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5
Critic
쓸쓸한 불빛 아래 활자들
: ⟪동시대-미술-비즈니스: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질서들⟫
진세영
미술 비평



처음 《동시대-미술-비즈니스: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질서들》 전시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전시장 전경을 쉽게 떠올리기 어려웠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이 기발하고 예측 불가능한 작업 경향을 지녀서 그런 것이 아니다. 참여 작가는 서동진,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 김수환, 안톤 비도클(Anton Vidokle),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로 모두 다섯이다. 나는 이들 대부분을 작가보다는 이론가, 연구자로 접할 기회가 더 많았다. 그러니 이들이 전시장을 어떻게 채웠을지 그 모양새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직접 찾은 전시장엔 고정관념으로 우리가 은연중에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작품들이 아니라, 강연 기록 영상들과 텍스트 문서들로 가득차 있었다.

전시장에 들른 이들은 가장 먼저 입구에서 종이로 된 문서파일 하날 챙겨 들어갈 수 있다. 바로 이 파일에 전시장 곳곳에 놓인 문서들을 하나둘씩 읽어보고 챙겨 담을 수 있다. 또 전시장에선 강연이나 낭독이 담긴 영상 관람도 할 수 있다. 강연 영상은 상영시간이 대개 1시간을 웃돌고, 문서 각각은 빽빽한 활자들이 네댓 페이지로 이어진다. 그런 영상이 아홉 편 가량 되고, 문서들은 열여덟 편이나 된다. 이와 같은 전시에 몸을 담고 있노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 전시를 누가 어떻게 다 볼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다. 이 물음은 전시를 관람하러 온 나 자신에게도 당연히 주어지는 것인데, 내가 지금 이 전시를 전부 살펴볼 여건이 주어져 있는지 묻게 된다. 전시장을 구성한 이들의 의도가 어찌 되었든 간에 전시를 차근차근 보려면 상당한 관람노동이 필요한 것이다. 게다가 영상과 문서엔 복잡한 문화·예술·사회이론의 내용, 앞으로 조명이 더 필요한 역사적인 정보 등이 포함되어 있다. 때문에 전시의 일부를 잠시 보고 듣고 읽는다 해서 금방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직관적인 전시도 분명 아니다.

사실 이와 같은 전시장의 인상 서술은 영상 작업이 주를 이루는 전시에선 흔한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전시장을 찾은 사람들은 상영시간이 긴 영상에서 배속재생 기능이 없음에 답답함을 느낄지도 모를 일이고, 한 번 놓치면 다음 차례의 반복을 기다려야 하니 관람이 고될 수밖에 없다. 영화와 달리 지금 이곳이 아니라면 다음에 또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 때문에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보려 할지도 모른다. 애당초 이와 같은 전시에선 전체를 감상할 필요가 없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점들에선 여느 영상 위주의 전시와 비슷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앞서 말했던 작품들에서 차이가 있다. 동시대 미술의 작업 방식이나 소재야 무궁무진하다 할지라도, 관람객이 비엔날레 행사로 열린 강연의 기록 영상을 하나의 작품이라고 받아들이기엔 어색한 것이 사실이다(히토 슈타이얼의 작품, 안톤 비도클의 일부 작품이 그렇다). 또 외국에서 지내는 이론가로 하여금 화상채팅 프로그램을 통해서 강연을 진행하게 하는데, 이것이 미술관 측의 커미션 작품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보리스 그로이스의 작품이 그렇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전시장의 영상 가운데 안톤 비도클의 <모두를 위한 불멸!>(2017)은 우리가 익히 봐왔던 예술작품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 하나가 전시 현장 전반의 분위기를 상쇄하지는 않는다.

전시장에 볼거리로의 작품이, 사진 찍기에 좋을 작품이, 감각적인 자극을 촉발시키는 것에 중점을 둔 작품이 없으니 괜스레 어색하다. 전시장은 차라리 세련된 시청각 자료실, 도서관처럼 느껴지고, 관람객들은 거기서 강연 영상과 문서를 분주히 오고가는 학습의 수행자로 자리매김한다. 이와 같은 전시장의 분위기와 구도를 거부하는 관람객도 많았을 것이다. 이 말에 대해서라면, 본 전시제목을 인스타그램에서 해시태그로 검색해보면 감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부산현대미술관을 찾은 이들은 해당 전시제목을 해시태그로 포함해 게시물을 업로드하면서도, 같은 미술관에서 같은 시기에 열린 다른 전시의 사진들을 주로 업로드한다. 사진 찍기 별로인 공간임을 뜻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이 전시에 관심과 애정을 쏟으며 열심히 젖어들기란 어렵단 말이 아닐까 한다.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전시. 나의 경우만 하더라도 전시를 세 번 네 번씩 보러 오면서 참여 작가들 저마다의 텍스트와 말을 이해하는 데 온 신경을 쏟기 바빴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하는데, 전시를 보면 볼수록 나는 내가 청탁받은 이 비평문 쓰기를 거듭 지연시키고 쓰기에 실패한다. 지금 이 글도 여타의 비평문 형식이 아니라, 가벼운 산문 느낌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설명하자면 이렇다. 전시를 보러 오기 전부터 나는 참여 작가 저마다의 이론과 사상을 요약정리하면 일단락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 다음, 이 전시에서 작가들이 어떻게 뭉쳐 있고 어느 부분에서 어긋나 있는지, 그래서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남겨야겠다고 은연중에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전시장에 올 때마다 그리고 전시장에서 들고 나온 문서를 집에서 버스에서 카페에서 열어볼 때마다, 내게 주어지는 것이자 남는 것은 방대한 지식을 흡수하기 바빠 지치게 되는 관람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이지 그걸 넘어선 무엇이라든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잘 생각해보자, 어떤 관람객이 이 전시장을 찾아 히토 슈타이얼의 작품을 보고 나서, 슈타이얼의 견해에 반대한다거나, 아니면 김수환의 아이디어에 동의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데, 오늘날 그 이야기가 사회적으로 어떠어떠한 의미가 있다며 말을 보탤 수 있을까?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이론가나 연구자, 비평가는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가령 부산현대미술관의 공식 유튜브 채널로 중계된, 이 전시의 부대행사 격에 해당하는 전시 연계강연에서 조선령과 유운성은 그 몫을 충분히 멋있고 훌륭하게 해냈다. 하지만 전시장을 찾았다가 이들의 내용을 흡수하기 벅찬, 관람노동자로의 정체성이 더 비대한 사람에겐 가능하냐는 것이다. 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이렇다. 미술관에 들렀다가 이 전시를 접한 관람객이 신자유주의에 대해 오랫동안 사유하며 살았겠는가, 서동진이 더 오래하고 살았겠는가? (오해하지 말자. 오래 생각했다고 무조건적인 옳음이 보장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렇지만 이 전시 안에서는, 그러니까 작가와 관람객의 구도 속에서는 어느 정도껏 그 힘의 논리가 보장되어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관람객이 신자유주의의 전문가일 필요야 없기도 하고, 전문가가 아닐지라도 일상의 경험이나 개인적인 기억 속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고, 그것을 생각해보면서 참여 작가들과 만날 수 있는 방식이야 다양하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가능성은 적어도 전시에서 각각의 작품을 접하는 관람노동의 순간에선 끊임없이 지연된다. 강연 영상 속 인물의 손짓과 표정을 살피고, 자막에 집중을 하며 그 말을 받아들이기 바쁜 관람노동자에게 이들의 말은 이를테면 그저 맞는 말로, “오, 몰랐는데, 그렇구나!”를 연발시키는 새로운 정보이거나 지금 당장엔 다소 어려워서 알 듯 말 듯한 말일 뿐이다.

사실 이렇게 따지자면 애초부터 국내에 번역되어 출판된 히토 슈타이얼과 보리스 그로이스의 책, 그리고 서동진과 김수환의 논문과 단행본, 안톤 비도클에 대한 작가론을 찾아보는 것이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 차근차근 흡수할 수 있는 매체가 될 것이다. 아시다시피 책이란 물질, 독서라는 활동은 전시라는 일시적인 사건보다 우리 곁에 오래 머문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 전시는 무엇인가. 어째서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하고, 토론회에서 발표를 하고, 책을 집필하고, 여기저기 강연을 다니며 활동을 하고 있는 이들이 미술관에 전시로 모인 것인가. 그러니 돌고 돌아 다시 전시장으로 향하게 된다.

전시는 서동진의 작품을 초석으로 둔다. <미술관은 금융시장인가?>(2020)라는 제목의 영상작품이 텍스트와 함께 놓여 있다. 영상엔 텍스트를 낭독하는 서동진이 등장하고 텍스트에 부합하는 주요 레퍼런스 이미지들이 화면을 연달아 채운다. 오늘날 미술관을 금융시장에 비유하는 것을 암시하는 제목은 이 둘의 관계가 단순히 비유의 영역이 아니라 사실의 문제임을 환기한다. 히토 슈타이얼의 경우, 비엔날레 행사 등에 참여할 적에 진행한 강연의 기록 영상이 주를 이룬다. 가령 <미술관은 전쟁터인가?>(2013)는 이스탄불 비엔날레의 강연영상인데, 슈타이얼은 본인이 어떤 영상작업을 하던 현장에서 총격 소리를 듣게 일화를 동시대 미술관과 그 미술관을 후원하는 군수산업에 포개며 그 일면을 비판한다. 다음 섹션에선 김수환의 작업을 볼 수 있는데, 열한 개로 분리되어 있는 각각의 채널 화면과 그것들에 상응하는 텍스트가 작품이다. 오랫동안 그가 연구해온 소비에트 코스미즘이나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경유하며 그 역사의 덩어리 속에서 그만의 뮤지올로지를 만날 수 있다. 안톤 비도클과 보리스 그로이스의 섹션도 대중을 상대로 펼치는 강연 영상이 재생되고 있다. 영상 속 안톤 비도클은 자신이 소비에트 코스미즘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계기를 바탕으로 그간 본인의 작업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설명한다. 그리고 뒤편의 공간에서 그의 또 다른 작품 <모두를 위한 불멸!>(2017)이 상영되고 있다. 마지막인 보리스 그로이스 역시 마찬가지로 강연 영상과 텍스트를 작품으로 내놓았다. 그는 미술계 안에서 새로움이란 개념에 대한 논의, 소비에트 시기의 몰락한 뮤지엄들이 어떠한 수집 경향을 지녔었는지 등 다채로운 논의를 작품에 담았다.  

말도 안 될 정도로 각 작업을 거칠게 요약한 것이지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작가들의 작품들이 하나같이 강연과 텍스트라는 공통된 형식에 기반하고 있단 것이다. 영상과 텍스트는 상호보완적인(이를테면 영상은 텍스트를 좀 더 쉽게 접근하기 위한 장치 같은) 역할을 나눠가지는 것일까 싶기도 하겠지만 그런 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서동진이 상품의 교환가치에 대해서 텍스트에 서술한 부분이 있다. 그 대목을 읽는 누군가에겐 생소한 어휘로 그 내용의 이해가 어려울 수 있을 텐데, 똑같은 텍스트를 영상의 내레이션으로 듣는다고 쉽게 이해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이들 모두 작품에서 뮤지엄-미술관을 핵심적인 장소이자 소재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뮤지엄-미술관이란 기관이자 제도를 문제화하고, 누군가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가는 뮤지엄-미술관의 잊히고 있는 측면을 조망하려 한다. 이런 면에서 어째서 이들이 단순히 책상 위나 학술지 지면을 넘어서 이곳 미술관의 벽면으로, 바닥으로 이 작품들을 들고 나온 것인지 조금 선명해진다. 이 전시의 작가들이 그간 정치적인 것, 사회경제적인 것,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것을 연구해오면서 그것들을 미술적인 것(특히나 뮤지엄-미술관에 결부된 것)과 결합하여 연구하고 사유해온 이론가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들에겐 그간 쌓아 간직한 이론의 논리, 발굴해낸 것, 새로운 관점을 담은 텍스트 결과물이 있다. 때문에 이들은 그것들을 어떻게 모아내어 이곳 하나의 문제 장소인 미술관에서 펼쳐놓을 것인지, 사람들과는 어떻게 나눌 것인지 하는 문제를 감각적으로 실천적으로 풀어내고 있으며 그런 중에 그 방식이 영상과 텍스트인 것이다.

나는 앞서 이 전시의 관람노동자 입장에선 마냥 맞는 말을 하는 작가들의 말과 글을 듣고 읽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어째서 내가 이곳 즉 미술관에서 이렇게 열심히 학습하는 관람노동자가 되었던 것인지, 조금은 실마리가 잡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보, 맞는 말, 비판적인 관점 등을 제공하는 전시, 그러니깐 배움의 시간을 가능케 하는 전시를 자주 접할 수 있었던가 새삼 묻게 된다.  다소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전시장에서의 새로운 앎의 순간, 정보와 지식의 나눔 등과 같은 경험일 것인데, 인터넷 포털에 검색하면 나올 법한 사전적 내용이, 벽면에 시트지 작업으로다가 붙어 있는 교육 목적의 상설전시가 그런 순간을 만드는 역할을 하던가? 이 전시 현장에서 관람노동자들은 동시대 미술에서 뮤지엄-미술관이라는 담론의 한 결을 단순한 전달로 받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오랫동안 지연시키며 그 시간 선상에서 스스로가 여러 작가를 오가며 그 이론적 궤적을 그려볼 수 있던 것은 아닌가 싶다. 《동시대-미술-비즈니스》의 관람노동자를 자처한 이들은 몇몇에 불과할지 모르겠으나 관람노동을 실천한 이상, 무거워진 머리를 싸매고 비로소 치열한 미술관 담론의 터로 진입할 수 있었으리라. 이 전시는 이런 이유에서 소중했다.

세 번씩 네 번씩, 한 번에 네 시간씩 다섯 시간씩, 이 전시를 향한 글을 쓰기 위해 전시장을 드나들면서 익명의 관람객, 불특정한 방문객을 종종 마주쳤다. 예상치 못한 이 같은 작품들에도 몰입할 누군가를, 황급히 텍스트라도 놓치지 않고 챙겨가는 이들을 기다리는 마음이 자라났다. 며칠에 불과한 시간이지만 잠시 동안 내겐 코로나19로 인한 관람인원 제한이 유난히 더 서글펐다. 입장객의 숫자가 제한되어 전시를 볼 수 있는 인원이 한정적이어서 그렇다기보다는, 그 제한된 숫자도 잘 채우지 못해 언제든 갈 수 있는 널찍한 거리가 미술관 안에서 유지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미술관 안에서 《동시대-미술-비즈니스》은 어쩌면 유난히 더 조용하고 어두웠는지도 모르겠다. 그 허전한 공간 속에서 조용히 불빛을 내보내던 화면들을 기억한다. 페이지 넘어가는 문서를 그리고 그것을 한 장 한 장 넘기던 손길을 비추는 쓸쓸한 화면의 불빛 말이다. 텍스트 더미 어딘가에 적힌 “주목의 정치”, “참여의 논리” 같은 말들이 유독 멀게만 느껴지던 날들. 어쩌면 참여 작가들도 이런 풍경을 예상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나 열렬하게 미술관을 이야기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이 전시의 곁에서 방황하면서, 영상에 대한 논의나 미학적인, 동시에 분명히 정치적인 쟁점에 선뜻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참여하지 못해서 스스로에게 아쉬운 마음이 크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그런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것이 맞는지 날마다 헷갈렸고 계속해서, 지금껏 지연시켰다. 전시가 막을 내리고, 이 글이 인쇄되어도 참여 작가들이 남겨놓은 문서 더미를 곁에 두면서, 또 다른 불빛이 이 문서를 비추길 기다려본다. 미술관에 얽힌 갖가지 진단과 처방을 짊어지고 미술관 안으로 들어와 목소리를 낸 이들처럼, 우리 관람노동자들도 어디선가 시끌벅적한 공간을 만들길 바라볼 뿐이다.




노매드랜드에서 노-매드-랜드로

책상의 측면 돌기: 〈에란겔 다크 투어〉 기행

노동을 구하지 마라: 〈깃발, 창공, 파티〉와 상황주의에 대한 소고

공원의 풍경(들): 다미앙 매니블의 〈공원Le Parc〉

“안심하시고 (...) 편안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신정균 개인전 ⟪아크로뱃⟫의 영상에 관한 노트

︎ 쓸쓸한 불빛 아래 활자들: ⟪동시대-미술-비즈니스: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질서들⟫

Unboxing: 발생하는 유기체

우울, 냉소, 충격의 트라이앵글을 넘어서: 공개서한 이후의 메모
시리즈의 감각: 예능 < f(다음 화 이어보기) < 영화

대화를 멈춰선 안돼: 〈마인드헌터〉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스위트홈〉에 대한 노트는 아닌 글

우정은 실패를 알아차리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폴 W.S. 앤더슨 영화와 액션의 교환

스콧 긍휼 평강 사랑: 〈메트로폴리스〉, 〈프로메테우스〉 그리고 〈레이즈드 바이 울브스〉

이래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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