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4
CRITICISM
김얼터

보지 않고 보기: 정여름의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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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4
CRITICISM
김얼터

보지 않고 보기: 정여름의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성지 순례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종교적 의미의 성지 순례다. 이는 다른 두 가지 의미의 기원으로, 기독교의 예루살렘과 이슬람교의 메카와 같은 종교적 핵심 도시를 방문하는 행위를 뜻한다. 둘째는 첫 번째 의미의 성지 순례가 인터넷상에서 밈화된 것으로, 예언에 가깝도록 미래를 정확히 맞췄거나 놀라운 사건을 담은 글, 혹은 누군가를 비난하는 글에 비난의 대상이 직접 등장하는 희귀한 글과 특별한 의미가 있는 글에 방문하여 댓글을 다는 행위를 가리킨다. 우리에게 중요한 마지막 의미의 성지 순례는 로케이션 관광을 뜻한다. 영화, 드라마, 문학 등 작품 속에 등장한 장소와 작품을 촬영한 장소, 출연 배우나 작가가 자주 출몰하는 장소에 직접 방문하는 행위를 가리키며, 이런 장소들은 훌륭한 관광지가 된다. 오픈 세트장과 테마파크 또한 성지 순례를 위해 마련된 특별한 장소다. 조금 더 넓게 보면 복고 열풍과 함께 어느 순간 유행처럼 번진 콘셉트 사진관도 이런 계열에 속한다. 이런 장소들은 192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등을 응축한 세트를 스튜디오로 만들어놓고 그곳에 피사체를 초대하고 때로는 피사체에게 해당 시기에 어울리는 몸짓을 요구하기도 한다. 경복궁 앞과 한옥마을 근처에 즐비한 한복 대여점들도 비슷한 계열로 생각할 수 있다.

2017년에는 조금 특이한 방식의 성지 순례가 있었다. 이들은 성지를 순례하러 어딘가로 떠나는 대신 그들이 살고 있는 곳에 성지를 소환하고자 했다. 영화 ‹아수라›의 팬덤인 아수리언과 극 중 배경인 안남시 이야기다. 안남시청, 안남시립도서관, 안남시민일보, 국립안남대학교, 안남여성회관, 안남수도사업본부, 안남창업지원센터, 안남인권연대, 안남시민연대, 중국집 안남루, 안남모터스 AM 오토큐 안남시청점까지, 그동안 아수라 팬덤이 안남시를 현실에 구현하려 했던 움직임은 일종의 컬트 현상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사실 이들은 도시 인프라를 예리하게 캐치하는 공동 도시 설계자에 가깝다. 특히 온라인 기반 매체를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이 특징인데, 앞서 열거한 도시 인프라의 공식 트위터 계정이나 공식 웹페이지를 그럴싸하게 보이도록 개설해놓고 그를 통해 존재하지 않는 도시가 온라인상에서 작동하게 했다. 2017년 이후 이들의 성지 소환 활동은 대부분 소강되었으나 이제 우리는 성지에 직접 방문하지 않고 우리가 살고있는 지금 여기로 소환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후설하겠으나 소환된 성지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올해 각종 영화제에서 유독 자주 보였던 정여름의 영상 작업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Graeae: A Stationed Idea›(2019, 이하 ‹그라이아이›)은 서울 한복판에 소환된 성지를 탐구한다. 소환된 성지인 용산 미군 기지는 원칙적으로 우리에게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이 근처에 가본 사람이라면 그곳이 꽤 가시적인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러한 가시성은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그 장소를 둘러싼 높은 벽, 즉 그 장소의 비가시성에서 기인한다. 용산 미군 기지로의 접근 불가능성은 물리적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한때 열풍이었던 스마트폰 AR 게임 ‹포켓몬 GO(Pokémon GO)›의 게임 내 지도와 인터넷 지도에서 해당 장소의 정보는 그곳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녹지 혹은 공백으로 메꾸어져 있다. 그곳의 정보에 접근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이러한 두 번의 불가능에 호응하듯, ‹그라이아이›에도 두 번의 소환이 있다. 두 번의 소환은 영화와 동시대 영상 문화, 우리가 거주하는 실재의 관계를 탐구하는 한편 아직 명확하지 않은 어떤 것이 존재를 획득하는 방법을 시연한다. 물론 ‹그라이아이›는 전쟁과 무기, 정의와 자유, 그리고 장소와 기념비가 그리는 미국 패권주의의 풍경을 논하기에 용이한 작업이다. 너무나 용이한 나머지 미국과 전쟁은 옳지 않으며 트럼프는 나쁜 대통령이고 미국 문화는 지독하게 매스큘린해서 경계의 대상이야, 같은 결론으로 치닫기도 쉽다.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매클루언의 말처럼, 어떤 매체를 통해 말해지는 내용은 해당 매체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에 오히려 방해될 때가 있다.“실제로 우리는 다름 아닌 미디어의 ”내용“ 때문에 그 미디어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방해를 받는다.” 마셜 매클루언 저, 김상호 역, 『미디어의 이해: 인간의 확장』, 커뮤니케이션북스, 2011, 33. 따라서 이 글은 ‹그라이아이›의 내용보다는 우리가 통상 영화, 비디오, 모션 픽처, 무빙 이미지 등으로 일컫는, 영상을 보여주는 스크린 매체들과 그것의 효과를 생각해보려 한다.

먼저 미군 기지를 건설하는 사람들은 특정 시기 미국의 모습을 용산에 소환한다. 이것이 첫 번째 소환이다. 이때 소환되는 미국의 모습은 적절히 낡은 현재거나 덜 낡은 근과거다. 아마 기지에 사는 군인들의 세대를 고려한 것일 수도 있겠다. 안남시 공동 설계자들이 도시를 작동시키기 위해 거기에 있을 법한 인프라를 상상하고 구현한 것처럼, 이들의 목적은 미국의 에센스를 추출하여 토질이 다른 한국 땅에 모조 미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조 미국이 군인들의 향수병을 달랠 것이라 예측하는데, 이는 미국의 정수를 정확히 재현해 놓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국을 재현한 미군 기지는 미국스러운 장소 혹은 미국다운 장소이지만 미국 자체는 아니다. 단순하게 생각해도 하나의 물리적 장소를 원형이 되는 장소와 최대한 비슷하게 조성한다고 해서 기지에 거주하는 미군들 본인이 미국에 있다고 감각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라이아이›에서 미군 기지는 모조 미국이 아니다. 조성된 환경이 미국 본토의 풍경과 비교할 때 구별되지 않을 만큼 동일하다는 것도 이유이지만, 무엇보다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조성된 환경에 적응하여 미국을 연기하기 때문이다. 조성된 환경은 그 장소의 거주자에게 미국에서의 삶과 비슷한 패턴, 비슷한 제스처를 유도하며 사용자로 하여금 미국에 있는 것처럼 연기를 하도록 이끈다. 텍사스 로드하우스의 직원들은 성공적인 기만을 위해 미국 본토로 연기 유학을 떠난다. 미국다움과 텍사스스러움을 익힌 그들은 용산으로 돌아와 텍사스 로드하우스 매니저를 연기하고, 거주자들은 매니저의 연기와 호흡을 맞춰 고객을 연기한다. 그럴 뿐만 아니라 이들은 실제로도 고객이다. 즉, 이들의 연기는 가짜도, 거짓도, 가상도, 재연도, 재현도 아니다. 이들에게 미군 기지는 미국다움을 체험하는 영화 세트장이나 테마파크가 아니라 실재다.

미군 기지에서의 생활에서 알 수 있듯 실재는 얼마든지 연출될 수 있고 이미 상당 부분 연출되고 있다. 이는 기지 바깥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리도 조성된 환경에 맞추어 다른 누군가가 아닌 우리 자신을 연기하며, 때로는 어떤 연기를 하기 위해 환경을 조정하기도 한다. 이때 연출된 실재 너머의 근원적 실재, 원형적 실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영화의 탄생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영상 문화를 구성하는 수많은 영상들, TV 리얼리티 쇼와 시트콤, 유튜브의 일상 브이로그, 트위치와 아프리카를 기반으로 하는 인터넷 방송에서의 역점은, ‘조작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실제의 삶을 보여준다’는 리얼리즘 원칙에 있다. 이런 방면에서 지상파 TV는 시청자들의 신뢰를 잃은 지 오래이며 최근 있었던 유튜버 뒷광고 논란 또한 ‘진짜인 줄 알았는데 진짜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시작되었다. 우리 시대의 새로운 다큐멘터리 장르들, 다큐드라마, 모큐멘터리, 페이크 다큐멘터리 같은 것들 또한 언제나 리얼리즘을 문제 삼는다. 이처럼 리얼리즘을 미덕으로 삼는 모든 포맷의 영상에서 실제 삶을 연출하는 현상은 점점 더 현저해지고 있다. 미디어가 광범위하게 보급되며 우리의 삶을 포착할 기회가 늘어날수록 의식적인 연출의 가능성도 더욱 증가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것이든 동시대 영상을 보는 시청자의 상태는 먼 옛날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1895)을 보고 혹시나 스크린 뒤에 기차가 있었던 걸까 하며 그 뒤의 벽을 매만지던 관객의 상태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영상은 언제나 연출과 리얼리티, 즉 리얼리즘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연출은 스크린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거주하는 시공간 또한 영화처럼, 예능처럼, 비디오 아트의 배경과 동일하게 대내외적으로 연출될 수 있다. 여기서 약간은 과감하게 도약해 보자면, 영화의 등장이 가능했던 배경을 환경이 조성될 수 있고 실재가 연출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당대 사람들이 눈치 챘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영화라는 매체의 효과는 실재를 연출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데에 있으며 이런 맥락에서 영화는 외파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영화의 탄생은 외파다.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져 불가항력적으로 여겨졌던 실재의 개념은 그 당시 이미 내파를 겪고있었을 것이며 영화는 그것을 가시화한 매체인 것이다. 모든 실재는 이미 연출되었거나 앞으로 연출될 것이라는 예감, 영화는 그런 예감을 딛고 탄생했다. 벤야민은 영화의 사회적 기능을 사람과 기계 장치 사이 균형의 생성이라고 말한 바 있다.“영화의 사회적 기능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능은 사람과 기계 장치 사이의 균형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영화는 이 과제를 사람이 촬영 장치 앞에서 자신을 연출하는 방식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사람이 촬영 장치의 도움을 빌려 주변 환경을 자신 앞에 연출하는 방식을 통해서 해결한다.” 발터 벤야민 저, 최성만 역,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제2판)」,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사진의 작은 역사 외』, 도서출판 길, 2007, 82.

그래서 ‹그라이아이›는 그 자체로 두 번째 소환이다. ‹그라이아이›는 뉴스, 거주 군인 인터뷰, 시트콤, 미군 기지 소개 영상과 체험 영상을 이어 붙여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지만 간혹 들리는 소음으로”만 존재하던 용산 미군 기지를 스크린 안에 소환한다. 그렇기에 ‹그라이아이›가 자기 매체로 회화도 조각도 설치도 아닌 영상을 선택한 것은 이러한 맞물림 때문에 타당성을 확보한다. 이 작업에서 매개된 용산 미군 기지는 우리가 직접 방문할 수 있는 다른 많은 장소들과 동등하게 존재한다. 존재는 원격으로 충분히 부여될 수 있으며 사방을 둘러싼 스크린 미디어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보지 않고 보는 법, 파운드 푸티지로만 구성된 ‹그라이아이›의 내적 구조는 바로 그 방법을 드러낸다. 사방이 스크린으로 점철된 우리 시대에 스크린으로 매개되지 않은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의 눈을 나눠 쓰는 그라이아이 자매가 아니라 백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인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