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4
Feature
아, 감은사 감은사 감은사 탑이여
— 때로는 조심하는 것이 문제다
정경담
마테리알 편집인



우리는 독립영화에 대해 충분할 만큼 이야기하고 있는가? 독립영화의 ‘독립’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제작 여건과 투자 과정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양해하면서, 그것을 핑계로 영화 자체가 가진 형식적 의의나 문제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지 않는가? 또는, 독립영화가 가진 정치적 올바름을 이유로 그밖의 모든 영화적 과오에 대해서는 함구하지 않았던가? 결국 “조심하는 것”은 독립영화를 상업영화와 같은 선상에 두고 논의함으로써 구성될 수 있는 생산적 담론의 가능성을 가로막고 있지 않은가?
        지난 3호와 함께 띄운 공개서한 「질식자의 편지」의 일곱 번째 주제로 이 질문을 던지면서, 나는 이것이 마냥 어그로 끌기로 비춰지지는 않을지, 그 의도를 호도당하지는 않을지 노심초사하며, 그럼에도 반드시 토론의 장에 끌려나와야 할 중요한 토픽이라고 믿으며 문장을 가다듬었다. 내가 놓친 맥락을 일깨워주거나 함께 논의를 시작할 이들을 기다리면서. 그러나 이번 서브는 누구에게도 가닿지 않고 그라운드 밖으로 나감으로써 완전히 실패했다. 침울한 마음으로 다시 공을 던진다.
        영화에서 우리는 자주, 끝까지 믿고 따를 수 있는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 인물을 탐색한다. 그게 주인공 군에 속하든 아니면 조력자 군에 속하든, 그가 사는 방식이나 이따금 잠언처럼 던지는 대사들을 지지하면서 우리는 손쉬운 방법으로 우리의 판단력을 의탁하려고 한다. 이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아주 ‘손쉽고’ ‘게으른’ 선택이다. 우리가 떳떳하게 믿고 따라도 되는 한 명의 인물 혹은 하나의 집단을 상정했을 때, 그 이외의 인물들은 아주 간편한 척도로 재단되곤 한다. 창작자가 이러한 사고의 작용을 막고 관객을 끝까지 피곤하게 만들면서, 능동적인 방식으로 ‘올바름은 무엇인가’ 혹은 ‘좀 더 마음에 드는 방식은 무엇인가’를 사고하고 구축하게 만든다면, 그리고 관객이 쉽게 ‘나의 PC함’을 대변할 극중 인물을 점찍거나, 혹은 ‘운동가’인 감독에게 이입하는 일을 그만둘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의제를 다루는 영화에서는 카메라가 바라보는 대상의 양가성이 (대개) 제거된다. 이를테면 그들이 사적으로 어떤 인물이든 간에, 그가 가진 입장을 토대로 그의 인간성까지 확정된다. 그리고 우리는 납작해진 인물들에게 보다 손쉽게 이입한다. 아주 조금만 방심해도 수시로 일어나는 일이다.
        ‘독립 다큐멘터리’를 떠올렸을 때 머리를 스치는 궁핍한 단면들에는 관객과 비평가 몫의 책임도 있다. 비평적 책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극장에서 문화비를 내고 ‘영화를 봤’지만, 왜인지 자꾸만 그것을 액티비즘 영화가 아닌 액티비즘 그 자체로 취급하려 들고, 동시에 이 영화의 관객이 됨으로써(혹은 영화 속의 ‘올바른 인간’에 빙의함으로써) 액티비즘에 가담한 ‘운동가’가 된 것처럼 느낀다. 그리고 구조와 앵글, 편집과 마감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지금 얘기하려는 것은 일종의 예외다. 2016년, 강일출 할머니의 실화를 소재로 만들어진 조정래 감독의 <귀향> 신드롬에는 이해하기 힘든 맥락들이 많았다. 박근혜 정부의 외압과 투자자 모집, 상영관 확보의 어려움 같은 문제가 소재와 주제의 정치성에 기인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직후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이재명 전 성남시장이 시 소유의 유휴공간을 이용해 상영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밝힌 것은 정말로 감동적인 국면인가? 민주당과 CGV의 협의는 또 어떤가?(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귀향> 이전과 이후의 영화 가운데 일본군 위안부 사안을 다룬 수많은 작품들은 왜 정의로운 수혜를 받지 못했나? <귀향>의 관람 티켓을 인증하지 않은 회원들을 모두 탈퇴시킨 네이버 카페는 어떻게 ‘귀감’이 되었나? 나는 <귀향>의 작품성에 대한 논란이 점화된 것이 이러한 강압적 관람 종용에 대한, 일종의 반발처럼 터져나온 이례적 현상이라고 보았다. 섣불리 말하자면 이 정도로 예외적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보통의 영화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누구나 몸을 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몸 사리는 이들이 형식적 측면을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 관객은 그들이 정의롭다고 지정한 ‘진실’에 가까워지고자 하는 감독의 노고가 표면적으로 지나치게 드러날 때 비로소 이 영화를 지지하기로 마음먹기 때문이다. 노고가 드러나는 방식은 다음의 몇 가지를 포함한다. 너무 많은 시퀀스가 포함되었을 때, 질감이나 결이 고르지 않은 서로 다른 푸티지들이 남용되었을 때, 카메라의 무빙이 전반적으로 다급할 때, 혹은 영겁과도 같은 롱테이크와 자기성찰적 내레이션이 동시에 등장할 때. 숨거나, 쫓기거나, 카메라맨 스스로가 전율 또는 비통함에 빠질 때, 지나치게 동요하는 카메라. 즉 현장에서 카메라맨의 찡그린 표정과 땀방울을 떠올리게 하고, 그가 든 카메라의 불안한 동세와 운동감을 상상하게끔 하는 형식이 그러한 형식이 된다.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와 관련 없이 ‘독립영화 진영’에서 만들어진, 제작비와 인력 수급과 피칭과 배급과 투자의 어려움 속에서 기어코 완성해낸 영화들 역시 ‘그러한’ 형식으로써 모든 것을 이해받곤 한다.
        그리고 일단 관객은 형식에 의해서 창작자의 충직함에 깊이 귀감받은 후에는 더더욱 여타의 요소를 고려하지 않게 된다. 나 역시 영화를 보며 한숨짓다가, 이내 이 영화를 어찌 욕할쏘냐? 라고 생각하기를 반복한다. 이 사람은 애썼고, 취지는 아름다웠으며, 의도가 선했고, 관객인 나 대신에 현장을 발로 뛰고 운동했기 때문에. 결국 이는 노동자, 투쟁, 좌절, 유혈 사태, 그리고 나서 다음 희망을 기약하고 떠나는 전형적인 80년대 노동 다큐멘터리의 답습에 지나지 않게 된다. 카메라맨을 투쟁의 동료로 삼는 순간부터, 영화를 비판하는 일은 운동을 배척하는 일과 동일선상에 놓인다. 그러면 이제 영화제에서 우리는 선택하는 섹션마다 그런 것들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실 이 문제가 어려운 것은 관객이 영화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방식이 (의외로) 형식에 근거해 있고, 역으로 형식을 판단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동인은 판단된 옳고 그름에 달려 있어서다. 어쩌면 관객이 영화를 지지하게끔 유도하는, 형식을 뚫고 나오는 ‘노고’는 그 자체로 이미 새로운 하나의 영화 스타일로 자리잡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이것을 어떻게 저며야 하는가? 영화의 정신 혹은 태도를 지지(혹은 그 반대)하는 일과 영화의 만듦새를 자유롭게 논의하는 일을 분리할 수 있을 것인가? 나의 질문은 그러한 물음에서 쓰여졌다. 앞서 투덜댔듯, 안타깝게도 “비평적 몸사림”에 대한 회신 혹은 반응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다른 중차대한 문제들에 가려졌거나, 다른 질문에 비해 덜 매력적이었거나, 그다지 공감을 사지 못했기 때문일 거다. 혹은 여전히 이 문제를 입 밖에 내기가 껄끄러워서일지도 모른다. 독립영화의 평생의 화두인,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인가?”를 다시 생각해본다. 차가운 시장논리나 재수없는 비평적 시선에서의 독립인가? 그렇다면 왜 감독들은 독립영화계를 벗어나 시장논리 속으로 편입하고 싶어 한단 말인가. 모든 영화를 함께 놓고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생산적 담론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자, 독립영화를 ‘한국영화사’의 부록이나 2번 문항이 아닌 본문 속에 함께 기록하는 행위가 아닌가. 독립영화의 구린 것을 구리다 말하지 못하는 것은 둘째 문제다. 정말 좋은 것도 중앙 무대에서 얘기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진짜 문제다. 그러니까, 때로는 너무 조심하는 것이 문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에서 유홍준 선생은 경주 감은사지 삼층석탑에 대한 글을 마무리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내 맘대로 쓰는 것을 편집자가 조건 없이 허락해준다면 나는 내 원고지에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쓰고 싶다. 아! 감은사, 감은사 탑이여, 아! 감은사, 감은사 탑이여…”

계속 비슷한 얘기를 했지만, 독립영화 내부에서 모두를 숨죽이게 하는 주된 요인은 일종의 성역화가 작동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건 “아, 감은사 감은사 감은사 탑이여!”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진실로 숭고에 압도당할 수 있다. 그러나 모두가 옆 사람을 따라 감은사 탑의 이름을 외치며 뛰어다닐 것이 아니라 누군가는 왜 감은사 탑에 압도되었는지를, 혹은 압도되지 않았는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일제히 한 목소리로 “감은사 탑이여…”를 외친다면 그것은 종교다. 거칠게 나누어보자면, 영화를 만드는 이가 ‘액티비스트로서’ 혹은 인디 정신에 의해 숭고해지는 경우가 있고, 카메라가 바라보는 대상이 ‘열사/ 피해자로서’ 숭고해지는 경우가 있는데, 어느 쪽이든, 영화를 운동의 부속으로 볼 때에나 가능한 얘기다. 영화가 단지 영화라면 우리는 그 숭고를 훼손시킬까 봐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 올바름을 임의로 지정해두는 일은 허망하기만 하다. 물론 너무나 당연하게도 여전히, “왜 이런 정치적 주제를 표방하면서, 또는 민감한 문제를 다루면서 연출의 윤리성에 더 신중을 기하지 않았어?”라는 문제 제기는 합당하다. 그러나 그것은 평가 요소 가운데 하나여야 하지, 영화를 옹호할 것인지, 공격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대법관적 캐치볼만을 주고받는 동안 여전히 ‘영화로서 좋은 영화’를 만드는 문제는 배제된다. 진영을 뒷받침하는 영화는 그렇게 영원히 올바름의 굴레만을 쳇바퀴 돌게 될 따름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템포러리에서 콘스탄트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가장한 (지역) 영화제의 문제

질식자의 편지에 부치는 소고

[구인공고] 언더커버 혹은 오버커버

︎ 아, 감은사 감은사 감은사 탑이여: 때로는 조심하는 것이 문제다

썼다 지운 질문과 소회

대화(dialog): 퍼포먼스를 위한 카메라-도큐멘테이션에 관한 고민들

보지 않고 보기: 정여름의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아이돌 기표의 ‘트랜스’ 해부하기: 아이돌 서사와 타세계의 시선을 경유하며

'접촉'에서 '접속'으로(2): 〈문명특급〉의 경우

협잡꾼 당신: 「김기영 평전」을 위한 단편

해적을 위한 변명: 위디스크와 ‘리스트’

독백과 방백 사이: 브이로그(VLOG)의 나르시시즘

한국 영화 비평장에 대한 비평 초고: 계속 말해야 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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