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5
Critic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스위트홈〉에 대한 노트는 아닌 글
윤아랑
비평가



ARRI Alexa LF라는 카메라가 있다. LF라는 이름대로 35mm 풀프레임보다 조금 더 큰 라지 포맷 센서를 탑재하고 있어 얕은 심도, 넓은 화각의 화면을 구현하는 데 아주 용이하고, 빛의 양에 따라 화면이 뭉개지는 것을 방지하는 명확한 HDR과 WCG도 갖추고 있으며, 또 이러한 장점들로 인해 ‘공식’ 아이맥스 카메라가 아님에도 아이맥스 인증을 받기도 했다. 말하자면 현재 상용화된 촬영용 디지털 카메라 중 꽤 고급에 속하는 기종인 것이다. 현재 공개된 작품 중에선 〈만달로리안〉, 〈포드 v. 페라리〉, 〈백두산〉이, 공개 예정인 작품 중에선 〈기묘한 이야기〉 시즌 4, 〈듄〉, 〈이터널스〉가 이 기종으로 촬영되었다. 왜 카메라 소개로 글을 시작하고 있느냐, 하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스위트홈〉이 Alexa LF(와 ARRI의 시그니처 프라임 렌즈)를 사용한 국내 첫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잠시 간단하게 상상해보자. 8개월에 달하는 긴 (사전-)제작 기간 동안 3,500평 이상의 거대하고 디테일한 세트장에 젊은 신인 배우들을 주연 삼아 고급 카메라 앞에 데려놓고 움직이는 촬영 현장. 여기에 (애니메이팅이 다소 어색하긴 했지만) 괴물들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한 CG 공정까지 셈해야 한다. 내게 있어, 형편없다는 말도 적합하지 않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형편없는 〈스위트홈〉에서 인상적인 유일한 지점은 이런 어마어마한 물적 요건이었다. 왜? 〈스위트홈〉이 저런 요건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아닌 드라마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말에 있어, 종말론의 계절을 넘어선 작금의 평균적 레토릭은 모든 영상 양식을 무빙 이미지라는 개념에 용해하는, 차이 없는 평등론을 펼치기 일쑤이지만, 그리고 그런 사고가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닐 테지만, 나에게 쟁점으로 인식되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같으나 서로 다른 영역으로 ‘성립된’ 양식들이 서로를 무어라 인식하고 서로에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과정이다. 현상을 야기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힘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있어선 이쪽이 훨씬 적합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선 영화와 드라마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오늘날 한국 드라마의 제작 환경이나 촬영 장비가 영화의 그것과 큰 차이를 찾기 힘들 만큼 발전하고 있다는 건 거의 상식이다. 촬영 장비의 경우 2009년을 기점으로 TV 드라마의 화면 송출 및 재생이 SD에서 HD 포맷으로 완전히 전환되면서 (출발선을 그은 〈추노〉 이후) 레드원을 비롯한 4K급 이상의 고성능 카메라가 빈번히 쓰이기 시작했고, 곧 드라마에서도 ‘영화적’이라고들 하는 고난도의 카메라 테크닉, 깊은 심도나 독특한 색감의 구도, 24프레임의 영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요즘은 (방송국에서 방영하는 것 중 가장 저가의 드라마인) 아침 드라마에서도 야외 씬은 웬만해선 24프레임으로 찍는다! 그리고 2021년 우리 앞에는 〈경이로운 소문〉, 〈빈센조〉, 〈스위트홈〉처럼 웬만한 상업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더 ‘개성적’이며 기술적으로 신경쓴 드라마들이 있다. 드라마들은 ‘영화적’인 것을 차용하여 점점 더 영화를 닮고 싶어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냥 이렇게만 말해도 괜찮을까. 남한에서 드라마가 영화를 닮고 싶어한다는 말은 더 큰 상황을 지시할 수 있지 않을까. 〈스위트홈〉은 어쩌면 그 (기점은 아니나) 주요 사례 중 하나로 우리네 역사에 등장한 게 아닐까. 물론 제작 환경의 하이-테크화에 따라 〈스위트홈〉에서 ‘영화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마치 흔해빠진 게으른 기자들처럼 말할 생각은 아니다. (여기서는 빈곤의 조건 속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들의 경우, 나아가 ‘영화적’인 것의 궁극적인 정체에 대한 규명은 일단 차치하자.) 그러나 〈스위트홈〉에서 그것이 ‘영화적’인 것이 된다고는 생각한다. 이 말은 말장난이 아니다. 나는 지금 다음과 같은 사례들을 더 떠올리고 있다. 〈쓸쓸하고 찬란하神 -도깨비〉의 (우리가 흔히 시네마스코프 비율이라고 부르는) ‘21:9’ 비율의 플래시백, 〈나쁜 녀석들: 더 무비〉의 (국내 시장에선 극히 드문) TV 드라마의 후속작으로서의 영화라는 위치, 2018년 이후 갑자기 늘어난, ‘영화배우’ 혹은 ‘영화감독’으로 자리매김한 이들의 TV 드라마행, 자사의 드라마들을 ‘드라마틱 시네마’라고 명명한 OCN, 〈닥터 프리즈너〉나 〈검법남녀〉 시리즈에서 〈스위트홈〉에 이르기까지 폭력을 주요 소재로 다루는 드라마들의 (김혜리 평론가가 명명한 이래 트위터 등지에서 조롱 투로 ‘암청색 영화’라 불리는 한국 영화들의 특징인), 무거운 색감을 배경으로 한 뚜렷한 대비 및 명암의 라이팅 연출. 곧 고급 표현 수단으로 불려 나오는 ‘영화적’인 것. “고품질 텔레비전(quality television)” 논의의 대표주자인 로버트 J. 톰슨은 여기서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다.

이렇듯 드라마가 영화를 닮아간다는 말은 (작품의 질적 상승과는 큰 상관 없이) 말 그대로 영화(의 외양)를 닮아가려 한다는 것인데, 그 동기 자체는 작품의 질적 상승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사례들은 차라리 (‘팬픽’이란 말을 거의 대체한 듯한) ‘포타’의 주를 이루는 이른바 순문학적 묘사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이 뒤엉킨 듯한 서술을 조금 풀어보자. 사람들이 A가 아닌 B를 두고 ‘A적’이라고 말할 때 진정으로 표상되는 것은 사람들이 A를 무어라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듯 ―방금 내 엉덩이에는 솔 크립키의 꼬리표가 추가됐다― 국내 드라마들이 갈수록 더 거대해지고 개성적이어지려 할 때 그 모델이 (한국)영화인 것에서 우리는 영화에 대한 드라마의 르상티망을 엿보게 된다. 이 르상티망이 전개되는 양상을 지적하거나 설명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그보다 어려운 건 이 르상티망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자본의 투여량에 따른 열등감이라고 말한다면, 모든 회차가 사전 제작되고 프로덕션에만 300억 원 이상의 예산이 투여되는 ‘텐트폴 드라마’가 남한에서도 갈수록 늘어나는 현재엔 곧 자연스럽게 해소될 일일까? 사람들이 영화 대신 TV로 몰려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콘텐츠’의 시대에 그건 못해도 십몇 년은 늦은 말이라고 받아쳐야 할 테다. 이런 문제틀에서 조금 빠져나와서 돌아보자면, 드라마의 근원적 무의식이랄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즉 여기서 문제 삼을 것은 드라마의 ‘고품질’화(라는 부차적 문제)가 아니라, (TV-)드라마가 20세기의 이미지 생태계에서 역사적으로 맡은 역할과 그로 인해 영화와 맺게 된 관계이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예컨대 1950년대 미국에서 그러했듯) TV의 대중화에 물량 공세로 대응한 (극장-)영화의 시도에 의해 외려 명확해진 것이지만, TV의 역할이란 일차적으로는 영화가 바야흐로 (아주 부르주아적인 의미에서) ‘예술’의 위상을 얻으면서 내친 ‘적당히 덜 예술적’인 장르들(뉴스, 스포츠 이벤트, 오락, 광고, 교육적 목적의 영상 등)을 위한 창구가 되는 것이었으며, 궁극적으로는 극장, 필름, 시차 등 시네마토그라프 모델의 ‘장치’, 혹은 ‘영화적’이라 할 만한 미장센/몽타주가 느슨해지거나 거의 소진된 상태에서도 영화(적 이미지)가 충분히 성립 및 유통 가능함을 극히 범용한 방식으로 폭로하고 표준화 ―단적인 예로 드라마에서 종종 길고 단조롭게 이어지는 실내 대화 씬을 떠올려보자― 하는 것이었다. ”텔레비전 장치는 (...) 상이한 수준의 이미지들이 서로 전이되는 것을 용이하게 한다”는 레몽 벨루의 말. 혹은 모든 방송을 생방송으로만 송출할 수 있던 초기 TV의 제약을 두고 “영화가 오래전부터 잊고 있던 반(半) 즉흥성, 즉석에서 작업하는 것의 장점을 알려준다”면서 거기서 현전성의 현시를 도출한 앙드레 바쟁의 ‘예언’. 그 잠재성으로만 본다면 TV는 그때까지 존재한 어떤 매체보다도 코메니우스적 이상에 걸맞는 매체였다.

물론 역사는 그런 잠재성이 (긍정적으로) 만개하도록 흐르지 않았고, 특히 경제의 차원은 TV로 하여금 ‘예술’이 되려 하는 영화를 적극적으로 모방하는 한편 광범위성/즉각성이란 TV 매체의 특성이 ‘스펙터클’에 복무하도록, 그리고 그래서 나아가 “민주주의에 대립”(데이빗 조슬릿)하도록 이끌었다. (이 점에서 우리는 “TV는 이미지가 아니다”라는 장 보드리야르의 말을 양가적으로 써먹을 수 있다) 그중 TV 편성 시간이 늘어나면서 불가피하게 태어난 데다, ‘영화 이후’ 처음 등장한 허구적 영상 양식이란 점에서 이전에 극영화가 걸어온 길(보드빌/무대 연극의 전통, 초기 영화의 ‘연쇄극’ 형식, 다수의 카메라, 그리고 어법)을 한꺼번에, 상대적인 빈곤의 조건 속에서 뒤적거려야 했던 드라마는 영화의 위상을 더더욱 신경쓸 수밖에 없었다. 앞서 말한 드라마의 무의식이란 바로 이렇게 형성된 것이다. 거칠게 쓰자면, 드라마의 역사란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라는 무의식이 긍정과 불안이 뒤범벅된 채 표출된 궤적이며, 이 중 후자인 불안의 판본이 바로 드라마가 가진 르상티망의 원형이다.

클로즈업이라는 형식과 클로즈업의 역량을 동일시해 클로즈업을 남발하거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라울 루이즈,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등의 모더니스트 영화 작가들과 협업해 미니 시리즈를 제작하거나, HBO를 비롯한 케이블 TV 네트워크의 발전 속에서 더 어둡고 더 심층적인, (브렛 마틴의 책 제목을 빌리자면) “까다로운 남자들(Difficult Men)”의 이야기에 빠지거나, 〈왕좌의 게임〉처럼 유례없는 초대규모 드라마를 진행하는 등의 상이한 사례들(의 한 측면)에서 우리는 (결과물의 ‘의도’는 조금 결이 다를지언정) 오랫동안 디폴트로 설정되어있는 이 르상티망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문득 국내 웹소설 ‘비평’이 이런 르상티망을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작 그들이 다루는 작품이야말로 정전을 그저 데이터 더미로 취급하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왜 2010년대 들어 남한에서 “고급 표현 수단으로 불려나오는 ‘영화적’인 것”의 사례들이 급증했는지에 대해서도 이제 말할 수 있다. 종편 개국과 케이블 채널의 발전으로 남한의 드라마 제작 시장이 급격히 확장된 이 시기에 드라마의 ‘품질’에 대한 관심(혹은 간섭)도 그에 비례해 증폭되면서 그간 미미하게 표출되던 이런 르상티망이 한국적 맥락 안에서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다. 그리고 국내 시장에 진출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들은 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 점에서 〈스위트홈〉은 (기점은 아니나) 주요 사례 중 하나일 수 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영화는 어떤 일을 겪었던가?

오늘날의 거의 모든 시각양식의 근원이요 여전히 중심적인 위상을 점하고 있는 ‘원 오브 카인드’로서의 영화, 그러나 동시에 자신을 대체하거나 전혀 다른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양식들이 끊임없이 늘어감에 따라 끊임없이 제 기능과 영향력을 상실하는 ‘원 오브 뎀’으로서의 영화. 개별 작품이 눈에 띄는 기능과 영향력을 발휘하더라도 그건 구조로서의 영화와는 전연 상관없다. 그렇게 영화는 다른 양식들에 직접 나눠줄 무언가가 거의 없는 올드 미디어가 되어간다. 영화의 역할 상당수를 부담한 뉴미디어였던 TV가 이제 그 역할을 또 다른 매체들에 나누고 ―가령 웹드라마로 자리를 옮긴 ‘전통적’ 청소년물, MTV에서 유튜브와 틱톡으로 자리를 옮긴 뮤직비디오― 자신을 이루는 콘텐츠들은 점점 더 ‘고품질’화하는 계단식 배분은 TV 역시 올드 미디어가 되기 직전이라는 명백한 징후일 테다. 사실 “요즘 누가 TV를 봐?”라는 말이 흘러나온 지 이미 한참 되지 않았던가? 이런 면에서도 드라마는 영화가 (1950년대에) 지나온 길을 비슷하게 걷는다. 그리고 주지하듯 TV를 비롯한 온갖 스크린-디바이스에 발을 걸치고 있는 넷플릭스는 ‘고품질’을 표방하는 오리지널 시리즈를, 그것도 한 시즌씩 통째로 공개하며 이런 흐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영화가 ‘원 오브 뎀’으로 격하되는 양상 속에서, 이제 드라마의 르상티망은 ‘영화’ 자체를 대신하겠다는 열망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만 같다. 고다르 식으로 (약간 고약하게) 말하자면, 이미지 생태계에 있어 코로나 19는 그런 열망을 확실히 승인하기 위해 도래한 파국은 아닐까? 당연하지만 나는 지금 어떤 비관도 낙관도 없이 말하는 중이다.





노매드랜드에서 노-매드-랜드로

책상의 측면 돌기: 〈에란겔 다크 투어〉 기행

노동을 구하지 마라: 〈깃발, 창공, 파티〉와 상황주의에 대한 소고

공원의 풍경(들): 다미앙 매니블의 〈공원Le Parc〉

“안심하시고 (...) 편안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신정균 개인전 ⟪아크로뱃⟫의 영상에 관한 노트

쓸쓸한 불빛 아래 활자들: ⟪동시대-미술-비즈니스: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질서들⟫

Unboxing: 발생하는 유기체

우울, 냉소, 충격의 트라이앵글을 넘어서: 공개서한 이후의 메모
시리즈의 감각: 예능 < f(다음 화 이어보기) < 영화

대화를 멈춰선 안돼: 〈마인드헌터〉

︎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스위트홈〉에 대한 노트는 아닌 글

우정은 실패를 알아차리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폴 W.S. 앤더슨 영화와 액션의 교환

스콧 긍휼 평강 사랑: 〈메트로폴리스〉, 〈프로메테우스〉 그리고 〈레이즈드 바이 울브스〉

이래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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