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들이 심어놓은 씨앗에 바로 싹이 트고 열매가 맺을 리는 만무하다. 부산시립미술관도 이미 예견하고 있지 않던가? 시장은 아직 모색 단계라고, “영리”는 이번에는 아직 제대로 추구하지조차 않았다고. 언뜻 조심스럽고 소박한 관점으로 시장에 접근하는 듯 보이지만, 지극히 이율배반적인 이 발언에서 신자유주의가 기존의 “사회적 관계와 제도 변형을 목적으로 하는 통치 방식”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피에르 다르도, 크리스티앙 라발, 『새로운 세계합리성』, 오트르망(심세광·전혜리) 옮김, 그린비, 2022, 7쪽. 무엇을 위하여? 자본의 팽창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지 못하면 기다리는 중에 언제고 뿌리 뽑히거나, 이식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가 수익과 성과를 굳이 거부하겠는가? ‘이번엔’ 혹은 ‘아직은’이란 말은 “‘구태의연한’ 자본주의의 준거들을 해방”하고 갱신하여, 향후 강화될 ‘신자유주의 합리성’을 근간으로 삼아 도약하고 팽창하기 위한 과정과 단계로 얼마간 필요에 따라 취하게 되는 것에 가깝다.
‘신자유주의 합리성’에는 “불안정과 불평등이 의도”된다. 특히 “혁신과 경쟁의 우월성을 기능”으로 삼아서 ‘낡은 것’과 ‘무용한 것’, ‘적응하지 못한 것’을 제거하는 ‘창조적 파괴’를 필히 자연화시킨다.피에르 다르도, 크리스티앙 라발, 『새로운 세계합리성』, 오트르망(심세광·전혜리) 옮김, 그린비, 2022, 27쪽. 아울러, 부산시립미술관의 사례는 아니지만 부산의 부산현대미술관의 경우에는 《부산현대미술관 정체성과 디자인》(2023.04.29.~07.09.) 전시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난 증상이다. “사실 부산현대미술관 정체성과 디자인 재정비라는 이 용역은 내부적으로 은밀하게 진행한 후 간단히 그 결과만 통보하는 방식으로 진행해도 될 일이다”라고 운을 떼며 기획된 해당 전시는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 “미술관의 실패를 인정”하고, “공공성”을 확보한 디자인 입찰 과정을 전시의 형식으로 선보였다. 이러한 기획은 어떠한 맥락이 전제되었든 그 자체로 모순을 내재한다. 관람객들은 투명하게 공개된 것 같은 기관의 행정업무에 민주적으로 참여함으로 시민의식을 갖게 되거나, 미술관 내부의 직무 유기를 떠안게 되는 피로감, 이전의 미술관으로부터 누적시켜왔던 미흡한 행정의 미학을 관람객으로서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 하는 현장에 놓이게 된다. 예정 전시 홍보 게시물로 소셜네트워크에 업로드된 게시물의 경우를 참고하라: https://www.instagram.com/p/CrKl6N5hm2Z/?utm_source=ig_web_copy_link&igsh=MzRlODBiNWFlZA== (최종 접속일자: 2025년 07월 01일). 부산시립미술관은 이와 같은 홍보 게시물을 통해 자기 자신을 ‘공개처형’과도 같은 맥락에서 시각화하고, 이를 문화자본이자 상징자본이 새로이 유동할 수 있는 활로로 삼아 제 몸을 새로이 디자인해낸다. (또한 이러한 전시가 전임 관장의 임기 종료 시점과 신임 관장의 취임 시기로부터 그리 오래지 않은 때에 개최되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비전으로의 미술관의 운영=통치 이념을 맥락화하는 장치로도 (의도와는 무관하게) 작동한다.) 관람객에 고스란히 전달되는 예상 가능한 (앞서 말한) 분열되고 상반될 수밖에 없는 정동 유발의 뮤지올로지 내파와 그 진동에서, 정치적인 것을 심미적인 것으로 둔갑시키며 다중적인 쟁점을 출연시키지만, 그것이 다자간의 투쟁으로 가시화되지 않게 은폐시킨다. 달리 말해 미술관의 큐레토리얼 실천은 “경제적인 경쟁”과 “정신적 차원의 도덕”, 그리고 “개인주의적 취향의 문제”로 봉합하여 가시화되지 못하도록 통제한다. 이와 같은 위기 관리와 재도약이 신자유주의적인 것이며, 그 결과로 부산시립미술관의 낡은 문화적 지식-상징적 자본은 비로소 다시금 (부활적으로) 도약한다. 이 과정에서 없어져 마땅한 것의 기준은 시장으로의 도약에 보탬이 되느냐 아니냐일 뿐이다. 예컨대, 여태껏—개관 이래 단 한 번도 빠짐없이, 도시 부산의 지역미술을 연구해온 부산시립미술관의 자체적인 실천들조차도 그들에게 이젠 짐이 된다면, 가뿐히 내던질 수 있다. 부산시립미술관은 관장의 입으로 하여금 “지역성이라는 게 내용적으로, 어떤 차별화된 미학적 내용이 있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만, 저의 결론은 ‘없습니다’, 입니다.”라고 발화하게 한다.부산시립미술관, 《젊은 시각 새로운 시선 2025》(2025.04.10.~07.06., 성곡미술관(서울)), 〈참여작가 아티스트 토크〉(2025년 05월 24일)의 일부 내용 수정 발췌, 기록영상의 링크주소는 다음과 같다: https://youtu.be/jTCKAk_-UYk?si=dRLbIHK9NBH56hfO (최종 접속일자: 2025년 07월 04일) ‘없다’는 말에 충분히 공감하고, 그럴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내가 지금 상술하고 있는 맥락에 한해서는 분열의 한 증상에 가깝다. 부산시립미술관은 새로운 ‘지역의 세계성’을 위해서 문화적 맥락과 미시 수준의 미학적, 일상적 삶을 편의에 입각해서 초국적 자본의 시장 세계와 아무런 장치도 없이 매끈하게 동질화시킬 준비가 되어있는 셈이다. 이것은 “그 어떤 합리성과도 무관한 순수 ‘광기’가 아니다. 제도와 사회관계 그리고 통치방식의 총체적 변형에 참여하는 국가들 자신의 지속적이고 편재적이며 다형적인 행위의 결과”인 것이다.피에르 다르도, 크리스티앙 라발, 『새로운 세계합리성』, 오트르망(심세광, 전혜리) 옮김, 그린비, 2022, 29쪽.
루프랩부산을 통해서 (재)생산하게 될 부산의 이미지, 다시 말해 부산이 세계적인 “디지털, 미디어 아트”의 도시가 되는 방식은 120명의 국내외 작가들이라는 국제적인 규모로 된 “디지털, 미디어 아트”를 뒤집어씌우는 것, 이것들을 부산에 ‘때려넣음’으로 얼마든 가능해진다. 스스로 위기를 초래하고 활용한다는 신자유주의의 특징에서 위기가 지닌 힘은 무궁무진하다. “디지털, 미디어 아트 도시로의 부산”이 갖는 향후의 “발전성”을 위해서라도 일단 한 번 뒤집어써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시-페스티벌에 작품들을 이렇게, 문자 그대로 ‘때려 넣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느끼기에, 부산시립미술관은 전시가 지역 안에서, 그리고 전시장 내부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를 고민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바깥으로 잘 보여질 수 있을지만을 염두에 둔 것 같다. 시장 개척과 진입을 위해서 말이다. 루프랩부산에 큐레이터십은 없다. 오직 전시주의자들의 연출만이 있다. 자긍심의 언어만이 가득한 보도자료는 제아무리 살펴보아도, 언제 어디에서 어떤 전시에서 어떤 작품을 관람할 수 있는지는 베일에 가려져있다. 작정하고 관객을 받지 않게 하려는 전략이 기획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닌지, 시험에 빠지게 하는 것을 기본 정서이자 태도로 삼고 있다. 페어는 “전 세계의” “국제적인” 갤러리 관계자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영어로 안내가 되어있으면 그만인 것이 된다. 한국어는 옵션 정도에 해당한다. 어느 갤러리가 참여했는지, 이것의 실체가 있기는 한지는 당일에 직접 호텔에 가봐야지만 알 수 있다. 전시는 사태가 더욱 심각하다. 많은 사례를 읊을 수 있겠지만 지면의 한계상 생략한다.
도모헌 소소풍 라운지에선 다음 작가들의 작품을 관람할 수 있다: 투안 마미(베트남), 에녹 첸(홍콩), 이본느 카니(인도네시아), 푸와민 인디(태국), 게리-로스 파스트라나(필리핀), 타오 응우옌 판(베트남), 유스케 사사키(일본), 암리타 헤피(호주), 헤일리 밀러 베이커(호주), 킨 테타 라트(미얀마), 다와자르갈 차시커르(몽골), 코라크릿 아루나논드차이(태국), 라길 드위 푸트라(인도네시아), 장우진(한국), 헤이디르 함단(말레이시아), 리 오캄포(필리핀), 게리 젝시 장(중국), 바트에르덴 바트출룬(몽골). 그리고 이들의 작품은 한 공간에 ‘때려넣어’져 있다. 작품이 2채널인지 등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주어진 모니터가 1대면 그 하나에서 선보여진다. “디지털, 미디어 아트”에 ‘사운드’가 있는지 없는지도 별 대수가 아니다. 설치 방식의 파격은 우리들만의 비밀로 묻어두자. 영화의 전당에서 루프랩부산 기간 동안 진행된 《무빙 온 아시아》에 대해서는 큐레이터들과 작가들의 외국 인명으로 가득한 텍스트만이 유일무이한 정보다. 어떤 큐레이터가 어떤 작가의 작품을, 어떤 이유에서 선정하여, 이들이 어떻게 각기 다른 시리즈별로 묶였는지는 수소문해도 아는 이가 없다…. 이 모든 것이 오직 ‘루핑’되기만 한다. 어떤 현장을 가든 큐레토리얼 실천으로의 전시는 만나기가 어려운, 배신의 연속과 반복이 이어진다. 전시나 스크리닝 행사에서 구체적인 주제와 기획된 맥락이 있는 경우, 루프랩부산과 무관하게 원래 진행될 예정이었는데, 루프랩부산의 기간 중에 열리는지라 그저 함께 ‘맵핑’되었다는 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