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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 2021년 1월

1. 특집/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2. 특집/ 템포러리에서 콘스탄트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가장한 (지역) 영화제의 문제
3. 특집/ 질식자의 편지에 부치는 소고
4. 특집/ [구인공고] 언더커버 혹은 오버커버
5. 특집/ 아, 감은사 감은사 탑이여: 때로는 조심하는 것이 문제다
6. 특집/ 썼다 지운 질문과 소회
7. 대화(dialog): 퍼포먼스를 위한 카메라-도큐멘테이션에 관한 고민들
8. 보지 않고 보기: 정여름의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9. 아이돌 기표의 ‘트랜스’ 해부하기: 아이돌 서사와 타세계의 시선을 경유하며
10. '접촉'에서 '접속'으로(2): 〈문명특급〉의 경우
11. 협잡꾼 당신: 「김기영 평전」을 위한 단편
12. 해적을 위한 변명: 위디스크와 ‘리스트’
13. 독백과 방백 사이: 브이로그(VLOG)의 나르시시즘
14. 한국 영화 비평장에 대한 비평 초고: 계속 말해야 하는 것들


3호 2020년 8월 

1. 특집/ 여섯 빛깔 스크린 너머: 한국퀴어영화제 20주년에 부쳐
2. 특집/ CRY, FUCK, BEAT UP(울고 하고 패고)
3. 특집/ “퀴어영화 연구는 정말로 노다지”: 『한국퀴어영화사』 책임편집 이동윤 인터뷰
4. 특집/ 한국 게이/레즈비언 영화와 호모-특정적 난관들
5. 특집/ 샷다 내린 퀴어랜드: ‘디스코팡팡’과 ‘방 탈출 게임’ 사이에서
6. 특집/ 뱀파이어의 딜레마: 누구를 위한 ‘착즙'인가?
7. 정전에 속하기, 정전 밖에 있기: 사프디 형제의 방법
8. 검고도 밝은: 조주현의 ‘흑공’과 스크린 안의 미로
9. 아이돌 기표의 '트랜스' 해부하기: NCT 127의 〈슈퍼휴먼〉과 아이돌 피상성
10. '접촉'에서 '접속'으로: NCT 127의 경우
11. 아직도 굳이 〈무한도전〉을 논할 필요가 있는 건
12. 듣는 여자: 〈그리고 베를린에서〉
13. 박세영의 무한 도시
14. 추상化와 픽션: 이소정의 영상 작업에 대해
15. 이미 흩어진 '밀레니얼 시네필’
16. 비천함, 실패, 나쁜 것에 관한 정직한 성찰(우회하지 마세요)

2호 2020년 3월  
1.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잠깐!)” 2019 한국 코미디 영화의 ‘비빔면적 경향’과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윤리’: 영화 ⟨극한직업⟩, ⟨걸캅스⟩, ⟨엑시트⟩를 중심으로
2. 봉준호 월드 유람
3. 창문과 창문 ‘너머’—오연진의 《Lace》와 백종관의 ⟨추방자들⟩
4. 갱신과 추동 사이에서 기업가∽노동자∽DIY로서의 작가
5. 구체적 세부: 2019년을 함께한 독립극영화 속 여자들
6. 특집/ 액체의 단상들: 리퀴드(liquid)와 플루이드(fluid), 그 언저리에서
7. 특집/ 15초 곱하기 240의 실험: 이소윤의 ⟨450⟩
8. 특집/ 보여주는 대신 믿게 하기: 박시우의 ⟨변신⟩
9. 특집/ ‘플레이스’와 ‘플레이’로 규명되는 영화 ⟨소녀의 기도⟩
10. 특집/ 연결하고, 순환을 주장하기: 독립영화협의회 낭희섭 대표 인터뷰
11. 영화제가 활짝 피었습니다—대안적 영화제를 상상하기 위한 생산적 망각
12. 디스코팡팡적 시네마: ⟨알라딘2019⟩ 4DX
13. 걷잡을 수 없는/겉잡을 수 있는: 2019년의 영상 작업을 통해서
14. 테니스와 바둑의 신체를 상상하며: 되받아치기와 이중구속의 비평

1호 2019년 9월

1. 환영에 대한 두 가지 입장: ⟨라이온 킹⟩과 ⟨야광⟩
2. 유령의 기술: 차이밍량의 ⟨더 데저티드⟩ 3. 괴물, 일레븐, 무전(하)기
4. 장재현의 보이 스카웃은 무엇을 단련하는가?
5. 특집/ 영화평론가 김소영 인터뷰
6. 특집/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한국 영화비평계의 86세대에 대해 반추하며
7. 특집/ 한국영화비평계의 00년대부터 지금까지
8. 비체(abject) 생산라인의 작동방식을 드러내는 무빙이미지들: Maotik의 ⟨FLOW⟩와 이은희의 ⟨Contrast of Yours⟩
9. 무한 가정해보기: 류한솔 작가의 ⟨크리크리 메리크리 스마스⟩를 중심으로
10. 픽션의 증언
11. 다음 세기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의 ⟨힘의 한 세기⟩


0호 2019년 5월

1. 철의 꿈, 믿음의 끝: 박경근의 ⟨철의 꿈⟩ 2. 펼치고 다시 조립하기: 백종관 감독론 3. ⟨로맨틱 머신⟩에 대한 짧은 소고: 카메라-눈의 체험을 체험하기 4. 경험되지 않는 영화에 대하여


공개서한과 회신들
질식자의 편지: 영화문화의 현재에 관한 13개의 질문
질식의 날 - 못다 부친 편지
회신1. 질식자에게
회신2. <비평(권력)에 대하여> 의 질문
회신3. 쉰들러 리스트: 무너진 낙원에서 완전함 찾기
수신인: 씨네21
회신4. 형제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회신5. 답변?
회신6. 창작과 비평의 관계에 대하여.....
등단 = 검증?
회신7. 지리적 계급의 소멸을 함께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회신8. 공개서한에 대한 회신입니다.
ㄴRE: 회신10. 별로 어렵지 않은 이야기
회신9. 질식자에게
비평? 우리는 웃고 있다
회신11. 답장, 그렇지만 (아무래도 결국은)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회신12. 질식자를 위한 이방인의 인공호흡

비평의 비평 2019년 11월
듀나와 이동진과 기타등등 / ‘씨네21식 비평’ 비판 / 오큘로에 대해서 / 반면교사 / 정면교사?

스루패스로서의 비평

기타 발표 및 행사 
동시대 독립영화 매체와 비평 (인디포럼2020)국적없는 영화를 위하여: 〈노 데이터 플랜〉과 〈거리두기〉(12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아직도 굳이 〈무한도전〉을 논할 필요가 있는
윤아랑 (비평가)


심상찮은 일일까? TV 예능 프로그램 〈돈 키호테〉, 〈플레이어〉, 〈끼리끼리〉 등을 조금씩 보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나 혼자만의 의문인가 싶어 해당 프로그램들에 대한 반응들을 살펴봤다. 이 프로그램들에서 〈무한도전〉적인 것을 발견한 건 역시 나 혼자만은 아니었다. 저 프로그램들의 형식, 그러니까 터무니없고 기괴한 일에 도전하거나, 고정된 멤버들을 매번 완전히 다른 극적 상황에 떨어뜨리는 (비)형식이 우리에게 〈무한도전〉의 시그니처로 각인된 지는 너무도 오래됐다. 그런데 일반 시청자들보다 더 예민할 수밖에 없는 제작자들이 이를 의식하지 않고 촬영에 들어갔을 리는 없다. 아닌 게 아니라, 〈돈 키호테〉의 PD인 손창우는 한 인터뷰에서 "절대 똑같지 않다고 말씀드릴 수 없"다며 소극적으로 〈무한도전〉과의 유사성을 인정했으며, 〈끼리끼리〉의 멤버인 박명수와 황광희는 〈무한도전〉 출신이기도 하다. 〈무한도전〉이 종영하고 얼마 안 되어 누가 봐도 〈무한도전〉적인 프로그램들이 연달아 출몰하는 게 그저 우연일까? 또 이건 심상찮은 일일까? 이 글은 이런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돌이켜보면, 여러 부침 끝에 〈무한도전〉이 (사실상) 종영했을 때 우리의 발에는 〈무한도전〉적인 것, 보다 세부적으로는 〈무한도전〉이 상징하게 된 이데올로기의 유효 기간이 이제 거의 끝났다는 '상식적' 진단들이 마구잡이로 치였다. 어떤 이데올로기? (광범위한 인기는 물론 아젠다의 형성에도 영향을 행사하는) '국민 예능'의 가능성, ('공식' 연예인들을 핵심으로 구동되는) 스타 시스템, (폭력적 태도를 근간으로 삼는) 남성 호모 소셜의 웃음 코드... 하지만 이런 진단은 사실 발화자의 기대일 뿐이란 걸, 〈내일은 미스터트롯〉의 출연자들이 TV를 틀 때마다 나오고 인기 인터넷 방송인인 브베와 보겸이 여전히 잘 나가고 있는 주위를 아주 잠깐만 둘러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무한도전〉의 종영은 (가치 판단과 결부된) 좁은 의미에서의 '새로움'의 기점이 아니다. 만약 무언가가 정말 끝났다면 그건 이데올로기의 유효 기간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대한 마지막 봉인이었을 게다. 이를테면 인기 쇼트 비디오 SNS인 바인과 틱톡의 관계를 떠올려보자. 2017년, 쉬운 편집 방식과 시간제한이라는 형식으로 비디오 밈 생태계에 크나큰 변화를 가져왔던 바인이 그 자신의 형식에, 정확히는 그 형식을 따라 하고 가공하고 발전시킨 SNS들에 의해 특수성을 잃고 결국 서비스를 종료했을 때, 다양하고도 간편한 편집 효과를 내세우며 '바인 이후'의 SNS 중에서 가장 위세를 떨치던 틱톡이 본격적인 글로벌 런칭을 시작했다. 이를 두고 '바인적인 것'이 끝장났다고 할 수 있는가? 불과 몇 개월 차이라는 이 절묘한 타이밍은 원류에 대한 형식의 자율성에의 '비극적'인 사례로서 우리에게 던져진다. 그 어떤 형식도 세간의 영역으로 떨어지는 순간 복제되고 산산조각이 나 원류로부터 멀어지고 심지어는 원류를 덮칠 잠재성을 갖게 된다는 '비극'. 이 연장선에서 이뤄지는 원류의 붕괴란, 이미 실상 껍데기만 남은 원류에 상상적으로나마 봉인되어있던 형식이 마침내 완전히 풀려나는 사태라고 할 수 있다. 바인이 개발한 형식이 더 이상 바인만의 것이 아니게 되었을 때 이런 사태는 이미 필연이 되었을 터.
        〈무한도전〉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로, 자신 '이후'의 초인기 예능 프로그램들(멀리로는 〈1박 2일〉 시즌 1, 가까이로는 〈마이 리틀 텔레비전〉) 사이에서도 나름의 인기와 영향력을 유지하던 때와는 달리 멤버들의 나이 듦 및 제작진의 변화 속에서 프로그램의 플롯이 '노후화'되고 식상해져—이 결정적인 원인을 여초 커뮤니티의 '프로불편러'들 탓으로 돌리는 이들의 비열함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자신에 내포된 이데올로기들과 자신이 만든 형식들을 독창적/독점적으로 상징화할 힘을 완전히 상실했기에 〈무한도전〉은 종영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한국 예능계에서 〈무한도전〉적인 것의 끝이 아니라 〈무한도전〉적인 것의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존속을 상징한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돈 키호테〉를 비롯한 누가 봐도 〈무한도전〉적인 프로그램들의 잇따른 출몰은 존속의 사례라 할 수 있는가? 아니, 그건 또 아니다. 꼭 해당 프로그램들이 흥행에 실패하고 폐지 수순을 밟았기에 하는 말은 아니고, 단지 〈무한도전〉적인 것의 일부를 그 자체로 인기 요인으로 오해하고선 (차이 없는) 반복만 했기 때문이다. 〈무한도전〉적인 것의 마지막 봉인이 풀린 것에 다소 기회주의적으로, 허나 성급하게 대응했달까? 하나의 증상일 수는 있어도 심상찮은 일까지는 아닌. 곧바로 질문이 따라온다. 그렇다면 〈무한도전〉적인 것은 어떻게 존속하고 있나? 말을 조금 바꾸는 게 더 적확할지도 모르겠다. 〈무한도전〉은 한국의 예능을 어떻게 바꿔놓았는가?
        〈무한도전〉의 성취로 언급되는 몇 가지를 나열해보자. 철저한 무의미성의 유희(로의 회귀), "고정된 멤버들을 매번 완전히 다른 극적 상황에 떨어뜨리는" 급진적인 유동성, 특유의 자막과 편집으로 대표되는 메타 개그, 인터넷 대안 문화 코드의 활용, 장기 프로젝트나 레이스/추격전 같은 포맷의 정립. 하지만 이들 자체는 〈무한도전〉이란 거대한 부피의 프로그램을 이루는 일부 형식이지 그것을 관장하고 또 그러면서 간접적으로 현시되는 논리는 아니다. 가령 〈무한도전〉의 핵심을 무의미성의 유희로 규정하며 공익에 몰두하게 된 후기 〈무한도전〉을 두고 '이젠 지나치게 어른이 되어버렸다'며 아쉬워하는 견해가 있다. 이는 자신이 하나의 텍스트에서 좋아하는 형식 자체만을 분리하고선 그게 텍스트의 전체라고 우기는 상투적인 생떼일 뿐이다. 그저 단순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앞서 나열한 〈무한도전〉의 성취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논리는 무엇인가? 그 실마리는 237화 "오호츠크 해 특집" 1부의 한 장면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한참 열차를 타고 로케이션으로 이동하면서 멤버들이 박명수가 만들었다는 산수 게임들을 하는데, 그 게임이란 것이 하나같이 재미도 긴장감도 없이 지루한지라 편집의 리듬이 느려지고 멤버들의 얼굴도 굳어가며, 그에 맞춰 “지루…"라는 큰 자막이 뜬다. 이런 게임들이 계속되니 참다못한 노홍철이 정색한 채 "정말 재밌어서 하시는 거예요?"라고 면박을 주고, 박명수는 서운한 듯 투덜거리면서 또 다른 게임을 만드는 무리수를 둔다. 이 장면이 촬영됐을 현실의 시공에선 거의 지루하게 느껴졌을 박명수의 '재미없음'과 무리수는 흥미롭게도 장면이라는 '매개' 속에서 재미를 유발한다. 통상적으로 재미없는 것에서 재미를 추출하기? 여기서 우리가 마주하는 건 리얼리티의 이용이라는 문제다.
        여기서의 리얼리티란 충만한 충격으로 신체의 감각을 혼동시키는 '실감'이 아니다. 그것은 마름질 되지 않은 것과 마주하는 '실재'의 감각이며, 〈무한도전〉에서라면 이전의 TV 예능의 체계에서 예외상태나 잉여로 여겨졌을 순간으로 바뀐다. 멤버들의 기나긴 수다나 지지부진한 게임 진행처럼 내러티브 경제의 측면에서라면 편집 과정에서 들어내 마땅한 순간을 적극 활용하거나, 예능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정형돈의 '웃기는 것 빼곤 다 잘하는 개그맨', 길의 '무리수')를 컨셉으로 밀고 가거나, 통제에 한계를 겪을 수밖에 없는 공공장소로 나가 촬영을 진행하는 등, 〈무한도전〉은 (그저 가이드라인으로서의) 극적 상황에서 발생하는 예외상태적/잉여적 순간을 과잉 이용하면서 그것이 정말 예외상태적/잉여적 순간임을 텍스트 내부에서 노골적으로 환기시키는 방식으로 열심히 의미와 맥락을 부여하고 조작해 자신의 세팅에 포섭한다. ("뷁', "어쩌라고...?" 등의 특유의 자막은 그 자체로 예외상태적/잉여적이면서 또 그런 순간들을 수식하는 두 겹의 역할을 수행한다.) 예외상태나 잉여를 과잉 이용한다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의 기획에 입각한 통상적인 미적 시도들이 세계(의 기준)의 불가능성을 가시화하기 위해 이를 불편하게 이용했다면 〈무한도전〉은 반대편에 서서 세계를 집어삼키기 위해 불가능성을 제 성립 조건으로 삼아 이를 '유희적으로' 이용했으며, 멤버들의 말과 제스처는 그 속에서 허구(-방송)적 감각과 리얼리티 둘 모두가 뭉뚱그려진, 불투명하고 모호한 위상을 갖게 된다. ("대본의 땔감화") 기존의 TV 예능의 체계에선 '예능화' 될 수 없던 '실재'를 최대한 '예능화'하기, 요컨대 그것이 〈무한도전〉의 논리요 〈무한도전〉이 바꾼 한국 예능의 패러다임인 게다. 혹은 역으로, 〈무한도전〉에 이르러 한국 예능에서 '실재'는 배치 방식에 따라 유연하게 다른 힘을 발산할 수 있는, 잠정적이고 임시적인 미적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콘텐츠'라는 뭉텅이 진 개념의 한국적 판본이 여기서 출발했다고 한다면 과도한 주장일까?) 이때 중요한 건 TV 예능의 체계가 무엇을 예외상태/잉여로 규정하느냐에 있는데, 체계의 '바깥'을 상정하고 그것을 확인시켜야지만 거기서 이런저런 것을 차용해 힘으로 전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편'이랄 것이 투쟁과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양태를 끊임없이 재구축하듯 TV 예능의 체계 역시 가소적(可塑的)으로 운동한다는 운명적인 사실이 〈무한도전〉의 논리의 핵심을 건드린다. 특정한 행동이나 이미지를 예외상태로 규정하고 이용하는 빈도가 높아질수록 클리셰의 발생 빈도는 그에 비례하며—정준하의 전 매니저 '최코디' 최종훈이 '공식' 연예인이 된 이후로는 〈무한도전〉에 단 한 번도 출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무한도전〉의 급진(적인 유동)성과 보수성을 동시에 유발한다.
        보수성? 〈무한도전〉의 여러 에피소드가 슬랩스틱에 기반을 둔 게임과 콩트 위주로 진행됐음을 떠올려보라. 말하자면 최소한의 우회의 장치. 이는 〈무한도전〉이 자신의 논리로 인해 치러야 하는 대가일 테다. 〈1박 2일〉-〈신서유기〉 시리즈나 〈런닝맨〉처럼 '〈무한도전〉적인 것'을 일찍이, 효과적으로 '반복'한 프로그램들의 거의 모든 에피소드를 구동시키는 핵심 동력이 게임이라는 건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는 패착이 아니라 실패일 뿐이며, 이 보수성이 앞서 거론한 프로그램들의 가치를 생성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허나 한편으로 그 '이후'의 프로그램들에 있어선 맞닥뜨려야 할 대상이었단 것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앞서 말한 "〈무한도전〉적인 것의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존속"은 "'예능화' 될 수 없던 '실재'를 최대한 '예능화'하"는 길을 가면서도 이 실패를 (자크 데리다의 표현을 빌려) 상속하려는 예능 프로그램들의 계열 안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른바 '리얼 버라이어티'를 표방한 프로그램들 이외에 (특수한) 일상의 '예능화'를 시도한 2013년 이래의 관찰 예능(이 중에서도 VCR 촬영분과 편집실 촬영분 양자를 적극 활용해 한쪽으로의 전적인 집중을 방해하는 〈나 혼자 산다〉는 독특한 사례이다), 인터넷 방송과 TV 예능 사이의 이중구속을 전제로 삼은 〈마이 리틀 텔레비전〉과, 그중에서도 프로그램의 전제를 영리하게 이용하여 눕방, 낚방, 말방 등 본인이 하고 싶은 걸 그저 방송에 내보내고도 놀라운 성과를 거뒀던 이경규의 시도들, 그리고 박준형의 〈와썹맨〉/장성규의 〈워크맨〉을 비롯해 "선을 넘는" 캐릭터성과 그것을 증폭/통제하려는 편집 사이의 긴장을 심화된 형태로 보여주는 여러 웹 예능들에서도 〈무한도전〉적인 것은 여전히, 상속의 계열을 그리며 강력하게 존속되고 있다. (한편 앞서 언급한 "이데올로기"의 연장선에서, 어째서 이 계열이 대부분 반-성장적 남성 예능들로 이루어져 있냐고 반문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선 김기태의 논문 『〈무한도전〉에서의 '평균' 남성상의 담화적 구축』이 해답까지는 아닌 힌트를 준다.)
        잠깐, 나는 〈무한도전〉이 저 프로그램들을 '낳았다'고 억지를 부리려는 게 아니다. 선진국(특히 일본)의 형식을 암암리에 적극적으로 밀수하던 한국 문화 시장의 역사를, 또 단일한 매체의 역사를 세우는 것의 불가능함이 공공연해진 작금의 미디어 생태계를 생각하면 그건 지나친 억지일 뿐이다. 그래도 '한국'이라는 문화적 맥락에서 "'예능화' 될 수 없던 '실재'를 '예능화'하기"가 가능하도록, 또 기본값이 되도록 〈무한도전〉이 길을 텄다는 것만큼은 당신도 동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