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5
Critic
노동을 구하지 마라: 〈깃발, 창공, 파티〉와 상황주의에 대한 소고
문윤기



“오, 고관들이여, 삶은 너무도 짧은 것이니…
우리가 죽지 않고 살게 된다면, 왕들의 머리를 밟아서 뭉갤 것이니…”
— 셰익스피어, 〈헨리 4세〉[1]



1. 알람이 울린다, 첫 굴욕이 시작된다

노동에 대해 말하고 싶지는 않다. 노동은 하루하루 나를 죽이고, 더 나쁘게도 당장 죽지 않을 만큼만 죽이고, 비참함을 일상화하며, 약속을 어기게 만들고, 죄책감을 들게 하며, 시간을 마모됨과 기다림으로, 한순간 스쳐가는 월급통장의 엷은 먼지 쌓임, 결코 오지 않을 영원한 휴일에 대한 고도적 대기 상태로 느끼게 만든다. 그런 노동이 알려주는 한 가지 진실이 있다면, 노동자에겐 거의 매 순간 그와 다른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한 협상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협상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싸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협상은 싸움과 다름이 아니고 싸움은 결론의 반박인 동시에 우리가 시간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확실한 주장이다. 직장에 대한 울분 때문에 내가 너무 나가버렸나? 그러나 울분 없이 노동에 대해 이야기하기란 쉽지 않다. 타협의 문구들, ‘워라벨’은 새까만 거짓말이고 ‘저녁이 있는 삶’은 사람을 멍청이 취급하는 조삼모사 프로파간다다. 울분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울분은 상여금 등 사내 복지 앞에서 쉽게 사그라지고 또 알아서 그 모든 것들 없이도 혼자, 자조와 슬픔, 자학과 무력함으로 사그라지기도 한다. 그것은 시작부터 예사롭게 타버리고 남은 재를 떠올리게 한다. 이를테면 병을, 체념을, 패퇴를. 언제부턴가 울분은 재의 규범[2]이 되었고, 한때의 유치한 치기쯤으로 쉽게 치부되곤 한다. 성숙한 태도란 무엇인가. 희망 없이 시도하기? 울분 없이 지속하기? 그게 성숙이라면, 성숙이란 너무 늙어서 이제 죽어봤자 아무 의미가 없을 지경일 것이다. 책임은 울분과 분노에 있지 않다. 그보다 울분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 시작과 끝이 동일한 저항 서사의 전형들. 고난과 역경, 오열과 죽음, 구속과 해방. 그러나 그 해방은 러닝타임으로부터의 해방, 극장 좌석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점에서 구속의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가속주의 하에 갈려나간 저항들은 무덤 속에 파묻힌 채로, 그저 반복되는 조문 속에서 잠잠해진다. 그러니, 그러지 않고, 그러니까 갈림을 최소화하며, 저항의 소진과 마모를 가속시키지 않고 싸우는 방식을 찾기 위해 외딴 미지의 영역을 찾아볼 필요는 없다. 바로 그것의 무덤 속을 응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2. 묘석 보수 금지[3]

〈깃발, 창공, 파티〉(장윤미, 2019)에 노조원들이 자신들의 2010년 투쟁을 다시 돌려보는 장면이 있다. 빼곡한 천막들. 인터뷰 중 울먹임. 용역들의 폭력. 울분에 찬 얼굴들. 저널리즘의 어떤 전형을 따르는 푸티지가 재생되고 그것을 보는 노조원들의 얼굴과 눈시울은 붉게 물들고 노조 사무실 스피커에서 구슬픈 음악이 흘러나오고. 그때 그들이 불러들이는 것은 향수인가 임파워링인가 혹여 패배를 염두에 둔 조문인가. 러닝타임의 끄트머리. 2018년 임단협이 부결과 어용노조의 잠정합의안으로 마무리되고, 2019년 임단협 투쟁의 시작을 여는 회의에서 조합원들은 다시 2010년 파업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가장 강력한 경험’, ‘참다참다 내질렀다가 됐던 경험’, “너무 이게 있잖아요…. 희망이 보이는구나….”. 이때 그 과거의 영상은 과거와 현재가 관계 맺는 한 방식, 현재를 지탱해 주는 중요한 동력임이 어필된다. 이를 무덤의 가장 유력한 알리바이로 삼기란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모든 알리바이는 부재증명이며, 땜질 이상의 그 어떤 것도 아닐 수 있다. KEC지회 조합원들의 일상이 된, 현재 진행 중인 투쟁 상황 속에서는, 한순간 흘러나온 짧은 감상과 회상보다, 끊임없이 흘러 움직이는 현재가 중요해진다. 그러므로 배태선 국장의 농담이 곧장 2010년 영상의 여운을 깨고 당면한 싸움에 대한 회의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닫힌 창 너머 바람에 가만히 흔들리는 나무를 비추며 장면을 갈무리하는 인서트. 그러니 어쩌면 장윤미의 카메라는 이 무덤에 의미 부여의 녹아내림을, 내부의 비어있음을, 그 텅 빔을 비춰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카메라의 비춤은 빈 것을 더 깊게 판다.[4] 비워낸 곳에서 현재가 계속 현재로 남아있을 수 있도록. 그리고 동시에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관객의 현재까지 러닝타임의 현재와 조응되며, 러닝타임의 재생이 아닌 스크린의 현재화를 이끌어낸다. 노사갈등이라는 도식 보편에서 벗어나, 보편성의 재구축이라고 해도 좋을 무언가를, 시간의 부활이라고 해도 좋을 무언가를, 아직은 그를 위한 대결이라고 해도 좋을 무언가를. ‘현재를 지탱해주는 강력한 경험’을 이야기하다가도 조합원들은 화투를 치며 웃고, 카메라는 다시 사무실 창 너머 바람에 가만히 흔들리는 사물을 비추고, 청소한 자리에 모두 모여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고. 그렇게 〈깃발, 창공, 파티〉는 노조원들의 개인사, 사측과 어용노조에 대한 억울함 등 끌려들어 갈 법한 인력들에 사로잡히지 않고 노동과 싸움에 대해 이야기해나간다.


3. 고용주에게는 당신이 필요하다, 당신에게는 고용주가 필요 없다

논지를 이어 “노동을 구하지 마라”, 이것은 금언의 형식이 아니다. 이것은 접촉에 대한 어떤 위험으로부터의 보호와 우회, 그리하여 결국에는 접촉을 넘는 가닿음에 무한정 가까워지고자 건네는 권고다. 먼저, 노동은 너무도 구해졌으므로 더이상 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수요는 항상 충족되어 있다. 사측은 노동을 구해야 하지만 충분히 구해졌기 때문에 구하지 않는다. 그들이 구하는 것은 그들이 이미 구한 상태의 노동 그대로다. 일을 하는 가운데도 일을 하길 바라는 그들이 정작 노동에 가장 밀접한 자들이다. 그런 형편에서 노동을 구하고자 할 때 우리는 그것이 철저히 구해질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체념에 머무르지 않겠다면, 접촉하고 있는 자는 우선 떼어야 한다. [5] 멀어짐이 움직이게 할 것이다.

1873년 바쿠닌은 자신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무정부주의 연맹을 떠나며 이렇게 썼다. “오직 이론으로만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난 9년 동안 인터내셔널 내에서 세상을 구원하고도 남을 수많은 이론들을 만들어냈다. 어느 누구도 새로운 이론을 더 이상 만들 수 없으리라…. 지금은 이론의 시간이 아니라, 사실과 행동의 시간이다.” 기 드보르는 『스펙터클의 사회』 92번 테제에서 그에 대해 코멘트 한다. “역사적 시각 — 이론은 실천돼야 한다는 확신 — 을 보존하고 있지만, 실천으로의 이행에 적합한 형태들은 이미 발견됐으며, 이 형태들이 결코 변치 않을 것이라고 가정함으로써 역사적 현장에서 벗어나 있다.”[6] 마찬가지로 노동은 변치 않을 것이라 가정되는 그 형태로 인해 유실되고 현장에서 유리된다. 상황주의자들이 거리에 휘갈긴 구호, “일하지 말라”는 이처럼 이해되어야 한다. 일하지 말라. 노동을 구하지 마라. 노동을 구하려면 제대로 구하라. 떨어져서, 허투루 전유하려고 하지 말고 분별없이 동일화하려고 하지 말고.

장윤미가 〈깃발, 창공, 파티〉에서 끊임없이 수행하는 작업도 그에 잇대어 볼 수 있다. 그의 영화는 투쟁의 시퀀스로 정동을 규합하는 데 딱히 특별한 관심은 없어 보인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노동에 대해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접촉으로부터 빠져나가고 있다. 반복되는 회의-시위 사이클 안에서, 사람들은 참여하며 동시에 그것에서 이탈한다. 시위 현장에서 사람들이 웃는 모습은 흔하고, 국민을 막지 말라고 외치는 시위대에게 아이~ 저희도 국민이에요 경찰은 대꾸하고, 휴식시간에는 길바닥에 앉아 졸거나 가족들과 통화하고 누워 폰게임을 즐긴다. 회의장인 사무실에서는 투쟁 상황을 걱정하다 요새 어떤 양말을 신는지 대화하고, 머리 염색하다 문화상품권을 이야기하고, 누군가 가져온 옥수수 더미를 나눈다. 영화에서 아마 가장 비장해보였던 9월 1일 노동자 시민 공동운동 현장에선, 전태일 열사 플래카드를 비스듬히 비추고 있는 앵글에 두 팔 뻗어 날개 만들어 달려 들어왔다 나가는 아이의 뒷모습. 인서트에 등장하는 사물들도 이에 동조한다. 지회 단합대회장 곳곳 ‘초우량 회사 KEC’ 프린트된 일회용 젓가락들, 사무실 구석 줄어드는 뻥튀기 간식, 이마에 투쟁 그려 넣은 복돼지 저금통, 시위장에 촛불 꽂힌 생일 케이크. 물론 그 외 사무실 곳곳에 출현하는 개미들과 잔잔히 흔들리는 식물들 그리고 고양이와 파랑어치 등을, 작은 존재들이 연상시키는 꿋꿋함의 서정성에 연루시킬 수도 있을 것이나, 거듭되는 조합원들의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투쟁이 다시금 그것을 이탈시킨다. 이것을 어떤 분리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불화는 아니다. 여기서 벌어지는 것은 접촉면이 없는 마주침, 고용주에 대한 사람과 사물들 간의 오랜 연합이다.


4. 행복은 새로운 개념

“사회적 의제와는 별개로, 〈깃발, 창공, 파티〉는 주관의 개입을 극도로 자제하고 설명적인 활자 장면을 삽입하는 등 예외적인 특징을 보이는 한편, 창 너머와 문틈 사이로 비치는 나무, 곳곳을 돌아다니는 벌레와 같은 장윤미의 시그니처가 공존하는 영화”[7]라는 언급이 상기시키는 바와 같이, 감독의 전작들을 봐온 관객이라면 본 영화에서 인서트만을 분리시켜 만든 하나의 영화를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깃발, 창공, 파티〉는 인서트화된 영화가 삽입된 영화, 조합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장윤미의 인서트는 감각의 환기나 상황을 강조하는 등의 보조 역할만을 수행하는 종속적인 숏이 아니라 그 자체로 다른 숏들과 대등하게 관계한다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접촉면 없는 마주침이자, 어떠한 교섭이 이루어지는 관계로. 배태선 국장의 말대로 교섭은 기브 앤 테이크, 거래가 아니고 서로가 서로에게 원하는 내용을 가져오기 위해 기를 쓰는 협상과 같다. 여기서 그것은 서로가 협력한다는 점에서 열리는 새로운 분리이자 조합원들의 일상화된 투쟁과 투쟁화된 일상을 보여주는 데 적합한 바탕을 제공한다. 라울 바네겜은 『일상생활의 혁명』에서 ‘일’과 ‘노동’이라는 단어의 기원이 ‘고통’임을 지적하며 노동과 여가라는 기만적인 분리를 폐기하고 일상이라는 긴 혁명을 준비하라고 요구한다. 『비참한 대학생활』에서 상황주의자들은 기존의 투쟁들을 맹렬하게 비판한다. “‘일상생활의 혁명’은 혁명이 완수해야만 하는 거대한 과업들과 마주하게 된다. 혁명은 그것이 예고한 삶처럼 재창조되어야만 한다.”[8] 2019년 임단협의 시작을 여는 회의에서 배태선 국장은 일상에서 꾸준히 싸우기 때문에 연대도 가능하고, 연대를 요청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중재에 대한 거부이자 반복되는 시간에 대한 저항이며 살 만한 삶에 대한 믿음이다. 영화에서 임금협상안과 전략이 수정되듯 일상과 투쟁의 경계선이 수정되고 또다시 수정되고 숏과 인서트 숏이 서로에게 옮아가듯 서로가 침투하고 참여하고. 여름휴가 계곡에서 물장구치고 음식을 나눠 먹고 평상에 누워 낮잠 자는 가운데 놓인 『지역사회와 노동운동의 개입과 전략』이란 제목의 책 한 권. 웃는 얼굴이 많았대도 조합원 실태조사 설문지 앞에서 울화와 슬픔을 차근차근 적어나가는 손. 회의하다가도 함박눈 외치며 희고 조용한 풍경 구경하러 몰려가는 사람들. 모종의 거창함과 그럴듯함 일체를 기각하며 출력되는 투쟁들. 그것을 재창조의 의무와 거대 과업의 수행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들은 그것을 실현하는 가운데 그것을 폐지한다.


5. 현실주의자가 되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

〈전투적 투쟁주의의 한계와 증명〉
-왜 노동운동으로 전과자가 되어야 하는가?
-왜 노동운동은 과격하고 반자본주의적 적대적 투쟁으로만 일관해야 하는가?
-왜 투쟁의 선택지를 스스로 한정하는가?


어용노조는 KEC지회 조합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전단을 배포한다.

이 질문들을 지회 노조원이 그대로 소리 내어 읽는다. 나는 이것이 사측과 어용노조에게로 되돌아가는 질문으로 들렸다.

영화의 말미, 황미진 부지회장은 결의를 다지는 발표에서 마르틴 니묄러의 시를 낭독한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하고 있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로 시작하는 그 시는 나치 신봉자였으나 후일 반나치 운동을 했던 사람의 시, 변절자의 시이고, 의도가 다분한 형편없는 시였다. 내게 시 자체보다는 영화 내내 의연하고 의견 제시에 거침없던 황미진 부지회장이 시를 읽는 행위가, 그리고 수줍게 퇴장하는 모습이 중요해 보였다. 어떤 시간에 시를 결합시켜야 하는가. 어떤 간격 안에 시를 삽입해야 하는가. 그 낭독은 내게 그렇게 들렸다.

영화를 보고 내가 받은 인상들을 내 나름의 순서대로 늘어놓는 것이 옳은 일인지, 확신은 없다. 다만 구획된 경로와 다른 경로를 취할 때, 도시는 우리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드보르의 ‘심리지리’에 동의하며 다른 경로를 탐색했다. 바네겜은 글 또한 차례대로가 아니라 동시에 접근되어야 한다고 했다. “책의 가장 좋은 순서는 독자가 자신의 순서를 발견하도록 순서를 갖지 않는 것이다.”[9] 이제 와서 상황주의라니. 오늘날 상황주의와 상황주의자들은 모두 죽었거나 살아있더라도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10] “이제 아무도 상황주의를 읽지 않는다면 상황주의는 왜 존재했던 걸까. 에이치는 상황주의가 뭔지 몰랐다. 아스거 요른이나 라울 바네겜은 고사하고 기 드보르도 몰랐다. 그런데 나는 정말로 궁금하다. 상황주의를 알 필요가 있나?”[11] 조금 억지스럽긴 할지라도 이 상황은 상황주의의 개념과 일치한다. “상황은 늘 새롭게 구축되어야 하기에 고착화된 이념으로서의 ‘상황주(situationnisme)’라는 개념은 부정된다.”[12] 어쨌든 그들은 실패했고 그들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이든 갖다 댈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너무 가버렸거나 아무데도 가지 못했을 수 있다. 나는 아무데도 가지 못했다는 말을 아무데로나 가버렸다는 말로 바꿔 이해한다. 그들에 비하면 KEC지회의 지향점은 상대적으로 명확해 보인다. 그래서 사정이 괜찮다는 소리는 아니다. 2018년 임단협 이후 한 조합원은 투쟁이 언제 끝나게 될지 묻는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그도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오, 고관들이여, 삶은 너무도 짧은 것이니… 우리가 죽지 않고 살게 된다면, 왕들의 머리를 밟아서 뭉갤 것이니…” 셰익스피어는 말줄임표에 체념을 담아 적었고 말년에 귀족의 지위를 하사받았다. 옳은 말이다. 그리고 틀린 말이다. 우리의 삶은 이제 너무도 길다. 우리는 단절된 적 없는 항구적 투쟁 속에서, 삶을 기념하는 무수한 축하 속에서, 세계가 살 만해질 것이란 믿음과 기다림 속에서, 바람 속에서 가만히 흔들리는 사물들과 함께 죽지 않고 살아간다. 결국 우리는 왕들의 머리를 밟아서 뭉갤 것이다. 내가 너무 나가버렸다면 알려달라. 너무 가지 않고서는 조금도 갈 수 없을 것이다.

*본 글의 소제목들은 『옵.신』 8호에 실린 구호들을 그대로 옮겨 적거나 바꿔 옮겨 적었다.


[1] 기 드보르, 『스펙터클의 사회』, 유재홍 옮김, 울력, 127p, ‘V.시간과 역사’의 제사로 사용된 것을 재인용

[2] 라울 바네겜, 『일상생활의 혁명』, 주형일 옮김, 갈무리, 58p, “재는 언제부터 불의 규범이 되었는가?”

[3]  『옵.신』 8호에 실린 슬로건, “벽면 보수 금지, 구조가 썩었다”를 간접인용한 소제목. “도심 전체를 빠르게 구축할 필요에 부응해 강화 콘크리트로 된 공동묘지들이 사람들 대다수가 지루해 죽을지도 모를 곳에 구축되고 있다. 세계가 이제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가장 놀라운 기술적 발명품이라도, 그것들로부터 혜택을 끌어낼 조건이 결여되어 있고 그것들이 여가 생활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으며 상상력이 의무를 게을리한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콘스탄트, 〈다른 삶을 위한 다른 도시〉(1959), 『옵.신』 7호, 157p)

[4] 장-뤽 낭시, 『나를 만지지 마라』, 이만형&정과리 옮김, 문학과지성사, 50p, “빛이 빛나는 것은 텅 빔 속에서 혹은 현존의 비워냄 속에서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이 빛은 빈 자리를 채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비움을 더욱 깊이 판다.”

[5] ““나를 만지지 마라”는 불가피하게 어떤 위험으로부터의 방어라는 심역(“너는 나를 다치게 할 것이다” 혹은 “내가 너를 다치게 할지 모른다”, “너는 나의 온전함을 망치려 하는구나,” 또는 “나는 나를 지켜야 할 듯하다”)에 특별히 위치한다.”, 장-뤽 낭시, 『나를 만지지 마라』, 문학과지성사, 28p

[6] 기 드보르, 『스펙터클의 사회』, ‘Ⅳ. 주체와 표상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中, 유재홍 옮김, 울력, 91p

[7] 금두운, 「〈깃발, 창공, 파티〉, 《모던 아카이브》 등」, https://blog.naver.com/likeacomet/221710682285

[8]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비참한 대학생활』, 민유기 옮김, 책세상, 78p

[9] 라울 바네겜, 『일상생활의 혁명』, 주형일 옮김, 갈무리, 20p

[10] 장-뤽 낭시, 『나를 만지지 마라』, 문학과지성사, 34p, “죽음은 종교가 다급히 부여하려고 애쓰는 의미에서의 [삶의] “패퇴vaincue”가 아니다. 그것은 [삶이] 측량할 길 없이 늘어난 것이다. 죽은 자의 떠남 속에서 빈 무덤은 죽음의 한계를 풀어준다. 죽음의 떠남 안으로 보내는 것이다. 그는 한 번 “죽고 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죽고 또 죽는다. (…)”

[11] 정지돈, 『야간 경비원의 일기』, 현대문학, 83p

[12] “상황주의는 앞의 용어(상황주의자)에서 파생된 의미 없고 남발되는 개념이다. 상황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상황주의는 존재하는 사실들을 해석하기 위한 독트린에 불과하다. 상황주의라는 개념은 명백하게 반상황주의자들에 의해 착상되었을 뿐이다.”, 『비참한 대학생활』, 역자 해제中, 107p



노매드랜드에서 노-매드-랜드로

책상의 측면 돌기: 〈에란겔 다크 투어〉 기행

︎ 노동을 구하지 마라: 〈깃발, 창공, 파티〉와 상황주의에 대한 소고

공원의 풍경(들): 다미앙 매니블의 〈공원Le Parc〉

“안심하시고 (...) 편안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신정균 개인전 ⟪아크로뱃⟫의 영상에 관한 노트

쓸쓸한 불빛 아래 활자들: ⟪동시대-미술-비즈니스: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질서들⟫

Unboxing: 발생하는 유기체

우울, 냉소, 충격의 트라이앵글을 넘어서: 공개서한 이후의 메모
시리즈의 감각: 예능 < f(다음 화 이어보기) < 영화

대화를 멈춰선 안돼: 〈마인드헌터〉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스위트홈〉에 대한 노트는 아닌 글

우정은 실패를 알아차리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폴 W.S. 앤더슨 영화와 액션의 교환

스콧 긍휼 평강 사랑: 〈메트로폴리스〉, 〈프로메테우스〉 그리고 〈레이즈드 바이 울브스〉

이래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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