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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서한

질식자의 편지: 영화문화의 현재에 관한 13개의 질문
질식의 날 - 못다 부친 편지
회신1. 질식자에게
회신2. <비평(권력)에 대하여> 의 질문
회신3. 쉰들러 리스트: 무너진 낙원에서 완전함 찾기

수신인: 씨네21
회신4. 형제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회신5. 답변?
회신6. 창작과 비평의 관계에 대하여.....
등단 = 검증?
회신7. 지리적 계급의 소멸을 함께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회신8. 공개서한에 대한 회신입니다.
ㄴRE: 별로 어렵지 않은 이야기
회신9. 질식자에게

비평? 우리는 웃고 있다




3호 2020년 8월

1. 특집/ 여섯 빛깔 스크린 너머: 한국퀴어영화제 20주년에 부쳐
2. 특집/ CRY, FUCK, BEAT UP(울고 하고 패고)
3. 특집/ “퀴어영화 연구는 정말로 노다지”: 『한국퀴어영화사』 책임편집 이동윤 인터뷰
4. 특집/ 한국 게이/레즈비언 영화와 호모-특정적 난관들
5. 특집/ 샷다 내린 퀴어랜드: ‘디스코팡팡’과 ‘방 탈출 게임’ 사이에서
6. 특집/ 뱀파이어의 딜레마: 누구를 위한 ‘착즙'인가?
7. 정전에 속하기, 정전 밖에 있기: 사프디 형제의 방법
8. 검고도 밝은: 조주현의 ‘흑공’과 스크린 안의 미로
9. 아이돌 기표의 '트랜스' 해부하기: NCT 127의 〈슈퍼휴먼〉과 아이돌 피상성
10. '접촉'에서 '접속'으로: NCT 127의 경우
11. 아직도 굳이 〈무한도전〉을 논할 필요가 있는 건
12. 듣는 여자: 〈그리고 베를린에서〉
13. 박세영의 무한 도시
14. 추상化와 픽션: 이소정의 영상 작업에 대해
15. 이미 흩어진 '밀레니얼 시네필’
16. 비천함, 실패, 나쁜 것에 관한 정직한 성찰(우회하지 마세요)

A BACK NUMBER

2호 2020년 3월  

1.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잠깐!)” 2019 한국 코미디 영화의 ‘비빔면적 경향’과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윤리’: 영화 ⟨극한직업⟩, ⟨걸캅스⟩, ⟨엑시트⟩를 중심으로
2. 봉준호 월드 유람
3. 창문과 창문 ‘너머’—오연진의 《Lace》와 백종관의 ⟨추방자들⟩
4. 갱신과 추동 사이에서 기업가∽노동자∽DIY로서의 작가
5. 구체적 세부: 2019년을 함께한 독립극영화 속 여자들
6. 특집/ 액체의 단상들: 리퀴드(liquid)와 플루이드(fluid), 그 언저리에서
7. 특집/ 15초 곱하기 240의 실험: 이소윤의 ⟨450⟩
8. 특집/ 보여주는 대신 믿게 하기: 박시우의 ⟨변신⟩
9. 특집/ ‘플레이스’와 ‘플레이’로 규명되는 영화 ⟨소녀의 기도⟩
10. 특집/ 연결하고, 순환을 주장하기: 독립영화협의회 낭희섭 대표 인터뷰
11. 영화제가 활짝 피었습니다—대안적 영화제를 상상하기 위한 생산적 망각
12. 디스코팡팡적 시네마: ⟨알라딘2019⟩ 4DX
13. 걷잡을 수 없는/겉잡을 수 있는: 2019년의 영상 작업을 통해서
14. 테니스와 바둑의 신체를 상상하며: 되받아치기와 이중구속의 비평


BACK NUMBER

1호 2019년 9월

1. 환영에 대한 두 가지 입장: ⟨라이온 킹⟩과 ⟨야광⟩
2. 유령의 기술: 차이밍량의 ⟨더 데저티드⟩
3. 괴물, 일레븐, 무전(하)기
4. 장재현의 보이 스카웃은 무엇을 단련하는가?
5. 비체(abject) 생산라인의 작동방식을 드러내는 무빙이미지들: Maotik의 ⟨FLOW⟩와 이은희의 ⟨Contrast of Yours⟩
6. 무한 가정해보기: 류한솔 작가의 ⟨크리크리 메리크리 스마스⟩를 중심으로
7. 픽션의 증언
8. 다음 세기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의 ⟨힘의 한 세기⟩
9. 특집/ 영화평론가 김소영 인터뷰
10. 특집/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한국 영화비평계의 86세대에 대해 반추하며
11. 특집/ 한국영화비평계의 00년대부터 지금까지


0호 2019년 5월

1. 철의 꿈, 믿음의 끝: 박경근의 ⟨철의 꿈⟩
2. 펼치고 다시 조립하기: 백종관 감독론
3. ⟨로맨틱 머신⟩에 대한 짧은 소고: 카메라-눈의 체험을 체험하기
4. 경험되지 않는 영화에 대하여



비평의 비평 2019년 11월

듀나와 이동진과 기타등등‘씨네21식 비평’ 비판오큘로에 대해서반면교사정면교사?



선언문




구체적 세부: 2019년을 함께한 독립극영화 속 여자들

김송요(글 생산자)



지난해 독립영화를 논하며 반복 등장한 표현 하나를 꼽자면 단연 ‘여성 감독의 약진’일 것이다. 약진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미 궤도에 진입한 세력을 두고 약진했다고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 사전 속 예문을 보아도 소외주, 개발도상국, 신생 야당, 진보정당이 약진 중이지 삼성전자 주식, 제1세계, 중국 공산당이 약진하지는 않는다. 
      어쨌거나 약진했다는 것은 괄목할 만한 가시적 성과가 있었다는 뜻이다. 빠르게 발전하거나 진보했다는 뜻이니까. 과연 2019년 국내 독립극영화를 이야기하려면 여성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을 빼놓을 수 없다.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를 기준으로 지난해 개봉한 장편 독립극영화 중 박영주 감독의 〈선희와 슬기〉, 정희재 감독의 〈히치하이크〉, 한가람 감독의 〈아워 바디〉, 안주영 감독의 〈보희와 녹양〉, 윤가은 감독의 〈우리집〉, 김보라 감독의 〈벌새〉, 이옥섭 감독의 〈메기〉, 유은정 감독의 〈밤의 문이 열린다〉, 김유리 감독의 〈영하의 바람〉 아홉 편이 여성 연출작이었고, 이중 〈우리집〉을 제외한 영화 모두가 감독의 첫 장편이었다. 〈우리집〉 역시 윤가은 감독의 두 번째 장편이니 초기작이라고 할 수 있다. 2018년 인디스페이스에서 개봉한 여성 감독의 독립극영화가 〈누에치던 방〉(이완민)과 〈수성못〉(유지영), 〈소공녀〉(전고운), 〈어른도감〉(김인선) 네 편인 것을 생각하면 무려 두 배 이상의 영화가 개봉을 통해 관객을 만난 셈이다. 꼭 직전 연도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개봉 독립영화 중 다큐멘터리가 가지는 파이와 기성 감독의 연출작이 갖는 비중을 생각했을 때 그야말로 ‘약진’이다.

공교롭게도
아홉 편의 영화는 여러 지점에서 마주치고 연결된다. 우선 이들 중 여섯 편이 어린이 또는 청소년 주인공을 뒀다. 십 대 여성, 정확히는 ‘여고생’의 이미지는 독립영화의 얼굴로 꾸준히 존재했지만 막상 장편에서 그 얼굴이 여성 감독의 눈과 손에 의해 표현된 경우는 생각보다 적었다. 당장 생각나는 영화만 보더라도 〈굿바이 썸머〉, 〈여고생〉, 〈한공주〉, 〈죄 많은 소녀〉, 〈박화영〉 모두 남성 감독의 작품이다.
      2019년 여성 감독에 의해 재현된 (주로) 여성 어린이-청소년이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면, 이 무슨 웃긴 소리인가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성장한다는 것이다. 여섯 작품에서 ‘여학생’들은 사회의 프리즘이 되거나 풋풋함/첫사랑이라는 인상 그 자체, 혹은 장르물의 쾌감 내지는 신선함을 더하기 위한 매력적 주체로 기능하기보다는 다치기도 부대끼기도 하면서 느리게 자라난다. 그 성장은 보물을 찾아서 떠난 영웅의 것처럼 성대하기보다는 두 발짝 전진하고 한 발짝 뒷걸음질 치는 모양일 때도 있고 최단 거리 질주가 아니라 나선형으로 소용돌이치고 휩쓸리며 얻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선희와 슬기〉의 선희는 습관적인 거짓말을 하다 친구 정미를 잃고, 과거를 지운 뒤 ‘슬기’라는 다른 정체성으로 살고자 한다. 그러나 고유의 지문을 고스란히 내보일 수밖에 없는 오프라인 세상에서 웹사이트 닉네임을 바꾸듯 자기를 바꾸기란 어렵다. 선희의 선택은 매정하게 재단되는 대신 끝을 확신할 수 없는 성장통으로 남는다. 〈영하의 바람〉의 영하와 미진은 물리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보호자와 이별한다. 이들은 아물어지지 않는 생채기를 얻고 혼자서는 보듬을 수 없는 외로움을 간직한다. 어른들은 폭력과 무신경함, 소통 불가능한 태도로 이들을 상처입힌다. 하지만 이들은 어른의 부조리에 맞서 싸워 이기거나 통쾌함을 얻을 생각을 하는 대신 나란히 서서 함께 찬바람을 맞길 택한다. 영하와 미진에게 서로의 존재는 마술적 힘은 아닐지언정 현실적 용기가 된다. 〈벌새〉의 은희는 불가해한 어른의 세계와 도무지 견고해지지 않는 자신의 세계를 낯설어한다. 가족의 관심을 받을 수 있기에 아픈 게 내심 좋고 자신을 존중하는 영지 선생님이 근사하게 느껴진다. 악다구니와 구타에 아무 말을 보태지 않는 엄마 아빠를 이해할 수 없고 재앙은 초현실적인 풍경과 비현실적인 상실을 은희의 현실 위에 아로새긴다. 일상의 요철을 밟기도 우회하기도 하면서 은희는 자기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그 위에 서 있는 스스로를 재차 발견한다. 〈히치하이크〉의 정애는 친구 효정과 부모님을 찾아 히치하이킹을 시작한다. 정애는 해피엔딩의 확신을 주지 못하는 가족이나마 간절히 찾아 헤메고, 효정의 아빠를 대리 가족으로 삼아서라도 행복해지고 싶다. 단단한 행복이 답보되지 않는 정애의 여정은 히치하이크의 속성처럼, 때로 목적지로 즉각 향하지 못하고 거리 위에서 휘청이기도 멍하니 정지하기도 한다. 〈보희와 녹양〉에서 아빠를 찾아 떠나는 건 여학생 녹양이 아닌 남학생 보희다. 유순하고 마음 약한, 이름 때문에 또래 남자아이들에게 ‘보지’라고 불리는(물론 거기엔 불린다는 중립적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성희롱과 호모소셜로부터의 배척이 뒤따른다) 보희와 ‘여자애’에게 요구되고 씌워지는 고정관념을 비껴가며 보희를 듬직하게 이끄는 녹양은 가장 가까운 친구 사이로 서로에게 힘이 된다. 〈우리집〉의 하나와 유미, 유진은 각자의 ‘집’을 지키고자 애쓴다. 엄마 아빠의 다툼이 불안해 밥을 차리고 가족여행을 떠나자고 조르는 하나와 각지를 돌아다니며 일하는 부모님 때문에 이사를 밥 먹듯 다니는 유미, 유진은 언뜻 유지할 수도 없고 유지할 의미도 없을 것 같은 지금을 보호하고자 한다.
      여섯 편의 영화는 많은 사람들이 통과했을 유년의 순간, 결코 동일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타인의 것과 완전히 분리되지도 않는 순간의 구체적 세부를 조망한다. 영화 속 인물들은 관객이 귀여워하거나 기특해하는 어린아이, 애늙은이거나 영악하거나 극단적으로 순수한 행동으로 어른에게 다각도의 ‘일침’을 가하는 어린아이에서 벗어난다. 이들은 도리어 그렇게 되지 않음으로써 미성년으로서 구체성과 핍진성을 갖는다. 다만 세계를 경험하는 입장에서, 아직 알을 깨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기 전인 이들(중 다수)에게,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오고 손아귀에서 가장 늦게 빠져나가는 존재는 가족이다. 가족을 향한 애증, 갈망, 분노, 탈력감, 애틋함,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자괴와 포기할 수 없게 하는 미련함 같은 감정들은 불안하고 때로 허망하지만 인물들에게는 너무나 중대한 것이 된다.〈우리집〉에서 집을 지키는 것은 이들 나름의 간절한 바람이자 임무이지 결코 정상 가족 판타지나 영웅의 뿌리 찾기, 어른들을 향한 경종 울리기(!)로 기능하고자 하지 않는다. 〈보희와 녹양〉이나 〈히치하이크〉, 〈영하의 바람〉에서 인물들은 가족이 정말로 이상적인 존재여서가 아님을 알면서도 기대고 싶은 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들은 연대하지만 그 연대가 유달리 견고하고 놀랍고 신통방통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 영화는 부서지고 망가지기 쉬운 관계와 눈부셨다가도 이내 초라해지는 마음을 정직하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교감하고 손을 맞잡기 바라는 마음, 존중받고 싶다는 소망, 내면의 술렁이는 진동과 가혹한 외부를 이겨내는 의지가 이들을 함께하게 하고 성장하게 만든다. 불완전이나 미성숙이라는 수사 없이 이 미성년의 인물들을 독립적으로 서게 하는, 그럼에도 이들의 불완전과 미성숙을 진지하게 재현하고 받아들이는 영화를 통해 이 ‘마음’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맺는다. 언젠가의 미래엔 수긍이나 체념 같은 두 음절 뒤에 가려질지도 모르지만, 터널을 통과하고 태풍의 눈을 지나는 바로 그 순간 절박했던 마음을 세밀하게 재현하면서 영화는 어린이-청소년을 주체적인 주인공이 되게 하고, 그 가장 사적이고 구체적인 마음을 통해 관객의 유년기와 사춘기도 불쑥 소환한다.

공교롭게도(2)
어린이, 청소년 주인공 영화 여섯 편을 제외한 세 편의 작품은 모두 젊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다.
      〈아워 바디〉는 준비하던 행정고시를 때려치우고 우연히 마주친 ‘현주’를 따라 달리기를 시작하는 ‘자영’을 통해 여성의 성취감과 무력감, 채워나가고 소모되는 감각, 욕망과 정동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영화는 정신적 자포자기와 육체적 긴장 사이에서 숨고르기를 하며 (비유로서가 아니라, 정말 몸을 써서) 달린다. 자영은 근사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자신이 원하는 여러 방식으로 몸을 쓰고 마음을 가눈다. 〈아워 바디〉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은 영화 속에서 구체적인 덩어리감을 갖고 부피를 차지하는 육체와 성욕의 존재다. 영화 속 자영의 섹스는 그냥 하는 거여서, 혹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다. 엄숙주의거나 핑곗거리일지도 모를 이유들을 제치는 한편으로 그간 ‘주체적 성욕’이라는 것마저도 ‘밝히는 여자’ 이미지를 통해 어떻게 대상화되었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히어로물 주인공은 갑자기 입도 맞추고 아침 햇살에 참새 짹짹하면 이불만 뒤집어쓰고 일어나고 하는데 왜 독립영화 속 헤테로 여자는 뭔가 참는 얼굴을 한 채 대강 호미질처럼 묘사되는 삽입 섹스를 견디고 이 초 뒤에 옷을 입은 채 다음 시퀀스로 넘어가는 것인가. 〈아워 바디〉는 시선과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한, 객체가 되는 것에 넌더리가 난 여성(들)이 어떻게 자신의 몸을 되찾는지 지켜본다. 영화는 거울을 보고,사진을 찍히는 존재가 동시에 자기 것을 쓰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줄 아는 존재임을 보여주고, 하나의 존재에 달라붙는 수사들이 꼭 역접으로 이어지는 모순일 이유가 없다는 것 역시 드러낸다.
      〈밤의 문이 열린다〉는 눈을 떴을 때 이미 유령이 되어버린, 그리하여 시간 축을 거슬러 세상을 부유하게 된 혜정을 통해 생과 사의 감각을 매만진다. 혜정의 경로는 사람인데도 유령처럼 숨어 지내는 효연과 철거한 폐건물에 몸을 뉘이고 아빠에게 보내는 메시지로만 생의 시그널을 유지하며 죽은 듯이 지내는 수양과 교차한다. ‘살아있긴 한 거니’ 소리가 귀에 설지 않은 관계의 부재 내지는 단절, 살림을 위해 벌고 쓰는 일의 지리함과 지난함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통과하는 유령의 시공간에서 더 높은 해상도로 드러난다. 영화는 유령과 서스펜스를 동반한 장르물이면서, 일상의 카메라로, 인간만한 괴담이 없는 세계의 단면 그리고 그 불안과 공포를 포착한다. 〈밤의 문이 열린다〉의 ‘텅텅 비어있고 무기력’한 혜인과 ‘그냥 안 하기로 한’ 〈아워 바디〉의 자영은 어떤 순간 언뜻 겹쳐 보인다. 서로는커녕 자기를 들여다보기도 피곤한 번아웃 상태의 여자들은 포기하는 것과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지 고민하고, 그 고민마저도 멈추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메기〉는 (천우희의 목소리를 가진) 변사 메기의 내레이션으로 개인병원에서 발견된 성관계 엑스레이 사진, 동시 다발한 싱크홀과 싱크홀에 의해 일자리를 얻게 된 청년들을 큰 줄기 삼아 (재즈가 아니라) 악보에 정교하게 쓰여 있는 엇박 리듬으로 나아간다. 간호사 윤영과 연인 성원,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캐릭터들 사이에서 영화는 시점의 차이가 주는 해석의 차이, 타인을 피로하게 하는 선의와 해맑고 기운찬 악의, 가까운 사람을 의심하게 되는 마음과 처음 보는 사람을 믿게 되는 마음, 가해자보다도 피해자를 궁금해하는 심리, 신념이 타인의 시선 앞에 흔들리는 모습 같은 것을 블록쌓기처럼 조립한다. 이 바지런한 컷들은 의심과 불안, 오해와 가해, 타성과 결함 사이를 점프한다. 영화는 불가능한 화해나 회복으로의 봉합 대신 선뜻 물러나 버리는 것을 택하며, 용서하기나 합리화하기 같이 일면 여성의 책임으로 주어지던 억지 화해를 끊어낸다.
      세 편의 영화를 굳이 부자연스럽게 엮어낼 마음은 없다. 그러나 세 편 모두 타인의 조력자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인물들, 두려움 없이 관계 맺지는 않지만 시작된 관계에 책임을 지려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되기’를 통해서 상대방의 세계로 이동한다. 메기와 눈을 마주치고 유인원 분장을 선뜻 걸치는 윤영, 현주의 표정과 자세, 현주가 머무는 공간을 점령하지 않고 뛰어드는 방식으로 전유하는 자영, 혜정의 육체가 되는 효연과 효연의 이름이 되는 혜정은 적극적인 방식으로 남이 되고, 그래서 도리어 자기 자신을 발견해낸다. 때로 이들은 서로를 그저 응시하고 카메라로 하여금 그 광경을 설핏 목도하게 하는데, 일방성 없는 응시의 마법적 에너지가 생성하는 여성들의 교감과 연대, ‘나와 너’의 발견은 이들 영화가 갖는 특별한 지점이다.
      이들이 하는 일은 일면 자신을 찾아내고 만나는 것이지만 그것이 혼자 광야에서 ‘이게 바로 나다’ 선언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건 아니다. 홀로 선 옆에 아무도 없을 필요는 없다는 듯이, 이들은 나와 내가 맺는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불쑥 ‘남자는 목표지향적이고 여자는 관계 지향적이지’하고 두루뭉술한 일반화가 등장하지는 않았으면 하지만, 사실 그보다 먼저 관계 지향적이라는 성향이 왜 ‘여성적’인 것으로 분류되는 동시에 한계짓는 말이 되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이를테면 독립다큐멘터리에서 ‘사적다큐’라는 말은 여성 창작자의 작품을 묘사하는 데만 쓰여왔다. 여성 감독은 본인과 본인의 가족을 담은 ‘사적인’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이 말은 여성 다큐멘터리스트들이 사회적인 이야기를 담지 못하고 지엽적이고 익숙한 것만을 다루는 것처럼 여기게 만들었다. 그러나 사적인 다큐멘터리가 나쁜가? 제아무리 사적이어도 어떻게 세상과 유리될 수 있을까? 사적다큐라는 말을 오염시킨 논조처럼, 여성 감독의 여성 서사 영화가 갖는 관계 지향적 성향을 무시하거나 비좁은 프레임 삼는 시선이 존재하는 건 아닐지 생각해볼 만하다. 동시에 이들의 관계 지향성이 어떻게 더 풍요로운 방식으로 소개되고 확장하여 이해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과 수다도 필요하다. 빌둥스로만bildungsroman은 여태 남성명사로 두고, 여성 인물의 성장은 그 관계의 복잡성과 낱낱의 차이점을 모조리 뭉뚱그려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정과 관계 지향적 웅앵웅’으로 묘사하며 한 카테고리에 밀어 넣는 일을 반복하는 건 좀 지겹다.
      결국 여자가 여자를 그린다는 것은 단순히 영화 속 여성 주체가 많아지는 데서 머무르는 게 아니라, 여성의 정체성이 더 촘촘하고 세밀하게 묘사된다는 데까지 이른다. 취업을 준비하는 여성, 아르바이트 노동자,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학교 안팎의 청소년, 전업주부, 보수화된 기성세대와 트랙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청년 세대, 자기를 정체화할 수 없는 이들까지 다양한 여자들이 스크린에 등장했고, 그만큼 이들이 서로 맺는 관계 역시 다양해졌다. (혈육이든 또 다른 형태이든지 간에) 자매, 모녀, 친구, 동료, 반목하는 사이, 같은 하늘 아래 살기에 완전히 타인이 될 수 없는 타인까지. 한 여성이 모든 여성을 대변할 수 없다는 것은 한계가 아니라, 더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이야기하게끔 하는 동력이 된다.

친구들
이 영화들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더 있다. 영화가 개봉한 이후의 움직임이다. 영화 자체의 경향성이나 형식적 특징은 아니지만, 이들이 관객에게 어떻게 도달했고 수용되었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2019년은 독립영화의 관객연구에 포함되어야 할 법한 해이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밤의 문이 열린다〉가 8월 15일, 〈우리집〉이 8월 22일, 〈벌새〉가 8월 29일, 〈메기〉와 〈아워 바디〉가 9월 26일―개봉한 다섯 편의 영화는 감독과 스태프, 배우들이 합동 GV나 상호 모더레이터 참여 등의 품앗이를 하며 시너지를 얻었다. 여기에 적극적인 관객 활동이 가세했다. 〈벌새〉의 벌새단, 〈메기〉의 메기떼 등 응원단 내지는 팬클럽이 생겼고, 이들은 영화를 ‘n차’ 관람하며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트위터부터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까지 여러 소셜미디어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작품을 홍보하며 적극적으로 이벤트에 참여하거나 이벤트를 기획하여 개최했다. 〈벌새〉의 관객 수 14만 돌파엔 물론 작품이 가진 에너지가 주효했고 배급사, 감독, 배우가 함께한 홍보 또한 큰 역할을 했지만 관객의 애정과 지지 역시 무시할 수 없는 힘이 됐다. 나아가 또래 여성 창작자들의 동료의식은 영화학교 동문 관계가 곧 친구이자 동료인 것이 당연한 듯 여겨지곤 하는 분위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동인’을 구성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데서 고무적이다.
      한편 지난해엔 독립극영화의 부지런한 기세와 더불어 독립영화에서 꾸준히 만날 수 있는 반가운 배우들과 장르를 오가고 매체를 넘나드는 배우들이 포개지고 교류하는 모습을 더욱 자주 마주치게 됐다. 극장 개봉작과 영화제 상영작을 통틀어 보면 더욱 그렇다. 연극 〈로풍찬 유랑극장〉(달나라동백꽃)에서 노래하던 강말금이 〈자유연기〉(김도영)에서 보여준 아코디언 연주가 〈찬실이는 복도 많지〉 캐스팅으로 이어진 것이나 수많은 무대에서 빛나던  예수정의 물끄럼한 시선이 무기력 대신 싸우고자 하는 의지로 차오르는 걸 보며 상업영화에서 그에게 주어지던 노모 역할이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지를 보는 일은 남다르다. 1993년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 쌍둥이 남동생과 차별대우를 받으며 자라야 했던 ‘후남’ 역으로 스타덤에 오른 김희애가 징벌 같던 삶을 되살아내고자 하는 중년의 윤희가 되는 것은 또 어떠한가. 누군가의 아역이 아니라 그 자체로 주역이 되는 배우들을 독립영화가 앞서 소개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 역시 중요한 특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박지후, 박서윤, 김주아, 안지호, 설혜인과 노정의, 이재인이 성장하는 모습을 간직할 수 있다는 건 꽤 멋진 일 같다. 박수연, 김새벽, 최희서, 안지혜, 노수산나, 한해인과 전소니의 담대함, 각자의 필모그래피를 쌓아가던 두 이주영이 〈메기〉에서 만드는 앙상블, 이승연이 〈벌새〉와 〈히치하이크〉에서 이마의 주름과 가만한 뒷모습으로 말하는 것, 〈아워 바디〉의 김정영의 입술이 망설이는 것들, 〈여름밤〉에서 만났던 한우연과 정다은이 〈비밀의 정원〉과 〈선희와 슬기〉에서 제 몫의 어려움을 견뎌내는 존재로 힘쓰는 것을 보았을 때 반가워할 수 있다는 것도 좋다.
      데이터로서의 독립영화가 축적된 정도에 비해 배우를 의미 있게 다룬 작업은 미미한 실정이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양의 한계가 있을 것이다. 독립극영화를 다루는 매체가 적으니 영화비평 자체가 많이 생산되지 못하고, 배우론은 자연스레 그보다도 적게 쓰이고 읽힌다. 여기에 배우 팬과 독립영화 팬을 구분 짓는 태도나 독립영화 배우를 비전문 배우로 지레 상정하고 이들의 연기를 평가 논외로 치는 시선도 이전보단 덜하지만 아직 남아 있다. 독립영화가 메시지나 신선함으로만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연출과 감흥을 논할 존재인 것처럼, 배우들의 연기 또한 조금 더 관찰되고 논의할 필요가 있다. 사라지지 않고 연기하는 이들의 존재가 각별하고, 배우의 스펙트럼이 다양해진다는 것은 의미 깊다. 더 많은 배우가 영화의 일원으로 소개되고 이야기되었으면 한다.

앞으로
2020년에도 여성 감독의 독립극영화가 적잖이 개봉할 예정이다. 2019년 영화제에서 소개된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 김초희 감독의 〈찬실이는 복도 많지〉, 임선애 감독의 〈69세〉, 박선주 감독의 〈비밀의 정원〉, 정가영 감독의 〈하트〉 등이 극장에서 관객을 만날 것이다. 2019년 개봉작과는 또 다른 이야깃감을 가진, 그러면서도 어느 면에서는 서로 친밀해질 여지를 갖는 영화들이다.
      〈남매의 여름밤〉에서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와 터울이 지는 남동생, 할아버지, 고모와의 여름날이 영화가 담는 일상은 순간순간 밀레니얼의 집단 기억처럼 느껴지면서, 여전히 충분하게 이야기되지 못한 것만 같은 시절을 되짚게 만든다. 여성 노인을 대상으로 한 성폭행과 세상의 불신에 의한 2차 가해를 다룬 〈69세〉와 과거의 성폭행 가해자가 잡힌 소식을 알게 되면서 10년 전 떠나온 고향과 자신 안팎의 상처를 돌아보게 된 여성의 이야기 〈비밀의 정원〉은 사건의 자극적인 면 대신 폭력이 지나간 자리에 드리우는 것들을 조심스럽게 보여주며, 뒤따르는 고통을 종착지로 삼지 않는 이들의 존엄을 헤아린다.
      당장 3월 개봉하는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관객과 어떤 화학작용을 일으킬지 사뭇 궁금하다. 이 영화가 영화 만드는 (변주로 시 쓰는, 소설 쓰는, 사진 찍는, 그림 그리는, 음악 하는 등등이 있다) 남자에 대한 영화가 천만 개 정도 만들어지고 나서야 등장했음에 큰 반가움을 느끼는 이들이 있을 법하다. 오랫동안 프로듀서로 일하던 (울 함량이 낮은 코트를 입고 ‘아, 시나리오 쓰고 있어요’하는 감독 지망 남자가 아니고!) 찬실은 크리스토퍼 놀란을 좋아하고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다는 남자에게 ‘엄마가 죽는데 어떻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냐고 항변하고, 〈아비정전〉에서 맘보 댄스를 추던 장국영의 모습을 닮은 귀신과 대화하며, 그토록 씩씩하면서도 자신의 것을 만들 수 있을지 망설이고 주저한다. 영화학교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극장 객석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영화잡지를 구독하고 팸플릿을 모으던 X부터 Z까지 여러 세대와 스펙트럼의 여자들이 찬실과 만나는 순간을 상상하게 된다. 〈하트〉에서 정가영 감독이 보이는 꾸준한 걸음도 재차 따라가 볼 법하다. 정가영의 능청을 (남자들이 그간 만든 건 다 어디로 가고, 마치 세상에서 그런 영화 처음 봤다는 듯이) “영화 만들기에 대한 영화… 입담… 성에 대한 솔직한 태도…” 운운하며 허공에 떠 있는 유체이탈 화법으로 소개하지 말고 영화적 재능으로 판단하는 목소리가 있었으면 한다. 그 무엇보다 이 영화들에게 필요한 건 보는 존재다. ‘유의미’가 언급되기 전에, 재밌고 없음이건 좋고 싫음이건 지지하고 지지하지 않음이건 동의와 반대이건, 더 많은 감상과 의견과 판단과 입장이 소리를 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