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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서한

질식자의 편지: 영화문화의 현재에 관한 13개의 질문
질식의 날 - 못다 부친 편지
회신1. 질식자에게
회신2. <비평(권력)에 대하여> 의 질문
회신3. 쉰들러 리스트: 무너진 낙원에서 완전함 찾기

수신인: 씨네21
회신4. 형제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회신5. 답변?
회신6. 창작과 비평의 관계에 대하여.....
등단 = 검증?
회신7. 지리적 계급의 소멸을 함께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회신8. 공개서한에 대한 회신입니다.
ㄴRE: 별로 어렵지 않은 이야기
회신9. 질식자에게

비평? 우리는 웃고 있다




3호 2020년 8월

1. 특집/ 여섯 빛깔 스크린 너머: 한국퀴어영화제 20주년에 부쳐
2. 특집/ CRY, FUCK, BEAT UP(울고 하고 패고)
3. 특집/ “퀴어영화 연구는 정말로 노다지”: 『한국퀴어영화사』 책임편집 이동윤 인터뷰
4. 특집/ 한국 게이/레즈비언 영화와 호모-특정적 난관들
5. 특집/ 샷다 내린 퀴어랜드: ‘디스코팡팡’과 ‘방 탈출 게임’ 사이에서
6. 특집/ 뱀파이어의 딜레마: 누구를 위한 ‘착즙'인가?
7. 정전에 속하기, 정전 밖에 있기: 사프디 형제의 방법
8. 검고도 밝은: 조주현의 ‘흑공’과 스크린 안의 미로
9. 아이돌 기표의 '트랜스' 해부하기: NCT 127의 〈슈퍼휴먼〉과 아이돌 피상성
10. '접촉'에서 '접속'으로: NCT 127의 경우
11. 아직도 굳이 〈무한도전〉을 논할 필요가 있는 건
12. 듣는 여자: 〈그리고 베를린에서〉
13. 박세영의 무한 도시
14. 추상化와 픽션: 이소정의 영상 작업에 대해
15. 이미 흩어진 '밀레니얼 시네필’
16. 비천함, 실패, 나쁜 것에 관한 정직한 성찰(우회하지 마세요)

A BACK NUMBER

2호 2020년 3월  

1.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잠깐!)” 2019 한국 코미디 영화의 ‘비빔면적 경향’과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윤리’: 영화 ⟨극한직업⟩, ⟨걸캅스⟩, ⟨엑시트⟩를 중심으로
2. 봉준호 월드 유람
3. 창문과 창문 ‘너머’—오연진의 《Lace》와 백종관의 ⟨추방자들⟩
4. 갱신과 추동 사이에서 기업가∽노동자∽DIY로서의 작가
5. 구체적 세부: 2019년을 함께한 독립극영화 속 여자들
6. 특집/ 액체의 단상들: 리퀴드(liquid)와 플루이드(fluid), 그 언저리에서
7. 특집/ 15초 곱하기 240의 실험: 이소윤의 ⟨450⟩
8. 특집/ 보여주는 대신 믿게 하기: 박시우의 ⟨변신⟩
9. 특집/ ‘플레이스’와 ‘플레이’로 규명되는 영화 ⟨소녀의 기도⟩
10. 특집/ 연결하고, 순환을 주장하기: 독립영화협의회 낭희섭 대표 인터뷰
11. 영화제가 활짝 피었습니다—대안적 영화제를 상상하기 위한 생산적 망각
12. 디스코팡팡적 시네마: ⟨알라딘2019⟩ 4DX
13. 걷잡을 수 없는/겉잡을 수 있는: 2019년의 영상 작업을 통해서
14. 테니스와 바둑의 신체를 상상하며: 되받아치기와 이중구속의 비평


BACK NUMBER

1호 2019년 9월

1. 환영에 대한 두 가지 입장: ⟨라이온 킹⟩과 ⟨야광⟩
2. 유령의 기술: 차이밍량의 ⟨더 데저티드⟩
3. 괴물, 일레븐, 무전(하)기
4. 장재현의 보이 스카웃은 무엇을 단련하는가?
5. 비체(abject) 생산라인의 작동방식을 드러내는 무빙이미지들: Maotik의 ⟨FLOW⟩와 이은희의 ⟨Contrast of Yours⟩
6. 무한 가정해보기: 류한솔 작가의 ⟨크리크리 메리크리 스마스⟩를 중심으로
7. 픽션의 증언
8. 다음 세기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의 ⟨힘의 한 세기⟩
9. 특집/ 영화평론가 김소영 인터뷰
10. 특집/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한국 영화비평계의 86세대에 대해 반추하며
11. 특집/ 한국영화비평계의 00년대부터 지금까지


0호 2019년 5월

1. 철의 꿈, 믿음의 끝: 박경근의 ⟨철의 꿈⟩
2. 펼치고 다시 조립하기: 백종관 감독론
3. ⟨로맨틱 머신⟩에 대한 짧은 소고: 카메라-눈의 체험을 체험하기
4. 경험되지 않는 영화에 대하여



비평의 비평 2019년 11월

듀나와 이동진과 기타등등‘씨네21식 비평’ 비판오큘로에 대해서반면교사정면교사?



선언문



걷잡을 수 없는 / 겉잡을 수 있는: 2019년의 영상 작업을 통해서

콘노 유키(미술 비평가)



(...) 기록되지 않고 보이지도 않지만 그 곳에 분명히 존재하는 무언가를 보려고 합니다. - 이소의 개인전 《Off Sight》 서문에서

기억은 결코 잊혀지는 게 아니야- / 사라지지도, 없어지지도, 지워지지도 않아. 단지 맘속에 묻히는 것일뿐・・・ (...) - 박선호 〈얼룩-2〉에 등장하는 한 장면에서


2019년, 영상 작품을 이해하려면 시간을 꽤나 확보해야 했던 한 해였다. 동시에 거기서 어떤 ‘분위기’가 느껴졌다. 바로, 상영 시간을 확보해도 그 작품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는 구석이 남고, 그래서 생기는 뜬구름과 같은 것, 바로 그런 의미에서 말하는 분위기이다. 일반적으로 전시장에 소개된 영상 작업을 보고 분석할 경우 시간이 요구된다. 무슨 시간일까? 글을 쓰거나 머리로 생각할 뿐만 아니라 감상에 걸리는 시간을 말한다. 페인팅을 가까이서 또 멀리서 보는 데 걸리는 시간과 달리, 러닝타임을 따라 보는 필요가 감상에 요구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상 작업을 제대로 보려면 작품이 소개된 공간에서, 영상의 시작부터 끝까지 봐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본다 해도 영상 작업은 단번에 이해하기 힘들다. 내가 보기에 그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다.

1) 전시된 영상 작업이 처음과 끝이 순환고리처럼 돌아가면서 상영되기 때문: 우리는 보통 전시 공간에 들어가자마자 영상 작업의 어느 부분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2) 감상을 방해하는 요소가 전시와 감상자에게 있기 때문: 영상 작업 바로 옆에 위치한 다른 영상 작업, 혹은 관객의 휴대폰.
3) 이해하기 위해 몇 번 더 보려면 그만큼 재생 시간을 따라 봐야 하기 때문: 그야말로 ‘단번에 이해하기 힘들다’.
4) 매체 속성상 감상자가 작품을 기록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 페인팅을 여러 각도에서 찍어 놓고 오브제와 전시공간 배치를 함께 찍어 기록해 두는 것과 달리, 헤드셋을 껴서 감상하는 영상 작업의 경우 소리는 기록되지 않는다. “오! 바로 이 장면이다!” 해서 버튼을 눌렀는데 집에 돌아와서 확인해 보니 손 흔들림이 심한 컷으로 저장되어 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5) 하나의 영상 작업을 하나의 서사가 지배한다고 보기 때문: 파편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의 통합된 내용으로 전개되는 것으로서 작품을 받아들인다.

영상 작업의 매체적 속성과 전시 방법은 이처럼 수용자의 감상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전시장에 소개된 영상 작업은 단번에 제대로 소화하기 힘들다. 이와 같은 조건 하에 우리는 영상을 슬쩍 보고 다음 작업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이런 겉핥기식의 감상법은 영상 작업을 이해하는 데 ‘피상(皮相)적’ 태도로 종종 간주되면서 영상 작업을 이해하려면 걷잡을 수 없다는 인식을 우리에게 심어준다. 작품을 아무리 “잘 봤다”라고 해도, 작품이 어땠다는 판단을 내리는 데는 불확실성이 따른다. 저장해둔 이미지를 뒤져서 찾아보면 어느 정도 해소되지만 그 해소는 완벽하지가 않고, 기록하기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다 보고 나서 어떤 감상을 말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웹으로 공개된 영상이라면 다 보고 나서 다시 볼 수도 있고, 일시 정지와 10초 되돌리기가 가능하다. 그러나 전시공간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렇게 하기 힘들다. 심지어 수용자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경우라 해도, 손에 잡히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다. 눈 앞에 펼쳐진 장면이나 소리가 아무리 촬영 기록에 충실하다고 해도 우리는 그 장면에 들어가지 못하고, 스크린을 통해 전달되는 서사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다. 스크린이나 화면을 창문으로 간주하는 비유는, 그야말로 비유에 멈춘다. 실제 공간이나 경험과 다른 가상의 공간에서 우리가 마주 보는 영상(작업)은, 단순히 주제나 대상을 비춰 드러낼 뿐만 아니라 수용자에게 괴리감을 전달해준다.
        이 괴리감은 영상 작업에서 표면이 단순히 평면적이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영상 작품을 이해하는 데는 스크린이나 화면이라는 표면을 붙잡는 일이 전제된다. 그러나 이 표면은 매끈하게 펼친 것 그대로가 아니라 움직이고 변화하는 장이다. 장면과 효과가 복합과 분리를 거듭하기 때문에, ‘표면 읽기’는 쉽지 않다. 그 장에서 수많은 시각 정보의 배치가, 푸티지와 연출, 현실의 기록이, 그리고 청각 경험과 시각 체험이 합쳐졌다가 따로 있기를 반복한다. 이런 수용 감각은 영상 작업의 전시 방법뿐만 아니라 곧 영상 작업 자체의 속성 때문에 우리에게 걷잡을 수 없다는 판단을 가져다준다. 그럼에도 수용자는 (위 맥락에서 말하는) 표면, 바로 ‘겉’을 통해서만 작품을 읽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의 ‘걷잡을 수 없음’은 ‘겉 잡을 수 있음’을 통해서 전달되며 또 받아들여진다. 표면을 통한 이해, 즉 ‘겉 잡는’ 태도를 통해 우리는 걷잡을 수 없는 영상 작품을 비로소 감상할 수 있게 된다. 영상 작업은 피상(皮相)적(superficial) 혹은 (잘못 이해될) 피상(皮‘像’)적이라는 말, 즉 껍질(皮)-상(像) 자체의 성질보다는 시각적 이미지의 껍질에 머무르지만 다른 감각(사운드, 설치 구조, 기억 등)과 복합과 분리를 반복하는 장이다.
        이제부터 다루는 영상 작업은 이런 ‘겉 잡기’의 태도로 분석되었을 뿐만 아니라 작품을 통해서 표면이라는 장에서 벌어지는 복합과 분리를 보여주는 것들이다. 임유정은 이미지를 애호하는 방식을 작품으로 제시한다. 개인전 《petting frame》에 포함된 작품 중 〈TO ALL THE BEINGS I'VE LOVED BEFORE〉는 작가가 지금까지 관심을 가져온, 화자의 말을 빌리면 ‘덕질을 하던’ 아이돌, 가수, 배우, 축구 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이미지와 함께 보여준다. 전시장에 브라운관 TV로 소개된 이 영상 작품은 화자의 목소리로 대상을 좋아하게 된 계기와 마음이 식어간 내용에 대해 수집한 티켓이나 영상의 일부인 이미지들을 쭉쭉 넘기면서 이야기한다. 화자가 이들을 좋아하고 향유하는 방식은 이미지로 전달되는 정보에 의거하는데, “액정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며 내 눈앞에 있다는 것에 신기함을 느끼는 동시에 더 다가가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에 감질난다.”라는 말을 통해서, 그리고 영상에 나온 ‘늘 너와 같은 자리에 있을게’라는 팬 카드의 한 문장을 통해서 괴리감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그들이 서게 되는 무대(TV 프로그램, 영화, 경기장)와 보는 사람의 물리적 거리뿐만 아니라, 이런 거리감을 전제로 실체 없이 향유되는 점을 짚어주는 것이다.[1]
        한솔의 개인전 《언제나 내일》에 소개된 영상 작업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자기자신과 여러 사람의 시선을 통해 보여진다. 하얀 복장을 입은 다섯 명의 캐릭터들은 각기 신체적으로 불편한 존재로 그려진다. 가시가 많거나 팔이 지나치게 긴 모습으로 등장하는 이들은 영상에서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고 힘든 모습이다. 중요한 부분은 이들에게 시감각은 있다는 점인데, 영상에서 이들의 눈은 ‘쳐다보기’만 할 뿐이다. 표정도 드러나지 않고, 목소리와 자막으로 마음이 전달되지 않은 채 말없이 불편하게 움직이는 캐릭터는 〈spartan race〉에서 관객 또한 직시하기만 하는 상황으로 그려진다. 〈The long armed one’s dream〉에서는 어둠과 제목의 ‘꿈’이라는 단어가 암시하듯이, 이들에게 꿈은 어쩌면 허구일 수도 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잠을 깬 그들은 시각적으로 보지 못할 뿐 감각적으로 여전히 불편한 자기 자신을 알게 된다. 그들에게 어둠은 여전히 짊어지고 있는 불편함을 잠시 시각장에서만 벗어나게 해준다. 시커메지는 팔과 길거리에 놓인 잡동사니를 보는 캐릭터는, 꿈에서 깨어나―설상 꿈이 아니더라도―불편한 자신을 감각적으로 아는 존재이다. 그들에게 꿈은 허구가 아니라 시각장이 지배하는 현실의 복사본일 뿐이며, 어둠은 적나라하게 시야에 비춰지는 대낮보다 나와 주변 모두의 시선을 잠시 돌리는 시간이다.


임유정, 〈TO ALL THE BEINGS I'VE LOVED BEFORE〉, 00'07'23


한솔, 〈The long armed one’s dream〉, 00’03’25


김효재, 〈SSUL〉, 00’04’00’

임유정의 작업에서 이미지로 향유된 대상과 한솔의 작업에서 시각적으로만 인식되는 캐릭터는 공통적으로 본체나 실체를 표면적으로 보고 인식한다. 한편 김효재의 작품은 시각적인 (겉)모습이 확산되는 양상을 포착한다. 개인전 《디폴트》에서 소개된 〈SSUL〉은 퍼져 나가는 인물의 얼굴 이미지를 식별 가능한 표본적 대상에서 특정할 수 없는 대상으로 파편화하여 변용한다. 익명적으로 누구나 이미지를 다루고 소비하는 시대[2]에 작가는 이미지의 익명성을 찾음으로써 탈출구를 찾는다. 작품에서 페이스 스와핑과 파편화를 통해 특정할 수 없는 모습을 증식하여 누구의 얼굴인지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방법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상현실과 파편화의 전략은 바로, 이 증식하기이다. 특정할 수 없는 얼굴로서 작품에 파편적이거나 덧씌운 가면처럼 등장하는 모티프는 기꺼이 익명적으로 사용되기를 기다리는 분신술―나누어진 신체거나, 재현된 신체거나―을 보여준다[3]. 아니면 〈Z〉에서 들리는 “여보세요”나 〈SSUL〉에 등장하는 NARA와 입금 확인을 알려주는 목소리처럼 (전시 제목이 시사하듯이) 어떤 (청각적) 용도의 기본값(default)으로 사용됨으로써 특정성을 벗어난다.


송민정, 〈Talker〉, 00’18’30

김효재의 작업이 대상을 특정할 수 없는 지점으로서 시청각적으로 다루었다면 송민정의 작품은 목소리와 시각 정보 사이의 분리에 근거한 복합을 다룬다. 작품 〈Talker〉는 여성과 남성의 화자가 목소리로 등장하여 같은 영상 이미지에 다르게 목소리를 입힌다. 비교적 느린 템포로 전개되는 영상에서 그는 얼굴이 등장하지 않는 주인공의 몸짓을 말하는 목소리에 따라 다르게 보여준다. 이때 화자는 말로는 다르게, 그러나 동일한 장면을 통해 시각적 맥락에 따르고 있다. 예를 들어 식사를 챙기는 장면이나, 외출했다가 집으로 들어오는 장면의 흐름은 목소리의 주체가 달라도 비슷하게 말과 내용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시각적 정보 외에 감지되는 점에서 수용자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비단 내용뿐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뇨끼를 만드는 장면과 이에 대한 묘사는 거의 같은데, 먹고 나서 “맛이 없다”는 반응과 “꿀맛”이라고 말하는 반응으로 나누어진다. 이런 차이는 시각적 장면을 다르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미지를 볼 때 무엇을 따르는지를 부각시켜준다. 동양계 여성(으로 보이는 인물)과 영국식 발음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유추되는 겉과 내부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남성 화자의 “내 입에 완전히 밀착된 음성의 질감은 어떤 장소에서 거의 손실된다”라는 말을 통해서 사진으로 기록되었을 때 영상 작업이 사운드(목소리) 없이 박제된다는 점을 포착해주는 것이다.
        음성의 질감은 여성 화자에게 또 다른 ‘어떤 장소’로 전개된다. 그곳은 남성 화자가 스크롤 다운하면서 댓글을 읽는 노트북 화면이 아니라, (다와다 요코의 글을 읽으면서 말하는) 어느 때보다 한국말을 편하게 꺼낸 외국이라는 장소다[4]. ‘모르는 언어를 의미가 전달되지 않은 채 듣는 감각’에서 말의 의미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음성의 질감으로 남는다. 그런 의미에서 화자에게만 보이는 증강현실 애플리케이션 허피(Huppy)는 관람자에게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고 음성만으로 전달되면서, 시각 정보와 그것이 전달해주는 의미를 받아들여 화자가 허피를 따르는 것을 부각시킨다. 허피가 제공하는 안내는 우리에게 음성의 질감으로밖에 전달되지 않지만, 증강현실로 띄워진 강아지 캐릭터의 명확한 표정은 영상 작업 중간에 삽입된 광고가 그렇듯이 의미를 전달하고 화자가 그것을 따르게 한다.
        이처럼 그의 작품은 동일한 제목의 두 영상이 잇따라 재생되면서 목소리와 시각 정보, 그리고 음성의 질감과 말의 의미가 사실상 분리된 지점을 포착한다. 한편 김희천의 작품 〈탱크〉에서 목소리와 시각 정보 또한 각각 다른 공간에서 나와 스크린에 복합(적으로 놓이게) 되는데, 여기서 각 요소들은 한 평면에 ‘통합’되지 않은 채 ‘배치’된다.[5] 〈탱크〉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헤엄치는 훈련을 위해 들어가는 시뮬레이션을 감상자가 작품을 볼 때 몰입하는 경험과 연결하는 점이다. 시뮬레이션이 진짜와 같은/동일한 체험이듯이, 영상 작업에서 우리는 사운드 효과와 함께 전개되는 컬트 집단 댄스 장면을 통해 몰입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막판에 이 몰입의 상황은 깨지고 만다. 수용자가 듣는 사운드, 말하자면 물속에 들어가 숨을 쉬는 소리와 성형 애플리케이션으로 찍은 자동차를 타고 있는 인물의 소리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에서 스크린 평면의 역할은 관객을 몰입시키는 것에서 파편화된 감각의 배치를 제시하는 것으로 전환된다.


김희천, 〈탱크〉, 00’01’44


이주연, 〈위치 완더 휘슬〉, 00’04’51

〈탱크〉에서 감각들의 불일치가 한 화면에서 벌어진다면, 이주연의 작품 〈위치 완더 휘슬〉은 장면과 컷의 이동에 따라 결말을 예언하는 불길한 이미지로 연결되고 또 종결된다. 제목에 등장하는 세 영단어는 한국어 문제집에 제시된, 외국어를 한글로 올바르게 표기하는 법을 보여주는 예시 가운데 비슷한 철자(Witch, Wander, Whistle)라는 이유만으로 같은 줄에 등장하게 된 것들이다.[6] 철자가 비슷하다는 이유를 제외하고 연결 고리가 없(어 보이)는 단어들은, 화자의 “이제 곧 세상이 끝난다고 한다”라는 말[7]을 통해서 영상과 함께 불길하게 전달된다. 그런데 이 불길함은 극적이지 않다. 영상 중간에 등장하는 재해 장면은 지진을 알리는 사운드와 CG로 그려지지만 “우리 동네는 백날 흔들려도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라는 (편지의)말[8]을 따르듯이 큰일이 벌어지지 않은 채 어색하게 얽힌 채 전개된다. 이제 영상은 "반전 연합 반대"의 목소리, 그리고 "안심과 안전"을 강조하는 광고 속의 메시지가 얽히는 장소가 되고, 화자의 독백과 장면을 연결지으면서 다른 요소들을 접속시켜 나간다. 이는 궁극적으로 “그것들은 더 이상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움직였다.”라는 말을 통해서 (이미 언급한) 한 화면상의 ‘배치’나 ‘통합’과 다르게 개별 요소들이 얽히는 흐름으로 전달된다.


정유진, 〈해적판미래〉, 00’00’34

정유진의 작품 〈해적판미래〉의 경우, 영상의 흐름은 드러남을 통해서 이미지를 다시 해석하게 한다. 재난 상황 통제의 현장처럼 보이는 첫 장면은 영상이 끝나면서 덧없이 비춰지는 불꽃놀이의 현장으로 드러나고, 학자처럼 보이는 인물이 밝히는 견해는 사실 미술작가의 것으로 드러난다. 기존에 유통되는 이미지를 소재 삼아 작업해 온 작가는, 개인전 《해적판미래X인간백해무익가든》에서 드러남에 의한 전환을 통해 오독에서 진실로 관객을 접근시킨다. 이는 그의 설치 작업인 〈인간백해무익가든〉을 감상하는 데도 작용한다. 어두운 실내에서 동선을 따라 자리에 앉아 상영되는 작품을 보고, 불이 켜지면서 〈인간백해무익가든〉의 실체는 더 명료해진다. 기록된 영상들이 어떤 순서를 거쳐 진실로 비춰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짜와 진짜 식물로 구성된 정원은 수용자의 자리를 지배하면서 상영 전과 후로 다르게 보여진다. 이 가짜와 진짜의 공존은 SF적인 미래를 쉽게 연상시키지만, 사실 진짜 재난처럼 보이고 또 유통되는 오늘날의 통신환경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상에서 재난센터의 연출된 폐허와 쓰나미 피해를 입은 후쿠시마 해안가에 남은 학교의 잔재가 이미지로 동일하게 비춰지듯이, 〈인간백해무익가든〉의 식물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정유진의 작업이 가짜와 진짜의 허물로 남는 상에 대해 전달해준다면, 최영인의 영상 작업은 사건을 기록하는 유물에 대해 다룬다. 영상 작업 〈낙서하는 수문장〉에서 묘사되는 비행기 추락 사건에서, 유물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비행기가 돌을 맞아 떨어진 세계에서 시신은 계속 돌을 맞고 있어 다가가기가 어렵고, 나중에 잃어버린 신체 부분을 모형으로 만드는 장례문화가 탄생한다. 영상에서 등장하는 오브제는 이러한 이야기를 대변해주는 역할을 하는데, 실제 전시장에 놓인 양말의 오브제는 영상 속에서 복제된 유물로 등장하지만, 전시장에서 작품 내의 서사인 허구를 받쳐 주는 증거로 작동한다. 그러기에 “모형은 옛것으로 전시된다”라는 대사(자막)에서 ‘옛것’이란 사건 당시의 유물뿐만 아니라 영상이 전달하는 이야기 혹은 내러티브 또한 가리킨다. 모형을 (작품으로) 전시장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영상의 지표적 역할뿐만 아니라 영상의 내러티브를 진실처럼 보여주는 것이다.


최영인, 〈낙서하는 수문장〉, 00’04’31, 사운드 없음

최영인의 작품에서 모형이 과거의 사건을 전달해줄 뿐만 아니라 영상 작품의 내러티브를 받쳐주는 역할까지도 맡는 한편 주현욱의 〈다우징 앳 더 마스〉은 화성을 무대로 가상의 투어를 전개한다. 〈낙서하는 수문장〉에서 모형이 어떤 (내러티브 속) 사건과 내러티브를 담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우징 앳 더 마스〉에서는 화성이 의미를 담는 장으로 등장한다. 눈이 없고 입과 귀만 달린 존재 ‘마스 다우저’의 안내를 통해서 수용자는 화성의 풍경을 보게 된다. 많은 관광 산업이 그렇듯이 그의 작업에서도 화성은 힐링을 위한 매력적인 공간으로 소개된다. 이상향처럼 보여지는 화성의 모습은 작품이 전개되면서 경사나 온도 등 환경을 고려하여 인간에 의해 개척되는 대상으로 변해간다. 초반에 순수하게 비춰지는 화성의 이미지는 나중에 인간의 손이 필요한 공간으로 바뀌어 등장하게 된다. 풍수지리나 주술사, 전쟁터, 이상적 이미지를 통해 인간이 개입되지 않은 이곳이 역설적이게도 이상적인 공간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초반 내레이션에서의 “이치를 아득히 초월한 산맥”이나 “점처럼 작은 인간의 번뇌를 무상하게 만듭니다.”라는 표현은 화성의 순수함을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이용한다. 따라서 마지막 장면에서 마스 다우저가 하는 “한 줌의 의미도 뿌리 내려 본 적 없는 순수의 땅에서 당신을 기다린다.”라는 말에서 ‘순수의 땅’이란, 순수함을 보여주기 위해 순수함을 거부하는, 즉 인간의 이념이나 등산 코스처럼 인프라로서 주어지는 곳이다. 초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단순히 듣는 사람에게 편안함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관광에 대한 관심으로 그들을 유도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주현욱, 〈다우징 앳 더 마스〉, 00’13’57


배한솔, 〈불안정대기〉, 00’06’02

〈다우징 앳 더 마스〉에서는 화성의 환경이 수치화되어 시각적으로 나올 때 바로 인간의 편의를 위한 참고 자료가 된다. 이런 수치화와 시각화는 배한솔의 작업 〈불안정대기〉에도 드러난다. 가상의 지구 위에 나타나는 수치/데이터에 따라 비행기나 대기의 방향은 매핑된 시각 정보를 통해서 전달된다. 이와 같은 정보의 표상은 사실일 수도 있지만, 이 사실이 어떤 경우에는 생산될 수 있다는 점을 〈잠망경〉에서 보여준다. 목소리가 아닌 자막으로 보여지는 “확실히 그들은 아마추어에 가깝겠지만, / 그건 그렇게 중요하진 않았다. / 오히려 거듭하여 숙련된 동작과 말들은 / 그들이 갖는 강박과 다름없었다.”라는 말은 가짜 난민을 반대하는 이들이 오히려 어떤 부분에서는 가짜 난민과 같은 궤도에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즉 영상에 등장하는 어린아이는 과연 어떤 정치적 신념을 통해 그 집회에 나왔을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아마추어에 가까운 입장에서 정치에 영향을 행사하는 점이다. 기록된 장면들이 보여주듯이, 일종의 퍼포먼스로 진행되는 집회는 국민 의례를 스킵하고 진행된 사실보다 휴대전화로 촬영하고 유통시키는 일이 중요해진다. 이 이미지는 〈불안정대기〉에서 미세하게 변화하고 어떤 경우에 ‘심미적으로’ 나타나는 데이터 값과 마찬가지로, 현실 세계에 어떤 힘을 행사한다. 데이터를 통해 조정하는 일이 어떤 세력을 키우는 한편 다른 세력을 억누르듯이, 사실은 생산되기만 하면 된다―그들이 아마추어건 아니건 간에.
        이미지의 유통과 소비는 오늘날 이미지가 현실 세계에서 나온 복사본이라는 사실의 인식보다 더 강력하게 현실 세계에 작용하는 촉매가 되었다. 인간이 데이터값의 수용과 유통 및 확산 주체가 되는 시대에 표면적인 이미지의 힘에 좌우되는 경우도 드문 일이 아니다. 김희욱의 영상 작품 〈슬픔채널〉은 타인의 슬픈 사연을 말하고 답하는 방식으로 작품이 전개되는데, 화면에 등장하는 배우는 이야기를 과장해서 보여주지 않는다. 여기서 화자의 말하는 톤과 배우의 비교적 차분한 연기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작가가 말하기에, 대사는 표면적이고 사회적으로 다뤄지는 슬픔이 콘텐츠화된 형태를, 배우의 움직임은 그 이면/인간의 내면에서 저러한 콘텐츠를 마주했을 때 생겨나는(혹은 항상 내면에 존재하는) 어떤 의식과 감정의 흐름을 표현한[9] 이 작품에서 눈여겨볼 지점은 배우와 화자라는 구성으로 '광고'가 상영되는 점이다. 영양제, 미술 치료원을 소개하는 광고는 타인의 사연을 말로 전달하는 과정보다 더 디테일하게 전달된다. 빠르게 사연을 말하고 답하는 방식과 달리, 광고는 몰입감을 제공하면서 슬픈 감정과 다른 소비를 연결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동영상 플랫폼에서 보는 ‘뉴스를 보고 충격받은 나의 모습’이나 SNS에서 올린 ‘내 기분이 별로다’라는 포스팅에 따라오는 관련된 광고와 마찬가지로, 작품은 콘텐츠가 되어버린 슬픈 사연과 서사적으로 전개되는 광고의 역학관계를 포착한다.


김희욱, 〈슬픔채널〉, 00’14’08


이소의, 〈Off Sight〉, 00’02’43

이제 도입부에 인용한 두 텍스트를 보자. 이소의의 개인전 《Off Sight》에 포함된 영상 작업 〈Off Sight〉와 사진이 저장된 인스타그램 계정[10]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또 무엇이 보이기 시작할까. 사진과 영상이라는 명확한 기록물에서 빠져나간 요소들, 그것은 기억이나, 수다를 떤 내용이나, 풀냄새와 같은 감각들일 수 있다. 이것들의 간극을 메우(지 못하)는 채 기록물은 모두 낭만적으로 비춰진다. 그러나 이 낭만은 사실 어떤 것들이 빠져나간 허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허물에서, 작가가 “기록되지 않고 보이지도 않지만 그 곳에 분명히 존재하는 무언가를 보려고 합니다”라고 서문에서 언급하듯이[11], 우리는 겉을 통해 텅 비어버린 내부를 유추하게 된다. 이소의의 작업에서 추억이나 이야기가 빠져나간 것과 마찬가지로 박선호의 작품 〈얼룩-2: Hard and Soft〉 또한 일종의 낭만을 보여준다. 편지를 읽듯 자막으로 등장하는 화자는 대상의 출처 혹은 좌푯값이 어느 위치에 찍혔는지 파악하려고 하지만, 스스로 “이 편지가 너에게 전달이 될까?”라는 의문을 품으면서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쓴다. 수용자 또한 남아 있는 이미지들을 영상으로 보면서 〈얼룩-2: Hard and Soft〉는 음악과 함께 끝나버린다.
        작품에 2019년, 혹은 2010년대에 대한 대표성이나 비평성을 과도하게 부여하고 싶지는 않지만[12], 필자가 작년에 영상 작품을 체험 혹은 경험한[13] 방식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겉잡기’라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다룬 예시들은 어떤 면에서, 정확히 어떤 ‘면’에서 관객들의 시선을 몰입과 다른 태도로 집중시킨다. 자명하게 기록된 몇 장의 컷과 순간적으로 타이핑으로 기록한 내용들을 통해 2019년의 영상 작품을 매핑하려고 했지만, 쉽진 않았다.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공유받은 링크나 동영상 파일의 겉을 훑어보니, 그것이 더 다양하게 독해 가능한 장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겉, 바로 경우에 따라 이미지나 상, 사진, 모습, 자막이라고 말하는 ‘겉’에 집착하면서 보다 보면, 서사나 내러티브, 그리고 목소리 사이의 빈틈을 찾게 된다. 전시장이나 서사적 구조로 순간적인 몰입을 유도한다고 해도, 지금까지 언급한 작품들은 겉과 내부 사이의 괴리(혹은 빈틈)를 보여준다. 이는 작품의 제작 방식에 기술이나 표현으로 반영되어 있다. 어떤 경우에 대상을 향유하는 방식, 목소리와 이미지, 여러 정보들의 통합 아닌 배치, 의미가 주어지는 것과 순수한 것, 데이터값과 현실 세계의 역학 관계 등등. 우리는 이미지의 평면에서 출발하여 거기를 떠나지 않은 채 이미지의 장에 머물게 된다.


박선호, 〈얼룩-2〉, 00’06’35





[1] 덧붙여 말하자면, 목소리와 함께 그려내는 이미지의 속도감은 화자의 취향 변화가 쇄신되는 것을 보여주면서 프레임의 내부는 〈petting, patting 〉에서 마지막에 나오는 휴대폰 게임 어플리케이션처럼 예측할 시간도 없이 빠르게 움직여 고정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더 다가가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에 감질난다.”라는 말은 브라운 관 티비에 스크린과 달리 작게 나온 영상과 함께, 관심의 변화를 빠르게 목소리로만 등장한 화자에 대한 거리감으로 전달된다.

[2] 이는 작품 〈SSUL〉에서 NARA의 얼굴이 일본 하라쥬쿠의 편집샵에서 프린트되어 티셔츠로 판매된 에피소드와 대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단타적으로 돌고 돌며 수치화되고 / 하나의 인격체 였다가 우상이었다가 그냥 / 누군가의 배경사진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 프린트되어 동양의 힙이다 라며 팔려나가고 /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 따라서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편집샵’은 단순히 여러 브랜드(brand)의 상품을 파는 곳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브랜딩(blending) 하는, 문자 그대로 ‘편집’의 의미로 전달된다.

[4] 여성 화자의 공간 설정은 파리이며 말은 영어로 말해진다.

[5] ‘배치’와 ‘통합’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탱크〉 전시 도록에 수록된 「눈물은 물속에서 흐르지 않는다: 평면 위의 순간적 무질서로 질식시키기」(pp. 131-133)를 참조 바란다.

[6] 작가가 쓴 작품 설명을 참조.

[7] 작품에서 화자는 일본어로 말하고 자막은 한글로 나온다.

[8] 독백은 다음 세 파트로 구성된다. 1) 후쿠시마의 방사능 누출 사고 현장에 투입된 로봇과 인간의 수명을 비교하는 이야기, 2) 페터 한트케의 소설 《반복》의 처음 부분과 끝 부분, 3) 도쿄에 있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9] 작가 김희욱과의 서신 교환(2020년 1월 4일)에서.

[10] @offsight_offsight에서 확인할 수 있다.

[11] 작가가 쓴 전시 서문에서 인용.

[12] 그렇기 때문에 전시 제목의 부제가 2019년의 영상 작업에 ‘대하여’가 아닌 ‘통해서’로 쓰였다.

[13] 여기서 필자는 체험과 경험을 구분하여 쓰는데, 이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1939)에서 구분되었고 경험(Erfahrung)이 개인적인 기억과 결부된다면, 체험(Erlebnis)은 피상적으로 주어지는 충격을 가리킨다. 폴 비릴리오(Paul Virilio)의 분석에서 체험은 시각 정보와 정보 전달 속도와 결합된다고 볼 수 있는데, 오늘날 영상 작품을 감상할 때 이 두 가지 중 한 가지만 작동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극장의 형식과 달리 보여질 때 관객이 중간에 휴대폰을 꺼내고 메시지를 주고받기도 하고, 이런 상영과 감상 방식의 변화에 주목하여 제작되는 작품 또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