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테리알

ma-te-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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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서한

질식자의 편지: 영화문화의 현재에 관한 13개의 질문
질식의 날 - 못다 부친 편지
회신1. 질식자에게
회신2. <비평(권력)에 대하여> 의 질문
회신3. 쉰들러 리스트: 무너진 낙원에서 완전함 찾기

수신인: 씨네21
회신4. 형제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회신5. 답변?
회신6. 창작과 비평의 관계에 대하여.....
등단 = 검증?
회신7. 지리적 계급의 소멸을 함께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회신8. 공개서한에 대한 회신입니다.
ㄴRE: 별로 어렵지 않은 이야기
회신9. 질식자에게

비평? 우리는 웃고 있다




3호 2020년 8월

1. 특집/ 여섯 빛깔 스크린 너머: 한국퀴어영화제 20주년에 부쳐
2. 특집/ CRY, FUCK, BEAT UP(울고 하고 패고)
3. 특집/ “퀴어영화 연구는 정말로 노다지”: 『한국퀴어영화사』 책임편집 이동윤 인터뷰
4. 특집/ 한국 게이/레즈비언 영화와 호모-특정적 난관들
5. 특집/ 샷다 내린 퀴어랜드: ‘디스코팡팡’과 ‘방 탈출 게임’ 사이에서
6. 특집/ 뱀파이어의 딜레마: 누구를 위한 ‘착즙'인가?
7. 정전에 속하기, 정전 밖에 있기: 사프디 형제의 방법
8. 검고도 밝은: 조주현의 ‘흑공’과 스크린 안의 미로
9. 아이돌 기표의 '트랜스' 해부하기: NCT 127의 〈슈퍼휴먼〉과 아이돌 피상성
10. '접촉'에서 '접속'으로: NCT 127의 경우
11. 아직도 굳이 〈무한도전〉을 논할 필요가 있는 건
12. 듣는 여자: 〈그리고 베를린에서〉
13. 박세영의 무한 도시
14. 추상化와 픽션: 이소정의 영상 작업에 대해
15. 이미 흩어진 '밀레니얼 시네필’
16. 비천함, 실패, 나쁜 것에 관한 정직한 성찰(우회하지 마세요)

A BACK NUMBER

2호 2020년 3월  

1.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잠깐!)” 2019 한국 코미디 영화의 ‘비빔면적 경향’과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윤리’: 영화 ⟨극한직업⟩, ⟨걸캅스⟩, ⟨엑시트⟩를 중심으로
2. 봉준호 월드 유람
3. 창문과 창문 ‘너머’—오연진의 《Lace》와 백종관의 ⟨추방자들⟩
4. 갱신과 추동 사이에서 기업가∽노동자∽DIY로서의 작가
5. 구체적 세부: 2019년을 함께한 독립극영화 속 여자들
6. 특집/ 액체의 단상들: 리퀴드(liquid)와 플루이드(fluid), 그 언저리에서
7. 특집/ 15초 곱하기 240의 실험: 이소윤의 ⟨450⟩
8. 특집/ 보여주는 대신 믿게 하기: 박시우의 ⟨변신⟩
9. 특집/ ‘플레이스’와 ‘플레이’로 규명되는 영화 ⟨소녀의 기도⟩
10. 특집/ 연결하고, 순환을 주장하기: 독립영화협의회 낭희섭 대표 인터뷰
11. 영화제가 활짝 피었습니다—대안적 영화제를 상상하기 위한 생산적 망각
12. 디스코팡팡적 시네마: ⟨알라딘2019⟩ 4DX
13. 걷잡을 수 없는/겉잡을 수 있는: 2019년의 영상 작업을 통해서
14. 테니스와 바둑의 신체를 상상하며: 되받아치기와 이중구속의 비평


BACK NUMBER

1호 2019년 9월

1. 환영에 대한 두 가지 입장: ⟨라이온 킹⟩과 ⟨야광⟩
2. 유령의 기술: 차이밍량의 ⟨더 데저티드⟩
3. 괴물, 일레븐, 무전(하)기
4. 장재현의 보이 스카웃은 무엇을 단련하는가?
5. 비체(abject) 생산라인의 작동방식을 드러내는 무빙이미지들: Maotik의 ⟨FLOW⟩와 이은희의 ⟨Contrast of Yours⟩
6. 무한 가정해보기: 류한솔 작가의 ⟨크리크리 메리크리 스마스⟩를 중심으로
7. 픽션의 증언
8. 다음 세기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의 ⟨힘의 한 세기⟩
9. 특집/ 영화평론가 김소영 인터뷰
10. 특집/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한국 영화비평계의 86세대에 대해 반추하며
11. 특집/ 한국영화비평계의 00년대부터 지금까지


0호 2019년 5월

1. 철의 꿈, 믿음의 끝: 박경근의 ⟨철의 꿈⟩
2. 펼치고 다시 조립하기: 백종관 감독론
3. ⟨로맨틱 머신⟩에 대한 짧은 소고: 카메라-눈의 체험을 체험하기
4. 경험되지 않는 영화에 대하여



비평의 비평 2019년 11월

듀나와 이동진과 기타등등‘씨네21식 비평’ 비판오큘로에 대해서반면교사정면교사?



선언문




테니스와 바둑의 신체를 상상하며: 되받아치기와 이중구속의 비평

김병규(영화 평론가)



영화평론가 세르주 다네는 테니스 경기에서 이루어지는 서브와 리시브의 과정을 영화의 쇼트/리버스 쇼트의 원리에 빗댄 바 있다. 이쪽과 저쪽 네트를 오가는 왕복운동은 쇼트와 리버스 쇼트의 교환과 닮았다. 양쪽 코트에 선 두 사람이 있고, 두 사람은 라켓을 손에 쥔 채 공을 주고받는 몸짓을 형성한다. 두 사람 사이에 물리적인 터치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라켓이라는 매개를 통해 상대방이 보낸 힘의 강도를 체감하고 그에 상응하는 힘을 실어 공을 되돌려준다. 이런 물리적인 운동으로 보이지 않는 역학의 규칙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네트를 왕래한다. 매력적인 은유임이 분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영화에서 쇼트의 운동은 다네가 말한 것처럼 균질한 왕복 운동에 한정되는 것만은 아니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확대Blow up〉나 자크 타티의 〈축제〉에서처럼 공 없이 마임으로만 구현되는 테니스 게임의 외관이 묘사되거나, 제임스 베닝의 〈풍경 자살Landscape Suicide〉의 도입부 두 장면처럼 혼자 서브를 연습하는 남자와 반대편 코트에 떨어진 수많은 공이 쇼트/리버스 쇼트로 이어 붙기도 한다. 라켓과 공이 내 손에 붙들려 있는지 확증할 수 없고, 한쪽에서 공을 보내도 다른 한쪽은 침묵과 무관심으로 일관할 뿐인 풍경이 제시되는 셈이다. 이런 이미지들을 떠올려보면 다네가 이야기하는 이쪽과 저쪽의 균등한 교환이란 테마에 대단히 불분명한 측면이 내재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영화의 운동이 이처럼 균일한 원리로 소화되지 않는 것이라면, 영화에 비유될 수 있는 놀이는 테니스보다는 바둑일지도 모른다. 테니스와 마찬가지로 바둑은 외부와 분리된 하나의 경기장에 두 사람이 입회해 특정한 몸짓을 주고받는 놀이지만, 상대방과 물리적인 운동을 교환하지 않는 데다 손으로 둔 것을 끊임없이 눈으로 확인하는 과정이 첨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구석이 있다. 바둑을 두는 사람은 이미지를 구성하는 역할이면서, 이미지를 보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건 누적된 수순과 현재의 판단이 맞물리고, 눈으로 보는 것과 손으로 선택하는 것의 활동이 미묘하게 시차와 간격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바둑 두는 모습을 묘사한 몇몇 영화들의 장면을 떠올려보면 그 외관이 실은 무척이나 도착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버린다.
        이를테면, 오즈 야스지로의 유작 〈꽁치의 맛〉의 요릿집에서 바둑을 두는 두 동창 친구는 바둑판을 애매하게 자른 프레임 건너편으로 손을 뻗을 생각 없이 자기 진영 근처에 돌을 올려두는 행동을 쇼트의 리듬에 맞춰 일관되게 반복한다. 바둑판 앞에 앉은 두 사람이라는 시각적 구성과 바둑돌을 내려놓을 때 발생하는 청각의 운율이 그럴싸한 외형을 만들어내지만, 바둑이 전개되는 양상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본다면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몸짓으로 비친다. 게다가 여기서 두 친구의 목적은 히라야마(류 치슈)를 속이기 위한 능청스러운 연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바둑판은 그저 히라야마에게 (거짓)말을 하면서도 그의 시선을 쳐다보지 않을 구실로나 작용하는 것이다. 바둑을 두던 한 친구가 심지어 자기 차례를 까먹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지만, 바둑판과 가장 멀어져 있다. 이 장면을 유심히 보았음이 틀림없는 코고나다 역시 장편 데뷔작 〈콜럼버스〉에서 주인공 진(존 조)이 홀로 바둑판에 앉아 복기하는 장면을 짧게 삽입하는데, 이상하게도 바둑돌이 담긴 통을 자기 앞에 나란히 두지 않고 한쪽 통은 내 쪽에, 한쪽 통은 (상대가 부재한) 반대편 자리에 두고 있다.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경우라면 자연스러운 배치일 테지만, 지금은 혼자 두는 상황이다. 진이 다음 수순을 자연스럽게 착수하는 유일한 방법은 〈선생 김봉두〉에서 차승원 배우가 고스톱을 치면서 선보이는 1인 2역의 자리 바꾸기를 수행하는 것밖엔 없다. 물론 이 장면의 부조리함이 탄로 나기 직전에 코고나다는 재빨리 컷을 넘겨버린다. 이런 사례들 가운데 가장 도착적인 형태로 떠오르는 건 티엔 주앙주앙의 〈기성 오청원〉의 한 장면으로, 이 영화에서 판 위에 오른 바둑돌들은 심지어 전쟁을 일으킨 폭발에 휘말린 뒤에도 멀쩡히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묘사들이 그려내는 바둑의 규범은 다음과 같다. 바둑판 앞에 앉은 인물들은 바둑판 바깥의 영역은 물론 눈앞에 보이는 상대방과도 동떨어져 있고, 나아가 그 자신의 신체적 통합성도 확보하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새삼스럽게 영화의 원리와 관련된 이런저런 형식적 분석을 늘어놓으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와 닮은 규범으로 테니스가 아닌 바둑을 이야기하는 선택이 지시하는 바를 말하고자 조금 긴 우회를 택했다. 국내 영화비평 전반을 아우르는 논평이나 《마테리알》이 기획한 ‘비평의 비평’ 프로그램에 관한 코멘트를 구체적으로 거론하는 건 내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굳이 이야기하자면 오늘날 영화 담론의 상태는 ‘테니스를 치는 두 사람’보다는 ‘바둑판에 앉은 한 사람’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단순하게 말하면 그건 되받아치기(‘카운터’)의 감각이 희미해진, 외려 내재적인 이중의 간격이 심화되고 있음을 인지하는 몸이다. 더 쉬운 예를 찾자면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에서 영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나오는 한 남자의 몸을 떠올려도 무방할 듯하다. 머리가 두 개 달렸다고 착각한 이 남자는 두통이 심해지자 한쪽 머리를 총으로 쏴버렸다고 한다. 동시대 인접예술과 철저하게 경계를 구획하지도 못했고, 독립적인 예술 매체로 굳건히 발을 디디지도 못한 오늘날 영화의 불균형한 몸을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된다. 그리하여 영화를 감싸는 담론에는 대외적으로 영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무빙 이미지 전반을 다뤄야 할 의무를 할당받고, 내부적으로는 교환과 응답의 카운터가 이루어지지 않는 자족적인 무대에 놓이는 이중구속이 새겨져 있다. 비평계 전반에 관해 말하기보다는, 이런 주제를 둘러싼 몇 가지 의문을 거론해보고 싶다.
        ‘비평의 비평’ 토크에서 작지 않은 비중으로 다뤄진 이동진과 듀나, 그리고 《씨네21》의 ‘영화비평’에 관한 비판은 정밀한 의미에서 비판으로 성립되지 않았다고 본다. 발제문이 제기하는 비판의 강도나 지적하는 바가 정교하지 못했다는 말이 아니다.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이들이 서로 다른 무대에서 각각의 파이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자족성을 확보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아쉬움이 남는 건 발제문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평자와 글들은, 《마테리알》을 읽고 이 기획에 참석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문제적이라 여길 만한 표적이라는 데 있다. 이동진과 듀나, 《씨네21》의 영화 읽기를 향한 비판은 이 장소에 모인 사람들을 간단히 통합하고 그저 안전하게 발화된다. 비평이 근본적으로 무언가를 바라보며 자신의 좌표를 설정하는 작업이라면, 여기서 비판의 대상은 선명하지만 비판적 관점의 디테일은 명확하지 않다. 차라리 논의를 뒤집어 온갖 선명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왜 이동진과 듀나만이 가시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평자로 남았는지 고려해보는 건 어땠을까.
        이동진은 CGV 씨네토크 현장에서, 듀나는 트위터에서, ‘영화 읽기’는 《씨네21》 사이트와 씨네플레이 블로그에서, 덧붙이자면 《Filo》라면 폐쇄적으로 할당된 지면과 텀블벅 후원 사이트에서, 또는 최근의 독립영화라면 GV 현장에서 자족적인 공동체를 구성한다. 규모가 크든 작든 이들은 오인된 공동체의 수축성을 산출하고 있다. 나는 (...)의 토크를 듣는 것으로 충분해. (...), (...)선생님의 글과 강의를 ‘팔로우’하는 정도면 담론의 흐름을 따라잡을 수 있어. 하지만 불화가 없는 친밀함은 상상할 수 없고, 내재적 충돌이 없는 공동체는 공동체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불화와 충돌이 전제됐을 때만이, 공동체의 역량은 진정 생산적인 수준으로 확장된다(누군가 말한 것처럼 앙드레 바쟁은 평생 자신과 다른 견해를 주장한 이들과 협업하며 영화잡지의 부흥기를 이끌었다). 통상적인 리턴과 카운터의 글쓰기가 불가능하고, 영화비평이 내재적인 이중구속에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는 그 구속으로부터, 내재적 충돌을 수용하는 것에서 우리의 입장을 추동해야 할 것이다.
        이와 연관 지어 생각해볼 것은 영화비평 자체의 자족성이다. 《마테리알》의 발제문에는 저널리즘 영화비평이 영화를 ‘시놉화’하는 경향에 관해 문제시하는 대목이 있는데, 실상 그보다 더 두드러지는, 그리고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평자가 혐의를 피해갈 수 없는 습관이라면 영화를 ‘장면화’하려는 현상학적 집착이라고 느낀다. 발제문에서도 ‘장면을 묘사하기’라는 영화비평의 습관을 거론하고 있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발제문이 지적하는 “움직이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인용 불가능성의 문제”와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다. 짧게 말하자면, 장면을 구성하는 시각적 신호와 그것을 스크린으로 대면하는 나-관객의 영화 경험을 특권화하는 방법일 것이다. 국내 영화비평의 문장들에서 ‘윤리’가 통용되는 방식, ‘아우슈비츠’와 관련한 테마가 다뤄지는 방식, ‘카메라의 시선’과 같은 질료가 해석되는 방식이 모두 이런 ‘장면화’를 기준으로 설파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는 앞서 거론한 영화문화의 자족적 태도의 결함과 무관하지 않다. 좀 게으른 일이지만, 몇 년 전에 써둔 글의 일부를 아래 문단에 불러오고 싶다.

“특히 영화와 관객의 조우라는 사건을 둘러싸고 집요한 증명과 논증을 필요로 하는 장소에마저 (세르주 다네로 대표되는) ‘윤리’와 (하스미 시게히코가 거론하는) ‘표층적 체험’이 난입한 것은 영화를 감싸는 냉소주의의 연장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이런 식의 서술을 예시로 들 수 있다. 그것은 비윤리적이다. 나의 윤리적 판단이 카메라의 비열함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또는 그것은 감동적인 체험이다. 나의 동체 시력이 탁월한 운동성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대화와 관계의 확장이 끼어들 틈이 없는 다네와 하스미의 견고한 레토릭이 시네필에게 매혹적으로 여겨지는 데는 어딘가 음험한 면모가 드리워져 있다. 다네가 말한 재현을 다루는 영화의 임무와 하스미의 표층 이론이 매우 특수한 조건에서 비롯된 예외적인 이론적 사건임을 고려한다면 이처럼 범용한 ‘적용’의 사례들은 실로 의문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다.”[1]

단순히 ‘윤리’나 ‘운동성’과 같은 특정한 단어와 주제를 붙잡고 늘어지려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장면화’란 영화의 내부에, 쇼트의 표면 위에 작품의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순간이 존재한다고 믿는 태도다. 그러므로 여기엔 토론이 가능한 명제가 들어설 리 없다. 나의 감흥과 당신의 감흥, 나의 불편함과 또 다른 당신의 불편함이 있을 뿐이다. 어쩌면 국내 영화비평의 언어는 감흥과 흥분의 순간을 간직하는 데 몰두하면서, 성찰 또는 되돌아보기의 방법을 경시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점차 동시대 예술의 표면과 식별하기 어려워진 영화들을 보면서도 ‘장면화’의 습관은 유효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의문은 이러하다. 이제는 ‘윤리’나 ‘영화의 운동성’과 같은 단어들도 어느새 유행을 넘긴 것처럼 보인다. 그럼 지금의 영화 담론 안에서 이념을 주창하고, 담론장의 입회자들에게 견해를 요구하도록 하는 단어 혹은 관점은 무엇일까? 비평이 발생하려면 그런 공동적 인식과 개별적 입장의 출현이 선행되어야 한다(《오큘로》의 작업이 긍정적인 측면은 이런 맥락에서다). ‘윤리’나 ‘운동성’ 같은 표현들은 그릇된 방식이긴 했어도, 무언가 입장을 만들어내고 견해의 차이를 선별하는 대화를 이끌어냈다. 이제는 서로 다른 장면들을 쳐다보면서 각자의 근사한 ‘해석’들만 난무하는 건 아닐까?
        탁월한 시각과 비평적 아이디어를 갖춘 글은 분명 갈수록 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누락되는 영화와 관점들도 적지 않다. 하나의 예시로, 재작년 키라 무라토바가 사망하고, 그보다 앞서 그의 영화 세계를 주요하게 다룬 미하일 얌폴스키의 「영화와 의미의 탐구」가 출간되었으며, 마침내 작년에 키라 무라토바 회고전 상영이 최초로 개최되었지만 정작 무라토바의 영화를 다시 보고 조망하는 글은 찾아보기 힘들었다(모 지면에 이와 관련한 기획을 건의했지만 거절당했다). 영화문화 내부에서 카운터나 리액션이 직접적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철저한 외면에도 이후에 리액션이 발생하리라 믿는 건 논리적인 추론은 아니다. 우리의 담론이 변모하는 흐름과 교차하는 매체 정체성에 주목하는 데는 거리낌이 없으면서, 뒤늦게 도착한 영화들의 낯선 면모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이유는 무얼까. 역사적 관점이 폐기된 자리에 새로운 현상이라는 착시를 덧씌우는 것일까. 이 지면에서 답하기는 어려운 문제이다. 하지만 이 또한 분명한 불균형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의문을 더 덧붙이고자 한다. 꼭 《마테리알》을 향한 질문만은 아니지만, 지금 영화잡지는 ‘왜’ 만들어지는 걸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개별적으로 준수한 비평과 에세이들을 모아두는 잡지라는 준거점은 왜 필요한 걸까. 그게 필요한 장소여서? 《Filo》도 비평지면의 부재라는 나름의 진정성이 담긴 문제의식을 견지한 채 그럭저럭 근사한 비평을 수록하지만, 영화잡지로서 특별한 전략과 정책을 갖추지 못한 채 유명 비평가들의 이름값과 개인기에 철저히 의존하는 결과물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므로 정당한 문제의식과 신뢰할 만한 필진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렇다면 영화잡지는 무엇으로 근거를 획득할 수 있을까? 무엇이 영화잡지를 영화잡지로 받아들이게 하는 걸까? 대화와 응답의 계기가 촉발되었으니 단지 ‘재밌는’ 관점과 해석을 모아두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 지면이 그런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장소가 되길 바란다.




[1] 「시네필의 난감함에 대해」(https://blog.naver.com/satan_tango/2211537317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