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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서한

질식자의 편지: 영화문화의 현재에 관한 13개의 질문
질식의 날 - 못다 부친 편지
회신1. 질식자에게
회신2. <비평(권력)에 대하여> 의 질문
회신3. 쉰들러 리스트: 무너진 낙원에서 완전함 찾기

수신인: 씨네21
회신4. 형제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회신5. 답변?
회신6. 창작과 비평의 관계에 대하여.....
등단 = 검증?
회신7. 지리적 계급의 소멸을 함께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회신8. 공개서한에 대한 회신입니다.
ㄴRE: 별로 어렵지 않은 이야기
회신9. 질식자에게

비평? 우리는 웃고 있다




3호 2020년 8월

1. 특집/ 여섯 빛깔 스크린 너머: 한국퀴어영화제 20주년에 부쳐
2. 특집/ CRY, FUCK, BEAT UP(울고 하고 패고)
3. 특집/ “퀴어영화 연구는 정말로 노다지”: 『한국퀴어영화사』 책임편집 이동윤 인터뷰
4. 특집/ 한국 게이/레즈비언 영화와 호모-특정적 난관들
5. 특집/ 샷다 내린 퀴어랜드: ‘디스코팡팡’과 ‘방 탈출 게임’ 사이에서
6. 특집/ 뱀파이어의 딜레마: 누구를 위한 ‘착즙'인가?
7. 정전에 속하기, 정전 밖에 있기: 사프디 형제의 방법
8. 검고도 밝은: 조주현의 ‘흑공’과 스크린 안의 미로
9. 아이돌 기표의 '트랜스' 해부하기: NCT 127의 〈슈퍼휴먼〉과 아이돌 피상성
10. '접촉'에서 '접속'으로: NCT 127의 경우
11. 아직도 굳이 〈무한도전〉을 논할 필요가 있는 건
12. 듣는 여자: 〈그리고 베를린에서〉
13. 박세영의 무한 도시
14. 추상化와 픽션: 이소정의 영상 작업에 대해
15. 이미 흩어진 '밀레니얼 시네필’
16. 비천함, 실패, 나쁜 것에 관한 정직한 성찰(우회하지 마세요)

A BACK NUMBER

2호 2020년 3월  

1.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잠깐!)” 2019 한국 코미디 영화의 ‘비빔면적 경향’과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윤리’: 영화 ⟨극한직업⟩, ⟨걸캅스⟩, ⟨엑시트⟩를 중심으로
2. 봉준호 월드 유람
3. 창문과 창문 ‘너머’—오연진의 《Lace》와 백종관의 ⟨추방자들⟩
4. 갱신과 추동 사이에서 기업가∽노동자∽DIY로서의 작가
5. 구체적 세부: 2019년을 함께한 독립극영화 속 여자들
6. 특집/ 액체의 단상들: 리퀴드(liquid)와 플루이드(fluid), 그 언저리에서
7. 특집/ 15초 곱하기 240의 실험: 이소윤의 ⟨450⟩
8. 특집/ 보여주는 대신 믿게 하기: 박시우의 ⟨변신⟩
9. 특집/ ‘플레이스’와 ‘플레이’로 규명되는 영화 ⟨소녀의 기도⟩
10. 특집/ 연결하고, 순환을 주장하기: 독립영화협의회 낭희섭 대표 인터뷰
11. 영화제가 활짝 피었습니다—대안적 영화제를 상상하기 위한 생산적 망각
12. 디스코팡팡적 시네마: ⟨알라딘2019⟩ 4DX
13. 걷잡을 수 없는/겉잡을 수 있는: 2019년의 영상 작업을 통해서
14. 테니스와 바둑의 신체를 상상하며: 되받아치기와 이중구속의 비평


BACK NUMBER

1호 2019년 9월

1. 환영에 대한 두 가지 입장: ⟨라이온 킹⟩과 ⟨야광⟩
2. 유령의 기술: 차이밍량의 ⟨더 데저티드⟩
3. 괴물, 일레븐, 무전(하)기
4. 장재현의 보이 스카웃은 무엇을 단련하는가?
5. 비체(abject) 생산라인의 작동방식을 드러내는 무빙이미지들: Maotik의 ⟨FLOW⟩와 이은희의 ⟨Contrast of Yours⟩
6. 무한 가정해보기: 류한솔 작가의 ⟨크리크리 메리크리 스마스⟩를 중심으로
7. 픽션의 증언
8. 다음 세기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의 ⟨힘의 한 세기⟩
9. 특집/ 영화평론가 김소영 인터뷰
10. 특집/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한국 영화비평계의 86세대에 대해 반추하며
11. 특집/ 한국영화비평계의 00년대부터 지금까지


0호 2019년 5월

1. 철의 꿈, 믿음의 끝: 박경근의 ⟨철의 꿈⟩
2. 펼치고 다시 조립하기: 백종관 감독론
3. ⟨로맨틱 머신⟩에 대한 짧은 소고: 카메라-눈의 체험을 체험하기
4. 경험되지 않는 영화에 대하여



비평의 비평 2019년 11월

듀나와 이동진과 기타등등‘씨네21식 비평’ 비판오큘로에 대해서반면교사정면교사?



선언문




영화제가 활짝 피었습니다
—대안적 영화제를 상상하기 위한 생산적 망각

최이다(창작자)



지금부터 소개하는 꽃이 무엇인지 알아맞혀 보시라. 첫째, 이 꽃은 잎과 꽃잎의 숫자가 피보나치 수열을 이룬다. 식물이 황금비를 선호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새로 나는 잎이 앞선 잎에 가려지지 않고 햇빛을 얻기 위한 생존 방식이라는 게 가장 유력한 이유라고 한다. 둘째, 이 꽃은 정감있게 생겼다. 희고 부드러운 꽃잎에 빙 둘린 노란색 통꽃을 보고 있노라면 계란프라이가 떠오른다. 이렇듯 친근한 인상은, 셋째, 아마도 뿌리를 여기저기 잘 내리는 특성 탓에 생긴 것일지 모른다. 설령 실물로 보지 못했더라도 사진이나 삽화, 혹은 아이들이 ‘꽃’이라는 주제를 받았을 때 누군가 꼭 그렸을 만한 얼굴이다. 이 꽃은 산과 들에 흔하다.
        수수께끼의 답으로 들국화를 떠올렸다면 … 맞다. 그리고 틀렸다. 안타깝게도 들국화라는 꽃은 세상에 없다. 들국화는 쑥부쟁이, 구절초, 개미취 등 닮은꼴의 꽃 종을 뭉뚱그려 부르는 이름일 뿐이다. 같은 국화과 안에서도 여러 계통이 있어 꽃잎의 색만 해도 흰색부터 노란색까지 다양하다. 피는계절도 종류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특별한 관심이 없다면 마치 들국화라는 한 꽃이 사시사철 열리는 것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한마디로 들국화는 편의성이 피운 관념적인 꽃이다. 하지만 꽃이 뭐 대수인가. 꽃을 향한 대다수의 관심사는 아마도 보기 좋은지, 또 꺾어서 쓸 수 있는지에 몰려있을 것이다.

거창하게 꽃밭에서 글을 연 이유는 들국화가 영화제를 논할 때 썩 괜찮은 우회로가 되겠다는 판단에서였다. 누구나 해마다 몇 번쯤 어떤 영화가 수상했고 어느 연예인이 레드카펫을 밟았다 하여 들어 봤을 행사. 개봉 전 최신작이나 일반 극장에서 보기 어려운 영화를 찾을 수 있는 곳. 영화제는 어느새 들꽃만큼이나 익숙한 이벤트가 되었다. 지난 2019년 말 기준으로 한국에 열리는 영화제 수가 약 200개에 이른다고 한다.
        한편 지난해 인디포럼이 개최를 잠정 중단하였다. 인디포럼은 국내의 가장 오래된 영화제 중 하나로 1996년 자기 작품을 선보일 곳이 없던 창작자들이 직접 꾸린 영화제였다. 20여 년 동안 인디포럼이 착실히 키운 몸집은 어느새 유지하는 데만도 품이 많이 들어 영화제에 내상을 입히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질적인 재정난과 인력난, 자원활동가 문제와 회원 성추행 사건이 영화제가 몸살을 앓고 있다는 증후였다. 인디포럼은 기존 형식의 관성적 유지가 곧 퇴보라고 판단하여 일 년간 영화제를 정비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인디포럼의 정지는 곧 치열한 자기 검토를 향한 의지였다. 영화제와 영상 플랫폼이 차고 넘치는 지금, 인디포럼은 설립 당시와 동일한 갈증과 목적성을 안고 갈 수가 없다.
        같은 해 나는 처음으로 영화과에 입학했는데, 공교롭게도 인디포럼은 내가 처음 국내 단편영화를 접한 곳이었다. 영화 제작을 독학한 형편에 인디포럼을 비롯한 많은 영화제는 동시대 영화인과 작품을 만나고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장이었다. 그렇게 영화제를 돌아다니다 보니 비슷한 사정에 놓인 영화인들의 고충이 점차 크게 들려 왔다. 많은 창작자의 고민은 영화 제작 지원 사업과 영화제 주변을 공회전하는 듯 보였다. 나 역시 이런 외부 조건에 덜 연연하며 영화를 찍고 싶은 마음에 학교를 찾은 처지였다.
        영화제가 풍년이라는데 어쩐지 영화제나 창작자나 나름의 고민이 많다. 이쯤 되니 우리가 영화제를 충분히 즐기고 있는지 의심이 든다. 같은 의문을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 있는 수많은 영화제가 이름에 걸맞게 영화와 영화인을 위한 축제로 불릴 만한가?
        앞으로 이 글은 영화제가 만개한 풍경을 다루되, 개인적인 시야와 지면의 한정 상 영화제를 창작자의 입장에서 중점적으로 살필 것이다. 또한 2019년 말 인디포럼 주최 토론회 ‘모두를 위한 각자의 영화제’에서 말했던 내용에 바탕을 둔다.

따기 어려운
일반적으로 영화 제작비는 단편의 경우 수백~수천만 원에 이르고 장편은 수십~수백억 원대를 호가한다. 그러니 신인 감독이 아주 부유하지 않은 이상 외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는 게 필수다. 장단편 불문하고 제작비를 원조받기 위해서 감독은 응당한 자격을 증명해야 한다. 이때 영화과 출신은 학위를 내세울수 있으나, 실무 중심의 영화 제작업에서는 학력보다도 경력이 창작자로서의 명맥을 잇는 실질적 발판이 된다. 하지만 경력으로 인재를 가리는 일이 여간어려운 게 아니다. 매년 영화 관련 전공 졸업생이 쏟아지고, 경력자는 이미 많다. 신진 감독들의 포트폴리오 작품을 일일이 확인하는 것 역시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요컨대 어느 연출자에게나 암묵적으로 특별한 경력이 요구된다.
        이때 영화제가 연출자의 재량을 가리는 사전 평가 기관 같은 역할을 맡음직하다. 영화제에 출품되는 작품의 수가 매년 최고치를 경신하는 추세에 영화제에서 상영이 된 것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경쟁률을 뚫은 셈이기 때문이다. 설령 영화제 상영이나 수상이 참고 사항에 그친다고 할지라도 신진 연출가의 입장에서는 스펙 한 줄이 긴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영화제에서 단편영화로 성공을 거둔 뒤 소위 ‘입봉’이라 하는 장편영화 데뷔를 치른 창작자의실례가 제법 있다. 신진 감독이 ‘영화제용 영화’, 즉 영화제에서 상영될만한 영화를 만드는 것도 충분히 이해될 만하다.
        ‘영화제용 영화’는 영화제가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생긴 은어이다. ‘입시용 연기’, ‘입시용 미술’ 등 예체능계 입시 전쟁에서 높은 성적만을겨냥하는 예술 활동을 일컫는 말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특정한 내용이나 형식을 갖춘 영화들을 정의하기보다 영화제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창작자의 태도를 겨냥한 냉소적 코멘트에 가깝다. 드물게는 정말로 특수한 조건 때문에 영화제에서만 틀 수 있는 작품을 지칭하기 위해 쓰일 때도 있다. 예를 들어 긴 러닝타임으로 인해 일반 극장에서 개봉하지 못하고 영화제, 기획전에서만 볼 수 있는 작품 또한 ‘영화제용 영화’에 포함된다. 그러나 정말 좋은 작품의 경우 영화제에서만 보기가 아쉽다는 평이 돌지언정 ‘영화제용’과 같이 활동 범위를 제한하는 수식어가 잘 붙지 않는 편이다.

국내에 영화제가 등장한 9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영화제용 영화’가 쓰인 용례를 살펴볼 때, 창작자의 위치에 따라 크게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점이 흥미롭다.

1. 기성 감독들의 ‘영화제용 영화’ : 주로 장편영화이다. 시장성이 높지 않아 개봉에 어려움을 겪는 작품이 많다. 개봉을 할 경우에는 영화제 상영 및 수상소식이 중요한 홍보 거리가 된다. 영화가 대중적 사랑은 고사하고 영화제에서라도 관심을 끌 목적으로 부러 극단적인 방향을 추구하여 만들어졌다는 조소가 은은히 깔려있다.

2. 신진 감독들의 ‘영화제용 영화’ : 주로 단편영화이다. 시의적절한 사회적 주제를 택해 모난 데 없이 잘 찍은 영화가 많다. 이때 잘 찍었다는 말은 대개 과감한 시도를 추구하는 대신 상업 영화처럼 매끄럽고 번듯한 외관과 기술을 갖췄음을 뜻한다. 얼마간 스타 마케팅이 작용하기도 한다. 연기 잘하고 팬도 많은 배우를 캐스팅하면 관객을 유치하기가 쉬워지므로, 인기 있는 배우가 등장한 작품은 영화제 입장에서 매력적인 상영 후보가 될 확률이 높다.

가벼운 농담으로 치부하기에는 ‘영화제용 영화’가 잠재적으로 품은 악영향이 심각하다 느낀다. ‘영화제용 영화’는 한 영화의 수단적 의미를 강조하여 작품성을 오롯이 존중하지 못하게 만든다. 나아가 영화가 가질 수 있는 관객의 범위를 한정 짓고 미리 선처를 구한다. 작품이 다소 부족하거나 불만족스러울지라도 너그러이 이해할 준비가 된 관객만 봐 달라는 격이다. 특히 독립 단편 영화가 이러한 위험에 취약한데, ‘영화제용’ 단편영화는 영화인의 본격적인 활동이 장편영화로 시작된다는 선입관과 연관되며 습작 취급을 받기 일쑤다.
        ‘영화제용 영화’를 탄생시킨 당사자로 감독만을 탓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인정을 받은 작품이 모범작으로서 공부와 탐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다. 더군다나 제작 지원을 받기가 쉽지 않은 환경에서 연출자가 ‘영화제용 영화’를 찍어 다음 작업의 토대를 닦는 게 최선의 전략일 수도 있다.
        다만 영화제에 ‘영화제용 영화’가 많아질수록 다른 가능성과 영감이 들어올 가능성은 요원해진다. 이는 고스란히 영화제의 피해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고르는 작품들이 비슷할수록 수많은 영화제는 개최 시기와 지역이 다르다는 것 이외에 고유한 정체성을 정립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영화제가 엇비슷한 모델을 반복하고 강조하게 되면서 ‘영화제용 영화’가 더 많아지는 악순환이 일어날 위험도 있다.

영화제 밖으로 찾아가기
위 모든 사태가 영화 창작자의 영화제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친 탓에 생긴 것이라면 영화제 바깥으로 눈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일찍이 언급했다시피 영화를 소개할 경로는 영화제 말고도 얼마든지 있다. 온라인 배급의 경우 영상을 공유할 플랫폼이 오히려 너무 많아 골칫거리다. 게다가 기술의 진보는 영상의유통뿐 아니라 제작까지 용이하게 만들었다. 드라마, 외화, 라이브 방송 등 볼 만한 콘텐츠가 매일 같이 쏟아지는 데 반해 개인의 시간과 집중력은 늘지 않으니 플랫폼 내 주목 경쟁이 악화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무한한 볼거리 사이에서 진정으로 요청되는 것은 밀도 있는 큐레이션이다. 영화제의 중대성이 되려 커지는 이유다. 기본적으로 영화제는 조회 수나 댓글과 같은 유저 참여도가 아닌 프로그래밍이라는 형태로 선별 작업을 한다. 웹의 콘텐츠 선택 방식은상대적으로 일시적이고 임의적인 반면, 권위 있는 영화제의 프로그래밍은 전문성에 기반을 둔다. 역사 깊은 영화제의 명예란 다른 게 아니라 관객과 오랜시간에 걸쳐 쌓아 온 전문성에 대한 신의 위에서 세워진 것이다.
        웹 플랫폼을 통하지 않고 독립・단편 영화 상영을 활발히 하려는 움직임도 물론 있다. 중소 배급사들과 영화인들이 여는 기획전과 독립 단체가개최하는 공동체 상영이 그것이다. 이런 행사는 독립 영화를 의미 있게 비추려는 자생적 시도라는 점에서 무척 고무적이다. 그러나 일회성으로 그칠 때가많아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또한 행사 관계자나 영화인의 지인이 관객의 높은 비중을 차지하여 파급력이나 개방성이 그다지 넓지 않다는 아쉬움이 있다.
        한편 영화 학교는 영화 학도가 영화제에 거는 부담감을 크게 덜어주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과의 커리큘럼은 영화를 만드는 것만으로도바쁘기 그지없지만, 결정적으로 학생에게 포트폴리오를 쌓는 것 이외에 별다른 선택지를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다. 이따금 강의실에서 어느 영화제의 취향은 어떤 형식의 영화라는 둥 영화제를 출세의 관점에서만 판별하는 우스갯소리를 들었을 정도니, 과장을 보태어 영화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 중에는 영화제 공략법도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는 학교가 현장과 학생을 실질적으로 잇는 가교 구실을 영화제만도 못하고 있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꼴이다. 가시적인 실적으로 수렴하는 교육 안에서 영화제의 권력은 가중되는 반면, 그 의미는 영화제란 영화인의 통과의례, 트로피처럼 따면 그만인 것으로 축소된다.

영화제 안으로 벗어나기
무엇보다 자성적 움직임이 시급한 건 영화제다. 영화제와 영화제 출품작 수가 훨씬 늘었음에도 ‘영화제용 영화’가 속출하는 현상은 영화제를 둘러싼 생태계에 어딘가 오작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시사한다. 영화제 이름을 단 행사들이 아무리 많이 나와 봤자 기존 영화제들과 다를 게 없다면 상황이 근본적으로나아질 리가 만무하다. 영상 플랫폼의 증가가 영화제를 유일한 등용문의 굴레에서 꺼내는 데 실패했듯, 영화제의 성찰 없는 양적 증가는 임기응변에 그치거나 자기 굴레에 더 깊이 빠지는 결과를 내기 마련일 테다.
        현재 영화제는 학교보다 현장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교육 기관보다 강력한 힘을 갖는다. 지난 영화제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작품과 비슷한 단편 영화들이 종종 그다음 해에 속출하는 현상이 그 방증이다. 영화제의 간택을 받은 작품이 연출가가 마땅히 따를 본보기가 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영화제는 영화인에게 미치는 제힘을 모르고 좋은 방향으로 쓰지도 못하는 듯하다.
        창작자가 영화제를 통해 작품에 대한 피드백을 받는 경로는 대개 일방적이고 제한된 편이다. 우선 상영작으로 선정이 되며 작품이 인정을 받는다. 여기에다 짤막한 프로그래머 노트가 소개 글 겸 추가된다. 이외에 감독이 타인과 함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라면 GV(Guest Visit)가 거의유일하다. 그런데 GV에서 관객과 감독, 모더레이터 사이에 영화를 두고 날카로운 피드백이 오간 걸 본 적 있는가? 있다고 한들 흔하지 않으리라 추측한다. 보통 GV는 짤막한 자기소개나 작품과 관련된 재미있는 후일담을 나누는 것 이상으로 가지 않는다. 아무렴, 상영을 축하하는 자리에서는 영화에게 좋은 말만 주고받자는 마음이 들기 쉽다. 하지만 이는 영화제가 가질 수 있는 비평적 측면에 대한 기대를 접는 것이다.
        창작자가 영화제로부터 내실 있는 피드백을 받을 수 없을 때, 영화제의 비평은 상영작과 수상작 선택으로만 가시화된다. 영화제란 말하자면 수업 없이 시상으로만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과 같은 꼴이다.
        영화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피드백을 나누는 자리가 많았더라면 창작자와 감상자 양쪽에게 더 건설적이고 보람찬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매번 아쉽다. 기존 GV와 다른 방식으로도 동시대 영화에 관해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눌 여지가 많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GV 행사가 잘못되었으니 없애야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영화제가 작품을 두고 펼칠 수 있는 교류의 장을 질적으로 풍부하게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비평적 기능은 영화제가 변할 수 있는여러 면 중 하나다. 영화제의 힘이 큰 만큼 그만이 찾을 수 있는 개선점이 많으리라 확신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각이 우선이다. 영화제가 가질 수 있는 영향력을 인지하고 책임감을 느끼는 것, 이런 통각만이 영화계가 좀 더 나아질 길을 닦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없는 꽃을 피우는
빼어난 영화인과 훌륭한 작품은 해를 가리지 않으므로, 영화제는 기존 시스템으로도 어떻게든 굴러갈 것이다. 각종 프로그램과 만남의 자리가 지금까지그랬듯 화기애애한 공기 속에서 치러질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에 영화제가 생겼던 예전과 지금의 사회는 다르다. 영화제 또한 이전과 같을 수 없고 같아서도 안 될 것이다. 어떻게든 현재 상태를 지킬 수 있으니 괜찮다는 위로나, 다른 방식은 어차피 불가능할 거라는 단언이나 모두 같은 타성에 젖은 말로 들린다. 맹목적으로 현상을 유지하는 성실함은 더 나은 대안을 찾지 않는 게으름과 궤를 같이한다. 괜찮다고 치장하는 영화제는 괜찮지 않다. 의식적으로 즐겁다고 자기 최면을 걸어야 하는 축제가 어디 있나.
        그동안 영화제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와 사건이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영화제 자체는 질문의 대상이 된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영화제는 많은 이들에게 당연한 무언가였다. 더구나 익숙한 모양의 영화제가 많아지다 보니 더욱 영화제를 고민의 대상으로 삼을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으리라 짐작한다. 그렇다고 다 같이 고민해보자는 미지근하고 안전한 권유만으로 글을 마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떠올린 방법은 일종의 망각으로서, 아는 것을 잊되 잃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동력이다.
        우리는 어쩌면 영화제에 대해 이미 너무 많은 걸 알고 기억하고 있다. 상상해야 할 것은 대안적 영화제가 아니라 영화제가 없는 대안일지 모른다. 있는 영화제를 두고 고민만 할 게 아니라 잠시 딴청을 피우며 벗어날 때에야 영화제가 나온 이유가 분명해지지 않을까.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제가 무엇이냐는 물음은 곧 영화제를 만드는 주체에 대한 질문과 뗄 수 없다.
        영화제가 없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영화제가 없는 세상에 어떤 갈증이 남나? 기어코 영화제가 필요하다면 어떤 형태의 영화제이며 누가 그런 모습으로 만들 것인가? 이쯤에서 들국화를 다시 생각한다.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이 꽃은 꺾느니 마느니 하기 전부터 이미 그것을 떠올린 사람의 손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