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테리알

ma-te-ri-al


신문 신청하기


마테리알(ma-te-ri-al)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로 132-1 | 사업자등록번호 633-94-01282 | ‌통신판매업신고번호 2020-서울서대문-1730 | ‌발행인 다함께 박차차·정경담‌·함연선 | 편집인 다함께 박차차·정경담‌·함연선 | 문의 ‌carolblueagassi@gmail.com | C‌OPYRIGHT © 2019~. 마테리알 ALL RIGHTS RESERVED.

 
4호 2021년 1월

1. 특집/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2. 특집/ 템포러리에서 콘스탄트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가장한 (지역) 영화제의 문제
3. 특집/ 질식자의 편지에 부치는 소고
4. 특집/ [구인공고] 언더커버 혹은 오버커버
5. 특집/ 아, 감은사 감은사 탑이여: 때로는 조심하는 것이 문제다
6. 특집/ 썼다 지운 질문과 소회
7. 대화(dialog): 퍼포먼스를 위한 카메라-도큐멘테이션에 관한 고민들
8. 보지 않고 보기: 정여름의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9. 아이돌 기표의 ‘트랜스’ 해부하기: 아이돌 서사와 타세계의 시선을 경유하며
10. '접촉'에서 '접속'으로(2): 〈문명특급〉의 경우
11. 협잡꾼 당신: 「김기영 평전」을 위한 단편
12. 해적을 위한 변명: 위디스크와 ‘리스트’
13. 독백과 방백 사이: 브이로그(VLOG)의 나르시시즘
14. 한국 영화 비평장에 대한 비평 초고: 계속 말해야 하는 것들


3호 2020년 8월 

1. 특집/ 여섯 빛깔 스크린 너머: 한국퀴어영화제 20주년에 부쳐
2. 특집/ CRY, FUCK, BEAT UP(울고 하고 패고)
3. 특집/ “퀴어영화 연구는 정말로 노다지”: 『한국퀴어영화사』 책임편집 이동윤 인터뷰
4. 특집/ 한국 게이/레즈비언 영화와 호모-특정적 난관들
5. 특집/ 샷다 내린 퀴어랜드: ‘디스코팡팡’과 ‘방 탈출 게임’ 사이에서
6. 특집/ 뱀파이어의 딜레마: 누구를 위한 ‘착즙'인가?
7. 정전에 속하기, 정전 밖에 있기: 사프디 형제의 방법
8. 검고도 밝은: 조주현의 ‘흑공’과 스크린 안의 미로
9. 아이돌 기표의 '트랜스' 해부하기: NCT 127의 〈슈퍼휴먼〉과 아이돌 피상성
10. '접촉'에서 '접속'으로: NCT 127의 경우
11. 아직도 굳이 〈무한도전〉을 논할 필요가 있는 건
12. 듣는 여자: 〈그리고 베를린에서〉
13. 박세영의 무한 도시
14. 추상化와 픽션: 이소정의 영상 작업에 대해
15. 이미 흩어진 '밀레니얼 시네필’
16. 비천함, 실패, 나쁜 것에 관한 정직한 성찰(우회하지 마세요)

2호 2020년 3월  
1.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잠깐!)” 2019 한국 코미디 영화의 ‘비빔면적 경향’과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윤리’: 영화 ⟨극한직업⟩, ⟨걸캅스⟩, ⟨엑시트⟩를 중심으로
2. 봉준호 월드 유람
3. 창문과 창문 ‘너머’—오연진의 《Lace》와 백종관의 ⟨추방자들⟩
4. 갱신과 추동 사이에서 기업가∽노동자∽DIY로서의 작가
5. 구체적 세부: 2019년을 함께한 독립극영화 속 여자들
6. 특집/ 액체의 단상들: 리퀴드(liquid)와 플루이드(fluid), 그 언저리에서
7. 특집/ 15초 곱하기 240의 실험: 이소윤의 ⟨450⟩
8. 특집/ 보여주는 대신 믿게 하기: 박시우의 ⟨변신⟩
9. 특집/ ‘플레이스’와 ‘플레이’로 규명되는 영화 ⟨소녀의 기도⟩
10. 특집/ 연결하고, 순환을 주장하기: 독립영화협의회 낭희섭 대표 인터뷰
11. 영화제가 활짝 피었습니다—대안적 영화제를 상상하기 위한 생산적 망각
12. 디스코팡팡적 시네마: ⟨알라딘2019⟩ 4DX
13. 걷잡을 수 없는/겉잡을 수 있는: 2019년의 영상 작업을 통해서
14. 테니스와 바둑의 신체를 상상하며: 되받아치기와 이중구속의 비평

1호 2019년 9월

1. 환영에 대한 두 가지 입장: ⟨라이온 킹⟩과 ⟨야광⟩
2. 유령의 기술: 차이밍량의 ⟨더 데저티드⟩ 3. 괴물, 일레븐, 무전(하)기
4. 장재현의 보이 스카웃은 무엇을 단련하는가?
5. 특집/ 영화평론가 김소영 인터뷰
6. 특집/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한국 영화비평계의 86세대에 대해 반추하며
7. 특집/ 한국영화비평계의 00년대부터 지금까지
8. 비체(abject) 생산라인의 작동방식을 드러내는 무빙이미지들: Maotik의 ⟨FLOW⟩와 이은희의 ⟨Contrast of Yours⟩
9. 무한 가정해보기: 류한솔 작가의 ⟨크리크리 메리크리 스마스⟩를 중심으로
10. 픽션의 증언
11. 다음 세기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의 ⟨힘의 한 세기⟩


0호 2019년 5월

1. 철의 꿈, 믿음의 끝: 박경근의 ⟨철의 꿈⟩ 2. 펼치고 다시 조립하기: 백종관 감독론 3. ⟨로맨틱 머신⟩에 대한 짧은 소고: 카메라-눈의 체험을 체험하기 4. 경험되지 않는 영화에 대하여


공개서한과 회신들
질식자의 편지: 영화문화의 현재에 관한 13개의 질문
질식의 날 - 못다 부친 편지
회신1. 질식자에게
회신2. <비평(권력)에 대하여> 의 질문
회신3. 쉰들러 리스트: 무너진 낙원에서 완전함 찾기
수신인: 씨네21
회신4. 형제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회신5. 답변?
회신6. 창작과 비평의 관계에 대하여.....
등단 = 검증?
회신7. 지리적 계급의 소멸을 함께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회신8. 공개서한에 대한 회신입니다.
ㄴRE: 회신10. 별로 어렵지 않은 이야기
회신9. 질식자에게
비평? 우리는 웃고 있다
회신11. 답장, 그렇지만 (아무래도 결국은)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회신12. 질식자를 위한 이방인의 인공호흡

비평의 비평 2019년 11월
듀나와 이동진과 기타등등 / ‘씨네21식 비평’ 비판 / 오큘로에 대해서 / 반면교사 / 정면교사?

스루패스로서의 비평

기타 발표 및 행사 
동시대 독립영화 매체와 비평 (인디포럼2020)국적없는 영화를 위하여: 〈노 데이터 플랜〉과 〈거리두기〉(12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추상化와 픽션: 이소정의 영상 작업에 대해
함연선 (마테리알 편집인)


영화가 재현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을까? 비재현적인 영화를 만드는 방법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필름에 물리적·화학적 변형을 가하는 실험영화적 실천이다. 가령 의도적으로 부식된 필름을 영사하면 화면에 노이즈와 같은 것이 발생하고, 그 작업은 재현의 대상을 전제하기보다는 부식과정에서 보이는 필름의 물질성을 드러내게 된다. 그렇다면 카메라는? 재현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가?
《범퍼!》가 열린 당시 위켄드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였던 풍경은 2열 5행으로  줄지어서 공중에 매달린 채 스크린의 역할을 하는 아크릴판들과 그에 비치는 박세영, 이소정의 작업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왼쪽 열의 박세영의 작업들에선 화면 내에서 운용되는 이미지와 화면 안팎을 오가는 사운드 요소들에 더 방점이 찍혀있었다면, 이소정의 작업들에서는 카메라 자체의 존재감이 중요했고 그래서 더 ‘영화적’이었다. 특히 오른쪽 열 첫 세 개의 작품에서 이소정은 카메라를 이용해 비재현적 이미지를 취한다. 카메라는 빠르게 달리는 바이크에 올라타 아스팔트 바닥을 바라보거나(〈Hold It!〉), 얕은 해안가의 바다에 잠수해서 수면 너머의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Splash〉), 한 자리에서 같은 방향으로 빙빙 돈다(〈I love you Michael Snow〉).
        다시 말해, 오른쪽 열 첫 세 개의 작품들—〈I love you Michael Snow〉, 〈Hold It!〉, 〈Splash〉—은 카메라의 움직임에 대한 실험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이소정의 작업 방식은, 어떤 이미지나 장면을 미리 기대하고 촬영에 들어가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일종의 행동명령을 카메라에 입력시킨 뒤 그것을 수행한 카메라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물을 받아들이는 쪽에 가깝다. 카메라가 카메라를 든 사람의 움직임과 동기화되든, 탈 것에 오르든, 물속에서 마구 휘저어지든 어쨌거나 카메라는 움직인다. 그리고 그 움직임을 통해 화면의 재현적 이미지는 서서히 혹은 갑자기 노이즈가 되고 추상이 된다. 결과적으로 관객은 카메라만이 포착할 수 있는 것(일종의 추상화된 화면)을 볼 수 있게 되고, 가끔은 카메라-라는-비인간-물체와 동기화되는 듯한 감각마저 겪는다. 특히 〈Splash〉에서는 수면 아래와 위를 부유하는 카메라의 시선에 상응하는 사운드, 즉 잠수했을 때 들리는 멍한 소리와 물 밖에 비로소 나왔을 때 들리는 명쾌한 소리들이 그 동기화에 큰 영향을 준다.
카메라의 움직임에 대한 실험, 그리고 그 움직임으로부터 파생되는 추상화된 화면은 일전에 이소정의 〈Romantic Machine〉에 대한 글*에서 내가 지적한 바와 같이 마이클 스노우의 작업, 그중에서도 〈중앙지역〉과 이소정의 작업이 공유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소정의 작업에서 보이는 한 가지 추가적인 특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표면에 대한 집착, 더 나아가 그 표면으로부터 발생하는 노이즈에 가까운 이미지에 대한 매혹이다. 표면의 우글거리는 것들에 대한 집착과 그것들을 천천히 포착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보인다. 그는 수면 위를 둥둥 떠다니는 파도 거품의 물방울들 앞에서 멈추고, 아스팔트 바닥을 촘촘히 메우고 있는 작은 덩어리들에 매혹된다. 그리고 아마도 그를 가장 매혹시키는 것은 무한개의 표면을 지닌 수면(水面)일 것이다.
        따라서 이소정은 화면의 추상화를 두 가지 방법을 통해 취한다. 카메라에 움직임과 속도감을 부여하거나, 혹은 표면을 가만히 바라보거나.

앞서 언급한 세 작품이 카메라의 움직임에 대한 실험, 표면과 표면에 집중할수록 의도치 않게 포착하게 되는 노이즈에의 천착, 이 두 가지를 보여주는 작업군이라면, 같은 열 제일 마지막에 설치된 〈Julie〉는 조금 다르다. 〈Julie〉를 한 번이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본 사람이라면, 영상 속에 일정 정도의 변주는 있을지라도 반복해서 나오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작가의 작업 설명에서 “등장(인)물”로 호명되는 바위, 해, 물, 사람, 갈매기가 그것이다. 그리고 더 자세히 보면 이 작업의 대부분이, “등장(인)물”들을 롱테이크로 촬영한 푸티지들을 여러 부분으로 쪼개거나 변형 시켜 다시 재조합한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바위 위에 앉은 갈매기’ 푸티지를 생각해보자. 바위 끝에 앉아 있는 갈매기가 기억나는가? 후경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고 배가 지나간다. 이 푸티지는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정지된 상태에서 롱테이크로 촬영되었을 것이고, 편집 과정에서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져 다른 푸티지의 조각들 사이에 듬성듬성 끼워 넣어졌다.
        촬영된 푸티지를 자르고 재조합하여 최종 작업물을 만드는 것이 보통의 영상 제작 방식과 다를 것은 없다. 〈Julie〉가 차별점을 갖는 부분은 촬영된 푸티지의 대상들이 “등장(인)물”로 도약하는 과정에 있다. 보통 극영화의 등장인물이 언제나 서사적 세계의 고유한 존재로 제시될 수밖에 없는 것에 반해, 〈Julie〉의 “등장(인)물”은 이 픽션적 세계의 고유한 존재로 도약하는 동시에 여전히 일반 명사(“바위, 해, 물, 사람, 갈매기”)로서 제시되고 있다. 이는 푸티지 조각들의 재조립 후에도 여전히 흔적기관처럼 잔존하는 촬영본 푸티지에 담긴 실재성 때문이다. 고정된 카메라는 롱테이크로 시간성을 담았고, 편집은 이 원(原) 푸티지의 실체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 노골적으로 반복되는 똑같은 구도의 똑같은 풍경들은 (성실한) 관객으로 하여금 조각들로부터 온전한 푸티지를 상상해내고 구성해낼 수 있게끔 한다.
        이 과정은 이소정의 꾸준한 관심사인 픽션 만들기의 방법이다. 그렇다면 그는 픽션 만들기에 완전히 성공했는가? 아니다. 그 시도는 절반만 성공적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오히려 관객에게 픽션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제공한다. 작가가 ‘재조립한 시간’에 균열을 내는 증거들이 계속해서 눈길을 끈다. ‘바위 위에 앉은 갈매기’ 푸티지를 생각해보자. 화면 전경에 삼각형 모양의 바위 끝에 앉아 있는 갈매기가 있고 중경에는 작은 배가 바다 위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지난다. 중경의 배가 화면 밖으로 나갈 때 즈음 후경에서도 작은 배가 나타난다. 그런데 ‘바위 위에 앉은 갈매기’ 푸티지의 후반부 조각이라고 추정되는 장면이, 최종 작업물에서는 이 푸티지의 조각들 중 제일 앞에 등장한다. (중경과 후경의 배의 위치와 갈매기의 다리를 보면 이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이외에도 완전히 똑같은 장면이 재등장하거나, 이미 후경의 바위 아래로 사라진 사람들이 또 몇 장면 뒤에 프레임 밖에서 전경으로 불쑥 나타난다. 이는 시간이 맴돌고 있다는 감각, 혹은 시간이 갇혀 흐르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 (영상 후반부의 노을 지는 풍경 장면 중 하나가 해가 쨍쨍한 대낮의 시간대를 나타냈던 앞부분의 장면을 색감만 달리한 것이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Julie〉에서 시간은 오로지 컷 안에서만 흐른다. 컷과 컷 사이가 보증하는 시간의 흐름은 없다. 거기엔 ‘그리고’ 혹은 ‘그러나’로 인해 창출되는 다음 문장이란 없다. 또는 ‘전화가 울렸다. 컵이 깨졌다.’라는 문장에 작용하는 자연스러운 선후 관계가 없다. 대신에 같은 층위에서 위계 없이 (간신히) 이어지는 문장의 감각만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Julie”라는 이름의 이 이야기(작가는 작업 설명에서 이야기에 이름을 붙인다)는 내러티브와는 무관한 것이다. 그것은 선형적인 내러티브도, 비선형적인 내러티브도 아니다. 오직 픽션일 뿐이다.

《범퍼!》의 오른쪽 열 첫 세 개의 작품이 추상화된 화면에의 지향을 보인다면, 마지막 작품인 〈Julie〉는 새로운 픽션에 대한 탐구를 보여준다. 물론 〈Julie〉도 표면 앞에서 멈추는 순간들이 자주 있지만, 그것이 노이즈 혹은 추상화된 화면으로까지 나아가진 않는다. 이 두 작품군 사이인 4번째 행에 설치되어 있었던 〈Romantic Machine〉은 한편으론 밤바다와 빛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낸 노이즈의 이미지를 담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론 ‘빛’이라는 특수한 “등장(인)물”을 통해 관객에게 픽션을 체험시키는 영리한 전략의 결과였다. 작업이 만들어진 시간상으로 따지자면,  〈Romantic Machine〉에서 분기한 두 개의 방법이 각각의 작품군들을 낳은 것으로 보인다. 두 개의 방법이 다시 합류(合流)하는 시기에 우리가 보고 듣게 될 것은 무엇일까. 그 미래를 기대해본다.



*함연선, 「〈로맨틱 머신〉에 대한 짧은 소고: 카메라-눈의 체험을 체험하기」, 『마테리알』 창간준비호, 2019. (혹은 마테리알 온라인 페이지 https://ma-te-ri-al.online/00c3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