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5
Critic
공원의 풍경(들): 다미앙 매니블의 〈공원Le Parc〉
김도형



1.
다미앙 매니블의 말. “키아로스타미는 ‘불완전 영화’(films incomplets)에 관해 많이 이야기했다. 불완전 영화란 상영이 끝난 뒤에도 관객의 머릿속에서 계속 발전되는 그런 영화다. 나는 이 개념이 흥미롭다고 생각한다.”[1]


2.
매니블의 〈공원〉(2016)[2]에서 공원이란 공간은 중요하다. 〈공원〉은 공원에서 시작해서 공원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영화는 첫 숏에서 단숨에 공원에 들어온 뒤 마지막 숏까지 공원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다. 공원은 영화의 유일한 무대가 된다. 하지만 이 무대는 낮에서 밤으로 넘어갈 때 성질이 달라진다. 낮 동안에 공원은 열려 있다. 이때 사람들은 공원에 자유로이 드나들며 산책하고, 운동하며, 쉴 수 있다. 막심과 나오미도 마찬가지다. 둘은 낮 동안의 공원에서 이리저리 걷고, 대화하며, 사랑을 나눈다. 반면 밤 동안에 공원은 닫혀 있다. 경비원을 제외하고 누구도 밤 동안의 공원에서 돌아다녀선 안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공원〉에서 낮 동안의 공원 역시 닫힌 것 같다. 바로 폐쇄 프레이밍[3]에 의해 말이다. 물론 이는 막심과 나오미에 한정된 얘기다. 매니블은 넓은 공원에서 막심과 나오미만을 프레이밍하여 점차 감금한다. 막심과 나오미 역시 점차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한다. 그런 곳에서 은밀하게 사랑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프레임 안에 막심과 나오미만 남아 있다. 〈공원〉의 공원에선 둘만 격리 조치된다.


3.
그런데 막심은 떠나겠다고 말한다. 갑자기 왜? 밤이 다가오니 집에 가야 해서? 물론 이는 정당한 변명이다. 문제는 막심이 그냥 떠난 것이 아니라 아예 나오미를 떠났다는 것이다. 막심은 왜 나오미에게 결별을 통보하는 것일까? 여기서 가설. 이는 아마 둘의 성향 차이 때문일 것이다. 어떤 성향? 먼저 막심은 말의 힘을 믿는다. 그래서일까. 막심은 철학에 관심이 많다. 막심은 나오미에게 프로이트 얘기를 꺼낸다. 사람들의 제스처, 생각, 행위는 분석될 수 있다는 얘기. 하지만 나오미는 프로이트를 모른다. 사실 나오미는 철학을 접해본 적도 없다. 오히려 나오미는 이미지에 관심이 많다. 이미지의 힘을 믿는다. 가령 막심이 말로 대화를 이끌어간다면, 나오미는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첩에 저장되어 있는 사진(어린 시절 양쪽 팔이 모두 부러졌을 때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또 나오미는 막심과 잔디밭에 누워 있을 때 같이 셀피(selfie)를 찍어 그 순간을 기록하고 싶어한다. 나오미는 떠난 막심에게 담배를 두고 갔다고 메시지를 보낸 뒤, 답을 기다리면서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방금 찍은 셀피를 꺼내어본다. (이런 성향 차이는 막심과 나오미가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도 확인 가능하다. 나오미가 막심에게 첫 번째 메시지를 보낼 때 문장 끝에 이모지(emoji)를 붙인다. 막심은 이모지 따위는 쓰지 않는다.) 그런데 막심이 나오미를 떠난 이유는 단순히 성향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또 다른 가설. 막심은 이미지를 혐오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지 안에 갇히는 것을 싫어한다. 나오미가 같이 셀피를 찍자고 할 때 막심은 극구 사양하지 않았던가. 다소 과장해서 말하자면, 막심은 (이미지-)폐소공포증 환자다. 사실 이런 막심의 성질은 영화 시작부터 정해진 것이다. 영화의 첫 번째 숏. 카메라가 이미 공원 안에 들어와 있다. 카메라는 그저 고정된 채 공원 어딘가 있는 풀들을 프레이밍하여 응시한다. 그다음 두 번째 숏. 마찬가지로 카메라는 이미 공원 안에 들어와 있다. 그런데 숏이 시작함과 동시에 막심이 공원 벤치에 앉아 있다. 즉 막심이 이미 프레임 안에 놓여 있다. 공원에서 공원으로 이어짐. 또 ‘이미’의 이어짐. ‘이미’라는 부사의 폐쇄성. 폐쇄성의 연장. 이런 연장 속에서 막심이 등장한다. 막심에게 공원은 일종의 감금의 공간이다. 반면 나오미는 자신이 직접 발을 내딛어 공원/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놓여 있다, 들어온다. 두 동사는 (의지의 차원에서) 분명 차이가 있다. 막심이 폐소공포증 환자라는 근거는 또 있다. 막심과 나오미가 공원의 깊숙한 곳에서 사랑을 나눈 직후의 숏이다. 나오미가 막심의 옷을 벗긴다. 둘은 서로의 몸을 더듬는다. 이 직후에 카메라는 하늘로 향한다. 나무들에 가려 구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 뒤에 연달아 네 개의 구름 숏이 나온다. 막심과 나오미의 시점 숏이다. 이 숏은 막심에게 숨통을 틔워주는 이른바 환기-숏이다. 물론 단순히 구름을 본다고 폐소공포증이 해결되진 않는다. 막심의 몸은 여전히 공원 안에, 땅에 붙어 있기 때문이다. 공원 안에 있더라도 나오미와 대화를 하고 사랑을 나누면 막심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나오미의 셀피 촬영 시도로 평정심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에 막심은 잔디밭에 누워 나오미와 키스를 하지만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담배를 피운다. 그런데 이제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공원이 닫히기 시작한다. 일련의 다중 닫힘 속에서 폐소공포증이 도진 막심은 결국 공원/프레임 바깥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4.
막심은 떠났다. 하지만 나오미는 남았다. 나오미는 왜 남았는가? 나오미는 막심과 달리 자신의 의지로 공원에 들어왔다. 나오미에게 공원은 감금의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한여름 낮의 추억의 공간이다. 더욱이 막심처럼 다중 닫힘에 민감하지 않다. 오히려 닫힘을 좋아한다. 닫힐수록 좋다. 그래야 나오미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또 나오미는 막심이 돌아올 것이라고 막연히 믿는다. 그래서 공원을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공원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닫힌다. 어두워지고 닫힌다. 이 동사에 어울리는 또 다른 공간이 있다. 바로 극장. 이제부터 공원은 정말 극장이 된다. 그냥 극장이 아니다. 스마트폰과 연동된 디지털 극장이다. 즉 (언어유희를 하자면) ‘공(0)원(1)’ 극장이다. 이 극장에 나오미는 이미 착석했다. 막심이 떠난 그 자리에 말이다. 이미지를 싫어하던 막심이 떠나서일까. 막심과 나오미가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이 그대로 (텍스트-)이미지화되어 프레임 안에 노출된다. 일종의 예고편. 이 장면이 길게 지속되는 동안 공원은 더 어두워진다. 이제 스마트폰의 불빛에 의해서만 나오미의 표정이 보인다. 일종의 체념. 나오미의 믿음과 달리 막심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희망. 나오미는 그 희망을 품고 잠에 빠진다. 꿈에서 막심을 다시 만나리라는 희망. 이제 나오미의 1인 극장-공원에서 본편이 시작된다.

나오미는 막심에게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라고 메시지를 보낸 바 있다. 이 소원은 꿈에서 기이한 방식으로 실현된다. 바로 나오미가 뒤로 걷는 것이다. 잠들었던 나오미가 일어나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향해 뒤로 걷는다. 그렇게 나오미는 막심과 낮에 걸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공원의 곳곳을 (재)통과한다. 잃어버린 막심을 찾아서. 하지만 밤 동안의 공원에는 누구도 있어선 안 된다. 그래서 나오미를 공원 바깥으로 내보내려는 경비원이 나오미를 계속 쫓아온다. 경비원이 말을 건네도, 나오미는 무반응으로 일관하며 계속 걷는다. 경비원과 나오미의 숨바꼭질 장면은 길게 이어진다. 마침내 나오미가 넘어져 가만히 있자, 그제야 경비원도 한숨을 돌리며 담배를 피운다. 이 담배는 일종의 트리거가 된다. 내내 무표정, 무반응이던 나오미가 경비원이 쥔 럭키스트라이크 담뱃갑을 쳐다본다(나오미의 시점 숏). 그리고 나오미와 경비원의 시선 교환이 이어진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사실 이 공원은 단순한 밤의 공원이 아니다. 나오미의 스마트폰과 연동된 극장-공원에서 연장된 꿈속의 공원이다. 그만큼 이 공원은 잘 닫혔기에 최적의 위장 조건을 갖췄다.[4] 그래서일까. 막심이 경비원의 육체에 빙의한다.[5] (막심이 폐소공포증이 있는 자신의 몸이 아니라 경비원의 몸을 통해 나오미 앞에 나타난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런 빙의를 가능케 한 매개체가 (경비원이 주웠던) 나오미의 스마트폰인지, 혹은 나오미와의 시선 교환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나오미가 (막심이 피우던 것과 같은 브랜드의) ‘담배’에 반응하고, 경비원이 갑작스레 (막심과 나오미가 장난칠 때 하던) ‘쿵후’를 하며, 이제부터 나오미는 ‘경비원’(이라는 가시적 존재)을(를) ‘막심’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오미는 경비원의 손을 붙잡고 일어선다. 둘은 춤을 추듯 뛰놀기 시작한다. 그런데 경비원은 나오미를 계속 아래로 데려간다. 일련의 하강 이미지. 공원의 밑바닥에 도달하자, 경비원은 나오미를 배에 태운다. 경비원이 노를 저어 깊이 들어갈수록 주변은 점차 어둠에 잠식된다. 이제 공원의 흔적이 프레임 안에서 사라지고, 오로지 경비원과 나오미만 보인다. 나오미는 불현듯 폐쇄로부터 기인한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지만, 경비원은 들은 체도 않는다. 그러다 암흑 속에서 배가 멈춘다. 경비원이 나오미에게 다가간다. 한번 컷되고, 이어지는 바로 다음 숏, 나오미가 프레임 안에 놓여 있다. 그 안에 막심이 들어온다. 첫 만남의 변주. 막심과의 재회. 그런데 막심의 등장? 사실 가장 닫힌 것 같은 암흑 속은, 역설적으로 공원의 풍경이 사라져 더 이상 위장을 가능케 하는 무대가 존재하지 않게 된 상태다. 위장술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따라서 이때의 컷은 일종의 폭로다. 컷 직후 이어진 숏은 폐쇄 프레임 그 자체며, 여기서 막심은 더 이상 숨을 수 없고, 나오미는 집에 갈 수 없다. 완전 격리 조치된 둘은 키스를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나오미는 막심이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키스를 한다. 이는 단순히 사랑의 키스가 아니다. 오히려 죽음 충동의 키스이자 동반 자살의 키스다. 여기서 막심을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둘 다 숨통이 막힌다. 배 위에서 둘이 아등바등하다 갑자기 꿈이 끝난다. 벌써 아침이다. 나오미가 눈을 뜬다. 나오미가 마주한 건 결국 (미조구치의 〈치카마츠 이야기〉(1954)처럼 동반 자살을 하기 위해 배를 타고 나갔다가, 사랑과 삶의 의지를 회복한 것이 아니라) 재회의 실패, 붙잡으려는 노력의 실패다. 물론 막심을 붙잡는 데 성공한다 한들 꿈에 불과하다. 사실 막심으로부터 결별 통보 메시지를 받았을 때 이미 관계는 파국을 맞았다. 나오미가 결심한 듯 어딘가를 향해 걸어간다. 꿈에서 경비원을 따라 계속 내려가 암흑 속에 갇힌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오미는 계속 올라간다. 일련의 상승 이미지. 언덕길을 오르고, 계단을 오른다. 그렇게 나오미는 (햇빛을 받으며) 프레임 바깥으로 나간다.


5.
이제 〈공원〉 바깥으로 나갈 차례다. 〈공원〉은 “시나리오 형식으로 쓰여진 텍스트 없이” “촬영을 하면서 이야기의 형태가 구축된”[6] 영화다. 매니블의 흥미는 “모든 것을 통제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어떤 일이 (우연적으로) 발생할 때 놀라는 데 있다.”[7] 한편 매니블은 ‘나오미’와 ‘막심’이라는 두 (비전문) 배우의 본명을 극 중 인물의 이름으로 삼았다.[8] 종합하면, 매니블은 공원 어딘가에 카메라를 고정한 채 나오미와 막심의 연기 아닌 연기를 지켜보는데, 특히 둘의 시선, 제스처 등의 우연성, 즉흥성과 같은 “어떤 순간을 포착하고자 한다.”[9] 〈공원〉이 다가가려고 하는 상태는 바로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에서 일종의 ‘오고 가며’의 상태, 즉 불완전하고 유동적인 플로(flow)의 상태다. (플로의 상태? 이는 영화 말미 공원의 풍경이 사라진 뒤 암흑 속에서 부각되어 들리는 ‘물’의 사운드로부터 떠오른 개념이다.) 그래서 〈공원〉에서 ‘(들어)오고 (나)간다’와 같은 동사적 행위가 반복적으로 형상화되는 것은 중요하다. 가령 인물은 (공원, 꿈 등의) 공간이나 (타인의) 육체 등에 들어오고 나가며, 심지어 젊은 커플의 애정 행각(특히 키스할 때 혀)은 넣고 빼는 것의 연속이다. 사실 플로의 상태는 완전히 붙잡을 수 없음을 전제한다. 얼마간 붙잡더라도 영원히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매니블의 폐쇄 프레이밍은 실패를 전제한다. 인물의 시선, 제스처 등의 ‘움직임’[10]에 집중하기 위해 고정된 카메라가 인물을 프레임 안에 아무리 감금하고 붙잡으려고 하더라도, 자율성이 보장된 인물이 언젠가 자신의 의지로 프레임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하면(그리고 벗어나면), 더 이상 붙잡지 않는다. 카메라를 들고 인물을 따라갈 수도 있겠지만, 매니블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 머문다. 매니블의 규칙. 이와 같은 고집은 나오미의 막심에 대한 태도와 공명한다. 막심으로부터 결별 통보 메시지를 받았지만, 나오미는 막심이 떠난 그 자리에 남는다. 그 자리에서 막심을 기다리고 붙잡고자 한다. 이 시도는 꿈에까지 이어진다. 심지어 꿈의 끝에서 나오미는 막심의 입안에 혀를 넣은 채 빼지 않는다. 극단의 붙잡음. 하지만 꿈에서 깨어난 즉시 나오미는 완전한 관계 맺기의 불가능성을 깨닫는다. 그 후 나오미는 막심을 더 이상 붙잡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재빨리 프레임 바깥으로 나간다. 요컨대, 카메라와 인물의 관계, 나오미와 막심의 관계는 완전한 링크(link)의 순간에 다가가지만, 종국엔 실패한다. 〈공원〉은 이 (두 개의 층위의) 다가감과 실패의 과정을 가시화하는 영화다. 여기서 다가감은 일종의 실험이다. 어떤 실험? 극단의 실험. 즉, 흐름이 막힌 정체의 공간/프레임에 인물을 밀어 넣는 실험. 이 실험의 결과로서 인물의 반응은 곧 공포다. 완전 폐쇄에서 기인한 공포. 결국 나오미와 막심 모두 공원/프레임 바깥으로 나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역설적으로 이런 사태는 불완전하지만 ‘오고 가며’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플로의 가치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것이 매니블이 인용한 키아로스타미의 ‘불완전 영화’ 개념의 또 다른 의미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1] 다미앙 매니블 인터뷰. http://www.filmdeculte.com/people/entretien/Entretien-avec-Damien-Manivel-23825.html 《Kiarostami parlait beaucoup des "films incomplets", qui continuent à évoluer chez le spectateur après la projection. C'est une idée que je trouve passionnante.》

[2] 제18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될 때 제목은 〈공원의 연인〉이다. 하지만 본문에선 원제를 따른다.

[3] 김곡, 『투명기계』, 갈무리, 2018, 44쪽. 김곡이 안토니오니에게 썼던 용어를 빌린다.

[4] 김곡, 『영화란 무엇인가에 관한 15가지 질문』, 갈무리, 2019, 239쪽. 참고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영화에서 프레임이 위장의 형식임은 의미심장하다. 일반적으로 위장은 닫힌 공간에서만 일어난다.” (...) “닫힌 공간은 위장의 조건이다. 게다가 영화는 이 한정된 공간을 무한히 연장할 수 있다.”

[5] 4와 동일, 237쪽. “위장은 배역을 맡는 행위다. 배역은 주체를 빙의시킨다(haunt).”

[6] 2와 동일. 《Je n'ai pas de texte écrit à la façon d'un scénario.》 (...) 《Le récit trouve sa forme au tournage.》

[7] 다미앙 매니블 인터뷰. https://www.critikat.com/panorama/festival/festival-de-cannes-2016/entretien-damien-manivel/ 《Ce qui m’intéresse, c’est de ne pas tout contrôler, pour être surpris par ce qui arrive.

[8] 다미앙 매니블 인터뷰. https://www.fichesducinema.com/2017/01/rencontre-damien-manivel/ 《Donc, j’attends de trouver la personne qui jouera dans le film et je donne son prénom au personnage.》

[9] 8과 동일. 《Mon ambition est de capter un moment.》

[10] '움직임'으로부터 기인한 생각. 〈공원〉뿐만 아니라 매니블의 다른 장편 영화 역시 여정 혹은 탐색의 모티브를 기반으로 ‘이동’의 이미지가 주를 이룬다. 장편 데뷔작 〈젊은 시인〉(2014)과 이가라시 고헤이와의 공동연출작 〈타카라, 내가 수영을 한 밤〉(2017)은 말할 것도 없고, 〈이사도라의 아이들〉(2019)에선 이사도라 던컨의 유령이 이사도라의 작품을 자신만의 무용의 몸짓으로 표현하는 네 여인을 가로지르며 이동한다.




노매드랜드에서 노-매드-랜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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