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5
Critic
우울, 냉소, 충격의 트라이앵글을 넘어서: 공개서한 이후의 메모
산하



(...) 이제는 종종 경멸적인 의미로까지 쓰이는 ‘대안적’이라는 낱말을 붙인 시도가 따라잡기 곤란할 정도로 넘쳐나는 요즈음, 나 또한 남들처럼 아주 우연한 계기로 서한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공개서한의 도발도 근년의 새로울 것 없는 ‘대안적’ 비평행위 중 하나일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그렇기에 평소와 같았다면 한눈을 팔았을 터이나, ‘생명을 잃어가고 있다’는 영화문화의 위태로움을 호소하는 서한의 시작에서 나는 주의를 가다듬게 되었다. 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마음속으로 떠올려보기도 전에 또 다른 질문이 수면으로 드리우는 질문들의 다급한 진력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기어이 공개서한을 끝까지 읽어 내려갔을 때, 나는 허무하게도 아무런 답변을 할 수가 없었다. 혹은, 그 어떤 대답도 이 서한 내외에서 조심스럽게 일렁이고 있는 어느 음습한 신음에 적절한 말을 보탤 수 없다고 느꼈다.

질문들에 아무리 답을 해보아도 서한에는 모종의 침윤된 여과물이 씻기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라는 느낌, 그러니까 숨가쁜 질문만큼이나 숨가쁘게 대답을 해보아도 그곳에는 질식자의 쓰라린 좌절에서 비롯된 긍정되지 않을 여과가 남아 있을 것이라는 조촐한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답을 건네보아도 이물의 결석이 남게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은 대체 어디에서 왔던 것일까? 그것은 분명 서한의 질문들 하나하나에 알알이 박혀 있었던 (나, 너, 영화문화 모두에 관한) 근원적인 실망감에서, 즉 각자의 현장에서 고민해 왔던 영화문화를 향한 전략들이 어쩌면 불가능성 그 자체와 결탁한 지 오래인 것이 아닐까 하는, 질문들이 가미하고 있었던 우울증자의 관점에서 연원하는 것이었다.

이때의 여과물은, 서한의 본래 목적 중 하나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을 법한 치열한 논쟁과 그로 인한 상승의 부둥킴, 또는 ‘우정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에서 떨어져나오는 대안의 다발이 아니었다. 내가 느끼기에 그것은 서한의 가시였고, 몇 cm 간격으로 나열된 질문들 사이를 배회하고 있는 질식자의 우울한 정서적 조각이였으며, 떨어뜨렸지만 미처 다시 주워가지 못한 채 길가에 놓인 질식자 자기 자신의 재귀적 불신과 예외 없는 상실이었다. ‘영화를 사랑하는 우리가 점점 더 비루해져 가는 것’에 대한 이유를 찾고 있었던 구절에서 나는 서한을 작성케 했던 속절없음과 답답함, 영화문화의 살해범을 향한 옅은 공포와 강한 환멸에 어느 정도 공감을 하면서도, 그러한 일련의 절망이 서한의 신체 일부로까지 변전되어가면서 뿜어져 나오는 지독한 멜랑콜리의 선명한 상연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평등한 동료’라는 관계의 기반을 모색하며 거의 한숨을 내쉬는 마지막 질문은, 그러한 우울의 생생함이 수많은 질문들에 대한 즉응적 대답의 요구를 초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서한이 서한 자신을 의심케 하는 어떤 음울한 냉소의 굽을 만들고 만 것이 아닐까 하는, 즉 퇴영의 기운이 질식자 내심의 깊은 첨단에 웅크리며 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떠올리게 했다. 비판 안에서 비판을 추동하게 만드는 우울의 (때로는-긍정적 의미에서-폭력적이기까지 한 이러한) 힘이 비판 그 자체의 차원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서한은 비판하는 대상에게 촉구되는 비전의 형상화보다 그러한 비판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나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무한히 꾸짖는 데에만 더욱이 공을 들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미 우울할 대로 우울한 질식자는 질문을 통해 어떤 것을 나무라는 것 그 자체에서 영화문화의 죽음을 감각할 적절한 애도법을 찾아나가게 된다. 바로 이때 야단과 자책은 손을 잡는다. 수신자를 제압하는 듯한 책망과 우울, 또 앞서 말한 이 예외 없는 상실 안에서, 서한의 질문들은 구체적으로 우리의 자리를 헤아리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에서 벗어나 그들이 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거대한 추상을 벌충하는 또 하나의 추상이 되어버리고 만다. 나는 이러한 허탈한 압도감과 여과의 방랑을 느끼면서, 다소 불안한 마음으로 다른 격지자들의 답변과 소회를 모두 읽어나가 보기로 했다.

서한의 답변은 ‘영화가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김선호), 질문들에 대한 즉응성을 아득히 뛰어넘는 사실상 독립된 별개의 글을 보여주기도 했으며(tunainforest), 서한에 대한 ‘부담과 강요’(이석준), ‘무서움’(무영), ‘자기 연민’의 경계(한창욱), ‘슬픔과 기쁨’(Cho Cho), ‘질린 상태’(정성일) 등의 감정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들은 대부분 서한을 질문의 구체적인 합으로 인식하기보다는 단수의 수행적 효과로 받아들인 다음 감정적 수사를 덧붙이고 있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정동의 언술을 되뇌이게 만들었을까. 이들 또한 내가 느낀 것과 같은 답변의 곤궁함과 여과의 방랑을 확인한 후, 무언가를 구체적으로 대답하는 것이 어쩌면 소용없는 짓이라고 자인하면서 비판을 향한 비판 대신에 자기 자신의 위치를 분주히 변명하는 데에만 애를 썼을지 모른다. 이처럼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의 머뭇거림, 아마 서한이 본래 꿈꾸었을 모습에서 조금 떨어져 있을 답변의 허둥지둥함을 지켜보면서 나는 서한이 서한이라는 낱말의 뜻대로 성실한 안부를 요청했거나 대화를 제안했던 것이 아니라 묵시적 가르침을 설파했거나 (따라서 ‘질문들은 무언가를 가르쳐주겠다는 열망에 가득차 있었습니다’라는 정성일의 심정은 꽤나 솔직한 것이었다.) 어떤 충격을 운반하는 데에 더 큰 수고를 기울였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보다 큰 확신으로 바꾸어갔다. 하지만 그러한 충격의 운반이 정녕 서한이 의도했던 것일까. 혹은 질문을 바꾸어, 충격의 급습을 확인하는 것만이 서한의 유일한 독해법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질문을 아예 확대해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충격의 내던짐을 비판의 수행 방법으로 채택할 수밖에 없는 현재의 담론활동은 『마테리알』을 위시한 세대에게 어떤 내외적인 힘으로 고무되고, 또 위축되고 있는 것인가.

물음의 단서를 찾기 위해 서한의 작성자들이 밝힌 소회를 읽어나가자, 나는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그곳에서도 우울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개의 답변이 돌아온 후 함연선은 ‘우리의 서한이 실패했다고 생각한다’고 선언하면서 서한을 둘러싼 실질적 다툼을 잠정적으로 결산하였고, 정경담은 ‘침울한 마음으로 다시 공을 던’졌으며, 다함께 박차차는 자신이 실제로 겪은 구체적 현장의 험담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강덕구는 자신의 배경을 짤막이 소개하며 ‘자기혐오’와 ‘쓸모 없는 취급’에 대해 언급했고, 한대호는 급기야 이 모든 소극에서 ‘다양한 형태의 트라우마가 가득하다는 점’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마테리알』의 필진들은 서한을 회고하면서 모두가 입을 모아 그들의 침울함을 은밀히 하소연했지만, 이상하게도 바로 그러한 하소연 그 자체에 대해서, 그리고 하소연을 몰아가는 해당 침울함이 서한에서 어떠한 수용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또 어떤 역설적 형식을 드러내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앞서 인용한 ‘트라우마’가 한대호가 소고에 부친 것처럼 회신자와 제도를 둘러싼 문제 사이의 결절을 이루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함연선의 ‘예측했던 실패’와, 그리고 무엇보다 서한이 질문을 통해 반복적으로 읊조렸던 소화불량의 상실과 직접적인 혈연관계를 맺고 있음을 느낀다. 또한 그 상실이 이제 충격의 경험을 비판에 덧대어 밖으로 생산하고자 하면서도 안으로는 기이한 냉소로써 감내하고자 하는, 이 영화문화의 살해현장에서 가장 강력하게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뒤엉킨 수사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느낀다. 배반당할 것을 은은히 예정하고 있는 상태, 서서히 실패를 면역해가고 있는 자조적인 각오의 상태는 이제 일견 당연하게 감각되는 위축된 믿음과 그로 인한 냉소, 그리고 그 냉소를 극복할 자가적 충격으로서의 전략을 구성하게 되었다. ‘다양한 형태의 트라우마’가 각자의 내부를 어떤 식으로든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눈치채고 있지만, 바로 그것이 제도와 산업과 같은 견고한 추상 속에서 생애를 보내는 적들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실패의 연쇄를 이어나가는 부정의 주체임이 지적된 적은 거의 없다. 물론 심리적 외상이 본래 제도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선결문제를 해소해야 한다는 지적은 가능하다. 하지만 제도로부터 태어난 우울이 이제 역설적으로 그 제도와의 가족유사성을 가진 둘도 없는 심리적 자본이 되어 모체가 자식을 배반했던 것과 흡사한 방식으로 영화문화 속 행위자들 간의, 심지어는 스스로와의 배반을 예정하는 적소가 되어버린 사실 또한 모른 척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질식자의 편지 기획자 중 한 명이었던 강덕구는 자신의 쓸모 없음과 자기 혐오를 일별하면서 ‘영화라는 예술이 가진 폭력적 경험이 시간 차(관람 이전과 이후)를 두고 개인을 분열시켜, 인격 안에 간극을 도입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힘과 동시에, ‘예술이 한때 보유했다고 여겨진 치명성, 삶을 뒤흔들고 역사의 내핵을 변환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제도에 의해 평탄해졌다고 강변하며 씁쓸해한다. 그는 자신의 ‘쓸모없음’이라는 내재적 우울의 모체를 제도와 추락한 예술의 치명성으로 상정하면서 예술이 가질 것으로 기대되는 충격적 힘의 반격을 예술의 순수하고도 절대적인 요구로써 희망한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아감벤의 『내용 없는 인간』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한 그의 주장은 실제로 예술의 과다한 감각적 충격이 미적 판단의 영역을 거슬러 일상적 삶의 세계로(혹은 아감벤의 표현을 그대로 표절하자면 ‘죽은 골조’를 거슬러 ‘살아 있는 신체’로) 스며들거나 그러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는 동의할 만하지만, ‘폭력’, ‘치명성’, ‘뒤흔들다’와 같은 충격이라는 짧은 순간의 단위만으로 예술과 비평의 결정적 시간을 구성하고 또 그것을 토대로 비평전략을 설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아스럽게 여길 만하다. 이러한 주장은 멜랑콜리에 빠진 자가 위축된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 믿기 힘든 것들을 더욱 더 억척스럽게 믿게 된 것이 오늘날 비평적 제스처의 주된 심리적 기반이 된 것은 아닐까하는 불안한 가정을 떠올리게 한다.

예술의 치명성을 복권하고 개인의 분열을 조장할 수 있는 비평적 전략의 힘을 일차적인 선봉 깃발의 표어로 휘두루는 것은, 다시 말해 영화와 비평을 업어메고 삶 속으로 저돌적으로 돌진하고자 하는 것은, 이제는 제법 유명해진 유운성의 지적인 ‘사제와 제단으로서의 관객과 극장’을 가리키는 태도와 얼마나 다른 것일까. 둘은 모두 영화, 비평, 삶이라는 트라이앵글의 꼭짓점을 아찔할 정도로 밀착시키려 시도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이들은 꼭짓점의 단일한 합일의 순간을 위하여 그동안 그것을 방해해 왔다고 가정된 일련의 적들을 호명하고 그것들을 송두리째 부정한다. 정전과 리스트를 곰팡이의 포자로 단정하고, 그것을 이루는 체제를 불태워야 한다고 소리치며, 영화교육은 일자무식하고, 비평이 상속법을 잠탈할 목적으로 제도와 야합했다고 턱을 내뺀다. 이와 같은 사나운 단정은 스스로의 냉소를 극복하고자 개인의 분열을,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할 제도의 총체적 분열을 꿈꾼다. 하지만 이때 충격과 분열, 냉소와 우울은 서로가 서로를 상호강화하기 시작한다. 우울을 덮어나가기 위한 강력한 항들이 비평의 전략을 메워갈수록 외상은 재묘사되고, 구체적 현장은 존재론화되어간다. 무엇보다 그와 같은 강권과 꾸짖음의 언어를 완성시키기 위해 비판하는 대상과 조응하는 행위자들의 개인생활사적인 유인가는 외면된다. 비평의 너무 큰 절박함이 행위자들의 맥락적 의미를 장으로부터 나포하는 것이다. 우울한 자는 냉소하고, 냉소한 자는 충격과 분열을 기도한다. 기도자는 예술의 지성소로 돌아가, 다시 우울해한다.

나는 물론 서한이 전달하고자 했던 믿음, 서한이 끌어안고자 했던 ‘우정의 증명’이 이러한 충격의 운반을 의도적으로 상정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또한 우울함만이 서한의 근간을 이룬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제도로부터의 예속화를 인자하게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나는 아무런 꾸짖음도, 아무런 충격도, 아무런 슬픔도 내비치지 말아야 하는 무감의 초인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서한이 내보인 부정의 체증보다 분명히 앞서 존재해야 하는, 어쩔 줄 몰라 그만 모든 것을 향해 고함쳐야겠다고 마음먹은 자의 힘찬 비평보다 선행해야 하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싶은 냉소의 위력 반대편에서 누군가에게 여지 없이 발견될 또 다른 자산에 대해서, 우리가 사랑하는 영화를—그 영화가 소속된 리스트와 무관하게—붙잡을 믿음에 대해서, 그리고 그 믿음을 ‘비루하다’고 일컫지 않을 내적 동기에 대해서, 각자의 극장 속 어둠을 주유하는 희망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올바르게 감각하고 이해하는 것이 희망의 정의라면, 우리는 긴 시간 동안 그것을 잊고 있었을 뿐, 희망은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오랜 시간 간직되어 왔다.





노매드랜드에서 노-매드-랜드로

책상의 측면 돌기: 〈에란겔 다크 투어〉 기행

노동을 구하지 마라: 〈깃발, 창공, 파티〉와 상황주의에 대한 소고

공원의 풍경(들): 다미앙 매니블의 〈공원Le Parc〉

“안심하시고 (...) 편안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신정균 개인전 ⟪아크로뱃⟫의 영상에 관한 노트

쓸쓸한 불빛 아래 활자들: ⟪동시대-미술-비즈니스: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질서들⟫

Unboxing: 발생하는 유기체

︎ 우울, 냉소, 충격의 트라이앵글을 넘어서: 공개서한 이후의 메모
시리즈의 감각: 예능 < f(다음 화 이어보기) < 영화

대화를 멈춰선 안돼: 〈마인드헌터〉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스위트홈〉에 대한 노트는 아닌 글

우정은 실패를 알아차리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폴 W.S. 앤더슨 영화와 액션의 교환

스콧 긍휼 평강 사랑: 〈메트로폴리스〉, 〈프로메테우스〉 그리고 〈레이즈드 바이 울브스〉

이래도 될까요?






마테리알(ma-te-ri-al)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로 132-1 | 사업자등록번호 633-94-01282 | ‌통신판매업신고번호 2020-서울서대문-1730 | ‌발행인 다함께 박차차·정경담‌·함연선 | 편집인 다함께 박차차·정경담‌·함연선 | 문의 ‌carolblueagassi@gmail.com | C‌OPYRIGHT © 2019~. 마테리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