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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서한

질식자의 편지: 영화문화의 현재에 관한 13개의 질문
질식의 날 - 못다 부친 편지
회신1. 질식자에게
회신2. <비평(권력)에 대하여> 의 질문
회신3. 쉰들러 리스트: 무너진 낙원에서 완전함 찾기

수신인: 씨네21
회신4. 형제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회신5. 답변?
회신6. 창작과 비평의 관계에 대하여.....
등단 = 검증?
회신7. 지리적 계급의 소멸을 함께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회신8. 공개서한에 대한 회신입니다.
ㄴRE: 별로 어렵지 않은 이야기
회신9. 질식자에게

비평? 우리는 웃고 있다




3호 2020년 8월

1. 특집/ 여섯 빛깔 스크린 너머: 한국퀴어영화제 20주년에 부쳐
2. 특집/ CRY, FUCK, BEAT UP(울고 하고 패고)
3. 특집/ “퀴어영화 연구는 정말로 노다지”: 『한국퀴어영화사』 책임편집 이동윤 인터뷰
4. 특집/ 한국 게이/레즈비언 영화와 호모-특정적 난관들
5. 특집/ 샷다 내린 퀴어랜드: ‘디스코팡팡’과 ‘방 탈출 게임’ 사이에서
6. 특집/ 뱀파이어의 딜레마: 누구를 위한 ‘착즙'인가?
7. 정전에 속하기, 정전 밖에 있기: 사프디 형제의 방법
8. 검고도 밝은: 조주현의 ‘흑공’과 스크린 안의 미로
9. 아이돌 기표의 '트랜스' 해부하기: NCT 127의 〈슈퍼휴먼〉과 아이돌 피상성
10. '접촉'에서 '접속'으로: NCT 127의 경우
11. 아직도 굳이 〈무한도전〉을 논할 필요가 있는 건
12. 듣는 여자: 〈그리고 베를린에서〉
13. 박세영의 무한 도시
14. 추상化와 픽션: 이소정의 영상 작업에 대해
15. 이미 흩어진 '밀레니얼 시네필’
16. 비천함, 실패, 나쁜 것에 관한 정직한 성찰(우회하지 마세요)

A BACK NUMBER

2호 2020년 3월  

1.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잠깐!)” 2019 한국 코미디 영화의 ‘비빔면적 경향’과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윤리’: 영화 ⟨극한직업⟩, ⟨걸캅스⟩, ⟨엑시트⟩를 중심으로
2. 봉준호 월드 유람
3. 창문과 창문 ‘너머’—오연진의 《Lace》와 백종관의 ⟨추방자들⟩
4. 갱신과 추동 사이에서 기업가∽노동자∽DIY로서의 작가
5. 구체적 세부: 2019년을 함께한 독립극영화 속 여자들
6. 특집/ 액체의 단상들: 리퀴드(liquid)와 플루이드(fluid), 그 언저리에서
7. 특집/ 15초 곱하기 240의 실험: 이소윤의 ⟨450⟩
8. 특집/ 보여주는 대신 믿게 하기: 박시우의 ⟨변신⟩
9. 특집/ ‘플레이스’와 ‘플레이’로 규명되는 영화 ⟨소녀의 기도⟩
10. 특집/ 연결하고, 순환을 주장하기: 독립영화협의회 낭희섭 대표 인터뷰
11. 영화제가 활짝 피었습니다—대안적 영화제를 상상하기 위한 생산적 망각
12. 디스코팡팡적 시네마: ⟨알라딘2019⟩ 4DX
13. 걷잡을 수 없는/겉잡을 수 있는: 2019년의 영상 작업을 통해서
14. 테니스와 바둑의 신체를 상상하며: 되받아치기와 이중구속의 비평


BACK NUMBER

1호 2019년 9월

1. 환영에 대한 두 가지 입장: ⟨라이온 킹⟩과 ⟨야광⟩
2. 유령의 기술: 차이밍량의 ⟨더 데저티드⟩
3. 괴물, 일레븐, 무전(하)기
4. 장재현의 보이 스카웃은 무엇을 단련하는가?
5. 비체(abject) 생산라인의 작동방식을 드러내는 무빙이미지들: Maotik의 ⟨FLOW⟩와 이은희의 ⟨Contrast of Yours⟩
6. 무한 가정해보기: 류한솔 작가의 ⟨크리크리 메리크리 스마스⟩를 중심으로
7. 픽션의 증언
8. 다음 세기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의 ⟨힘의 한 세기⟩
9. 특집/ 영화평론가 김소영 인터뷰
10. 특집/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한국 영화비평계의 86세대에 대해 반추하며
11. 특집/ 한국영화비평계의 00년대부터 지금까지


0호 2019년 5월

1. 철의 꿈, 믿음의 끝: 박경근의 ⟨철의 꿈⟩
2. 펼치고 다시 조립하기: 백종관 감독론
3. ⟨로맨틱 머신⟩에 대한 짧은 소고: 카메라-눈의 체험을 체험하기
4. 경험되지 않는 영화에 대하여



비평의 비평 2019년 11월

듀나와 이동진과 기타등등‘씨네21식 비평’ 비판오큘로에 대해서반면교사정면교사?



선언문



졸업 전시・상영 특집: 학교의 안팎

연결하고, 순환을 주장하기: 독립영화협의회 낭희섭 대표 인터뷰



“졸업 전시・상영 특집: 학교의 안팎” 기획의 마지막으로 독립영화협의회 대표 낭희섭과의 인터뷰를 싣는다. 1980년대 중반의 영화 운동 시절부터 활동해 온 그는 독립영화워크숍(입문과정 공동작업)을 30여 년째 진행하고 있다.


︎우선 대표님이 영화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시점부터 84년도 “작은 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가 개최되기 이전까지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AFKN(American Forces Korean Network)이라는 게 있었다. 당시 흑백 TV의 미군방송으로, 중학생 때 금, 토 심야에 좋은 영화를 많이 해줬는데, 히어링도 안 되는데 뭘 알겠나? 줄거리 중심으로 봤다. 영어로 더빙된 〈400번의 구타〉나 〈졸업〉, 채플린이나 버스터 키튼도 거기서 처음 봤다. 박정희 시대여서 한국영화는 검열이 심했고, 청소년 관람가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은 별로였었다. 의정부나 성남이나 안양에 가면 지역 보따리 장사가 재밌는 영화들을 상영했기 때문에 서울에서 거기까지 갔다. 청소년기가 우울했다 보니까 영화가 나의 도피처였던 것 같다. 대학 갈 때 영화를 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을 설득할 자신도 없었고 자본이 있어야 하니까 건축학과를 졸업한 뒤 집 장사를 하면서 그 돈으로 영화를 찍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연립주택 같은 거 많았으니까. 그런데 성적이 안 돼서 재수를 하고, 부모님 모르게 서울예전 영화과에 들어갔다. 학교에서 많이 배웠다. 그때 2년 배운 거 갖고 지금까지도 독립영화워크숍을 하면서 수입도 없는데 버티고 있으니까. 반면 시행착오도 너무 많이 겪었다. 입문할 때 굳이 겪지 않아도 될 것들. 자퇴를 해야 하나 방황도 많이 했다.
        이후 휴학하고 방위 복무할 때 불란서 문화원에서 좋은 영화를 많이 봤다. 끝나고 영화 좋아하는 선배들이랑 튀김에 소주 마시면서 영화 얘기도 하고. 불란서 문화원에 박건섭 선생님이라는 직원분이 있었다. 그분이 만든 ‘토요단편’이라는 행사가 있었는데 영화 운동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영화 청년들이 교류할 수 있는 유일한 장을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당시 교류의 장이라고 할 만한 것은 1년에 1회로 1시간 남짓한 시상과 1등 먹은 단편영화만 상영하는 관 주도의 금관청소년영화제(서울독립영화제의 전신)가 전부였다. 토요단편은 외부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매주 주말 국내의 단편영화를 상영하고 연출자와 관객이 대담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토요단편을 통해 서로의 단편영화를 상영하고 역할을 순환하며 차츰 서로의 존재를 알아갔고, 군사 정권하에서 한국영화의 검열을 비판하려 한다는 공통점도 발견하게 된다.
        복무가 끝나고 영화를 다시 해야겠다고 맘먹고서, 학교로 돌아가 ‘예전 영화 감상 동아리’라는 걸 했다. 구로사와 아키라와 스탠리 큐브릭의 비디오를 자막도 없이 상영하고, 《키네마 준보》를 번역하여 줄거리, 감독 소개, 리뷰 등을 유인물로 제공하기도 했다. 영화과 학생들은 많이 없어서 외부의 영화한다는 지인들에게 회비를 받고 진행했는데 강한섭(당시 서강대 대학원생으로 이후 커뮤니케이션 센터 창설)이 여기 회원이었다. 그리고 내가 겪은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게 하기 위해 시간 약속 잘 지키는 후배들을 모았다. 매주 토요일에 영화를 보면서 토론하고 후배들 단편영화 실습할 때 기획처럼 시나리오와 편집을 봐주고 결과적으로 평가까지 함께한 것이다. 내 것도 못하면서. 그러면서 후배들과 친해졌다. 내가 아닌 남을 위하는 쪽을 선택하게 된 게 이때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후배들한테 잔소리는 잘하더라. 중학교 때 사생대회에서 그림 못 그린다는 친구한테 이렇게 저렇게 그리라고 했더니 그 녀석이 1등 먹은 적도 있었다. 그런 게 누적된 것 같다. 나는 참모형이란 걸 알게 된 거지. 동서영화연구회의 세미나를 참관한 적도 있었는데, 인용된 영화도 구할 수 없어서 원서만 갖고 공부하더라. 장님 코끼리 만지기잖아. 영화작업도 안 하고 공허했다.

︎학교를 졸업한 다음에는 어땠나?
졸업하고 나서는 김기종, 정성헌과 함께 ‘영화마당 우리’를 만들었다. 신촌의 ‘우리마당’이라는 이름의 전통찻집에서 운영하는 민요/연극/풍물 등 파트별 모임이 있었고, 우리가 영화 파트를 담당한 것이었다. 앞으로 한국영화라는 충무로를 받아들여야 할지 거부하여야 할지를 고민하는 암중모색의 시기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영화를 계속하려면 충무로에 안 들어갈 순 없었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구조적인 문제가 많더라. 한국영화 자체가 기본적으로 자본이 부족하다 보니 불가피하게 지역의 극장업자들과 거래해야 했고, 대부분 의무제작 편수에 의하여 한국영화에 재투자를 안 하다 보니 어떻게든 스태프 인건비부터 깎았다. 그마저도 도제 시스템이라 그렇게 몇 년을 조감독으로 버텨야 겨우 감독이 된다는 것이 엄두가 안 났다.
       근본적으로는 영화법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땐 젊었으니까 문제를 제기하려고 했는데, 막상 하려니까 군사 정권하에서 과연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거야? 그럼 영화제를 하자, 영화제를 통해서 캠페인을 하자, 그렇게 의견을 모았다. 말은 좋았다. 그런데 하다 보니까 캠페인보다는 작품 중심으로 흘러가게 되더라. 그래도 의외로 관객들이 많이 왔고 수익도 꽤 올렸다. 어떻게 보면 그게 단편영화를 하던 영화 청년들이 함께하는 마지막 자리였다. 그때만 해도 그렇게 충무로를 거치지 않는 대안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순진한 착각이었다.

︎‘순진한 착각’이었다면, 결국 충무로로 돌아갔다는 말인가?
그렇다. 영화제가 끝나고 바로. 당시 서울예전은 소위 현장에 가는 게 목적인 학교였다. 중앙대, 동국대는 방송국 특채로 가고, 한양대는 광고로 가고, 서울예전은 충무로로 가는 식이었다. 나도 직접 감독이나 영화사를 찾아가면서까지 한동안은 현장에 나가고자 했다. 그런데 정말 힘들더라. 보통 아침 여섯 시에 동트면 바로 촬영에 들어가야 했다. 인서트니, 롱 쇼트니 찍어야 할 것도 많았다. 아침 먹고 한바탕 하고 나면 점심 먹고, 다시 푸닥거리하다가 해 지면 편집이 기다리고 있는 식이었다. 그래도 많이 배웠다. 그렇게 참여했던 작품이 하명중 감독의 〈땡볕〉이다. 끝나고 나서는 다시 충무로에 남아야 할지 영화 운동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구태여 어렵게 감독할 생각은 없었고, 좋은 작품에 스태프로 기여하겠다는 생각이 컸다.
        때마침 여유가 생겨 다시 영화마당 우리를 찾았더니 갑자기 워크숍을 한다고 하더라. 우린 이론적 토대가 없었으니까 서울영상집단이 주관하고. 그런데 또 거긴 16mm/35mm 작업은 안 해봤으니까 경험해본 내가 실습과 진행조교를 맡은 거였다. 그렇게 탄생한  참여회비 2만 원짜리 ‘작은영화 워크숍’의 회원 대부분은 영화를 전공하지 않은 대학생들이었다. 끝난 뒤에도 영화서클로 확장될 수 있도록 학교별로 팀을 편성하기도 했다. 그때는 카메라도 조명기도 여기저기서 빌려야 하는, 그야말로 악전고투였다. 하지만 의외로 주제는 좋았다.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정치적 관점을 견지하려 했다. 그렇게 네 편의 결과물이 나왔고 이틀 동안 하루에 두 번씩 공개 시사회도 했다. 이후 기대했던 것처럼 이를 계기로 경인 지역에서 대학 영화서클이 우후죽순으로 결성된다.
        당시는 대학서클이 허가제였다. 전두환 때였으니까. 그런 시기에 처음으로 대학에서 서클을 자발적으로 만들고 존재성을 드러내기 위해 영화제를 꾸리기 시작했다. 나는 상영할 필름을 수집해서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초창기에는 자체 제작한 콘텐츠가 없으니까 우리가 16mm 단편영화 필름들을 구해주고, 상영할 수 있도록 했다. 필름을 순서대로 감아주고, 영사기 사용법도 가르쳐 주고. 처음에는 다 무료로 했다. 배급이 아닌 ‘보급’의 시작이었다. 그러면 자료집도 만들고, 상영한 작품의 연출자들을 불러서 관객과의 대화도 하고. 학교 앞 분식집 같은 곳에서 몇만 원씩 광고료 받고, 입장료도 500원씩 받은 덕에 수익도 남길 수 있었다. 그러나 수익 공개는 고사하고 뒤풀이에서 수고비를 밥이나 만년필 같은 것으로 대신하는 분위기였고,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시작됐다.
        1회 작은영화 워크숍을 수료하고 외대 영화서클 울림을 창설한 장기철이라고 있다. 이후에는 그 친구가 기업의 스폰을 많이 구해오면서 십분 내외의 16mm 단편영화 필름 하나 상영하는 데 대여료로 2만 원을 주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시장가가 형성이 된 거다.
        영화 상영의 역할을 한 게 대학 영화서클이었고, 나중에는 총학이 넘겨받았다. 서클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영화제를 했다면 총학에서는 대동제나 신입생 OT 등에서 보여줄 수 있는 사회 비판적인 단편영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상영해 달라는 연락이 알음알음 건너서 오더라. 지금의 독립영화 유통구조의 기원도 따지고 보면 그때 시작된 셈이다. 시장가가 85년도에 2만 원으로 시작했다면, 전국의 대학총학으로 상영 주체가 넘어가면서 수요가 늘어 87년도에는 6만 원까지 오르게 된다. 88년 장편 16mm 〈오! 꿈의 나라〉가 기획된 배경도 이런 맥락에서다. 10분짜리 5편을 묶어서 틀면 그 상영료가 30만 원이 되지 않냐, 이제 시장이 형성되었으니 그럼, 장편을 찍자, 이렇게 된 거다. 장산곶매가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고 이런 전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성을 보고 출발한 거다.

︎장편 인프라를 조성했던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다. 한편 그보다 이전에 열렸던  ‘작은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당시의 기조는 ‘작은영화(단편영화)=대항영화’이지 않았었나. 왜 그때는 필름들을 모아서 같이 협업을 하여 하나의 장편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 했을까?
서로 자기 영화만 만들려고 했으니까, 어떻게든 충무로에서 감독하려고 했으니까. 함께 연대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또, 16mm 장편영화로 재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도 못했으니까. 84년 작은영화제 세대의 한계와 89년 장산곶매 세대의 가능성이 그래서 비교가 되는 것이다. 86-87년에는 서대문 치안본부 옆 허름한 6층짜리 건물에 영화마당 우리, 대학서클 연합, 영화과 연합 세 단체가 월세를 공동으로 분담해서 옥탑방을 빌렸다. 100명 정도 되는 인원이 요일별로 나눠서 공간을 이용했다. 세 단체가 함께 서울 시내 중심 극장가에 미국영화 반대 유인물도 뿌리고 집회도 했는데, 때마침 미국영화 직배가 허용됐다는 뉴스가 나오고, 가닥이 딱 맞았다. 당시 대학 영화서클 내에서 미국 영화에 대한 비판적 움직임이 시작되던 시기였고, 이때 대항영화와 대학영화에 대한 공동의 이슈를 가지고 함께 할 수 있는 인식이 형성됐다.
        87년 12월 1일부터 16일까지 혜화동 연우무대에서 “열린영화를 위하여”라는 영화제를 개최한다. 바로 12월 16일이 대선으로 소위 노태우 낙선 캠페인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노태우 대통령으로 나왔지만, 사회적 기능을 보여줄 수 있는 단편영화들을 모아서 관의 검열도 허가도 받지 않고 할 수 있었다.
        88년 한참 〈오! 꿈의 나라〉를 기획할 때, 이효인과 이정하는 민족영화연구소를 영화 운동의 조직 차원에서 만들었는데, 나중에 외부의 창작 주체들과 내부의 조직 주체들의 성과를 연결하기 위하여 나는 보급을 책임지는 설립멤버로 참여한다. 여기에 내건 조건이 있었는데, 보급이 되고 수익이 나면 민족영화연구소에서 수익 공개하고, 기금을 떼고, 외부에서 자기 단편영화의 보급을 위임한 저작권자들과 함께 기금을 어디에 쓸지 협의하는 거였다. 근데 한 달이 경과하여 재확인하여 보니까 기금의 협의를 부정하면서 말을 바꿔버린 거다. 그래서 이건 아니다 싶어서 바로 나왔다. 내가 너무 순진했구나 싶고. 그래서 민족영화연구소 들어가기 위해서 탈퇴했던 영화마당 우리에 신입 회원 절차를 밟고 재가입한다.
        그리고 〈오! 꿈의 나라〉에서 제작과 기획으로 역할에 집중하면서 촬영작업을 하면서 후반작업비가 없었기 때문에 영화하는 선배들을 한 명씩 연락하여 16mm 영사기로 한 시간여 동안 편집본을 보여주며 나중에 갚을 테니 몇만 원이라도 빌려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그런데 단 한 명도 안 도와주더라. 5.18 광주가 소재인 것이 문제가 있다고 본 것인지 그냥 돈이 없었던 건지 신뢰가 없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선배 세대가 못한 새로운 바람을 형성할 수 있음에도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 것에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다. 결국은 완성하였고 신촌의 연극공연장을 대관하여 관의 허가를 받지 않고 상영을 시작하였다. 마침 그때가 국민 주주 공모로 한겨레 신문의 창간 즈음이었는데, 서대문구청과 사법당국에서 상영 중지 압력을 가하면 한겨레 신문에서 연일 기사화하여 홍보가 많이 됐었고 덕분에 하루 3회씩 10여 일 동안 연일 만원이었다.

︎완성된 영화 배급은 어떤 방식으로 했나.
내가 서울, 경기, 강원, 제주 지역의 보급을 담당하고 나머지 충남, 충북, 전북, 전남, 경북, 경남으로 지역의 단체에 100만 원씩 받고 판권을 넘겨줬다. 16mm 중고 영사기를 구입하여 사용법도 알려주고, 지역별로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나 대동제 때 동시에 상영이 진행되었다. 대학 별로 한 번 트는 데 30만 원이었는데, 덕분에 관객도 많았고 돈도 무지하게 많이 벌었다. 그때 10만 명 이상 영화를 본 걸로 안다. 특히 구정 연휴 끼고 3박 4일 동안 부산 경성대에서 상영했을 때는 입장료로 자료집 값 500원을 받고 3천만 원의 수익을 올릴 수 있을 만큼, 지역적으로 관심이 대단했다.

︎기금 조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다. 영화 제작은 언제부터 안 하시게 됐나.
〈오! 꿈의 나라〉로 후반 작업비 마련이 너무 힘들어서 다음 사람들도 이렇게 하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번 돈의 일정 비율을 기금으로 조성하여 빌려주고 완성하면 상영 보급 후에 원금을 회수하는 식으로 연대하려고 했다. 더 많은 제2, 제3의 ‘장산곶매’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데 그 ‘장산곶매’에서 두 번째 장편 16mm 다큐멘터리 〈87에서 89로 전진하는 노동전사〉의 후반 작업비로 그때까지 조성된 기금 500여만 원을 빌려 가더니 안 갚더라. 그래서 끝나버렸다. 양아치들이고 나쁜 놈들이라고 하였지만, 애증의 관계였다. 그래서 그때 일방적으로 물심양면의 도움을 줬었던 그 작업의 제작 주체들인 서울예전의 영화과 후배들이 기금 파기에 동조했기 때문에 절연했다. 민족영화연구소에서 나왔을 때 장산곶매와 거리를 두고 보급에만 집중하겠다고 하고 시작한 건데, 결과적으로 4년을 노력한 기금조성이 깨져버린 거다. 그때 정신적으로 엄청나게 타격이 컸다. 다음 영화 단체의 작업에 대하여 조성된 기금의 순환으로 지원하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그 이후로는 영화 제작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신뢰와 연대의 관계가 아무런 명분도 없이 개인과 자기 집단의 우월주의 때문에 깨지니까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여기까지가 80년대의 이야기라면, 이후 1990년에 발족한 독립영화협의회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89년에 “장산곶매”와 민족영화연구소로 영화운동 진영이 분화된다. 그래서 이효인은 영화운동 조직을 한국독립영화협의회로 결성하려고 하였지만, 한쪽은 ‘NL이고 한쪽은 PD다’라는 진영 논리로 연대가 겉돌고 있었는데 당시에 영화운동 진영에서 구성원들 대부분은 사실상 NL도 PD도 아니었다.
        소련사회주의권이 붕괴하고 영화운동의 주도권을 상실한 이효인은 영화운동의 연속성을 무책임하게 1장짜리 탈퇴서로 던져버리고, 영화과 교수가 되기 위하여 대학원으로 적을 옮긴다. 그는 탁월한 이론가이지만, 여기 남아있어 봤자 자기 인생과 경력에 있어서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한 것 같다. 결과적으로 영화운동의 대의는 자신의 지위와 권한을 위해 명분으로 활용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는 유감스러운 일이 된 것이다.
        어쨌든 덕분에 한국독립영화협의회에 가입한 단체(민족영화연구소, 아리랑영화연구회, 영화공동체, 영화마당 우리, 우리마당 ‘영화분과’, 한겨레 영화제작소 등 6개 단체)들은 점점 해체되는 중이었고, 나는 대안으로 단체 가입이 아닌 개인 참여의 분과 체제로 가자고 주장했다. 보급사업분과, 제작분과, 연구/교육분과로 구성하고 단체 이름도 한국을 떼고 독립영화협의회(이하 독영협)로 남게 된다.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가 나오기 전까지 독립영화협의회가 주도적으로 활동했다면, 한독협은 어떻게 갈라져 나오게 된 건지 궁금하다.
90년대 중반 영화운동 진영의 슬로건이 "독립영화, 변방에서 중심으로"다. 내가 유일하게 그 슬로건에 반대한 사람이었다. 무슨 변방에서 중심이야. 변방에서 변방이지. 그때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의 영화위원회가 구심점 역할을 했고, 새로운 '독립영화' 연대 조직체 필요성이 대두됐다. 문화학교 서울의 조영각과 나, 그리고 개별 단체를 대변해서 몇 사람이 같이 모여서 지속적으로 이에 대해 논의했다. 한 주는 사당동 문화학교 서울에서 모이고, 한 주는 신당동 독영협 사무실에서 모이고 하는 식으로. 그 과정에서 독영협이 자진 해체할 테니 한독협을 발족하자고 내가 직접 제안했다. 대신에 독영협에서 했던 사업들을 한독협에서 넘겨받아서 교육과 보급의 인프라를 이어받으라고 말이다. 그런데 김동원 대표가 그걸 거부하고 독립영화협의회 단체명만 포기하라고 하더라. 그러고 나서 사단법인 한독협으로 등록하더니, 임시총회에서 나에게 위임된 감사의 지위를 박탈하고 제명시켜 버리더라. 당시 한독협 결성에 참여한 구성원의 반절이 독립영화워크숍 출신이었지만, 파벌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동반 탈퇴 같은 걸 설득하지도 않고 그냥 혼자 나와버렸다. 그래서 독영협이 별도의 단체로 존속하게 된 거다.
        이후 한독협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잘 버텨오고 있다고 본다. 잘한 게 많고, 내가 못한 걸 한 것도 많다. 하지만 아쉬운 것들이 있다.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이빙벨〉 문제로 집행위원장 등이 탄압을 받는 것에 보이콧으로 대응하다가 쉽게 그 기조를 포기한 것은 어떻게든 오점으로 남게 될 것이다. 박근혜 정권 막바지에 김세훈 영진위원장과 고영재 한독협 대표의 밀실 협의 문제도 독립영화 단체들을 대표하는 역할을 하는 데에 의구심으로 남아 있다. 더욱이 22년 전의 과거라고 해도 홍형숙 감독의 <본명선언> 표절과 도용 문제에 대해 아무런 입장표명 없이 침묵하고 있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홍형숙 감독 사태에 대해서 얘기해 주실 수 있나.
지금의 한독협에서 중심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구성원들은 그 일과 관련이 없다고 본다. 당시의 초창기 멤버들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나도 그 일과 관련 없다고 할 수 없다. 〈본명선언〉이 1998년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국제) 운파상(와이드 앵글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하고서 표절 시비가 붙었을 때 곧바로 따져봤어야 했는데, 공과 사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던 것 같다. 분명 홍형숙 감독이 잘못했고, 마찬가지로 부국제도 제 신뢰와 권위를 생각한다면 문제가 터졌을 때 어떻게든 비교상영회를 열어서 같이 들여다 봤어야 했다. 동종업계인 독립영화계 구성원들이 이 문제를 지적해야 한다고 보는데, 이게 말을 꺼내면 진영논리가 된다고 우려해서인지 다들 입을 닫고 있는 실정이다. 결과가 좋든 나쁘든 간에, 이게 규명이 안 되면 양심적 독립영화인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 자체가 다음 세대에게 안 좋은 선례가 된다. 바뀐 게 없지 않나. 〈본명선언〉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고 계속 진행 중인 문제다. 까놓고 얘기하자. 진보진영이나 영화운동에서는 투명성을 바탕으로 신뢰를 갖고 권한을 수평적으로 나눠야 하는데, 지금은 최소한의 책임조차 나눠 갖지 않은 채 줄만 서는 것처럼 보이니, 외려 수직적 문화권력을 고착화하고 방치하는 격이다.

︎영화교육에 오랜 시간을 힘써왔다. 독립영화워크숍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 있다면.
대한민국 대학의 영화교육에 일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교수는 평생직이고 후학들을 가르치고 이끌어줘야 하는 자리 아닌가. 그런데 어느 대학의 영화과에서는 졸업생의 전부가 영화를 포기하는 것도 봤다. 죄송한 얘기지만 나는 교수들이 이런 현실에서 영화제에 관여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다. 영화제 프로그래머 겸업하는 교수랑 문자로 대판 싸운 적도 있다. 교수만 해도 먹고 살 수 있으면서 이걸 왜 당신이 하느냐고. 이러니까 준비된 다음 사람들에게 일자리가 안 돌아오는 거다.
        독립영화워크숍 입문과정은 공동작업으로 적성을 찾아주는 것이다. 공동작업의 강점은 소통이다. 다들 전공을 포기하고 영화아카데미에 가려고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위해서 워크숍에 지원하는데, 독립영화워크숍은 처음 시작할 때부터 개인 영화를 만들지 못하게 한다. 다짜고짜 자기 영화를 만들기 이전에, 전체적 프로세스나 시스템을 이해하고 서로 소통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부터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게 기본이어야 한다. 그래서 자기 에고가 강한 사람들과 입문과정에서 영화작업이 힘들다. 그래서 공동작업이 중요하다. 처음부터 시나리오를 제출하지 못하게 한다. 왜냐면 입문과정에서 시나리오가 권력 관계를 만들고 우열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자 기획안을 발표하고 민주적으로 선정되면 하나씩 돌아가며 공동연출과 공동촬영으로 역할을 맡아서 서로 맞춰보게 한다. 기획안 통과되면 바로 시놉시스를 쓰는 게 아니라, 다시 팀을 재편해서 그 기획안을 가지고 트리트먼트 경쟁을 하게 한다. 시나리오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다 해보고 나서 자기한테 맞는 포지션을 찾아가는 거고, 이런 과정이 교육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아직까지도 ‘내가 감독이고 제작자니까 내 결정에 따라라’는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 거지. 사람들이 너무 개별적인 것 같다. 〈본명선언〉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걸 회복하고 다음 세대에게 제대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안 좋은 선례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왜 다들 자기 목소리를 못 낼까. 제발 줄 좀 안 섰으면 좋겠다.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줄’ 같은 걸 의식하게 되는 것 같다.

︎최근에는 서울지역 영화교육 허브센터(이하 허브센터), 스크린 독과점 반대 영화인 대책 위원회(이하 독과점 영대위)에서도 활동하고 계시지 않나.
독과점 영대위는 독립영화협의회 대표로서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다음 세대가 안정적으로 영화작업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허브센터는 영화진흥위원회 위탁 공모에 선정되었던 건데, 운이 좋았다. 심사위원들한테 지역마다 미디어센터 시설, 기자재, 인건비 다 지원하고 있는데 서울지역부터 독립영화 지원센터가 부재한 실정이라 이를 위탁받아 운영하고 싶다고 말했다. 저 사업들, (허브센터 강의실 벽면에 붙은 포스터들을 가리키며) 다 교육사업이다.
그리고 또 장비지원과 후반작업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른다. 영진위에서 지원해주는 게 일 년에 딱 두 번이다. 무슨 이벤트처럼. 그러니까 지원자들이 엄청 몰린다. 공공적인 지원이 매월 연속적으로, 일상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하는 후반 작업 지원 “독립영화 “기사회생 프로젝트”는 우리가 심사에 관여 안 한다. 최소한의 역량만 있다고 판단하면 일단 지원자들을 다 허브센터로 불러서 서로 발표하고 투표하게 한다. 그렇게 약 50편 내외가 응모되었고, 그중에서 29편을 지원했다. 그중 17편이 최종적으로 완성되었고, 나머지 12편은 아직 후반작업 중이다. 나온 것 중에서 7편 정도는 괜찮다. 영진위가 그런 지원사업이 일이 많다 보니까 일 년에 한두 번만 하는 것 같다. 상반기, 하반기. “독립영화 기사회생 프로젝트”를 담당한 직원이 일이 많더라. 좋은 게 뭐냐면, (영진위 지원으로 받은) 2천만 원 갖고 가면 정산을 다 자기가 해야 하는데 여기서는 담당자가 다해준다. 자기가 후반업체 어디서 하겠다고 얘기해서 그쪽으로 증빙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제작하는 쪽은 잡무가 없지. 그럼 영화에만 더 집중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럴 필요가 있다.

︎그럼 지난해 진행한 사업 중에 “독립영화 기사회생 프로젝트”가 가장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
그렇다. 덧붙여 영화를 완성하고 과정과 결과를 평가하는 단계가 필요하다. 관련하여 서로 인적 교류하는 것도 필요하고, 정보를 교환하고 평가해야 하는데 그게 지금 안 되고 있다. 우리가 독립영화 발표회를 했을 때도 그냥 한 게 아니다. 본인의 제작 과정에 대한 평가서를 쓰라고 한다. 이런저런 평가 하면 두 페이지에서 네 페이지 정도 나온다. 물론 우리 워크숍 과정이 아니기 때문에 강요까진 못 하지만, 그걸 해라, 그게 너한테 중요하다고 말한다. 청년 시절 봉준호도 그걸 했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잘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스스로 평가하는 게 제일 낫다.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조금만 개선하면 되는 거다.

︎영화비평은 영화와 어떤 식으로 관계 맺어왔다고 보나?
관객을 위한 비평이 있고 제작 주체를 위한 비평이 있다. 그런데 관객을 위한 비평은 많이 죽었지 않나? 다들 웬만큼 쓴다 이제. 우선 꾸준히 많이 쓰는 게 중요하다. 이전에 저널에서 글발 날렸던 사람들은, 지면이 있었다. 지금 여러분들도 두 가지가 다 필요한데, 평론 쪽에서 보면 yes가 아니라 no라고 하는, 관객들을 향한 비평이 필요할 것 같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작 주체들을 견인할 수 있는 평가도 필요하다. 비평에서도 그런 역할 좀 해줘야 한다.

︎그럼 제작과정 자체에 비평이 필요하단 말인지?
그렇다.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더라도 이 작업은 계속해야 한다. 프로들도 자기 객관화를 위해 스스로 평가하는 과정을 지속한다. 아마추어들은 작업 과정 중에도 자체평가가 필요하다.

︎오늘날 한국영화계에서 본인의 역할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이번 〈기생충〉의 경우도 대기업이지만 CJ ENM의 최소한의 역할을 부정할 순 없다. 한 편의 영화에 그와 같은 수많은 역할이 요구되지만, 일반 영화사에서 그 일을 누가 하겠나? 필요한 건 인정해야지. 그래서 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아무나 할 수 없는 역할로서 독립영화워크숍 입문과정과 공동작업 같은 교육을 맡으려 한다. 나는 네트워킹하는, 넘겨주는 역할을 한다. 연결하는 역할이다. 분배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 순환이 안 되는 게 문제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과 하고 싶은 말은?
일단 〈본명선언〉 문제가 잘 해결됐음 좋겠다. 독립영화의 어떤 정신적, 문화적 유산을 다음 세대에  올바르게 넘겨줄 수 있느냐에 관한 문제라고 본다. 진행은 되고 있는 것 같으나 만약 해결이 안 되면 나를 포함해서 당시 활동했던 세대들이 다 같이 은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울지역 영화교육 허브센터도 내가 앞으로 2년만 책임지고 운영하려 한다. 이후에 단체가 바뀌든, 누가 맡아서 하든 기본 토대를 마련해서 인수인계를 했으면 한다. 그렇게 보다 발전적으로 가동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면 다시 독립영화워크숍 입문과정의 담임조교로 복귀하는 거다. 다시 1월 말까지 워크숍하고 2, 3, 4월 새 공모도 여는데 그전까지 자체적으로 월세 해결해야 한다. 열 받는다. 우씨. 사비 털어가며 이게 뭔가. 일단 버텨보자는 생각이다. 정원 수가 채워지지 않는다면 더이상 할 수 없지. 지위나 명예는 관심 없기 때문에 미련은 없다. 다만 후계가 아니라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줄 서거나 흔들리지 않고 공공적으로 연대와 순환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 그 역할을 담당해 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