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원고는 예술경영지원센터의 ‘2025 한국미술 비평지원’ 사업의 후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전시는 장영혜중공업의 섹션 “실험은 민주주의다. 파시즘은 제어다.”를 시작으로 홍진훤의 “사진은 내란만큼 세계를 각성할 수 있는가”로 끝맺는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섰을 때, 내부 공간은 (인파가 지나치게 많은 경우가 아니라면) 물리적 규모에 비해 텅 비어있다. 이는 장영혜중공업이 그동안 견지해온 제도와 규범에 대한 위반의 제스처로 이해할 만하다. 이들은 그동안 여타의 그룹 전시에서 미술관 화장실 복도를 비롯하여 락커룸 인근, 계단 아래와 비상구 주변 등에 작품을 설치하는 제도 비판적 실천을 묵묵히 고수하며 화이트큐브 속에 쉽게 편입되는 것에 그 누구보다 열심히 몸부림쳤다. 이번 전시에서도 이 태도는 지속되어, 전시장 좌측과 우측의 ‘가장자리’ 공간, 그리고 전시장 중앙에서 약간 벗어나고 다소 물러난 ‘애매한’ 위치, 이렇게 총 세 군데에 걸쳐 각각의 영상 디스플레이 장비를 설치해두었다.입구에 들어섰을 때 오른편으로 5채널 모니터에 여러 개의 대나무를 덧붙인 십자형 설치가 공중에 하나 있고, 중앙으로 한글과 영문 텍스트를 각각 제공하는 앞뒤로 된 2채널 설치가 이어지며, 마지막 반대편 벽에는 스크린이 하나 놓여있다. 전시 서문에서는 각 영상 장비를 기준으로 하여 그 위치를 “스테이션”이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이 각각으로부터 여러 작품을 순차 상영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 순차 상영으로 인해서, 작품 하나가 재생되고 있을 때 나머지 두 디스플레이 장비는 ‘꺼져있는 상태’로 전시가 이루어진다. 작품은 공간 내부에서 물리적으로 주변화되고, 전시장의 넓은 화이트큐브는 어두침침한 허공에서 검은 화면의 모니터들과 백색으로 비어있는 스크린을 전면화시킨다.
장영혜중공업이 채택한 이와 같은 관습 저항적이고 이탈적인 설치방식과 공간 조성은 다수의 영상 작품이 정해진 동선과 구역에 산발적으로 설치되어, 개별적으로 동시/루프 재생되는 보편의 전시 연출 방식에 대한 거부가 되기도 한다. 이런 지점에서 관람객은 한 번에 한 작품씩만을 볼 수 있는 환경을 갖게 되고, ‘지금’ 송출되고 있는 작품 앞에서만 몰입하면 된다. 다른 선택지라면 가끔 불 꺼진 디스플레이 장치를 멍하니 바라볼 수만 있을 뿐이다. 벗어나고 이탈할 관람 동선, 한 작품을 보는 중에 다른 작품으로 접속할 여지가 없다. 엄밀하게 따졌을 때, 별도 공간에 마련된 〈그들은 내가 자는 동안 문을 부수고 쳐들어왔다 / 우리는 문을 부수는 일이 거의 없다〉(2025)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별도의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점을 유념해달라. 플레이리스트 역할을 하게 되는 캡션은 다음 작품을 기다리게 하며 보상 심리를 심어주기도 한다. 관람객은 정해진 대로 반복할 뿐인 상영 순서를 따라 각 “스테이션”으로 이동하고 그 앞에 멈추길 반복하면서, 전시를 유쾌한 “실험” 감각의 장으로 이해하기도, 혹은 반대로 작가로부터 놀아나고 있는 듯한 “제어”감각에 휩싸이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장영혜중공업이 콘셉트로 삼는 타이틀은 관람객의 신체를 “실험”과 “제어” 사이에서 조절하며 안정적으로 구현시킨다.
1997년 작가로 데뷔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장영혜가 1999년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앉고, 마크 보주(Marc Voge)가 지식총괄책임자(CIO)를 맡아, 설립 이래 지금까지 장영혜중공업이 유지되고 있다. 20여 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산전수전을 겪어왔을 이 선배 작가 격의 듀오에게 혹자는 어쩌면 이 정도의 타이틀-콘셉트의 구상과 실현은 가뿐했을 것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결성 이후 비물질 기반의 ‘웹아트’ 혹은 ‘넷아트’를 선보인다고 곧잘 알려졌던 이들이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미술 작업”“장영혜중공업(YOUNG-HAE CHANG HEAVY INDUSTRIES)은 1999년에 장영혜와 마크 보주(Marc Voge)가 결성한 서울 기반의 넷 아티스트 그룹이다. 기계, 선박, 건축 등과 관련된 대규모 산업을 일컫는 중공업이 장영혜중공업에서는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미술 작업으로 변용되어 사용되고 있으며, 내용은 성욕이나 음식 등 원초적인 욕망, 대기업이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으로 되어 있다.” 위키백과, ‘장영혜중공업’, 링크 주소 생략.으로 ‘플래시(Flash)’를 매체로 활용했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사실 우리한테 그런 기억이 부재할지도 모르겠지만….) 인터넷 도입 이후로 이들에게 가장 잔혹했을 때는 바야흐로 2020년, “어도비사(Adobe Inc.)가 12월 31일부로 플래시 플레이어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을 때일 것이다. 이들은 그 위기의 국면을 “‘플래시’에서 동영상 플레이어로 전환”시키면서 이를 극복, 즉 작품세계의 수명을 연장해냈다.윤충근, 「주력 상품의 유통 방식 변화에 대응하기 — 플래시 플레이어 지원 종료 이후의 장영혜중공업」, 『BE(ATTITUDE)』, 2021.10.14. https://magazine.beattitude.kr/review/report-yoon-chung-geun/ 때문에 이 듀오는 예정대로라면 장례식을 치루었어야 했는데, 죽지 않고 혹은 죽지 못한, 아직 덜 죽은 상태를 정체성으로 가진다. 후술하겠지만, 홍진훤은 이와 대조적으로 예술가 주체로서의 자살, 즉 온전히 맞이할 죽음을 열렬히 갈망한다. 홍진훤에게 장영혜중공업이란 마치 망령처럼 귀환한 치사량 부족의 언데드, 즉 깨어나고 싶은 꿈과도 같은 현실이다.
원래 하고 있던 얘기로 돌아가자. 장영혜중공업이 ‘웹/넷 아티스트’로서 ‘소프트웨어의 폐지’라는 사태를 겪어낸 고초에 비하자면야 심각하진 않았을 테지만, 이들은 이번 신작들에서도 또 한 차례 기업의 수명 연장을 위한 전략과 쇄신을 담고 있다. 이들은 그간 텍스트로 승부를 보던 지점(그리하여 시각디자인의 세계에서 타이포그래피가 지닌 문자의 시각적 감수성을 일깨우며, 많은 창작자, 특히 디자이너 영혼에게 영감과 용기를 주었던 지점)에 단순하게 머물러 있지만은 않은 것이다. 이들은 또 한 번 시류에 과감히 올라타 새로운 에너지원을 동력으로 삼고 있는데, 바로 챗GPT 등을 연상시키는 인공지능 기술과 ‘릴스’나 ‘쇼츠’라고 불리는 형식이 그것들이다.
작가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아폴리네르의 타이포그래피적 자유로 시작된 프랑스 구체시(concrete poetry) 전통과 친숙하다, 물론 구체시랑 비교하는 건 부적절하겠지만. (…) 좀 더 나은 쪽으로 말해보자면, 말라르메의 「주사위 던지기」와 더 잘 맞겠다”본 원고를 작성하기 위해 장영혜중공업 특유의 감각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확보하게 되자, 이 인터뷰가 진짜로 존재하는 것이 맞는지 확신이 없어졌다. 해당 인터뷰는 다음과 같다. “Intercultural medium literature digital: Interview with YOUNG-HAE CHANG HEAVY INDUSTRIES,” Dichtung Digital. Journal für Kunst und Kultur digitaler Medien, No.35(2005). https://mediarep.org/server/api/core/bitstreams/534ce6fb-d2c5-4041-816a-dd3077a20277/content고 언급한 바 있다. 텍스트를 급진적인 재현 방식으로 다루는 미술사의 모더니즘적, 아방가르드적 실천을 계승 중이던 이들은 역사의 새 페이지를 유튜브의 시대로 넘기고, 그 자리에서 해당 실천을 이어 서술해야 한다고 인식하는 듯하다. 이 듀오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한 것이 바로 그것이기에 이들은 최선을 다해 은혜를 갚는다. 이 중공업에게 폐업의 운명을 따돌릴 기회를 주고, 창작활동을 지금껏 유지할 수 있게 해준 것은 특정한 역사적 예술 실천의 방법론도 아니며, 미학-정치적 입장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인터넷의 플래시, 플래시에서 영상, 영상으로 이뤄진 세계와 그 세계에서의 영상일 뿐이다.
이들은 그러므로 유튜브 미감을 부분적으로, 그러나 높은 강도로 작품에 반영한다. 작가는 기존의 시적 표현방식을 유지하면서, 데이트폭력에 얽힌 썰(〈야, 쪼다, 너 사람을 잘못 건드렸어(내 생각에는)〉(2024/2025)), 너무 가짜뉴스 같은 가짜뉴스(〈침묵의 쿠데타〉(2025)), 자기계발과 자기혐오의 융합적 웅변(〈자기혐오에 빠진 시〉(2025)), 인공지능 기술로부터 느끼게 되는 이질성과 미감(〈우리는 아름답지만 당신은 아냐 — 근데 괜찮아!〉(2025)) 등을 소재로 삼고 주제화한다. 여기에 가상으로 만들어진 얼굴-상반신과 음성이 새로운 것으로 등장한다. 이 등장인물들, 화자들은 문법적으로 다소 어색하게 조합된 기계적인 말들에 유머를 잔뜩 담아 시청각적 향연을 펼치느라 분주하다. 관람객이 이들 작품세계 끝에 다다르며 경험하게 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파시즘”의 기운으로 여겨지는 “제어”가 됐든, “민주주의”의 역동적인 “실험”이 됐든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는 심리, 그리고 은근한 궁금증으로 이야기를 계속 기다리게 되는 갈증 현상, 두 글자로 요약하면 분열 그 자체다. 이 분열은 편안한 잠을 청하고 싶지만, 정작 그 시간이 아깝게만 여겨져 쉽게 잠들지 못하고, 뜬눈으로 폰 화면을 쓸어내릴 뿐인 감각과도 같은 것이다. 이것이 전시장에서 관람객의 신체로 상연되게 이르는 것이 장영혜중공업의 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