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테리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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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서한

질식자의 편지: 영화문화의 현재에 관한 13개의 질문
질식의 날 - 못다 부친 편지
회신1. 질식자에게
회신2. <비평(권력)에 대하여> 의 질문
회신3. 쉰들러 리스트: 무너진 낙원에서 완전함 찾기

수신인: 씨네21
회신4. 형제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회신5. 답변?
회신6. 창작과 비평의 관계에 대하여.....
등단 = 검증?
회신7. 지리적 계급의 소멸을 함께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회신8. 공개서한에 대한 회신입니다.
ㄴRE: 별로 어렵지 않은 이야기
회신9. 질식자에게

비평? 우리는 웃고 있다




3호 2020년 8월

1. 특집/ 여섯 빛깔 스크린 너머: 한국퀴어영화제 20주년에 부쳐
2. 특집/ CRY, FUCK, BEAT UP(울고 하고 패고)
3. 특집/ “퀴어영화 연구는 정말로 노다지”: 『한국퀴어영화사』 책임편집 이동윤 인터뷰
4. 특집/ 한국 게이/레즈비언 영화와 호모-특정적 난관들
5. 특집/ 샷다 내린 퀴어랜드: ‘디스코팡팡’과 ‘방 탈출 게임’ 사이에서
6. 특집/ 뱀파이어의 딜레마: 누구를 위한 ‘착즙'인가?
7. 정전에 속하기, 정전 밖에 있기: 사프디 형제의 방법
8. 검고도 밝은: 조주현의 ‘흑공’과 스크린 안의 미로
9. 아이돌 기표의 '트랜스' 해부하기: NCT 127의 〈슈퍼휴먼〉과 아이돌 피상성
10. '접촉'에서 '접속'으로: NCT 127의 경우
11. 아직도 굳이 〈무한도전〉을 논할 필요가 있는 건
12. 듣는 여자: 〈그리고 베를린에서〉
13. 박세영의 무한 도시
14. 추상化와 픽션: 이소정의 영상 작업에 대해
15. 이미 흩어진 '밀레니얼 시네필’
16. 비천함, 실패, 나쁜 것에 관한 정직한 성찰(우회하지 마세요)

A BACK NUMBER

2호 2020년 3월  

1.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잠깐!)” 2019 한국 코미디 영화의 ‘비빔면적 경향’과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윤리’: 영화 ⟨극한직업⟩, ⟨걸캅스⟩, ⟨엑시트⟩를 중심으로
2. 봉준호 월드 유람
3. 창문과 창문 ‘너머’—오연진의 《Lace》와 백종관의 ⟨추방자들⟩
4. 갱신과 추동 사이에서 기업가∽노동자∽DIY로서의 작가
5. 구체적 세부: 2019년을 함께한 독립극영화 속 여자들
6. 특집/ 액체의 단상들: 리퀴드(liquid)와 플루이드(fluid), 그 언저리에서
7. 특집/ 15초 곱하기 240의 실험: 이소윤의 ⟨450⟩
8. 특집/ 보여주는 대신 믿게 하기: 박시우의 ⟨변신⟩
9. 특집/ ‘플레이스’와 ‘플레이’로 규명되는 영화 ⟨소녀의 기도⟩
10. 특집/ 연결하고, 순환을 주장하기: 독립영화협의회 낭희섭 대표 인터뷰
11. 영화제가 활짝 피었습니다—대안적 영화제를 상상하기 위한 생산적 망각
12. 디스코팡팡적 시네마: ⟨알라딘2019⟩ 4DX
13. 걷잡을 수 없는/겉잡을 수 있는: 2019년의 영상 작업을 통해서
14. 테니스와 바둑의 신체를 상상하며: 되받아치기와 이중구속의 비평


BACK NUMBER

1호 2019년 9월

1. 환영에 대한 두 가지 입장: ⟨라이온 킹⟩과 ⟨야광⟩
2. 유령의 기술: 차이밍량의 ⟨더 데저티드⟩
3. 괴물, 일레븐, 무전(하)기
4. 장재현의 보이 스카웃은 무엇을 단련하는가?
5. 비체(abject) 생산라인의 작동방식을 드러내는 무빙이미지들: Maotik의 ⟨FLOW⟩와 이은희의 ⟨Contrast of Yours⟩
6. 무한 가정해보기: 류한솔 작가의 ⟨크리크리 메리크리 스마스⟩를 중심으로
7. 픽션의 증언
8. 다음 세기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의 ⟨힘의 한 세기⟩
9. 특집/ 영화평론가 김소영 인터뷰
10. 특집/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한국 영화비평계의 86세대에 대해 반추하며
11. 특집/ 한국영화비평계의 00년대부터 지금까지


0호 2019년 5월

1. 철의 꿈, 믿음의 끝: 박경근의 ⟨철의 꿈⟩
2. 펼치고 다시 조립하기: 백종관 감독론
3. ⟨로맨틱 머신⟩에 대한 짧은 소고: 카메라-눈의 체험을 체험하기
4. 경험되지 않는 영화에 대하여



비평의 비평 2019년 11월

듀나와 이동진과 기타등등‘씨네21식 비평’ 비판오큘로에 대해서반면교사정면교사?



선언문




비천함, 실패, 나쁜 것에 관한 정직한 성찰(우회하지 마세요)

t毬x(malware)



"문화란 말만 들어도, 권총에 손이 간다."
헤르만 괴링



문화비평
지금 우리 사회에서 문화란 말을 꺼내자마자 총성이 울릴 것이다. 물론 총알을 맞고 쓰러지는 시체가 꿈꾸는 문화가, 방아쇠를 당기는 문화의 파수병이 떠올리는 문화와 다르다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다. 성인이 된 이래, 예술을 사회적 텍스트로 분석하는 문화비평은 내가 경멸해 마지않았던 장르였다. 사회적 실재와 예술작품의 1대1 대응을 그리는 얼치기 문화비평. 나는 세대론을 통해 호명된 80년대생 진보 논객들이 쓴 글을 보며 성장했지만, 그들이 쓴 문화평론이 형편없을 뿐만 아니라 철저히 무가치하다는 점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다크 나이트〉와 신자유주의적 주체? 냉소주의?
하하, 실소를 감출 수 없다.


나 역시 예술작품이 사회적 실재에 의해 규정되며, 때로는 사회적 실재에 종속된다는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순박한 실재론자들이 간과하는 점은 사회적 실재가 전치나 압축 같은 과정을 거쳐 예술작품으로 변화한다는 점이다. 사회적 실재는 예술가에 의해 원래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파손된다. 설사 이데올로기가 사회적 실재를 예술작품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관장하더라도, 예술작품엔 사회적 실재를 초과하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숨은 그림 찾기’ 평론이 작품의 비밀을 해명하는 데 그토록 무력한 것이다. 다크 나이트를 신자유주의의 시대정신으로 해석하는 음모론적 비평은, K-POP 뮤직비디오에서 프리메이슨의 상징과 알레고리를 찾는 ‘숨은 그림 찾기’ 평론과 다르지 않다. 음모론적 비평은 세부의 총합으로서 전체를 전제하며, 개별 세부를 한 데 긁어모아 총체적인 의미를 산출하길 즐긴다. 그러나 예술에서 ‘전체’가 ‘부분’과 맺는 관계는 음모론적 비평이 전제하는 것처럼 결코 일의적이지 않다.[1] 관객이 이미지에 의미를 손쉽게 포개면, 전체와 부분의 관계는 끊임없이 미끄러지기 때문이다.

“얼굴이 피로 범벅된 한 남자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장면은 노동계급이 부르주아에 저항하는 의미를 지닌다.”
“얼굴이 피로 범벅된 한 남자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장면은 끓어오르는 죽음충동에 관한 이야기다.”

이 장면에 대한 해석은 (...) 무수히 이어진다. 우리는 텍스트의 개방성과 무한한 해석에 대해 웅얼거릴 것이지만, 우리가 떠들어대는 무한한 해석이 음모론적 총체성이라는 그림자 구멍에 기초해 있다면, 이는 작품 자체를 인식론적으로 살해하는 것과 다름없을 터다.
           이처럼 A요소에서 B의미를 해석하는 주장은, A요소가 C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반박에, 작품 전체의 의미를 재규정해야 하는 딜레마에 처한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총체성은 강력하지만 동시에 위와 같은 이유로 연약할 수밖에 없다.[2] 한 요소가 자리바꿈하면, 모든 요소들은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난다. 총체성이 작동하는 그 순간에, 우리는 수건돌리기(혹은 도둑맞은 편지)를 끊임없이 수행하는 것이다. 문화비평의 토대로 작동하는 그림자 구멍은 사회적 실재가 예술로 출입하는 통로처럼 여겨지는데, 이는 작품이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촘촘한 의미망을 휘감는다.
           단언하자. 사회적 실재는 작품에 뚫려 있는 그림자 구멍으로 쏟아 내리지 않는다. 예술작품 속으로 진입한 사회적 실재는 자기-생성적으로 변화한다. 앞서 말한 대로 사회적 실재는 예술작품의 기초 토대이지만, 이는 예술작품의 신비를 설명할 수 없다. 문화비평에 나서는 이들이 포착해야 할 시퀀스는 사회적 실재가 예술작품으로 전환하는 자기-생성적 과정이다. 내가 큐브릭의 〈배리 린든〉에서 감흥을 느낀다면, 이는 영화가 근대 영국의 역사적 배경을 꼼꼼히 묘사했기 때문이 아니라, 린든이 펼치는 협잡과 이 영화에선 유독 더 느리고 장중히 움직이는 큐브릭의 카메라, 우연을 운명으로 해석하게끔 만드는 내러티브의 중력이 맞물려 모종의 비밀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관객은 〈배리 린든〉의 내부로 가라앉아 영화를 헤엄친다. 그는 미로처럼 얽혀있는 비밀들을 오가고,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린다. 관객은 얽히고설켜있는 미로 안에서 방황하는데, 미로를 헤매는 이 순간 관객이 느끼는 당혹스러움과 경이로움이야말로 사회적 실재와 닮아있다.

로베르토 볼라뇨가 파스칼에게서 제사로 인용한 대목은 관객이 예술작품을 관람함으로써 자신의 단독성을 체험하는 그 순간을 명징하게 설명한다.

“내 생애의 짧은 기간—단 하루 머물렀던 나그네의 추억—이 그 전후의 영원 속에 흡수되어 있으며, 내가 차지하고 있고 또 내가 보고 있는 이 작은 공간이 내가 알지 못하고 또 나를 알지 못하는 무한하고 무량한 공간 속에 깊이 잠겨 있음을 생각할 때, 나는 내가 저기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다는 것에 두려움과 놀라움을 느낀다. 내가 저기가 아닌 여기에, 그리고 다른 시간이 아닌 지금에 있을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여기에 놓았는가? 누구의 명령과 뜻에 따라 이 장소와 이 시간이 나에게 주어졌는가?"

바로 ‘나’가 이 세계에 느끼는 당혹스러움, 즉 나의 단독성에 소름끼치며 놀라워하는 이 경험은 관객이 영화에서 느끼는 경외심과 닮아 있다. 무르나우의 〈일출〉에서 화해에 겨우 성공한 부부가 탄 조각배는 태풍을 만나 강 한 가운데서 흔들리며 그들의 화해를 무색하게끔 한다. 이 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에 포개지지 않는 독특한 감정을 전해준다. 관객이 느끼는 감흥은 사회에서 외면 받아 인생이 완전히 실패했다고 느끼거나, 사랑하던 이를 우연히 재회해 설렘을 다시 느끼는 것과 같은 일상적 감정에서부터, 그저 해가 질뿐인데 왠지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숭고한 기분까지, ‘나’의 뱃속을 엉망으로 헤집는 복잡다단한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가 작품에서 발견하는 것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이 아니라, 이런 기분과 감흥이다. 이 같은 감흥은 내가 세계와 맺는 관계, 세계에 마주하여 느끼는 감정과 상통한다. 예술작품 내에서 내가 방황하는 형국을 그려내는 것은 결국 세계와 내가 맺는 관계를 포착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므로 비평가는 예술작품의 운명, 파스칼이 말한 “내 생애의 짧은 기간”의 필연성을 해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비평은 관객이 겪는 방황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비평은 비밀들이 뒤엉킨 미로를 지시하는 한편 관객의 방황을 비평 텍스트 내에서 구현해야 하는 이중적인 의무(혹은 재귀적인)를 갖고 있다.


마크 피셔를 위해
1. (나를 포함해서) 수많은 독학자들이 문화 이론가 마크 피셔에게 존중을 바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나’라는 단독자가 느끼는 존재론적 당혹감을 사회적 실재와 연결할 수 있는 비평가다. 마크 피셔에게 혼톨로지란 그저 대중음악에 관한 사기꾼적인 개념이나 학술적 농담에 불과하지 않다. 혼톨로지는 바로 사회적 실재가 자기-생성적 과정을 거쳐 예술작품으로 전환하는 시퀀스를 포착하는 개념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신자유주의 사회 내에서 내가 느끼는 기분(억울함, 분노, 우울, 욕구불만), 시간의 빗장이 뒤틀려 주체의 위치를 정박할 수 없는 탓에 마주하게 되는 기이한 감정을 개념화할 수 있는 것이다. 마크 피셔는 이처럼 대중문화의 작품들에서 맥락과 역사라는 진부한 외피를 벗겨내고, 그것이 ‘나’라는 존재를 완전히 뒤흔드는 특정 시퀀스를 포착한다. 그때 우리는 마크 피셔가 제안한 개념적 어휘를 인용하는 대신에, 그가 관객과 작품이 만나는 그 순간을 하나의 개념으로 제시하는 추상적 방법론을 빌려와야 한다.

2. 마크 피셔가 개진한 여러 비평적 논점 중에서 펄프 모더니즘은 문화 비평을 형식적으로 다시 한 번 갱신하고자 하는 시도다. 피셔는 맨체스터 출신 포스트 펑크 밴드 ‘더 폴The Fall’에게서 T.S 엘리엇이나 사무엘 베케트 같은 모더니스트의 흔적을 발견한다. ‘더 폴’은 그저 아방가르드적인 요소를 젠체하는 식으로 인용하는 밴드들과는 다른 관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피셔는 ‘더 폴’이 노동계급의 언어로, 모더니즘을 실천한다고 말한다. ‘더 폴’은 모더니즘을 납치한다. 이때 노동계급의 언어는 형식과 내용이라는 이분법에 갇혀 있지 않다. 그 언어란 모더니즘 자체의 형식적 뼈대를 구성하는 질료로, 질료와 형상은 마주치는 즉시 불화해 갈등 속으로 휘말리거나 혹은 긴 싸움 끝에 임시적인 화해를 이룰 뿐이다. 펄프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형식적 요소를 노동계급의 관습과 기억으로부터 끌어내는데, 펄프 모더니즘이라는 개념 아래, 문화를 향유하는 대중의 선호가 만든 임의적 규칙과 그들의 어휘가 모더니즘을 우연적으로 출현시키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작가성의 목을 매달 수밖에 없다. 피셔가 꾸는 꿈속에서 예술가의 ‘자의식’을 통해 제작되는 예술작품은 무자비한 흰개미 떼에 의해 갉아 먹히고 있다. 펄프 모더니즘은 개인적인 작가 상을 부식시키면서, 문화의 무의식에 작품을 생산할 수 있는 강력한 권능을 부여한다.


아마추어라서요? 무교회주의자라서요?
모두 알다시피(모르십니까?) 마크 피셔처럼 사회적 실재의 힘을 규명한 문화비평조차도 영화나 미술, 음악 같은 분과평론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문화연구는 분과평론에겐 멸칭이고, 문화비평은 어중이떠중이나 하는 망상이다. 이는 단지 학부 간의 경계나 분과 경계가 침해당한다는 주장으로 이해될 순 없다. 분과평론이 근거하는 정전 체계는 아마추어리즘이 들어올 틈을 주지 않는다. 아마추어리즘의 징표로 받아들여지는 우수한 서투름은 어느새 잊히고 만다. 아마추어리즘에 반대하는 분과평론, 특히 대중문화의 분과평론은 ‘좋은 것’만을 비평의 상석에 놓기 마련이다. 예컨대 마니 파버가 ‘칠판 평론가’라고 힐난해 마지 않았던 수잔 손택과 앤드류 새리스. 그들은 지금의 영화평론을 성립시킨 거대한 이름이지만, 파버에겐 영화평론이 저지른 죄악을 상징하는 인물로 받아들여진다. 파버의 말처럼 분과평론은 어떤 영화가 좋고 훌륭하다는 별점 매기기-평가에 기초하는데, 이는 영화를 점차 정전-팡테옹 안으로 귀속시키고, 영화 사이의 위계를 가르는 시네필 문화를 형성해 영화의 삶을 황폐하게 한다.

마니 파버는 새리스와 손택에 대해 아래와 같은 비난을 가한다.

“대부분의 관객에게 알려지지 않은 가장 슬픈 이야기는 수잔 손택과 앤드류 새리스, 즉 딱딱하고 부드러운 이상한 듀오, 시몬 드 보부아르와 흐물흐물 거리면서 지나치게 감상적인 세일즈가 이끄는, 잔인한 점수 매기기 비평가들의 출현에 관한 것이다. 이 특별한 상품에는 어떤 인식도 재치 있는 농담이나 쪼그라든 은유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인 후츠파가 포함되어 있다. (...) 손택은 본인이 쓴 글 중 제일 식견이 있는 분석인 고다르의 〈비브르 사 비〉에 대한 평문에서 이 영화의 연기, 풍경 또는 영화 이미지의 어떤 다른 측면에 대한 언급하지 않은 채, 그저 "아름답고 완벽한" 작품이라고 쓸 뿐이다.”

마니 파버가 수잔 손택과 앤드류 새리스를 힐난하는 원인이 된, 점수 매기기와 단정적 수사법은 영화에 위계를 설정한다. 아름답고 좋은 영화? 칠판 평론가가 영화에 내리는 형용사는 비평을 집어삼킨다. 영화평론이라는 분과평론은 ‘잔인한 점수 매기기’라는 평가를 통해서 문화의 비천함을, 문화의 밑바닥에 가라앉는 나쁜 것을 포기하게 만든다. 분과평론이 포기한 대중문화의 비천함은 예술작품의 무의식, 작품이 꾸는 음란한 꿈을 만드는 데 활용되고 했다(이에 관한 사례는 차고 넘친다. 케네스 앵거, 존 워터스, 누벨바그, 리오넬 수오카즈...). 이 음란한 꿈들은 펄프 모더니즘의 근간이자, 흰개미 예술의 근거조항이 된다. ‘좋은 것’ 아래 가라앉아 있는 ‘나쁜 것’, 미적으로 가망 없는 이 비천한 꿈들은 그 자체로 예술을 움직이는 동인이 된다. 이들은 질료에 머물지 않는다. 비천한 것은 예술이 생산되는 방향 자체를 이끄는 힘이다. 꿈을 잃은 예술. 꿈을 거부한 예술. 비천함을 포기한 예술은 운이 좋으면 의미를 성공적으로 제거한 완고한 형식주의로 흐르지만, 운이 나쁜 대다수는 중산층-부르주아의 지적 만족을 위해 봉사하는 지루한 미들 브로우로 흐른다.
           한국의 문화는 비천함을 사유할 수 있는 역량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이제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르는 평가의 기준이 도덕으로 대체됐기 때문이다. 동시대의 평론가는 도덕적으로 ‘좋은 것’의 위치에서 ‘나쁜 것’을 굽어보며 ‘나쁜 것’을 철저히 거부하도록 장려한다. 나는 시대를 역행해 비천함을 꿈의 질료로 활용하는 문화비평을 복권시키자고 권유하고 싶다. 상속권을 박탈당한 자의 입장에서 문화를 새로 서술하자. 사회적 실재, 세계, 시간성, 자본주의, 한국힙합, 실시간 스트리밍, 밈과 농담, 우리 문화 내부의 비천함을 사고하자. 그렇지만 비천함을 사유하는 방법론은, 비천함의 근원을 탐구하는 시선은 언제나 형식에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다시 말하자면, 문화적 비천함은 문화가 겪은 실패다. 분과평론으로 성립되기 이전의 초기 영화비평은 문화적 실패를 영화라는 상징형식 안에서 찾아내곤 했다. 로버트 워쇼의 「비극적 영웅으로서의 갱스터」는 현대적 삶의 비참함과 영광을 감내하는 영웅주의에 대해 말한다. 끊임없이 낙관을 강요하는 문화, 비극적 영웅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수단으로서 범죄, 영화라는 비천하고도 야만스러운 장식 예술. 비평은 문화가 자신의 약속을 지키는 데 완전히 실패할 때 발생하는 비천함을 자신의 품 안으로 받아들인다.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질문한다.

당신이 말하는 실패는 무엇인가요?


수천수만의 실패 목록
이를테면 “비평은 위기를 겪은 적도 없고, 흥한 적조차도 없다.”는 진술에 대해 생각해보자. 나는 이 진술이 드러내는 비평적 입장의 정 반대편에 서고 싶다. 누군가 부정한다한들 비평은 항상 위기를 겪는다. 비평은 자신이 다루는 대상이 위기 상황에 놓여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만 존속할 수 있는 장르다. 작품이 당면한 위기 국면을 과대평가하는 비평적 수사로, 당대의 문화를 공격/방어하는 것은 비평가만이 누릴 수 있는 사악함이다. 이는 작품에 대한 호오, 즉 평가와는 무관히 이뤄지는데,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성공한 작품일지라도 모종의 실패를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실패는 위상학적으로, 전체와 부분, 장과 장소에 관한 개념으로 변모한다. 위대한 작품일지라도 그것이 감내하고 있는 작품 내의 모순, 분열은 다양한 형태의 실패를 창출한다.

사례는 아래와 같다.
1) 작가의 의도가 작품을 온전히 장악하지 못하는 경우
2) 작품이 해석자의 해석을 초과할 때
3) 맥락이 작품을 대신할 때
(이하 생략…)

실패는 시스템 내부의 기능적 오류일 수도 있고, 의도한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미완으로 끝난 하나의 사건일 수도 있다. 비평가는 실패의 형식을 탐구한다. 그러므로 비평에 대한 메타적 진술은, 어쩔 수 없게도 비평이 예술에 내재된 실패를 적절히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위기 의식을 반영한다. 영화의 죽음, 문학의 죽음, 작가의 죽음, 자아의 죽음, 새로움의 죽음, 비평의 죽음… 무엇은 죽어야 한다. 비평가는 자신이 다루는 분과가 ‘~에 성공할 수 있었다면’이라는 가정(혹은 당위)에서 출발해 그것이 놓친 가능성과 미래에 대해 논한다. 비평가의 눈에 예술분과가 나아가야 할 미래와 그것이 잠재하고 있는 가능성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죽음들이다. 뤼미에르가 영화는 미래가 없는 예술이라고 말할 때, 뤼미에르의 눈에 영화는 영화 이전에 존재한 각종 예술형식의 죽음과 실패를 빨아들이고 있는 뱀파이어 성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를테면 “비평가는 기생충”이라는 진술에 대해 생각해보자. 대중 매체에서 비평가는 예술가의 성공을 질시하거나, 작품의 해석을 협소하게 만드는 원흉으로, 작품에 대해 논평을 독점하면서, 작품을 살해하는 기생충으로 인식된다. 그는 작품과 작가에 기생한다. 비평을 공부하는 이는 비평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에 반색하며 비평가도 생산자라고 항변 할지 모르지만, 그조차도 비평가의 생산 활동이 작품 내에 존재하는 실패와 작품이 맞닥트린 외부의 실패를 악랄히 착취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비평가는 실패의 시제를 조정하면서 작품의 가능성을 착취한다.

기본시제
1)과거 : 작품은 실패했다(작품에 대한 평가)
2)미래 : -이런 국면이라면- 작품은 실패할 것이다(위기)
변형시제
(이하 생략...)

그는 수많은 작품 내에 존재하는 실패, 죽음, 위기를 생산력의 근원으로 삼는다. 비평가는 예술작품에 혁명적 총파업이라는 신화를 기능적으로 삽입하는 생디칼리스트다. 그는 형식을 분석함으로써 작품을 조각내고, 통합된 작품을 분열로 이끈다. 자크 리베트는 〈혁명에 대한 노트〉라는 글에서 (니콜라스 레이로 대표되는) 젊은 영화감독들이 만든 영화에 출현하는 폭력을 하나의 덕목으로서 취급한다. 리베트는 젊음이라는 세대론적 특권 아래에 놓인 영화감독들이 폭력을 활용하는 방법에서 이전의 세대와 다른 무엇을 발견한다. 리베트에게 폭력은 진실로 향하는 방법을 일컫는다. 폭력은 영화형식의 관습을 폭파시키고, 영화산업의 독재를 종식시키는 수단이다. 리베트의 은밀한 조언을 따라 비평가라는 혁명적 생디칼리스트는 전진하려는 예술작품의 활동을 중지시킨다. 그렇게 돌연히 정지한 예술작품은 비평가로 인해 (다소 잔인하고 야만스러운 형태로) 분열되는데, 이는 우리 영혼을 예술의 내핵으로 데려간다. 여기서 성찰이란 작품의 도덕적 수준을 평가하는 방법 따위가 아니다. 성찰은 작품에 폭력을 가하는 비평가의 머릿속에서 작동되는 분쇄기계로, 작품이 성찰 내로 진입하면 산산조각 나고 만다. 성찰의 연료는 시간이다. 시간이 흐르면, 영화에 대한 인상은 희미해지고, 시간이 저지르는 폭력은 작품을 그대로 놔두지 않는다. 성찰은 버로스의 컷업이다. 시간은 비평가가 오독을 감행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한다. 비평가에게 성찰은 시간이며, 시간이란 폭력이다.

게다가 그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뻔뻔한 파렴치한이다. 예술가는 논쟁할 수 없지만 비평가는 논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에 대한 논평은 사후적으로 개입되므로 비평가는 마지막에 대답한다. 파렴치한 비평가는 작품이 겪는 실패를 문화의 실패로까지 확장하면서 교묘히도 자신의 발언권을 내세운다. 그는 변증법을 잊고 이분법을 선택한다. “끔찍한 작품=끔찍한 문화”

역설적으로 실패는 권리이자 관점이 된다. 비평가는 실패에 사로잡힌 예술가들을 보면 반색을 표한다. 부코스키, 셀린, 발저, 헨리 밀러, 베른하르트, 오한기 (…) 그들이 겪는 실패는 세속적이자 미학적이고, 존재론적이자 인식론적이다. 그들은 자신의 실패로만 작품을 쓸 수 있다. 그들은 실패를 통해서만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

“역설적인 얘기지만, 실패자의 시선은 동시에 여행자의 시선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철학자의 시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실패한 사람, 그중에서도 어떤 종류의 실패한 사람은 그런 시선을 통해서 모든 걸 볼 수 있습니다.”

《후장사실주의 vol.1.》에서 오한기가 백민석에게 헛것을 보냐고 질문하는 대목을 읽고 나는 오한기를 사기꾼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홍학이 된 사나이』를 읽으며 오한기는 진실로 헛것, 귀신, 환영을 보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덜 된 인간, 더 된 인간, 덜 된 홍학, 더 된 홍학, 홍학이 된 인간, 인간이 된 홍학, 사물의 영혼, 영혼 내에서 죽은 시간들, 모순 전체를 바라본다. 오한기의 눈은 발저가 가장 미소한 차원까지 줄어드는 속도를 향유한다.

이를테면 “위기는 기회다”라는 진술에 대해 생각해보자. 현실 정치 운동이 완전히 실패할 때 무조건적 가속주의자는 흥분을 느낀다. 부정성을 멸균한 정치 운동이 자본주의의 속도에 완전히 압도당해 존재 당위와 생명력을 잃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 정치 운동의 실패는 주체에게 속도에 적합한 방식으로 소멸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준다. 그것이 가져다주는 주체의 소멸은 가속으로 인한 것이므로, 시간 안으로 휩쓸려갈 기회만을 노리는 무조건적 가속주의자에게 무엇보다 흥분되는 일이다. 좌파운동이 무너지는 틈 속에서, 자본주의가 주체를 소멸시키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비평가는 정말이지 모든 것을 포기해도 좋다. 그곳에서 그저 사라지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관객인 비평가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다.

그러므로 “장선우는 민중영화”라는 진술에 대해 생각해보자. 바디우가 프롤레타리아를 사건의 특정 국면에서 출현하는 규제적 이념으로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장선우는 민중이 단일한 사회적 실체가 아니라 한국이 처한 정치적 상황에 의해 조립되는 개념이라는 점을 명료히 알고 있었다. 즉 정치의 특정 국면에서 규제적 이념으로서 민중이 나타난다. 장선우에게 민중은 노동계급과 한국이, 영화라는 매체가 실패함으로써 나타날 수 있다. 민중은 혁명의 주체가 아니다. 그들은 히스테리 환자, SM 중독자, 양아치, 본드 중독자, 비정상성이라는 범주 그 자체다. 그를 서울대 중심의 운동권-민중 영화사에서 분리해야 한다. 비평가는 장선우의 실패에 기초해 한국 영화사를 둘로 쪼갠다.

비평가는 자신이 겪는 존재론적 실패, 당혹감 전체를 비평의 기저로 삼는다. 비평가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다. 그에겐 예술가들이 누리는 명성도, 부도, 명예도 주어지지 않는다. 특별함과 재치도, 재능도 없다. 단지 실패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비평가가 쥐고 있는 유일한 권리헌장이다.



[1] 레비 브라이언트가 애덤 밀러로부터 인용한 이 대목은 음모론적 비평의 정수를 담아낸다.
“유서 깊은 형태의 상아탑 음모론으로서 형이상학의 바로 그 작업은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을 드러내는 과업으로 이해된 지가 오래되었는데, 요컨대 그 과업은 비조직적이고 수동적인 다중의 움직임을 그 다중을 어떤 더 기본적인 공통인 자로 일방적으로 환원함으로써 하나의 일관된 전체로 이끌어서 통합하는 것이다. 이 런 기본적인 공통인자에 할당된 이 그림자 구멍은, 신이나 플라톤적 형상, 칸트적 범주 들이 그 역할을 쉽게 수행할 수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기호학적 체계나 자본주의, 아원자 입자들도 쉽게 수행할 수 있다.순수성에 대한 충동―형이상학적 성향 자체에 깊이 배어든 충동―이 존재하고, 게다가 이 순수성은 모든 현상이 환원론의 세정수로 세례를 받도록 요구함으로써 산출된다.” (출처: http://blog.daum.net/nanomat/1316)
그림자 구멍을 전제하는 비평은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자동차, 농구, 스니커즈, 영화, 미술, 요리... 총체적이고 완전한 형태를 상상하는 일은 예술작품에 그림자 구멍을 뚫고 만다.

[2] 세부에서 전체를 환유하곤 하는 하스미 시게히코의 미장센 비평도 역시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물질적인 제 요소에서 영화적 전체를 유추해내는 하스미 시게히코의 비평은 전체를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지만, 언제라도 그 음모론적 총체성에 의해 손쉽게 무너질 수 있을 것처럼 보인 다는 점에서 위태롭다. 이는 하스미가 말하는 한계체험을 물신화한 후, 이것을 바르트의 에로티시즘으로 오독하는 한국의 영화비평에서 더 크게 드러난다. 그들은 물신주의자지만, 자신들이 장식예술에서 벗어나 윤리적인 선택을 감행한다고 착각한다. 그런가? 우리들은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