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8
CRITICISM
황재민

동시대 미술이 미디어아트를 배치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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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8
CRITICISM
황재민

동시대 미술이 미디어아트를 배치하는 법

1.

이곳은 미술관. 그리고 눈앞에 미디어아트가 있다. 조금 생각해본다. 그것의 모습은 어떠할까? 그것은 움직이고 있다. 움직일 뿐만 아니라 빛이 나고, 상호작용하고, 반짝반짝하고, 기계이고, 과학적이고 기술적이고 그래서 신기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며 아이들이 즐긴다. 미술관에서 미디어아트는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기능을 한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질문이 필요할 것이다. 동시대 미술을 다루는 미술관에서 사람이 적극적으로 즐거울 만한 일은 그다지 일어나지 않는다. 어떻게 미디어아트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야 마는가? 어쩌면 이 질문은 ‘미디어아트가 동시대 미술이라는 관계망 내에서 어떻게 배치되는가?’라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마테리알은 미디어아트와 스펙터클의 관계에 대하여 글을 요청했고, 주제를 받아든 나는 즉각 하나의 풍경을 떠올렸다. 움직이고 빛이 나며 상호작용하는,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미디어아트의 모습이다. 거대화한 동시대 미술관의 규모에 호응할 수 있는 크기의 기계 장치를 만들거나, 도심의 거대한 미디어 파사드를 꾸미는 배경지 역할을 도맡거나, 새로운 기술이 등장해 뉴스의 헤드라인을 달굴 때 발 빠르게 해당 기술을 제것으로 받아들이며 새로운 예술 형식의 도래를 섣불리 예언하거나. 어쩌면 미디어아트가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은 늘 스펙터클의 형식에 적절하게 맞아떨어지고, 그렇기 때문에 즐거움을 준다.

하지만 이렇게 잘라 말할 순 없다. 어째서? 일단 미디어아트라는 것이 무척이나 곤란한 범주이기 때문이다. 미디어아트에 대하여 말하기 위해 우선 그것을 정의해야 한다. 그렇지만, 예컨대, 움직이고 상호작용하고 반짝반짝하고 기계이다… 이러한 캐리커처를 피해 정말로 ‘미디어아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해당 예술양식에 대한 도전적이고 임의적인 정의와 거기에 따른 논쟁을 통과해야만 한다.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미디어아트의 역사와 깊은 관계를 지닌 기획자이자 비평가, 도메니코 콰란타(Domenico Quaranta)는 해당 형식이 얼마나 혼란한 기반을 갖고 있는지 설명한다. 누군가의 연대기 속에서 미디어아트는 대중매체나 새로운 기술을 예술의 영역으로 적극 끌어들였던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후손이다. 그러나 또 다른 누군가의 해석에서 미디어아트는 컴퓨터의 소형화와 인터넷의 발명 등 1980~90년대의 기술적 사건과 함께 발생한 별종이다.도메니코 콰란타, 『뉴미디어 아트, 매체를 넘어서』, 주경란 옮김, 칼라박스(황금알), 2018, 38-41쪽. 미디어아트는 미디어아트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뉴미디어아트’였으며, 때로는 ‘디지털아트’에 해당한다. 탄생 설화가 합의되지 않은 역사와 문제 설정은 ‘미디어아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바탕으로 공동의 지평을 구성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또 하나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동시대 미술이론, 혹은 비평의 대응이다. 첫 번째 대응. 미술이론은 이 범주 앞에서 침묵하기로 결정한다. 『1900년 이후의 미술사』(2016)와 같은 저작에서 미디어아트를 다루는 챕터가 없다는 점은 이 사실을 직접적으로 가리킨다.도메니코 콰란타, 같은 책, 30쪽. 여기서 콰란타는 2004년 출간된 『1900년 이후의 미술사』의 첫 번째 판본을 참조한 듯하다. 『1900년 이후의 미술사』는 2011년과 2016년에 걸쳐 개정판이 출간되었고, 이 과정에서 데이비드 조슬릿(David Joselit)이 필자로 참여하며 미디어아트/뉴미디어아트 역사 서술의 불균형이 다소 완화되었다. 이와 같은 침묵으로 인해 미디어아트는 (말하자면) 주류 동시대 미술로부터 인정을 얻기 위해 투쟁해야 했다. 그렇지만 더욱 흥미로운 것은 두 번째 대응이다. 두 번째 대응은 질문을 뒤바꾸는 것이었다. ‘미디어아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뒤집어서는, ‘미디어아트는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클레어 비숍(Claire Bishop)은 「디지털 격차(Digital Divide)」(2012)라는 널리 알려진 글에서 동시대 미술과 디지털아트, 나아가 미디어아트 사이의 관계 맺음을 살핀다. 그의 의견은 다음과 같은데, 디지털적 전환 이후 기술이 예술 창작의 기본적인 배경이 된 상황에서 굳이 미디어아트라는 범주가 필요하겠냐는 것이다. 사진이 어도비 포토샵과 같은 그래픽 편집 소프트웨어를 경유하고 영화가 프리미어 프로 등의 영상 편집 소프트웨어를 통과할 때, 그러니까 거의 모든 예술이 프로덕션 과정에서 미디어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미디어아트’가 되었을 때, 미디어아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미디어를 이용한 예술이 있을 뿐이다.Claire Bishop, “Digital Divide: Contemporary Art and New Media”, Artforum, 2012.9., 436쪽.

비숍의 정리는 효과적이다. 우리가 미디어아트라는 유사 장르를 벗어나 비로소 예술이라는 ‘진짜 범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끔 도움을 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의 의견은, 예술의 영역에서 예술의 전통을 빌어 기술에 대한 일종의 “해킹”을도메니코 콰란타, 같은 책, 121쪽. 시도해온 역사를 무시한다는 점에서 빈 공간이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글에서 간접적으로 관찰되는 기술 공포의 뉘앙스다. 「디지털 격차」에서 비숍이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최소한 1989년 이후 동시대 미술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적수가 나타났으며 그것의 이름이 다름 아닌 디지털이라는 서사다. 그에 따르면, 동시대 미술을 대표하는 여러 형식은 디지털 미디어와 은밀히 결합되어 있었다. 필름과 같은 아날로그 미디어에 대한 물신, 인터넷을 통한 간접적 만남이 아니라 직접적 만남의 가치를 중시한 관계 미학, 디지털 환경에서 일상화된 아카이브 — 무작위적이거나 너무 매끄럽게 연결된 아카이브를 떠나 연결될 수 없는 것을 연결하고자 했던 ‘아카이브 충동(archival impulse)’과 같은 형식들. 비숍이 보기에 이와 같은 형식은 디지털적 전환에 따른 반향이지만, 그 사실을 은폐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코드라는 언어체계에 기반한 디지털 환경은 인간적 지각(human perception)을 근본적으로 소외시키기에, 동시대 미술은 스스로 존속하기 위하여 디지털적 전환에 대해 침묵해야만 했다는 것이다.Claire Bishop, 같은 책, 436-441쪽.

디지털적 전환을 승인할 때 동시대 미술의 토대는 무너진다. 이것이 디지털아트, 혹은 미디어아트가 동시대 미술이론의 내부에서 적절히 다룰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우리는 비숍의 의견을 신중하게 취합할 필요가 있다. 과연 디지털 환경은 인간적 지각을 소외시키는가? 나아가, 동시대 미술은 정말로 인간적 지각과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가? 기술 물신의 뒤집힌 대응물과 같은 기술 공포는 상황을 제대로 조망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그리고 이런 종류의 (말하자면) ‘공포’는 비숍 특유의 것만은 아니다. 데이비드 조슬릿을 제외한 『1900년 이후의 미술사』의 저자들, 핼 포스터와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E. Krauss)를 비롯해 휴대전화를 개인의 몸짓과 행동을 재주조하는 장치로 보았던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의 사례까지, 더욱 늘어나야만 하는 이 목록은 또 다른 연구를 요청한다. 콰란타는 「디지털 격차」라는 짧은 글이 갖는 영향을 인정하면서도, 주류 동시대 미술의 영토를 이루는 장치 중 하나인 이론과 비평이라는 입법 제도에 미디어아트가 정당하게 기입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문제시한다.도메니코 콰란타, 같은 책, 217쪽. 확실히 비숍의 비평을 돌아본다면, 그가 대상으로 삼은 사례들이 대부분 주류 동시대 예술질서에 문제 없이 안착한 경우임을 알 수 있다.(토마스 히르슈호른(Thomas Hirschhorn), 타시타 딘(Tacita Dean), 이자 겐츠켄(Isa Genzken), 카데르 아티아(Kader Attia…) 그러니 이 질서 바깥에 무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은 얼마간 정당할 것이다. 미디어아트는 이렇게 동시대 미술을 이루는 규범 바깥에 속하는 어떤 것으로 위치되면서 의도치 않은 임의성을 얻는다. 이와 같은 임의성으로 인하여 미디어아트가 또 다시 기반을 합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2.

그러나 우리는 미디어아트뿐만 아니라 스펙터클에 관하여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미디어아트라는 범주를 적절히 사유할 수 있는 공동의 지평이 구축되지 못한 상황이야말로 예의 스펙터클이 등장하는 이유가 된다. 핼 포스터(Hal Foster)는 파시즘의 재현물을 전유했던 1970~80년대의 예술 실천들, 그 중에서도 로버트 롱고(Robert Longo)의 실천을 유의 깊게 다룬 바 있다. 롱고의 작업은 제국주의적 이미지를 전유하는데, 그것은 이른바 “실재의 상실”과 관련된다.핼 포스터, 『미술 스펙터클 문화정치』, 조주연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 2012, 152쪽. 롱고를 비롯한 몇몇 작가들은 실재의 상실에 지나치게 고통받은 끝에 실재가 존재했다고 추정되는 시간, 파시즘의 시간을 복기하는 위험한 도약을 시도한다. 그의 작업은 파시즘을 복기하는 동시에 실재의 상실을 보상받으려는 당대의 병리적인 시도를 함께 추적했기 때문에 잠시 합리화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스펙터클 속에서 안전하게 해소되어 버리며 문제를 만들어냈다. “사회적 토대가 없을 때, 유토피아적 욕망이 권력을 향한 의지 —또는 집권 예정자들과의 동일시— 가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핼 포스터, 같은 책, 183쪽. 지평 없음을 지평 없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 예술은 권력이 가하는 중력의 방향으로 쉽게 빠져들고 만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미디어아트라는 담화를 향해 비추어 본다면, 해당 형식이 얻은 의도치 않은 임의성이 어째서 계속해서 스펙터클로 빠져들고 마는지,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미디어아트가 스펙터클을 소유하게 되었다면, 그 힘이란 대체 무엇일까? 널리 알려졌듯, 스펙터클은 단순한 이미지들의 집적이 아니라 이미지에 의해 매개된 사회적 관계들의 대상화에 가깝다. 대화를 방해하고, 공동체 형성을 좌절시키고, 사회적 삶을 총체적으로 정복하여 개인을 분리하는 것. 그것이 스펙터클이 작동하는 방식이다.마틴 제이, 『눈의 폄하』, 전영백·이승현·안선미 등 옮김, 서광사, 2019, 566-567쪽. 조너선 크레리(Jonathan Crary) 역시 스펙터클을 대중매체와 그 시각적 이미지들이 행사하는 단순한 효과가 아니라 분리의 기술을 구체화하는 힘, 복합적인 고립화 전략으로 바라본 바 있다. 스펙터클은 이미지를 바라보는 일 자체와는 큰 관련이 없으며, 주체를 개별화하고 고정하고 분리하는 조건을 구성하는 일에 가깝다.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133-134쪽.

그렇다면 미디어아트는 고립과 분리의 힘을 발휘하고 있을까? 잠시 내 이야기를 하자면… 삼성역 인근으로 매일 출근하던 시절, 출근길에 늘 미디어 파사드를 마주쳐야만 했다. 그것은 국내 최대 규모라고 알려진 코엑스 케이팝스퀘어의 거대한 미디어 파사드였는데, 매번 독창적인 이미지를 내보이며 잠재 고객의 눈길을 끌고자 애쓰고 있었다. 그렇지만… 미디어 파사드를 바라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때 가장 스펙터클에 가까웠던 것은 오히려 (나를 포함해) 성난 발걸음으로 빠르게 출근길을 걷던 사람들의 흐름이었다. 이미 충분히 고립된 세계에서 고립의 힘을 행사할 수 있는 미디어아트의 스펙터클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 있는 것은 그저 바짝 말라 소진된 스펙터클의 잔해에 불과하다.마틴 제이, 같은 책, 575쪽.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펙터클이 완전히 해소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어쩌면 오늘날 스펙터클은 고립과 분리의 문제를 떠나 새로운 몸체를 얻은 듯싶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몸체란 몽상의 삭제를 가리킨다. 다시 한번 크레리를 따르자면, “몽상은 일상화된 또는 강압적인 어떤 시스템의 내부에 언제나 존재하는 저항의 영역이다”.조너선 크레리, 같은 책, 139쪽. 그러나 몽상은 기술자본주의 체제의 가시화 이후 가장 적극적으로 삭제된 역량 중 하나가 되었다. 크레리는 『24/7 잠의 종말』(2014)에서 자본주의의 속도로부터 단절될 수 있는 잠과 몽상의 ‘쓸모 없는’ 힘이 어떻게 종말을 맞고 있는지 추적한다. 몽상을 가능케 하는 ‘주의 없음’의 시간, 그리고 잠이라는 “심오하게 무용하고 본래 수동적”인조너선 크레리, 『24/7 잠의 종말』, 김성호 옮김, 2014, 26쪽. 시간은 자연으로부터 풀려나 조작의 대상이 되었고, 끊임없이 무언가와 관여하고 상호작용하고 소통하고 반응하는 시간, “연결주의 패러다임”이라 말할 만한 시간이 몽상의 빈자리를 잠식했다.조너선 크레리, 같은 책, 29-33쪽. 이에 더해, ‘플랫폼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거대 기술 기업은 주의 산만의 시간을 생산하고 동시에 자원화하여 착취하면서 시간의 비시간화를 가속한다. 이것은 스펙터클의 새로운 껍질이다.

여백 없이 계속해서 작동하려는 비시간의 양상은 오늘날 주류 동시대 미술이 소화하는 미디어아트의 모습과 겹쳐진다. 움직이고, 말을 걸고, 상호작용을 유도하는 미디어아트의 끊임없는 움직임은 이제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기에 누구나 쉽게 수용할 수 있다. 바로 이렇게 여백이 없는 움직임을 통해서, 미디어아트는 스펙터클의 새 껍데기와 분명하게 공명한다. 종종 한 사람의 미디어아트 작가는 이처럼 끊임없는 움직임을 구현하기 위해 실험에 몰두하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기술적 회로를 창출하게 되는데, 대개의 경우 인력과 자본을 요구하는 이토록 특출한 기술은 작가의 시각적 캐치프레이즈가 되어 브랜딩 요소로 활용되곤 한다. 여기서 기술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대신 하나의 성공적인 커리어를 만들어내는 데 쓰인다. 기술이 무용한 여백을 포함하지 못하고 함께 꿈꿀 수 있는 몽상의 잠재성을 삭제할 때, 그렇게 원숙해지고 완결성을 갖게 될 때, 스펙터클이 다시 한번 나타나는 셈이다.

동시대 미술은 예술의 진리 기능이 상품, 그리고 제도와의 필연적인 절충 속에서 일시적으로 발현되는 실정성의 사례다. 절충의 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모순을 문제화할 때 동시대 미술은 가능해지고, 모순을 단순히 해소하거나 승화해버릴 때 동시대 미술은 좌절된다. 때로 하나의 세계를 통째로 소모해버리는 모순의 길고 끈질긴 문제화 과정을 작업이 수용하지 못할 때 문제는 발생하곤 한다. 헤르트 로빙크(Geert Lovink)에 따르면, “뉴미디어아트는 변환적 혼성 예술 형태로서, 다학제 간 미시적 실행들의 클라우드”로서 가장 잘 표현될 수 있다.도메니코 콰란타, 같은 책, 48쪽에서 재인용. 그러나 미술 제도는 미디어아트가 내부적으로 맺는 모순, 나아가 주류 동시대 미술의 규범과 맺는 모순을 제대로 바라보는 대신, ‘융합 예술’과 같은 범주를 입안한 뒤 물신화하는 방법을 택하곤 한다.예컨대 기술 기반 예술창작을 후원하는 플랫폼 ‘언폴드엑스’는 스스로를 ‘융합예술 페스티벌’로 소개한다. 그러나 2023년 11월 10일부터 12월 13일까지 열린 《언폴드 엑스 2023: 달로 가는 정거장》은 백남준의 작업을 소개하는 등, 미디어아트의 역사를 자신의 역사로 취하는 듯 보였다. 이것은 지평 없음을 지평 없음으로 바라볼 수 없는 제도의 무관심을 증언하며, “유토피아적 욕망이 권력을 향한 의지”로 귀결되는 필연을 재차 불러들인다. 미디어아트가 장르로서 존속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 미술과의 관계 맺음을 통하여 현재의 양식으로 구체화되기 위해서, 그것은 끊임없는 움직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움직임이란 결국 우리를 가장 쉬운 선택으로 끌고 들어가는 장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