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4
Critic
독백과 방백 사이
: 브이로그(VLOG)의 나르시시즘
이민주



삶을 기록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사람들은 일기, 메모, 사진, 영상 등 각자 편한 방식대로 하루를 기록하고 기억한다. ‘사람 사는 세상 다 똑같다’지만, 우리의 하루는 각자에게 고유하다. 하지만 일상을 나누는 대상이 특정하지 않다면, 알 수 없는 타인에게 본인의 내밀한 영역을 내어주는 것이 또 하나의 일상이 된다면, 우리는 그 하루를 고유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글은 오늘날 온라인에서 유통되는 하루의 파편들, ‘브이로그(VLOG)’*에 관한 이야기다. video blog, 또는 video log라고 풀이되는 이 조어는, 웹(web) 서버에 의해 등록되는 정보를 의미하는 로그(log)의 개념을 딴 블로그(blog)에서 파생됐다. 블로그가 자유롭게 글과 이미지를 포스팅하면서 텍스트로 자신의 관심사를 표출하는 방식이라면, 브이로그는 개인의 일상과 주변의 풍경을 영상 이미지로 기록한다. 유튜브(Youtube)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브이로그 영상은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유학생 일상’, ‘직장인 일상’, ‘다이어터 일상’ 등등. 콘텐츠 생산자들은 자신이 가진 수많은 성격 중 하나의 이름을 내세우면서 그 세계를 가감 없이 소개하고 편집한다. 그들의 하루는 모종의 서사를 입은 채 온라인에 보관된다. 일상이 하나의 콘텐츠가 될 때, 그들의 일일은 소독된 무대 위에서 상연되는 일종의 상품으로 둔갑한다. 하지만 상품화된 일상보다 더 문제적인 것은 이미지 안팎의 주체들이다. 그 비대하거나 왜소한 인물들에 관여해보려 한다.


혼자 말하기

유튜브에 ‘브이로그’를 검색해보자. ‘코로나 확진자 브이로그’, ‘랜선 집들이 브이로그’, ‘제주도 브이로그’, ‘대학생 브이로그’ 등 가깝고 먼 일상이 무수하다. 코로나가 벌려놓은 사람과 사람의 거리를 삭제하듯, 낯선 인물들이 각자에게 친밀한 풍경을 눈앞에 들이밀고 있다. 하루들은 이렇다 할 사건 없이 인물의 고요한 의식주를 보여주거나, 반대로 그들의 평범한 시간을 하나의 사건처럼 다룬다. 극영화에서 배우들이 카메라를 쳐다보는 것은 일종의 금기처럼 취급되지만, 브이로그 속 인물은 모니터 바깥의 시청자와 눈을 마주하듯 카메라의 렌즈를 쳐다본다. 그들은 카메라를 쳐다보지 않거나 프레임 밖으로 밀려난 순간에도 자막과 내레이션으로 영상에서 존재감을 잃지 않는다. ‘나의 일상’을 한 개의 단위로, 하나의 시간 축으로 묶어낸 기록은 현실을 무대 삼아 자신의 행위에 서사를 부여하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는 그곳에서 극화된 인물과 장면을 본다.

브이로그 영상에서 인물은 우리에게 자신의 상태, 상황 등 제공해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공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삽입되는 자막과 내레이션은 이미지가 하지 않는 방식으로 인물의 감정을 설명한다. 영상 내 자막 또는 내레이션은 카메라를 촬영하는 ‘나’와 촬영본을 편집하는 ‘나’의 분리로부터 출발한다. 두 명의 ‘나’로 분리된 자아는 스스로를 타자화하면서 영상 속 인물의 정황을 묘사한다. 인물의 표정과 제스처가 이미지로서 은밀하게 감정을 드러낸다면, 텍스트와 목소리는 구체적인 언어로 그 내밀함을 폭로한다. 그렇게 영상은 빈틈없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대다수의 유튜버(Youtuber)는 주변에 실제 사람이 있건 없건 개의치 않는다. “처음엔 밖에서 카메라 들고 다니는 게 민망했지만, 지금은 익숙해져서 괜찮다”고 말하며 혼자 말하기에 적응한다. 여기서 이미지의 프레임 바깥을 상상해보자. 이들은 일정 거리에 카메라를 두고 그를 향해 말을 건넬 것이다. 타인의 자리를 차지한 카메라와 말하는 인물의 기이한 관계를 그려보면, 연극의 독백 혹은 방백의 장면이 떠오른다. 독백은 무대에서 배우가 혼자 말하는 방식이다. 무대 위 인물의 숨겨진 내면을 드러내는 고독한 언술 행위로서 독백은, 배우의 목소리가 주변 인물에게 들리지 않고 배우 또한 주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가정된 일종의 ‘연극적 약속’이다. 말하자면 이는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다른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 혼잣말인 것이다. 독백의 장에서 타인의 자리는 마련되지 않는다. 한편, 형식적인 차원에서 브이로그 속 인물이 카메라 너머로 말을 계속 던지는 모습은 독백보다 방백의 형식에 가까워 보인다. 독백의 발화가 대상을 설정하지 않고 혼자 말하는 것이라면, 방백은 말하는 배우의 목소리가 관객에게 들릴 것이라는 전제, 즉 대상을 앞에 두고, 그를 향해 혼자 말하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잠재적인) 시청자를 대상으로 하는 이유로 우리는 이 말하기 방식을 방백의 형식으로 봐야 할까? 이들이 내뱉는 말은 정말로 타인을 향하는가? 엄밀한 의미에서 방백을 가장한 독백은 아닐까?

대부분의 브이로그 제작자들은 제작 이유를 “나에 대한 기록” 차원이라고 말한다. 이는 ‘말하는 나’를 저장하면서 스스로를 기억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발화가 결국 자신을 향함을 알려준다. 영상이 유튜브에 업로드되는 시점부터 그것은 단순한 기록의 차원을 넘어선다. 유튜버가 영상을 매개로 불특정한 다수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이다. 구독자에게 ‘애칭’**까지 붙여주며 이름을 부르고, 댓글란을 통해 대화의 창구를 열어놓는다. 하지만 그 무수한 개별의 존재를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 녹화된 모습을 재생하며 나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구성하는 것, 눈을 내게 고정한 채 당신에게 말을 건네는 것. 이러한 형태의 말하기를 정말로 대화 혹은 소통이라 이해할 수 있는가? 카메라와 눈을 마주치고, 카메라와 밥을 먹고, 카메라와 여행을 가는 이 모든 장면에서 당신의 자리는 어디인가? 독백과 방백 사이, 비대한 자아는 눈을 내게, 입은 당신을 향해 속삭인다.


혼자 보기

우리는 왜 브이로그를 보는가? 타인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 비롯하는 걸까? 어쩌면 이는 시각적 쾌락의 수준에서 먹방을 보는 이유와도 관련 있을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일은 충동과 쾌락의 문제보다 더 복잡한 지점을 시사한다. 쇼룸에 나올 것만 같은 내 방 인테리어, 거무죽죽한 현실 속 벽지를 적당히 상쇄하는 화사한 필터, 영상이 보여주는 낭만적인 일상은 인물의 현실을 편집하면서 완성된다. 이곳에서 타인은 영상의 주체를 위한 엑스트라로 등장한다. 하나의 온전한 세계를 구현하는 이 장소에 ‘당신’은 없고 ‘나’만 있다. 카메라 앞에 선 모든 행위, 그리고 그 행위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모두 나르시시즘과 관련한다. 이는 근원적인 차원에서 주체와 타자가 관계 맺는 방식의 문제다. “너 자신을 인정하라”,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하라” 등 자존감(self-esteem) 향상을 위한 수많은 경구 틈에서 나르시시즘과 자존의 경계는 늘 모호하다.

나르시시즘에 관해 지난한 연구를 이어온 정신분석의 논의를 살펴보자. 정신분석에서는 병리학적 구분을 위해 일차적 나르시시즘(primary narcissism)과 이차적 나르시시즘(secondary narcissism)을 나눈다. 일차적 나르시시즘은 유아기의 정상적인 발달단계로서 유아가 최초로 거울을 마주하는 장면에 기인한다. ‘거울단계’로 언급되는 시기에 아이는 자신이 감각하던 분절된 신체를 거울 속 온전한 자신의 모습, 그 통합된 이미지로 확인하며, 그에 매혹된다. 자신의 (성적) 충동을 바깥의 이미지에 투여하면서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외부의 이미지가 실제 나와 완벽하게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아이는 거울 속 이상적 자아와의 괴리를 인지하지만 무엇이 다른지 모른 채, 내게 무엇이 결핍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렇게 아이는 뭔가를 잃어버린 상태로, 그 잃어버린 것을 타자에게서 찾으려는 실패의 여정을 시작한다.

이차적 나르시시즘은 타인보다 자기 자신을 주요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 퇴행적인 상태로 볼 수 있다. 나는 브이로그 영상 속에서 이 퇴행적 상태의 인물을 종종 발견한다. 물론 나르시시즘을 마냥 부정적인 특질로만 간주할 수 없다. 주체가 세계의 이상적 이미지를 내재화하는 과정을 가시화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이미지를 구성하는 방식을 반추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모두가 자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스스로 이미지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꽉 짜인 세계를 구축한다면? ‘일상’을 무대에 올리는 일이 일상화된 세계에서, 너와 내가 모두 나르시시스트로 거듭나는 세상에서 거리두기가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유튜브 플랫폼에서 구독자(subscriber)는 자신의 카테고리에 즐겨 찾는 채널을 등록해 정기적으로 영상을 감상한다. 하지만 일부 구독자들은 단순한 감상의 수준을 넘어선다. “이거 먹어주세요, 여기 가주세요.” 그들은 영상 속 인물에게 멈춤 없이 질문하고 만족을 요구한다. 브이로그에서 자기 매혹에 함몰된 이미지는 촘촘하게 편집된 세계에 주체를 거주하게 만들며, 구독자로 하여금 그들과 상상적 관계를 맺도록 유도한다. 여기서 ‘상상적’이라 함은 주체가 자신의 상상적 이미지를 타자에게 투사하고 그를 통해 다시 자신의 이미지를 확인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유튜버와 구독자의 관계에서 시선은 교환되지 않는다. 이들은 움직이는 이미지를 매개로 각자의 시선에 매몰될 뿐이다. 다시 말해 영상의 인물과 시청자는 현실 타자와 상징적 관계 맺기를 미뤄두며 스스로 구축한 안전한 세계에 남는다. 영상의 인물은 구독자의 여러 가지 질문을 ‘Q&A’의 형식으로 수렴해 답하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노출한다. “질문이 너무 많아 모든 요구에 답할 수 없어 죄송하다”, “영상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두세 번 촬영했다”와 같은 흔한 피드백은 나와 너의 세계에 일말의 빈틈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강박처럼 보인다. 타인과 대화하는 순간에도 ‘나’를 지켜보는 카메라, 그 응시를 다시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서 리비도(Libido)는 나에게로 집중된다.

욕망의 경제에서 타자는 늘 알 수 없는 존재이며, 주체는 그 ‘알 수 없음’ 자체를 해석하기 위해 끊임없이 욕망의 운동을 지속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자신의 충동을 언어와 이미지로 매개해 바깥으로 내던져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곁을 마련하며 타자에게 말을 걸고, 그에 대한 응답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르시시즘적 주체에게 그 투자의 대상은 타자가 아니라 언제나 자기 자신이다. 서두의 질문을 다시 복기해보자. 이러한 요구와 대답을 진정 소통과 대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무수한 질문 더미에서 누구로부터 출발했는지 모를 요구와, 당신의 껍데기를 향한 실체 없는 질문들에서 소통의 의미는 무색해진다. 혼자 말하고 혼자서 구성하는 이미지에 당신이 들어올 틈은 없다. 나를 너무 사랑하는 이 거대한 몸집 앞에서 타자의 형상은 점점 더 왜소해진다. 보이는 자와 보는 자, 이들은 서로의 결여를 인정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매혹된 채 스스로를 겨냥할 뿐이다. 나의 세계에 당신이 없다는 말은 곧 나와 외부의 경계를 설정할 수 없다는 의미이며, 이는 엄밀한 수준에서 자신의 좌표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럴수록 우리는 영상 속 타인의 삶을 더욱더 선명하게 알길 요구할 것이다. 

주체는 타자의 세계를 구성하면서 형성된다. 하지만 브이로그를 둘러싼 주체들은 타자를 상상하기보다 구멍 없는 세계를 이미지로써 조달받는다. 이 빈곤한 상상력으로 과연 우리는 스스로를 욕망하는 자라 선언할 수 있을까? 공백 없는 이미지 앞에서 갈 곳을 잃은 채 조용히 혼자서, 혼자인 그들을 관음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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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로그의 형식은 매우 다양하다. 본 글은 무수한 유형 중 ‘일상 브이로그’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나르시시즘적 인물을 중심으로 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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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로그 제작자는 구독자 수가 늘어나면서 구독자를 칭하는 이름을 댓글로 공모받는다. 그중 하나의 이름을 선정해 모든 구독자들을 통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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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ogen Tyler, “‘Who put the “Me” in feminism?’ The sexual politics of narcissism,” Feminist Theory, vol. 6(1):25-44, SAGE Publications, 2005. 이모겐 타일러는 페미니즘과 나르시시즘의 관계에서 나르시시즘을 문화적, 정치적 가능성으로 간주한다. 나르시시즘적 페미니즘이 성 정치를 둘러싼 많은 질문을 대리하고 있는 것으로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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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한 책들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 윤희기, 박찬부(옮긴이), 「나르시시즘 서론」,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열린책들, 2004
-Imogen Tyler, “‘Who put the “Me” in feminism?’ The sexual politics of narcissism,” Feminist Theory, vol. 6(1):25-44, SAGE Publications,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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