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5
Essay
이래도 될까요?
ML
뮤직비디오 감독



0. 이래도 될까요? 20년과 21년에 어딘가에 메모해두고 잊거나 감추었던 것들을 보내봅니다.


1. 이래도 될까요? 깨진 거울의 모양에 감탄하고 있는 한국 영화들

20년 초 코로나가 발생한 이후, 개봉 예정이던 충무로의 기대작들의 개봉 일정이 차츰 변경되기 시작했고, 〈사냥꾼의 밤〉을 시작으로 OTT 서비스 공개로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공개된 기대작을 하나둘 확인해 나가며, 뒤틀린 방식으로 충무로 영화를 애호하던 내 열정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고민했다. 이상한 자신감을 쏟아내지만 하나같이 권태로운 꼴을 취하고 있는 영화들을 보고, 이런 걸 왜 만들고 싶어했는지 궁금해 감독들의 인터뷰를 찾아 읽었는데, 내가 본 영화에서 열연을 펼치고 있던 건 배우들이 아니라 감독이구나, 하는 지루한 사실만 확인했다. 상업영화 자장 안에서 작가주의를 표방하는 감독들의 에티튜드를 얼기설기 엮은 태도를 연기하고 있음을 숨기지 못하는 인터뷰를 읽으며, 나는 굉장히 낙심한 관객을 연기라도 해야 하는 걸까 싶었다. 그러던 와중에 이충현 감독의 〈콜〉의 주요 무대가 되는 저택과 그 저택을 둘러 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어떤 찝찝함이 다시 떠올랐다.

이충현 감독의 〈콜〉은 여성 캐릭터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사이코패스의 변칙적인 태도와 과잉된 폭력을 동력으로 삼아, 디자인과 입시 미술 같은 CG를 뒤엮은 영화인데, 이 영화 속 호기로운 설정 대부분은 극중 배경이 되는 지방 변두리 마을로 인해 용인된다. 된다기보다, 용인된다고 확신하고 진행하는데, 이 확신이 참 의아했다. 충무로는 어느 순간부터 납작하게 눌린 지방 풍경에서 살육을 벌이는 것을 즐기고 있는데, 이 유희의 정점이자 종결이라고 생각한 〈곡성〉 이후에도 지속됨으로써 일종의 패턴이 되었다. 이 패턴은 장르에 적합한 공간으로서 지방 풍경으로 끝나지 않고, 은밀하게 작가주의를 표방하는 감독들의 태도, 또는 그 태도를 마케팅 요소로 사용하는 방식과 어우러져 완성된다.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무책임한 태도로 근 십 년간 공개된 주류 충무로 영화들은, 농촌 스릴러 시초처럼 언급되고 있는 〈살인의 추억〉이 두 줄기로 갈려져 형성된 흐름 안에 있다고 파악한다. 하나는 〈살인의 추억〉 속 화성의 풍경을 장르적 공간으로 받아들여 사용하는데, 예를 들면 앞서 언급한 〈곡성〉 같은 것들이 있고, 다른 하나는 군부 정권의 폭력성을 암시하거나 고발하는 미장센을 독해하는 방식에 영감을 받아 만든 〈내부자들〉 같은 것들이 있다. 이때 흥미로운 건, 이 두 줄기 모두 출발점의 맥락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는데, 여기서 더 나아가 그 출발점 자체를 알게 모르게 맥락으로 사용하며 많은 것들을 아웃소싱해버린다.

00년 초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등의 활동을 일컫는 ‘충무로 르네상스’는 방화라 불리는, 근과거에 제작된 충무로 영화들을 하나로 묶어 부정하는 태도를 표방하고 있었는데, 촬영이나 조명, 편집 등의 기술적 완성도를 높이는 동시에 영화를 이루는 모든 요소들이 당대 유행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내적 논리를 따르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형식화하였다. 이때 무맥락적으로 만들어진 충무로 영화들의 원인을 급격한 근대화로 인해 좌충우돌하는 한국으로 설정하였고, 이렇게 파악한 한국은 캐리커처화된 극중 인물의 행위, 한국이란 풍경을 과장하거나 압축한 미장센, 불균질함으로 인해 충돌을 일으키는 편집 등으로 표출되었다. 이와 함께 ‘충무로 르네상스’의 대표 주자들은 자신들이 출몰한 당위를 위해 일종의 교과서로 여겨지는 명작 리스트를 거부하며 ‘김기영’을 비롯한 국내외의 괴이한 B급 영화 감독들을 지면과 영화제 등을 통해 열정적으로 소개했다.

이때 흥미로운 점은 〈쉬리〉의 흥행으로 만들어진 한국형 블록버스터 제작 유행을 통해, 올림픽 기록을 갱신하듯 관람객 숫자가 증폭하는 과정에서, 도박사 같은 몇몇 제작자들이 충무로에 흘러넘치는 돈을 지르듯 박봉김의 영화 제작에 투자했고, 주류 영화에 걸맞지 않은 괴상한 비전이, 그에 걸맞지 않는 거대자본을 통해 필요 이상으로 웰메이드한 완성도로 제작되었고, 놀랍게도 흥행에 성공하며 주류에 안착해버렸다는 것이다. 이후, 세계 주요 영화제를 통해 소개되고 수상을 하면서, 국위 선양하는 인물 취급을 받기 시작했고, 지속적으로 이들 영화에 거대 자본 투입이 가능하도록 천만관객 풀을 유지하는 역할을 맡은 기획 영화들은 돈밖에 모르는 저급 취급을 받았다. 마치 ‘충무로 르네상스’ 흐름 안에서 괴상하게 묘사된 한국식 가족 같은 꼴이랄까? 여튼, 박봉김은 필모가 진행됨에 따라 자신의 영화의 맥락을 자신의 필모로 삼기 시작했고, 후발주자들은 그들의 영화 속 요소들을 단순한 스타일로 추종하며 모사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때 특정 대상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발현된 태도를 모방할 만한 스타일, 교본으로 삼을 만한 것인지에 대한 물음, 부정된 대상의 자리를 뭘로 채워야 하는지, 그 자리가 채울 만한 것인지, 아니면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아무도 관심이 없다. 뭔지 모르겠으나 스타일을 추구한다는 후발주자들의 공허한 제스처는 장르적 공간으로 지방 풍경을 사용한다. 그러니까 그 허우적거리는 제스처를 보면서, 왜 이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을지 궁금할 수밖에 없는데, 하나같이 비전에 대한 확신은 있으니, 더더욱 뭐가 뭔질 알 수 없게 된다.


2. 이래도 될까요? 제목을 언급하고 싶지 않은 영화.

20년에는 극장을 간 횟수가 손에 꼽을 만하다. 코로나가 게으름에 대한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 극장에 가지 않고 OTT로 영화를 접했다. 때문에 20년 이전보다 디지털 디바이스를 통해 영화를 보는 횟수가 늘었고, 이어서 각종 SNS를 통해 다양한 영상을 접하는 횟수 또한 늘었다. 20년 이전이었으면,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란 왜 이 모양인가 하고 말았을 고민이 다른 영화나 영상을 물고 이어졌고, 영화와 영화 아닌 것들을 비교하는 횟수가 잦아지다 보니 결국 내가 본 이 영화의 존재 이유는 대체 뭘까? 이건 왜 영화라는 형태를 띠고 싶어했어야만 했나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상업 영화야 시장 유지를 위해서라도 꾸역꾸역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 치더라고, 그 밖에 있는 영화들 중 고된 환경을 기어코 이겨내어 만들었지만, 그 어떤 비전 없이 닳고 닳은 요소들을 버무린 결과로 끝나고 만, 그러니까 그 결과물이 어떤 비전을 구현하려던 과정에서 실패의 흔적만을 남겨, 그 흔적을 역추적해 비전의 흐릿한 형태라도 가늠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닌, 그냥 만들어진 무언가임을 확인할 때마다, 이게 왜 굳이 영화라는 형태를 취해야만 했는가 싶은 것이다. 왜 아트하우스 무비니, 독립 영화니 하는 수식어를 달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있어 어떤 요철도 없는 안정된 형식을 최적화하는 데 혈안이 된, 넷플릭스 드라마만도 못한 비리비리한 무언가를 영화라고 칭하고 싶으냐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유튜브를 통해 간혹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 수익 창출을 위해 구독자 폭증을 유도하는 기획물을 제외하고, 유튜브를 헤집다 보면 카메라와 편집을 다루는 데 있어 굉장한 아마추어임을 노출하는 것 따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것을 오롯이 보여주려는 의지만 남아, 그 자체로 단정하고 선명하며, 아름다운 리듬을 선보이는 순간을 담은 영상들을 기적적인 확률로 목격할 때가 있다. 카메라를 쥐고 장식 없이 삶을 가로지르며 선험적인 사고방식에 현기증을 일으키는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당대 이슈와 관습적인 시선에 맞춰 세상을 게으르게 축약하고 비아냥거리거나, 고뇌에 빠져있거나, 정의감을 불태우거나, 염세적인 태도를 노출하는, 암튼 어떤 포즈가 됐던 무성의한 컨벤션을 노출하는 영화들을 볼 때마다, 이게 왜 굳이 영화의 형태를 띄고 싶은지 모르겠다.

왜 영화 만드는 행위가 영화라는 것을 하나의 제도로 만들고, 그 제도에 편입되려는 욕망으로 전락했을까? 내가 현시점까지 영화에 기대하는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지난 관행에 맞춰 개봉 리스트나 OTT 라이브러리를 뒤적거리는 행위는 과연 어느정도 유의미한 행위일까? 이런 식으로 염세적인 태도로 나의 게으름을 정당화하지 말고, 차라리 유튜브를 의미심장하게 대해보는 것은 어떨까? 방대한 양의 영상을 보유하고 실시간으로 그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어, 거시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아 무기력해질 유저를 다독이고자, 취향에 맞춰 서비스를 주체적으로 활용한다는 착각을 유발하는 알고리즘, 인터페이스로 치장한 유튜브에 뛰어드는 건 어떨까? 유튜브를 자연으로 설정하고, 지질학자의 태도를 어설프게 흉내내며 겸허한 방식으로 영화적 순간을 찾아 헤매는 것을 고행으로 삼는, 괜한 심통을 부리는 것은 어떨까 싶은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코로나 블루? 죄송합니다.


3. 뭔가 끝났다는 세 편의 미국 영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The Mule>을 보고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옛 영화들을 몇 편 찾아 봤다. 그러던 중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명성을 얻고 난 이후, 줄곧 부적응자를 연기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블론디였을 때나, 헤리 칼라한이었을 때, 프랭크 모리스, 빌 무니, 프랭키 던, 월트 코왈스키였을 때도, 시대에 부적응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대에 부적응하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인물들은 극중 세상에서 튕겨나갈 위치만을 열심히 사수하다 결국 세상 밖으로 튕겨나가 버리고 마는 선택을 반복한다. 남들이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큰 가르침이니 뭐니 떠들던가 말던가 말이다. 과거와 달라져 버린 가치들을 거부하며 세상과 불화를 일으키고, 대치하다, 결국 자신의 방식으로 퇴장함으로써 자신이 연기한 인물을 극중 세계 너머의 신화적인 공간으로 이동시키는 것을 반복한다.

<Gran Torino>의 게으른 동어반복 취급을 받았던 <The Mule>은 작정이라도 한 듯 이를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마약을 운반하며 미국을 횡단하는 얼 스톤이란 노인은, 마약 운반 루트를 이동하며 ‘요즘 미국인’을 마주치며, 세상과 자신의 거리를 관객들에게 확인시킨다. 영화 말미 얼 스톤은 자신을 변호하며, 자신의 행위에 대해 첨언하려는 변호사의 변론을 거부하고 범죄를 시인한 뒤 감옥으로 들어간다. 극중 어떤 인물보다 자신과 합이 잘 맞았던 갱 같은 인간들이 가득할 장소로.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신화적인 공간으로 자신이 연기한 인물들을 옮겨 놓고 모든 진입로를 끊어버렸달까?

타란티노가 믿는 영화라는 게 있다. 그리고 그걸 작동시키는 동력에 대해 말하는 영화가 <헤이트풀 에잇>이었다. 무언가를 보고, 보는 행위로 인해 의심이 촉발되고, 그게 폭력 같은 광폭한 에너지를 촉발시킨다. 혐오만이 영화를 영화답게 굴러가게 했다고 믿는다. 혐오는 너무 과격한 말이니 편견으로 바꾸자.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는 그럴 수 없지.

이제 그럴 수 없어 크게 낙심해버린 것인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헐리우드>의 타란티노는 우울증 걸린 노인네 웅얼거림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 릭 달튼이 대표하는 영역이 있고, 클리프 부스가 대표하는 영역이 있다. 그리고 릭 달튼이 대표하는 영역은 클리프 부스 같이 삶을 고스란히 마주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만들어져 왔다. 그때는 진짜 인간들이 진짜 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삶을 진공 상태에 처넣고 관념으로 세상을 마주하는 인간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잘못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타란티노는 릭 달튼이 샤론 테이트의 집에 들어서는 마지막 컷을 가장 단호한 응징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짐 자무시의 <데드 돈 다이>의 세계는 너무 늙어버린 세계다. 너무 늙어버려서 좀비가 나와 사람들을 물어 뜯으며 썩은 몸뚱어리를 질질 끌며 돌아다닌다 해도, 그 이전과 다를 것이 없는 세계다.

변화의 가능성이 없어져 버린 늙은 세계. 노인의 삶은 청춘의 한 순간에 정체되어 꾸역꾸역 이어져 가고, 젊은이들은 이제 노인이 되어버린 이들이 젊었을 때 만들어놓은 것을 지가 발굴한 보물인 것마냥 품고 산다. 변두리 사는 너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도심에서 폰티악 르망을 타고 온 힙스터 또한 별 수 없이 늙은 상태로 청춘을 가로지른다. 너무 늙어버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또한 증발한 세계는 그렇게 무결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르자가 연기한 딘은 이 세계가 “완벽하다”고 한다.

이 완벽한 세계 앞에서 무력한 짐 자무시는 자신의 필모 속 기호들과 그 연장선상에 있는 기호들을 끌어와 화투패 뜨듯 이용한다. 그 과정에서 꾸역꾸역 터져 나오는 밥의 논평, 그리고 그 논평으로 인해 이 영화 자체가 현 미국 상황에 대한 논평이라 언급되는 영화 외부의 상황, 그걸 당연한 듯 예상하고 다 실없다고 웅얼거리는 영화. 완벽한 세계 앞에서 짐 자무시는 이런 신변잡기뿐 할 게 없다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짐 자무시의 미국이 없어졌다.








노매드랜드에서 노-매드-랜드로

책상의 측면 돌기: 〈에란겔 다크 투어〉 기행

노동을 구하지 마라: 〈깃발, 창공, 파티〉와 상황주의에 대한 소고

공원의 풍경(들): 다미앙 매니블의 〈공원Le Parc〉

“안심하시고 (...) 편안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신정균 개인전 ⟪아크로뱃⟫의 영상에 관한 노트

쓸쓸한 불빛 아래 활자들: ⟪동시대-미술-비즈니스: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질서들⟫

Unboxing: 발생하는 유기체

우울, 냉소, 충격의 트라이앵글을 넘어서: 공개서한 이후의 메모
시리즈의 감각: 예능 < f(다음 화 이어보기) < 영화

대화를 멈춰선 안돼: 〈마인드헌터〉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스위트홈〉에 대한 노트는 아닌 글

우정은 실패를 알아차리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폴 W.S. 앤더슨 영화와 액션의 교환

스콧 긍휼 평강 사랑: 〈메트로폴리스〉, 〈프로메테우스〉 그리고 〈레이즈드 바이 울브스〉

︎ 이래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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