확보하게 되자, 이 인터뷰가 진짜로 존재하는 것이 맞는지 확신이 없어졌다. 해당 인터뷰는 다음과 같다. “Intercultural medium literature digital: Interview with YOUNG-HAE CHANG HEAVY INDUSTRIES,” Dichtung Digital. Journal für Kunst und Kultur digitaler Medien, No.35(2005). https://mediarep.org/server/api/core/bitstreams/534ce6fb-d2c5-4041-816a-dd3077a20277/content고 언급한 바 있다. 텍스트를 급진적인 재현 방식으로 다루는 미술사의 모더니즘적, 아방가르드적 실천을 계승 중이던 이들은 역사의 새 페이지를 유튜브의 시대로 넘기고, 그 자리에서 해당 실천을 이어 서술해야 한다고 인식하는 듯하다. 이 듀오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한 것이 바로 그것이기에 이들은 최선을 다해 은혜를 갚는다. 이 중공업에게 폐업의 운명을 따돌릴 기회를 주고, 창작활동을 지금껏 유지할 수 있게 해준 것은 특정한 역사적 예술 실천의 방법론도 아니며, 미학-정치적 입장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인터넷의 플래시, 플래시에서 영상, 영상으로 이뤄진 세계와 그 세계에서의 영상일 뿐이다.

이들은 그러므로 유튜브 미감을 부분적으로, 그러나 높은 강도로 작품에 반영한다. 작가는 기존의 시적 표현방식을 유지하면서, 데이트폭력에 얽힌 썰(〈야, 쪼다, 너 사람을 잘못 건드렸어(내 생각에는)〉(2024/2025)), 너무 가짜뉴스 같은 가짜뉴스(〈침묵의 쿠데타〉(2025)), 자기계발과 자기혐오의 융합적 웅변(〈자기혐오에 빠진 시〉(2025)), 인공지능 기술로부터 느끼게 되는 이질성과 미감(〈우리는 아름답지만 당신은 아냐 — 근데 괜찮아!〉(2025)) 등을 소재로 삼고 주제화한다. 여기에 가상으로 만들어진 얼굴-상반신과 음성이 새로운 것으로 등장한다. 이 등장인물들, 화자들은 문법적으로 다소 어색하게 조합된 기계적인 말들에 유머를 잔뜩 담아 시청각적 향연을 펼치느라 분주하다. 관람객이 이들 작품세계 끝에 다다르며 경험하게 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파시즘”의 기운으로 여겨지는 “제어”가 됐든, “민주주의”의 역동적인 “실험”이 됐든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는 심리, 그리고 은근한 궁금증으로 이야기를 계속 기다리게 되는 갈증 현상, 두 글자로 요약하면 분열 그 자체다. 이 분열은 편안한 잠을 청하고 싶지만, 정작 그 시간이 아깝게만 여겨져 쉽게 잠들지 못하고, 뜬눈으로 폰 화면을 쓸어내릴 뿐인 감각과도 같은 것이다. 이것이 전시장에서 관람객의 신체로 상연되게 이르는 것이 장영혜중공업의 결말이다.

장영혜중공업, 〈안녕하세요, 여러분, 우리는 특별해요!〉, 2025, 오리지널 텍스트와 음악 사운드트랙, 단채널 비디오, 컬러, 6분 14초. 스틸컷. (출처: 서울시립미술관)

장영혜중공업은 자본주의적 사회의 음울한 시대상을 이와 같은 유사 악몽의 이미지들로 점철시키지만, 이 매트릭스 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얼룩과도 같은 것을 위트와 유머로 내세우길 포기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듀오가 박차를 가하는 집단적 무의식의 상연 공장은 지긋지긋한 삶을 살아낼 수 있게 하는 위안의 가능성을 (매우 찝찝하지만) 획득할 수 있게 해주며, (그것이 의심스럽더라도) 일말의 긍정성을 전해준다. 홍진훤의 경우, 이와 대조적으로 늘 실패를 노정에 두고 그것을 관람객과 나누고자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냉혹하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이미지로 과잉된 오늘날의 현실 세계에서, 노동자인 우리가 아직 획득하지 못한 꿈과 소망을 이미지로부터 되찾고자 분투한다. 그는 자본주의적 세계에서 노동자계급에게 실현되지 못한, 깨어지고 지연되고 망각에 부쳐지면서 퇴색해버린 세계의 이미지들을 데이터로 축적하고, 그것들을 비판적으로 읽어보는 행위를 제안하기 위해 알고리즘 형성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작가는 사진 이미지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힘으로 발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자체에 가학적인 입장을 고수하게 되고, 종래에는 예술가 주체로서의 맞이할 정당한 종말을 갈망한다. 그는 장영혜중공업과 달리 오롯한 죽음을 원하는 것이다.

홍진훤의 섹션 “사진은 내란만큼 세계를 각성할 수 있는가”는 〈랜덤 포레스트 2025〉로 시작한다. 해당 작품은 국가권력, 거대 기업 등 자본에 의해 망가진 현실의 풍경 그리고 그 안에서 주체적으로 발화하고 가시화되길 선택하면서 투쟁에 참여하게 된 이들을 비롯하여, 사진사적 맥락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자료 성격의 사진 등을 담고 있다. 2층 전시장 벽면을 길게 두르고 있는 총 109장으로 구성된 이 방대한 이미지 더미 작업1층 벽면 작업으로 7장의 사진이 활용되었다. 작품 자체의 총 사진은 116장이다.은 작가가 2014년 7월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촬영한 2장의 고양이 사진으로 시작된다. 오늘날 절대다수가 좋아하며 저마다의 갤러리에 저장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길냥이 사진 이미지에 동시대 민중의 욕망과 힘이 깃들어있다고 간주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고자 초석에 둔 듯 보인다. 이와 같은 사진에 담긴 힘에 대해서 그는 믿음과 의심을 동시에 품으며 작업을 전개해나간다. 그렇게 나머지 107장의 사진들 역시 마찬가지로 벽면을 따라 길고 가득차게 배치되며, 캡션 역할을 하는 〈랜덤 포레스트 2025 인덱스북〉을 비치해둠으로, 개별적인 설명과 사진 이미지 일반에 대한 작가의 단상을 함께 살필 수 있게 한다. 긴 절차의 관람을 따라가게 되면, 어떻게 각각의 사진을 사회적 차원에서 정치적 역량을 지닌 이미지로 우리가 읽어낼 수 있을 것인지, 사진 기반의 이미지를 생산하는 주체로서 예술가(사진가)의 역할은 어디에 그 방점이 있는지 등을 고민해보게 되며, 그 어느 때보다 시각 중심적으로 되어가는 오늘날 사회를 되돌아보게 된다.

홍진훤이 가진 사진에 대한 의심은 2009년 용산 참사 현장을 기자 신분으로 취재하면서, “잘 나온 사진”을 기대하는 자신을 발견한 순간 최초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 미디어 세계의 사진과 실제 현장 사이의 감각적 괴리감을 고민하면서, 이미지의 정치성을 탐구하는 작가로서 작업을 시작한 시점부터 의심은 고스란히 함께 놓여있는 것이다. 그가 형성하는 작품세계 내에서 작업은 늘 믿음/의심과 함께 출발하고, 이에 더해 예정된 실패(믿음에의 배신/의심의 여지 없음)가 문제화(혹은 주제화)되는 것이 특징이다. 예컨대 작가가 첫 작업으로 상정하고 있는 〈임시풍경〉(2009–2011) 시리즈를 생각해보자. 해당 작업은 도시 공간 내에서 건설자본, 국가권력 및 시민사회의 욕망 등과 결합 되어 작동하는 개발 논리를 살펴보고자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공사 현장이나 개발 이후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하는데, 작업 시점이 흐르게 되면 될수록 그는 대한민국의 그 어느 곳을 사진으로 남겨도 임시적인 풍경이 아닌 곳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임시풍경〉이라는 작업은 애당초 성립 불가했음에 생각이 이르게 되고, (풍경)사진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배반당하게 된 실패로 작업을 끝맺게 된다. 우리가 홍진훤의 사진 작업에서 경험하게 되는 예술적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대개 이와 같은 방식 즉, 믿음에서 실패에 이르게 되는 경로에서 파생되는 감각에 기반해있다. 마테리알 독자 여러분께서 비교적 친숙할 수 있는 작가의 대표작 〈멜팅 아이스크림〉(2021) 역시 이와 같은 서사 구조 즉, (필름-복원-)실패를 향한 운동에 기반한다.

홍진훤의 섹션은 이와 같은 사진 이미지를 둘러싼 믿음/의심과 그 이미지의 발현 실패라는 축 위에서, 사진 이미지가 세계에 가할 수 있는 “각성”의 가능성(믿음)과 그 조건을 탐구하는 방식(의심)으로 일관성 있게 구성되어있다. 도시 내에 랜드마크라는 시각적인 것을 염원하는 욕망과 그 어긋남, 성노동자들이 생존권 투쟁에 나선 상황에서 기존의 방식으로 보여지기를 거부하고 시각 권력의 분배를 요구하게 되는 지점(〈엑타크롬은 매주 금요일에 현상됩니다〉(2025)), 미술사적 배경으로써 1930년대 미국의 농업안정국(FSA) 사진 기록 프로젝트에서, 주체의 재현 문제가 국가적 이데올로기와 맞물려 작동해온 것과 관련한 사진에 대한 논쟁(〈언다큐먼티드 모나리자〉(2009/2025)),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1824)이 근현대의 정치 사상사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는 이력(〈합창〉(2025)) 등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흐름과 더불어, 창작자로서 예술가는 자신이 생산한 이미지에 사회적 영향력을 직접적으로 설계할 수 없으며, 그것은 오직 구조적인 차원에서 형성될 뿐이라는 작가의 진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홍진훤은 이 진술에 기반하여 자신이 위치한 자리, 즉 사진 이미지의 힘을 스스로 추동해낼 수 없는 (비참한) 실패의 지대에서, 그것을 (재)점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의 주체로 관람객을 상정한다. 작가는 분명하게 “사진은 더이상 촬영에서 힘이 발생하지 않고 보는 데서 힘이 발생한다”고 선언하면서 사진 이미지를 대하게 된다. 이는 작가가 일상에서 누구나 해봄 직한 단순 반복적 촬영(예컨대 양파 성장 사진 기록)을 시도하고, 공적으로 열린 아카이브 이미지 리서치/셀렉팅을 시도한 이유이다. 작가의 작품세계는 이제 그러한 이미지들의 전유, 재맥락화로 창작의 방법론 상에서 다층적인 구성을 띠게 된다. 이러한 작품의 질적, 구성적 변화는 전시장 벽면에 시트지로 붙여 놓은 문장 단위의 텍스트를 활용하여 작품을 결정짓는 부분에서도 잘 드러난다. 작가는 〈랜덤 포레스트 2025〉의 일부를 내란 시대 이후의 예술작품으로 인식될 수 있게끔 한 문장으로 지시하며, 이를 윤석열 탄핵 이후의 시점에서 우리가 또다시 회귀할 수 있는 자본주의적 현실의 풍경으로서 제시한다. 이러한 기점에서 홍진훤은 스스로를 관람객 주체와 마찬가지의 선상에서 사진 이미지의 일상적인 생산자이자 향유층으로 위치시키며 세계의 여러 이미지를 쫓고 탐하며 끝없이 저장하고 이따금 재구성해보는 시선으로 무장한다.

작가가 〈합창〉에서 베토벤의 「하일리겐슈타트 유서」(1802)를 적극적으로 인용하고, 그의 목소리까지 되살려내어 내레이션으로 들려주는 방식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리히노프스키 공이 소유했던 악기들을 너희 둘 중 한 사람 집에 보관할 수 있었으면 한다. (…) 뭔가 나은 일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즉시 그것들을 다 팔아라. (…) 예술적 소양을 다 펼칠 기회를 갖기 전에 죽음이 닥쳐온다 해도, 이대로 난 만족한다. 죽으면 끝없이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겠어?”베토벤, 「로하일리겐슈타트 유서」(1802). 로맹 롤랑, 임희근 옮김, 『베토벤의 생애』(포노, 2021, 전자책)의 수록본을 인용하였다. 이 유언은 1942년의 히틀러 생일 전야제 공연에서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 제9번〉과 함께 송출되며, 푸르트벵글러가 괴벨스에게 보냈던 편지(1933)의 낭독과도 교차를 이룬다. 그는 정치의 영역에서 종말을 고하게 된 예술의 역사적 입지에 예술가의 유언을 섞어 발화시키고 있는 셈이다. “나치당의 투쟁이 뿌리도 없고 파괴적이며, 그저 대가인 척하는 태도와 키치만 보여주는 예술가를 겨냥하는 것이라면 아무래도 상관이 없지만, (…)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진정한 예술가에게까지 당이 나서서 투쟁으로 대응한다면 (…)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사태가 독일 예술계에 발생할지 모릅니다.”푸르트벵글러, 「독일 민족성에서 본 예술: 요제프 괴벨스에게 보내는 편지」(1933). 헤르베르트 하프너, 이기숙 옮김, 『푸르트벵글러』(마티, 2007), 705~706쪽의 수록본을 부분적으로 요약하여 인용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 가공된 유령들의 목소리를 작가가 참세상 아카이브에서 건져올린 경찰청고용직공무원 노동조합 고공농성 투쟁 푸티지와 함께 보고 듣는다.

〈합창〉은 따라서 홍진훤이 이제 정치도 예술도 아닌, 오직 그것들을 아우르는 구조에만 집중하고자 결심한 것이 극대화되어 나타나는 작품이다. 그것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안온한 죽음으로 향하는 여정인지는 모르겠으나, 홍진훤의 설정대로라면 우리는 그의 곁에 서서 그것을 함께 바라보며, 저마다의 재구성을 시도해보면서 오래도록 사유할 선택지만을 가질 뿐이다. 장영혜중공업 역시 〈우아!〉를 통해 막간극 내지는 훅송에서의 훅(Hook)과도 같은 효과를 도입해 구조화된 연출을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홍진훤의 방법론과 기이하게 닮아있다. 홍진훤이 숱한 사진적 실천의 끝에서 그것에 내재한 가능성의 감각을 관객에게 돌리고 작가 자신은 구조적인 것에 골몰하기를 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장영혜중공업 역시 “스테이션”의 이동-반복을 통한 순차 상영이라는 제한적인 관람 방식을 채택한 배경에 대해 “저마다 기준에 따라 작품을 판단할 수 있는 자유”전시 서문, 일부 발췌.를 확보할 수 있는 몰입의 환경을 조성하기 위함이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두 작가 모두 관람객의 주체성을 회복해야 할 대상 혹은 새롭게 형성시켜야 할 대상으로 전제하는 듯하다. 장영혜중공업과 홍진훤 모두는 이미지가 세계를 초과한 양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진단으로부터, 이미지가 가진 정치적 힘을 실험한다. 홍진훤은 잃어버린 현실들을 마주하며 꿈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읽어내길 강조하고, 장영혜중공업은 우리가 인터넷-즉시성의 차원에서 읽고 있는 세계를 경유하면서, 우리에게 현실적인 것으로 주어지는 이미지에 대응하는 굴절되고 환상화된 이미지를 정초한다.

홍진훤, 〈랜덤 포레스트 2025〉, 2025, 시트지에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가변크기(116). 사진: 홍철기. (출처: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의 제목은 이 지점에서 분명 세밀하게 작동한다. 전시는 “중간 지대는 없다”고 말하며, 공간적 구성에서도 두 작가를 교차하는 동선에 작품을 두고 있지 않다.장영혜중공업의 섹션이 끝나는 출구 편에 홍진훤의 〈랜덤 포레스트 2025〉 일부(사진 7장)가 벽면에 프린트된 형태로 있지만 2층으로 홍진훤의 섹션이 이어질 것이라는 암시 정도만 할 뿐, 실질적인 연결성을 발휘하진 못한다. 다만 해당 전시를 기획한 담당 학예사 유은순은 전시의 구조를 “집단적 목소리가 형성되기 전[장영혜중공업] 그리고 후[홍진훤]”로 본다. 그래서 그사이에 해당하는 “집단적 목소리의 발화 상태”를 “1층과 2층 사이” 어딘가로 여기며 1층 전시의 끝자락에서 마주할 수 있는 벽면의 해당 작품이 “공간을 서로 연결”해준다고 말한다. 담당 학예사의 견해에 대해선 다음을 참조하라. 「2025 타이틀 매치 – 큐레이터’s 비하인드」, 『SeMA-Zine』 2025년 10월호. https://scented-spectacles-410.notion.site/2025-s-27a7605666418008a659ce502366a9f3 이 때문에 전시는 두 작가가 1층과 2층으로 분리된 공간에서 저마다 개인전을 개최하는 듯한 구조다.강수미도 그렇게 전시를 이해하고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을 참조하라. “이번 전시에 장영혜중공업은 ‘실험은 민주주의다. 파시즘은 제어다’라는 메시지를 상정했다. (…) 홍진훤은 이번 전시에 4점의 신작과 2점의 구작으로 일종의 ‘사진에 관한 사진전’을 꾸렸다. 말하자면 그는 《2025년 타이틀 매치》 전의 초청 작가이자, 큐레이터처럼 그 전시 속에 별도의 전시를 기획한 셈이다.” 강수미, 「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 미술 효과: 장영혜중공업 vs. 홍진훤의 작업 의의」, 『쿨투라』, 2025.09.03. http://www.cultura.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81 다만 장영혜중공업과 홍진훤 모두 동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풍경에 주목하는 측면이 있으며, 특히 첨예하고 복잡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미지의 성격을 실험적으로 다루거나 주제화한다는 점에서 하나로 묶여있다. 이 하나의 전시는 이들의 작품세계로부터, 사회에는 갈등과 상반된 욕망, 그로 인한 불화가 가시적으로 혹은 은폐된 상태로 존재할 뿐이라고 말한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지점은 “중간 지대는 없다”는 말로 이 두 작가는 사실상 하나의 전시로 묶여있는 것처럼, 이들이 실상 하나이기도 하다는 점 그 자체다. 관람객은 이 하나에서 진실한 것과 가상적인 것, 작품과 관람객, 제도와 보기의 방식, 역사성과 동시대성의 사이에서 분명 선택의 기로라는 하나의 자리, 즉 전시에서 지시하는 것과는 또다른 중간 지대를 얻는다. 홍진훤이 제안하는 사진 이미지에 대한 반복적이고 느린 응시로의 읽기-수행, 혹은 장영혜중공업이 의도하는 바와 같이 즉흥적이면서도 깊게 몰입하는 방식 사이에서 보기 행위 어느 것 하나를 시작해야 하는 위치가 그것이다. 따라서 이 중간 지대는 없는 것이 아니라 발생할 수 있는 것이며, 다만 우리가 머무르기가 아니라 떠나야 하는 곳이자, 우리가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어야 하는 곳이기도 할 것이다.

두 작가가 평행선상으로 함께 하나를 이루어내는 구도 속에서, 관람객은 각 섹션을 관람하고 사후적인 종합을 통해 이것을 하나의 전시로 이해해야 하는 조건 속에 놓여 있는 지점에서, 중간 지대는 금방 그리운 곳이 된다. 장영혜중공업이 요청하는 기다림과 몰입의 플레이리스트와 홍진훤의 트레이닝을 위한 알고리즘은 분명 관람객의 소진을 도출하기 때문이다. 이는 통합된 비평적 시선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감상들로 전시 이해를 성립시키는 밑바탕이 된다. 가령, 큐레이터 유은순은 장영혜중공업의 〈그들은 내가 자는 동안 문을 부수고 쳐들어왔다 / 우리는 문을 부수는 일이 거의 없다〉(2025)를 통해서, 그리고 홍진훤의 〈엑타크롬은 매주 금요일에 현상됩니다〉(2025)를 통해서, “겹치는 주제” 중 하나로서 “남북관계에 대한 작가님들의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2025 타이틀 매치 – 큐레이터’s 비하인드」, 『SeMA-Zine』 2025년 10월호. https://scented-spectacles-410.notion.site/2025-s-27a7605666418008a659ce502366a9f3, 두 작품에서 “남북관계”는 지엽적인 것이다. 하지만 둘로 나뉘어진 구도라는 하나를 이해하려면, 이같이 파편적인 단위들을 부여잡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러한 상황은 두 작가 각각에 내재한 주제-방법론적 한계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고, 타이틀 매치라는 콘셉트 자체에 재고가 필요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본고에서는 후자의 관점을 되돌아보며 마치도록 하겠다. 타이틀매치라는 전시 형식을 복싱 경기에 비유하자면 두 선수가 링 중앙에서 맞붙고, 벨 소리와 함께 실제 타격이 오가는 것을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전시에서 선수들은 각자의 링 코너에서 작전을 세우고, 섀도우 복싱을 하며 몸을 푸는 장면만을 반복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관람객은 경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지만 그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는 끊임없이 유예된다. 우리는 결국 그 종소리를 잊어버린 것 같다. 대결이 부재한 대결 콘셉트 앞에서, 경기를 성사시켜야 하는 것은 아무도 아니거나 모두인 셈이다. 작가들은 각자의 링 코너에서 준비 동작만을 반복하고, 관객들은 존재하지 않는 대결의 의미를 스스로 구성해내려 애쓴다. 그렇게 작가들과 관객들은 이 풍경 앞에서 함께 소진된다.

타이틀 매치라는 이 전시 콘셉트의 원형을 과거 쌈지스페이스에서 진행되어오던 기획전시(2002~2005)라는 점으로 접근해볼 때, 두 명의 참여작가가 “마음 놓고 한 판 싸움을” 벌인다는 취지는 분명 중요해보인다.「설특집 문화게시판-아방가르드 원로·신세대 기획전: 된장세대와 케첩세대가 만나면…」, <한국일보>, 2005.02.03. “선배 원로작가의 업적에 경의를 보내기보다는 서로 맞붙어 싸우면서 세대간 소통과 생산적 대화를 모색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전시다. 쌈지스페이스는 두 작가가 마음 놓고 한 판 싸움을 벌이기를 바랐지만 기대보다 싸움의 강도는 낮은 편이라고 한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0502030064111779 2005년 제3회 타이틀매치를 마지막으로 쌈지스페이스 타이틀 매치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쌈지스페이스의 디렉터 출신 김홍희는 훗날 서울시립미술관에 관장으로 취임하면서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 해당 컨셉을 다시 활용한다. 그는 2014년 한 인터뷰에서 “당시 모호하게 시도했던 것들에서 미술관 성격에 맞게 다시 의역 작업을 하는 것, 미술관에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미술관을 변화시키는 기폭제로 사용해 포스트 뮤지엄을 성취하는 기제로 활용하는 것”이라고 타이틀 매치의 재도입 취지를 밝힌다.김해주·김홍희, 「피플/미술전문가-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 관장(1)」, <더 아트로>, 2014.01.14.https://www.theartro.kr/kor/features/features_view.asp?idx=1094&b_code=32e 대안공간에서 출발한 큐레토리얼 실천의 한 기획적 방법론이 미술관의 기폭제로 도입되고 10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는 어쩌면 점점 더 모호한 구도로 편성되는 타이틀매치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