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5
Critic
“안심하시고 (...) 편안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신정균 개인전 ⟪아크로뱃⟫의 영상에 관한 노트
김얼터
미술 비평




2003년 일본의 웹페이지인 ‘2ch’를 중심으로 화제가 되었던 괴담이 있다[도 1]. 이 괴담이 ‘나폴리탄 괴담’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진 뒤 ‘사메지마 사건’, ‘스타쉬피스’, ‘나카무라의 비밀’, ‘SCP 재단’과 같은 파생 괴담들이 발굴되었다. 상당히 마니악해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들어본 적도 없을 이 괴담들에는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 하나 있는데, 쉬운 이해를 위해서는 2018년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영화 〈버드 박스(Bird Box)〉를 생각하면 된다. 이 영화에서 관객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인류를 위협하는 존재가 정확히 무엇인지, 이 존재를 보는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길래 그들이 그런 파국을 맞이하는지 알 수 없다. 이 존재에게서 아름다움을 보는 몇몇 예외를 제외한다면, 그 존재를 본 사람들은 모두 죽기 때문이다.

이 글에 중요한 매뉴얼 괴담 또한 나폴리탄 괴담에서 파생했다. 매뉴얼 괴담에 공포와 소름의 대상인 귀신, 괴물, 살인마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등장하는 것은 어떤 규칙과 매체다. 군대, 기숙사, 병원 같은 헤테로토피아스러운 장소부터 국가 단위의 재난 상황[도 2]까지, 매뉴얼 괴담은 우리의 실재를 점령해나가고 있다. 내가 특히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유튜브에서 ‘긴급 경보’를 검색하면 노출되는 영상들인데, 이 영상들은 허구적인 재난 상황을 가정하고 만들어졌다. 매뉴얼 괴담의 재미는 그것이 일종의 시뮬레이션처럼 작동한다는 점인데, 이런 괴담들에서 중요한 것은 발생한 사건이 어떤 것이고 왜 그런 사건이 발생했는지 밝히는 일이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건이 발생한 것 같은 효과를 창출하는 데에 있다. 이 창출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규칙과 매체다. 매뉴얼 괴담은 많은 경우 지시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영상으로 만들어진 경우 매체가 오류를 일으킨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매뉴얼 괴담의 관객은 괴담을 읽거나 봄으로써 성립되는 시뮬레이션 안에 자기를 위치시키는 일에 관심이 있다.


이처럼 사건에 접근할 때 방해나 장애물이 있는 정도를 넘어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 아니면 접근할 필요가 없는 상황, 사건을 직접 보여주기보다 재현하는 규칙과 매체로 사건이 발생한 것 같은 효과를 창출하는 상황에 ‘나폴리탄 현상’이라는 말을 제안해본다. 이 현상에서 규칙과 매체는 사건을 재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건 자체다. 발생하지 않은 사건이 규칙과 매체에 의해 성립하고, 바로 그 규칙과 매체가 사건이 발생한 것 같은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이 글은 신정균 개인전 《아크로뱃(Acrobat)》의 영상 작업들을 나폴리탄 현상과의 연관 속에서 다루어보려 한다. 전시 제목이기도 한 ‘곡예’는 아무런 목적도 메시지도 없이 수행되는 몸짓인데, 이 몸짓은 사건으로부터 분리되어 규칙과 매체만이 남게 되는 나폴리탄 현상과 공명하는 측면이 있다. 이 현상에서 목적 없는 몸짓, 원인 모를 규칙, 내용 없는 매체는 형식의 영역으로 도약하며 목적-행위, 원인-결과, 내용-형식이라는 순서를 뒤바꾼다. 그것은 재현하는 대상과 재현하는 수단, 그리고 재현한 결과물의 거의 완전한 일치이며,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일종의 제의다.*

먼저 〈찾는 사람(Seeker)〉(2021)은 무엇을 찾는가. 찾아야 할 대상은 보이지 않고 찾는 사람만이 남아 있다. 찾는 사람은 계속해 찾는다. 찾는 사람이 정확히 무엇을 찾는지는 알 수 없다. 아니, 정확히 아는 것은 애초에 중요하지 않다. 찾으려는 대상은 영원히 찾아지지 않을 확률이 더 높은데, 이 비디오가 전시장 안에서 루핑(looping)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핑하는 것은 비디오뿐만이 아니다. 당신은 〈찾는 사람〉의 화면 안에 있는 공간의 전체적인 모습을 짐작이라도 할 수 있는가? 카메라가 움직이지 않는 〈아크로뱃(Acrobat)〉(2021)이나 〈시뮬레이션(Simulation)〉(2021)과 달리, 이 작업의 카메라는 이전의 시점으로부터 툭 하고 끊기는 방식으로 위치를 바꾸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인물의 머리에 달린 조명이 역광을 비추거나 공간의 아주 일부만을 비추기 때문에, 찾는 사람이 위치한 장소의 전체적인 구조는 상상하기 대단히 어렵다. 그렇다면 찾는 사람은 미로를 루핑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 우리도 그 미로를 함께 루핑하며, 일반적인 영화를 감상할 때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일관성 있는 공간 대신, 장면 하나를 레고 조각 하나처럼 취급하여 그것들을 덕지덕지 붙여놓은 것 같은, 마인크래프트적 공간감을 구성하게 된다. 찾는 사람은 종이 조각이나 담배꽁초를 주워 든다. 그러나 그것이 찾으려는 최종 대상을 향한 단서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없는 것을 〈찾는 사람〉에게 단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찾는 몸짓 자체이기 때문이다.


내용과 목적은 잊히거나 존재하지 않고, 본래라면 그것을 위한 수단과 도구인 몸짓, 규칙, 매체만이 남게 되는 현상ㅡ나의 말로는 나폴리탄 현상ㅡ은 신정균의 다른 작업들에서도 강조된다. 4채널 비디오 설치 작업 〈시뮬레이션〉[도 3]에서, 퍼포머는 각각 화재, 홍수, 지진, 태풍의 상황에 놓인 대피자가 수행할 법한 신체적 매뉴얼을 ‘예술적으로’ 변용하여 보여준다. 재난 상황임을 알리는 환경 정보가 화면 안에 있다. 대피 방송,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우울하고 심각한 소리,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 등의 청각적 요소와, 화면 뒤에 보이는 재난 상황, 깜빡이는 전구, 피어오르는 연기, 물의 범람, 흔들리는 무대 등의 시각적 요소 등등. 그럴싸하게 조성된 인공 환경 속에서, 있을 법한 인공 사건이 시작되면, 해야 될 법한 몸짓이 연기(act)된다. 〈시뮬레이션〉이 문제삼는 것은 재난이 닥친 상황이 아니라 시뮬레이션과 실재가 형성하는 관계인데, 이 관심사는 〈미래 연습(Future Practice)〉(2021)에서 더욱 심화된다. 그러나 어떤 몸짓도 탈출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신정균의 작업 안 어디서든 재난은 실제로 발생한 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찾는 사람〉과 〈시뮬레이션〉하는 사람의 몸짓은 원인이나 목적이 없어 몸짓만이 남게 되는데, 그 몸짓은 말 그대로 〈아크로뱃〉, 곡예다. 〈아크로뱃〉의 곡예사는 느릿한 움직임으로 화면 좌상단에서 시작되는 계단과 물탱크 몇 개를 지나 아래로 내려오지만, 화면 앞에 도달해 어디론가 떠나는 것이 그의 목적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왜 내려오는가? 뚜렷한 목적 없는 곡예는 왜 감행되는가? 여기서 곡예는 그 자체로 장식이다. 작업의 제목이 ‘탈출’이 아니라 〈아크로뱃〉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곡예사는 탈출하지 않는다. 탈출처럼 보일 수도 있는 곡예를 할 뿐이며, 곡예사는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곡예하기 위해 곡예한다.


〈아크로뱃〉을 〈미래 연습〉과 겹치면 조금 더 섬세한 고민이 필요해진다. 잠실 롯데타워를 배경으로 하는 〈미래 연습〉은 재난이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서 재난을 연기하는 모습을 재현한다. 〈미래 연습〉의 카메라 또한 〈아크로뱃〉이나 〈시뮬레이션〉과 다르게 움직이는데, 촬영은 하고 있지만 무언가를 찍을 여유는 없다는 것처럼 빠르게 달리고 있을 때의 아스팔트 블록을 보여준다[도 4]. 평소 같았으면 잘못 촬영되었거나 실수로 촬영된 것으로 간주되었을 이 장면에서 매체는 매우 불투명해지면서 카메라의 존재가 확연히 드러난다. 오히려 아무것도 촬영하지 못한 화면이 재난 상황의 절박함과 다급함을 포착하는 것이다. 직접 촬영한 사건 장면이 아니라 사건을 보여주지 않는 화면,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고 카메라만이 남은 화면은 촬영자가 무엇을 촬영할 여유도 없이 뛰어가고 있음을 드러낸다. 여기 남은 것은 오직 몸짓과 매체로, 역시 전형적인 나폴리탄 현상이다.

〈미래 연습〉은 시뮬레이션과 실재의 관계라는 문제의식을 이어받는다. 〈시뮬레이션〉의 공간은 완전한 통제 아래에 있다. 거기서 보이는 모든 재난 상황은 연출된 것이며, 여러 규칙과 매체를 통해 재난이 발생한 것 같은 효과를 만들어내고 그 가운데에 퍼포머가 움직인다. 〈시뮬레이션〉이 완전히 통제된 공간, 그렇기에 현실에는 존재할 리 없는 공간, 즉 픽션의 공간에서 목적 없는 몸짓을 보여준다면, 〈미래 연습〉은 픽션이 침투하지 못하는 곳으로 전제되는 우리의 실재에도 이미 목적 없는 몸짓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짚는다. 여기서 실재와 픽션은 기묘하게 맞물리며 서로에게 침투한다. 픽션은 실재를 재현하면서, 동시에 실재를 실행한다. 〈미래 연습〉은 완전한 실전도 완전한 훈련도 아닌, 완전한 실제 행위(action)도 완전한 연기(action)도 아닌 상황에서 사람들이 매뉴얼을 따라 무용(無用)하게 대피하는 풍경을 보여준다. 여기서 실재와 픽션의 관계를 대립하는 두 항처럼 놓고 전자가 후자에 비해 ‘진짜’라는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는 공식은 모호해진다.

그러한 모호함이 가장 탁월하게 드러나는 분야는 스포츠다. 체조나 피겨 스케이팅, 싱크로나이즈 같은 종목을 생각할 때 나의 궁금증은 어째서 또 어떻게 스포츠 종목에서 ‘연기’라는 말이 사용될 수 있는지에 있다. 김연아의 트리플 악셀에 캐스터가 ‘최고의 연기였습니다’라는 찬사를 덧붙이는 일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김연아는 무엇을 연기하는가? 그녀는 살인면허를 가진 영국의 스파이 제임스 본드를 연기하는가? 본드걸을 연기하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피겨 스케이팅을 하고 있는 김연아’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가? 나 자신을 연기하는 일은 가능한가?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또 다른 질문이 뒤를 잇는다. 특수하고 허구적인 상황 바깥에서는 연기가 불가능한가?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시험대에 오르는 것은 이제 스포츠 선수뿐만이 아니다. ‘이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늘 그런 시험대 위에 올려져 있어 왔다. 예컨대 어떤 괴담도 그 괴담이 실제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마녀 사냥에서 중요한 것은 당사자가 정말로 마녀냐 아니냐가 아니라, 마녀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악역을 연기하는 영화배우의 연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배우가 정말로 나쁜 사람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얼마나 나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냐의 문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도 우리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보이며 어떤 매체와 규칙, 몸짓을 거쳐 어떻게 재현되느냐 하는 문제다.


재현의 결과물은 주로 가상, 환영, 허구, 픽션 같은 이름으로 불리며 실재보다 열등하거나 실재를 대리하는 것, 임시변통인 것, 실재에 침투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에 반해 물질적 실체를 지닌 나의 몸과 우리의 실재는 진짜인 것, 원본인 것, 고정된 것, 심지어는 근원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미래 연습〉에서 화면 아래 흐르는 안내 메시지[도 5]와 작업 중후반에 등장하는 엔딩 크레딧은 이러한 인식을 드러내는데, 특히 안내 메시지는 픽션이 마치 실재를 위협하는 존재인 것처럼 말한다. “현재 고객님께서 계신 (…)은 훈련 제외 구역입니다. 안심하시고 (…) 편안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엔딩 크레딧은, 정확히 스포츠 선수의 연기처럼, 소방관이 소방관을 연기하고 경찰관이 경찰관을 연기했다고 명시한다.

그러나 동시에, 〈미래 연습〉은 실재와 픽션 사이의 전제들을 재검토해야 할 때가 왔다고 제안하기도 한다. 과연 실재는 우리가 안심하고 편안히 지낼 수 있을 만큼 안정된 어떤 것일까? 〈미래 연습〉이 짚어내는 것은, 코로나는 위험하고 지구의 자연 재해와 재난은 인간의 업보다, 같은 세기말 예언적 아포리즘이 아니라, 견고하다고 생각되는 우리 실재가 픽션과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형세다. 부재하는 것을 재현하는 곡예가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재현하는 픽션과 겹쳐진다. 나폴리탄 현상에서 선행하는 것이 몸짓, 규칙, 매체인 것처럼, 선행하는 것은 미래가 아니라 픽션이다. 픽션이 미래에 선행한다. 미래는 픽션을 따라 실행될 것이며, 픽션이 바뀌면 미래도 바뀐다. 미래는 몇 번이고 연습될 것이다.


*매체이론가 빌렘 플루서(Vil←m Flusser)는 이 제의를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몸짓」(『몸짓들』, 2019, 워크룸프레스)에서 다룬다.





노매드랜드에서 노-매드-랜드로

책상의 측면 돌기: 〈에란겔 다크 투어〉 기행

노동을 구하지 마라: 〈깃발, 창공, 파티〉와 상황주의에 대한 소고

공원의 풍경(들): 다미앙 매니블의 〈공원Le Parc〉

︎ “안심하시고 (...) 편안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신정균 개인전 ⟪아크로뱃⟫의 영상에 관한 노트

쓸쓸한 불빛 아래 활자들: ⟪동시대-미술-비즈니스: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질서들⟫

Unboxing: 발생하는 유기체

우울, 냉소, 충격의 트라이앵글을 넘어서: 공개서한 이후의 메모
시리즈의 감각: 예능 < f(다음 화 이어보기) < 영화

대화를 멈춰선 안돼: 〈마인드헌터〉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스위트홈〉에 대한 노트는 아닌 글

우정은 실패를 알아차리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폴 W.S. 앤더슨 영화와 액션의 교환

스콧 긍휼 평강 사랑: 〈메트로폴리스〉, 〈프로메테우스〉 그리고 〈레이즈드 바이 울브스〉

이래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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