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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서한

질식자의 편지: 영화문화의 현재에 관한 13개의 질문
질식의 날 - 못다 부친 편지
회신1. 질식자에게
회신2. <비평(권력)에 대하여> 의 질문
회신3. 쉰들러 리스트: 무너진 낙원에서 완전함 찾기

수신인: 씨네21
회신4. 형제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회신5. 답변?
회신6. 창작과 비평의 관계에 대하여.....
등단 = 검증?
회신7. 지리적 계급의 소멸을 함께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회신8. 공개서한에 대한 회신입니다.
ㄴRE: 별로 어렵지 않은 이야기
회신9. 질식자에게

비평? 우리는 웃고 있다




3호 2020년 8월

1. 특집/ 여섯 빛깔 스크린 너머: 한국퀴어영화제 20주년에 부쳐
2. 특집/ CRY, FUCK, BEAT UP(울고 하고 패고)
3. 특집/ “퀴어영화 연구는 정말로 노다지”: 『한국퀴어영화사』 책임편집 이동윤 인터뷰
4. 특집/ 한국 게이/레즈비언 영화와 호모-특정적 난관들
5. 특집/ 샷다 내린 퀴어랜드: ‘디스코팡팡’과 ‘방 탈출 게임’ 사이에서
6. 특집/ 뱀파이어의 딜레마: 누구를 위한 ‘착즙'인가?
7. 정전에 속하기, 정전 밖에 있기: 사프디 형제의 방법
8. 검고도 밝은: 조주현의 ‘흑공’과 스크린 안의 미로
9. 아이돌 기표의 '트랜스' 해부하기: NCT 127의 〈슈퍼휴먼〉과 아이돌 피상성
10. '접촉'에서 '접속'으로: NCT 127의 경우
11. 아직도 굳이 〈무한도전〉을 논할 필요가 있는 건
12. 듣는 여자: 〈그리고 베를린에서〉
13. 박세영의 무한 도시
14. 추상化와 픽션: 이소정의 영상 작업에 대해
15. 이미 흩어진 '밀레니얼 시네필’
16. 비천함, 실패, 나쁜 것에 관한 정직한 성찰(우회하지 마세요)

A BACK NUMBER

2호 2020년 3월  

1.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잠깐!)” 2019 한국 코미디 영화의 ‘비빔면적 경향’과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윤리’: 영화 ⟨극한직업⟩, ⟨걸캅스⟩, ⟨엑시트⟩를 중심으로
2. 봉준호 월드 유람
3. 창문과 창문 ‘너머’—오연진의 《Lace》와 백종관의 ⟨추방자들⟩
4. 갱신과 추동 사이에서 기업가∽노동자∽DIY로서의 작가
5. 구체적 세부: 2019년을 함께한 독립극영화 속 여자들
6. 특집/ 액체의 단상들: 리퀴드(liquid)와 플루이드(fluid), 그 언저리에서
7. 특집/ 15초 곱하기 240의 실험: 이소윤의 ⟨450⟩
8. 특집/ 보여주는 대신 믿게 하기: 박시우의 ⟨변신⟩
9. 특집/ ‘플레이스’와 ‘플레이’로 규명되는 영화 ⟨소녀의 기도⟩
10. 특집/ 연결하고, 순환을 주장하기: 독립영화협의회 낭희섭 대표 인터뷰
11. 영화제가 활짝 피었습니다—대안적 영화제를 상상하기 위한 생산적 망각
12. 디스코팡팡적 시네마: ⟨알라딘2019⟩ 4DX
13. 걷잡을 수 없는/겉잡을 수 있는: 2019년의 영상 작업을 통해서
14. 테니스와 바둑의 신체를 상상하며: 되받아치기와 이중구속의 비평


BACK NUMBER

1호 2019년 9월

1. 환영에 대한 두 가지 입장: ⟨라이온 킹⟩과 ⟨야광⟩
2. 유령의 기술: 차이밍량의 ⟨더 데저티드⟩
3. 괴물, 일레븐, 무전(하)기
4. 장재현의 보이 스카웃은 무엇을 단련하는가?
5. 비체(abject) 생산라인의 작동방식을 드러내는 무빙이미지들: Maotik의 ⟨FLOW⟩와 이은희의 ⟨Contrast of Yours⟩
6. 무한 가정해보기: 류한솔 작가의 ⟨크리크리 메리크리 스마스⟩를 중심으로
7. 픽션의 증언
8. 다음 세기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의 ⟨힘의 한 세기⟩
9. 특집/ 영화평론가 김소영 인터뷰
10. 특집/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한국 영화비평계의 86세대에 대해 반추하며
11. 특집/ 한국영화비평계의 00년대부터 지금까지


0호 2019년 5월

1. 철의 꿈, 믿음의 끝: 박경근의 ⟨철의 꿈⟩
2. 펼치고 다시 조립하기: 백종관 감독론
3. ⟨로맨틱 머신⟩에 대한 짧은 소고: 카메라-눈의 체험을 체험하기
4. 경험되지 않는 영화에 대하여



비평의 비평 2019년 11월

듀나와 이동진과 기타등등‘씨네21식 비평’ 비판오큘로에 대해서반면교사정면교사?



선언문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 (잠깐!)”
2019 한국 코미디 영화의 ‘비빔면적 경향’과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윤리’
:
영화 〈극한직업〉, 〈걸캅스〉, 〈엑시트〉를 중심으로

다함께 박차차(마테리알 편집인)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 만약 이 문장만으로도 특정 멜로디가 떠올랐다면, 바로 당신이 생각하는 그 노래가 맞다. 이 짧은 노래는 1984년도부터 팔도 비빔면의 CM송으로 사용되었다. 그럼 다음 가사도 한번 떠올려보자. 음, 사실 그건 가사라기보다는 노래에 불쑥 끼어든 추임새, 맞장구 혹은 콩트에 가깝다.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라는 CM송 가수의 목소리이자 일종의 지침에 따라 마치 청기 백기 게임이라도 하듯 어리숙하게 양손을 바꿔가던 (지금으로선 매우 앳돼 보이는) 심형래는 맞은편에 놓인 카메라의 오른쪽 부근 어느 곳을 향해 익살스레 쳐다보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두 손으로 비벼도 되잖아~”


[유튜브 캡쳐] kcanari, “팔도비빔면1984”

이 광고는 코미디언 심형래의 캐릭터를 살린 것으로서, 모종의 자명한 진실을 가장 늦게나마 불현듯 깨우치며 극의 반전을 맞이할 때 발생하는 희극성에 기반을 둔다. 이를테면, 난센스 퀴즈나 한때의 최불암 시리즈가 비슷한 방식으로 희극성을 자아냈던 예시에 해당할 테다. 한편 이와 같은 희극적 양식은 팔도 비빔면 광고나 최불암 시리즈가 유행하던 어느 특정 시기에만 통용된 것은 아니다. 당장 TV를 켜 〈코미디 빅리그〉라든지 아무 드라마의 자투리 장면들만 봐도 이런 양식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점은, 광고나 예능 프로그램을 제외한다면 어디까지나 드라마의 ‘자투리’ 장면에서만 사용된다는 사실이다. 제아무리 코미디 장르를 표방한다고 한들 이렇게 어리숙한 주인공과 그를 따라가는 관객이 뒤늦게 진실을 깨우침으로써 여태껏 우리 모두가 매달려온 어떤 곤란함이 한번에 해갈되는 식의 희극적 반전이, 작가는 전체 극의 큰 줄기, 즉 ‘대미’를 장식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는 어쩌면 기존의 내러티브 중심 영상 콘텐츠가 그 작법의 근간으로 아직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산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랜 고전인 『시학』, 그중에서도 서사시와 비극을 위대하게 다루는 제1권에서 그는 앞서 말한 ‘뒤늦게 도착한 (희극적) 반전’을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유난히 코미디 장르물이 두각을 보였던 지난 2019년의 한국 영화들은 얼마간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 선생님의 가르침을 쉰 소리처럼 여겼던 것 같다. 가령, 〈극한직업〉과 〈걸캅스〉가 그렇다. 약 1,626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역대 한국 영화 박스오피스에서 〈명량〉(2014)에 이어 2위에 오른 〈극한직업〉과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광풍 속에서도 나름의 약진을 거둔 〈걸캅스〉는 그동안의 한국 코미디 장르물, 특히 대중으로부터 유효한 반응을 얻었던 코미디 영화들과는 사뭇 다른 양식을 보였다. 물론 형사물의 계보에서 보아도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장군님’과 ‘할리우드 히어로들’을 넘진 못했다!) 그 다른 양식이란, 바로 ‘자투리’로 ‘대미’를 장식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기존의 내러티브 영화가 그야말로 자투리처럼 다뤘던 ‘희극적 반전’을 러닝타임 내내 주인공이 힘겹게 매달려온 어떤 곤란함을 해갈하는 데에 ‘기꺼이(喜)’ 사용했다. 〈극한직업〉의 경우 도입부의 첫 시퀀스로 말미암아, 이렇게 기존의 영화들과는 다른 양식을 추구할 것임을 언질이라도 해주는 듯하다. 여태껏 영상매체 속 대부분의 형사들이 작전을 소위 ‘간지나게’ 수행해왔던 바를 떠올리게 하는 재연 장면과 〈극한직업〉의 마약반을 교차 편집하여 대비해 보이고, 이에 더해 검거대상인 범죄자를 마치 ‘변사’처럼 기용하여 그들의 비루함을 친절히 설명까지 해주었던 것이다. 이어서 잠복수사를 위해 마약 거래 조직의 본거지 맞은편에 치킨집을 차린다는 설정과 전개는 이를 더욱더 극대화했다.
        그러나 이런 비루함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서사의 클라이맥스 지점에서 반전되는데, 반대로 그 방식은 전혀 당연하지 않게 느껴진다. 포문은 ‘마 형사(진선규)’가 연다. 연신 범죄자들에게 당하기만 하며 어딘가 다소 헐렁해 보이던 그는, 마침내 목숨마저 위태로워진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르러서는 위협적으로 돌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경찰이) 어떻게 됐을까?”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범죄자들을 놀라운 액션으로 후다닥 제압해 버린 뒤 이렇게 덧붙인다. “나 유도 국가대표 특채라고!” 이후로도 이런 식의 커밍-아웃은 계속된다. 예컨대 ‘영호(이동휘)’는 UDT 특전사 출신으로, ‘장 형사(이하늬)’는 무에타이 동양 챔피언 출신으로, ‘재훈(공명)’은 야구부 출신이라 맷집이 강하기 때문에 아무리 맞아도 아파하지 않는다며, ‘고 반장(류승룡)’은 칼에 열두 번 찔리고서도 좀비처럼 살아난 전설적 인물로 ‘뒤늦게 급부상’한다. 그런 이력을 스스로 소개하는 게 남사스러워서인지는 몰라도, 영화는 다시 한번 도입부와 마찬가지로 변사 격의 인물, ‘최 반장(송영규)’의 입을 빌려 일종의 ‘천기누설’을 감행한다. 정말이지 천기누설이다.
        그럼 〈걸캅스〉는 어땠을까. 마찬가지로 현재 시점의 서사는 주인공 ‘박미영(라미란)’의 (과거의 영광에 비하면) 비루한 처지에서부터 출발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시동생이자 동료 경찰인 ‘조지혜(이성경)’도 좌천되어 같은 민원실에 부임하게 된다. 이처럼 〈걸캅스〉는 〈극한직업〉이 그랬듯 경찰인 주인공들의 비루한 현실로부터 출발하는데, 그럼에도 전자의 경우엔 그것에만 오롯이 한정되는 건 아니다. 과거 여자형사기동대 시절의 ‘미영’이 멋들어지게 범죄자를 소탕하는 영화의 첫 시퀀스는 이후 전개될 서사에서 그가 재기할 것임을 충분히 가늠케 한다. 대신 정말로 서사를 우스꽝스럽게 급반전하는 대목은 디지털 성범죄 조직을 향한 그의 사적 수사가 끝내 막다른 길에 부닥친 시점에서 찾을 수 있다. 상관인 ‘민원실장(염혜란)’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 말이다. 이전까지 ‘미영’과 ‘지혜’의 수사를 크게 방해하는 요인이었거니와 민원실 직원들 중 ‘미영’을 가장 못마땅하게 여기기는 인물이기도 했던 ‘민원실장’은 바로 이 장면에 이르러선 갑작스레 태도를 바꾼다. 그도 ‘미영’처럼 여자형사기동대 출신임을 커밍-아웃하는 것이다. 더불어 다른 민원실 직원인 ‘장미(최수영)’로부터 모두 들었다며 지지를 보태어 ‘미영’과 ‘지혜’의 사적 수사를 공적 수사에 준하게끔 격상시키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미영’이 줄곧 매달려 온 갈등을 단번에 열어젖혀 버릴 열쇠를 제공한다. “‘장미’ 사실은 카이스트 졸업한 국정원 내근 요원 출신이야.” 여기서 ‘민원실장’은 〈극한직업〉의 ‘최 반장’ 만큼이나 천기누설의 기적을 행한 셈이다.
        이렇게 두 영화가 조연 캐릭터의 천기누설로 하여금 희극적 반전을 거둠과 동시에 줄거리 전체의 대미 내지 그것의 여명을 마련했다는 사실은 영화 리뷰 유튜버들로부터 받은 기존의 비아냥뿐 아니라 가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릅뜬 눈을 면치 못했을 법하다. 그는 앞서 언급한 저서에서 이러한 천기누설적 해갈을 비판하며 ‘데우스 엑스 마키나’ 즉, ‘기계 장치의 신’을 사용하는 허술한 작법으로 구체화한 바 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란,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종종 사용되곤 했던 서사적이고 연출적인 도구로서, 기중기와 같은 ‘기계 장치로 들어 올려진 신()적 인물’을 뜻한다. 그리고 이 도구는 주로 서사의 갈등이 극에 치닫는 지점에 등장하여 신의 뜻을 설파하는 식으로 사용되었는데, 그리하여 주인공과 그에 이입한 관객들이 줄곧 씨름해온 온 극적 갈등은 순간 단칼에 베이어져 버리고 만다. 다시 말해, 앞의 두 영화에서 그랬듯 ‘천기누설의 기적’을 행하던 도구이자 캐릭터였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작법을 두고서 아무런 계획 없이 극을 써 내려가던 작가가 마침내 제 한계를 깨닫고는 황급히 마무리 지어 버리는 아마추어적인 실수쯤으로 여겼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이를 비롯한 그의 통찰은 아주 오랫동안 연극은 물론이고 극영화의 작법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중의 입맛에도 가장 마땅하게 자리 잡아 왔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극한직업〉과 〈걸캅스〉의 목넘김이 2019년의 한국 대중에게는 그다지 거북하지 않았음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동원 관객 수라는 수치적 자료가 이를 방증한다. 심지어 이들 영화가 이전에 인기를 끌었던 코미디 장르물 혹은 형사물과 다른 작법을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두 영화의 희극성은 분명 〈투캅스〉(1993)의 ‘익살스러움’이나 〈베테랑〉(2015)의 ‘단계적 구성’으로부터 이탈해 있다. 기실 두 영화가 담지하는 일련의 특징은 2019년을 돌아보며 특기할 만한 모종의 새로운 경향일 듯하다. 그리고 나는 이를 이 글의 첫 문단에서 언급한 팔도 비빔면 광고로부터 차용해 ‘비빔면적 경향’이라고 부르고 싶다.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다 ‘불현듯(잠깐!)’ 본인이 두 손을 모두 사용할 수 있음을 깨달은 앳된 심형래처럼, 〈극한직업〉과 〈걸캅스〉는 수원 왕갈비 통닭으로도 비비고 하와이안 셔츠로도 비비다가 종래에는 깨닫는다. 본인들이 ‘장군님’과 ‘할리우드 히어로들’에 비견할 만한 영웅적 면모를 ‘애당초부터’ 갖추고 있었음을 말이다. (과연 〈걸캅스〉에서 ‘미영’이 범죄 조직에 납치감금되었을 때 내뱉는 대사,  “비벼, 비벼! 졸라 비벼!!”는 우연이었을까?) 아울러 그런 깨달음의 기로에는 때마다 바로 그것을 가능케 할 천기(天機)를 머금고서 “잠깐!” 하며 나타나는 ‘최 반장’과 ‘민원실장’, 두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새롭게 두각을 보인 경향을 어떤 각도로 바라볼 것인가 하는 화두 또한 다뤄봄 직하다. 만약 아리스토텔레스식 작법이 국적을 불문하고 오늘날의 극영화에까지 대체로 유효한 것이었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더욱더 말이다. 이는 공연히 떠도는 한국 영화의 쇠락설과 더불어 관객의 태도마저 안일하게 변해 버렸다는 주장에 그저 힘을 보탤 뿐인가? 아니면 닭과 달걀을 바꿔서 한국 관객이 안일해졌기 때문에 한국 영화가 무지막지(無知莫知)한 행보를 걷는 중인 걸까? 그것조차 아니면 한국 제작자나 제작사가 그래서? 물론 딱 잘라 아니라고 대답할 배포는 나에게 없다. 대신 그보다 제작자와 관객이 동시대 한국영화를 대하는, 구체적으로는 코미디 장르물을 대하는 ‘태도’ 혹은 ‘윤리’의 변화로 이 경향을 재고해볼 것을 제안하고 싶다. 무언가가 무언가로 존재하기 위해 마땅히 지켜야 할 대상으로서, ‘무엇을 받아들일 것이며, 또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 하는 질문이 중요해지는 관점에서 말이다. ‘비빔면적 경향’은 현 시점의 대중이 형사를 주인공으로 한 코미디 장르물을 대할 때의 바로 그런 것들을 짚어낼 수 있도록 한다. 한때는 소시민 영웅으로 활약하던, 어쩌면 그래야만 했던 영화 속 ‘형사’들은 이제 한 없이 우스꽝스러운 오합지졸이어도 괜찮은 존재가 되었다. 반면, 그들이 별안간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범죄자를 일망타진하더라도 그리 어색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우공(愚公)이 산을 옮겼다(移山)’하여도 고개 끄덕여 줄 수 있는 것이 된 셈이다.
        한편 〈극한직업〉과 〈걸캅스〉가 모두 ‘비비고’의 기업인 CJ가 제작 및 투자배급에 관여한 영화였다는 사실을 반추해보며, 나는 지난해 당사의 다른 코미디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비빔면적 경향’이 감지되는지가 궁금해졌다. 1월의 〈극한직업〉과 5월의 〈걸캅스〉, 그다음엔 8월의 〈엑시트〉가 있었다. 그런데 만약 ‘따따따-따-따-따-따따따’를 좀 따라해본 적 있는 관객이라면, 〈엑시트〉의 경우 앞의 두 영화에서 발견되었던 희극적 반전, 달리 말해 주인공 ‘용남(조정석)’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초인적인 힘을 가장 늦게 깨달음으로써 발생시킬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우스꽝스러움을 도입한 영화가 아니었음을 기억하고 있을 테다. 오히려 영화는 그것의 주제가(이승환, “슈퍼히어로”)와는 정반대로 ‘용남’이 ‘슈퍼히어로’로 ‘급부상’하는 걸 의도적으로 지양함으로써 비슷한 처지인 취준생들의 마음속에선 오히려 그렇게 재의미화되도록 하는 역설적 전략을 취했다. 그러기 위해 〈엑시트〉는 첫 시퀀스를 통해 비록 ‘용남’이 취직도 못 한 채 비루하게 나이만 먹어가고 있긴 하지만, 생활 근력운동만큼은 꾸준히 해왔다는 사실을 관객들이 선뜻 인지하고 믿을 수 있게끔 매우 공을 들였다. 배우 조정석의 다부진 몸매와 (실제로 거의 대역 없이 소화했다고 알려진) 체력단련 몽타주 쇼트를 전시함으로써 말이다. 이후 재난적 상황에 놓인 다음에도 ‘용남’은 내내 달리고 매달리고 또 달리면서 그 육체의 거짓 없음 내지 진실함을 전달하고자 부단히도 애를 쓴다. 마치 면접관 앞에 앉은 취준생이 어떻게든 제 능력을 입증해 보이려 듯이 말이다.
        그런데 역으로 이렇게 ‘비빔면적’이지 않은 경향에서 또한 모종의 윤리를 도출해내는 게 가능할 것 같다. 〈엑시트〉처럼 동시대 한국 코미디 영화가 ‘청년’ 혹은 ‘취준생’ 등을 주인공으로 다룰 때 지켜내려는, 혹은 지켜내야만 하는 준칙과도 같은 것. 비빔면적이지 않은 게 아니라 비빔면적이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서 말이다. 다만 이들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도구까지 아예 내던져 버린 건 아니다. 대신 이전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그것이 등장한다. 순전히 ‘기계장치(로 들여 올려진 것)’로 소급해 볼 때 더욱 선명하게 파악된다는 점에서. 가령, 약 100분 분량의  〈엑시트〉가 러닝타임의 30분가량만을 남긴 채 결말로 향하는 3막으로 도약할 때의 장면, 바로 그때 난데 없이 등장하는 ‘드론’을 떠올려 본다면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이때의 드론은 그자체로 기계장치이자 들어 제 동력으로 들어 올려지는 것인 한편, 재난적 상황 속에서 몸부림치는 ‘용남’과 ‘의주(윤아)’를 영화 속 가족들뿐 아니라 시민들, 나아가 관객들에게까지 속속들이 전달해준다는 점에서 모종의 신적 역할을 수임(受任)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이 유사-기계장치의 신은 고대 그리스나 〈극한직업〉, 〈걸캅스〉의 그것처럼 주인공인 ‘용남’과 ‘의주’가 당면한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아마도 형사가 주인공일 때와 다른 윤리가 투사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그저 “이제부터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노라!”하고 선포하는 존재가 아니라 ‘해당 극이 무슨 이유에서 어떻게 해결되어야 하는지를 엄밀하고 성실하게 설명하는 존재’였다는 근본적인 전제에 유념한다면, 아울러 〈엑시트〉와 같이 비빔면적이지 ‘않아야 하는’ 영화가 택할 수밖에 없는 존재양식이 바로 그 ‘엄밀하고 성실한 설명’을 통해 ‘거짓없음 내지 진실함을 증명해 보이는 것’임을 병렬해 본다면, 이때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가장 윤리적인 방식으로 제 소임을 다 하고 있다고도 볼 법하다. 나아가 이런 맥락에서라면 드론뿐 아니라 영화 〈엑시트〉 그 자체를 찍고 있는 기계장치, 즉 카메라가 그 소임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덧붙여 그 소임은 다음과 같은 오래된 화두를 또 한번 지속한다. 카메라는 무엇을 보여줄 수 있으며, 무엇을 보여주지 못하는가. 혹은 보여주길 꺼려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