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4
Critic
한국 영화 비평장에 대한 비평 초고
: 계속 말해야 하는 것들
원은영



2019년 겨울, 마테리알 창간호의 선언문을 뒤늦게 접했다. ‘상호작용하는 예술적 실천’을 위해, 무엇보다 열린 공간을 창출하기 위해 ‘스루 패스’로서의 비평을 지향한다는 선언에서 생기 있는 절박함을 느꼈다. 나는 프랑스에서 한국 영화 비평장(field)을 주제로 연구 중인 학생이었다. 마테리알 홈페이지를 통해 〈비평의 비평〉 토크 기록 등을 흥미롭게 읽었고, 3호를 계기로 발신한 공개서한 〈질식자의 편지〉와 여러 회신들을 관심 있게 들여다 보았다. 지금 내가 쓰는 글은 영화 비평의 생산자가 아닌, 온전히 장 바깥에 위치한 자가 바라보는 동시대 한국 영화 비평장에 대한 단상이다. 잡지와 온라인상의 글 및 영상들을 수집하고 관찰하며 얻은 개괄 중 보다 깊이 생각해봄직한 점들을 풀어내고자 한다. 여전히 연구 중이며 불완전한 분석이므로 글을 내는 것에 망설임이 있었지만, 적어도 이 비평 세계에 대한 비평의 불씨가 쉬이 사그라들지 않게 한 목소리라도 더 내려고, 생각의 흐름을 공유한다.


누가 누구를 비평가라고 말할 수 있는가? 상징권력에 대하여

“아직까지 우리 젊은 비평가들에게 허락된 자리는, ‘선생님들’이 어렵사리 마련해준 지면의 한 구석이거나, ‘인디’의 자리이거나, 혹은 몇 안 되는 ‘등단’의 자리이다.”[1]

비평가 집단이 의심의 여지없이 인정하는 평론가가 되려면 위에 언급된 바와 같이 등단 제도라는 문화 자본, 혹은 나의 선생님이라는 사회관계 자본을 필요로 한다. 선생님들도, 신춘문예나 평론상에 제출한 평론을 심사하는 위원들도 모두 기성 영화평론가들이다. 평론가에게서 인정받은 평론가. 평론가 세계가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 내린 신인. 이렇게 영화 비평장의 문은 장 내부에 자리 잡은 행위자들에 의해 열리고 닫힌다. 이는 비평장이 영화 비평 및 비평가가 지니는 상징적 가치를 존속시키고 행위자들 사이에 고유한 신념을 유지시키는 방식이다.[2]
        영화 비평가들이 비평‘장’이라는 사회 공간에 각자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보자. 그곳은 비평이 지녀야 할 특수한 가치와 그에 대한 신념이 공유되며 행위자들 사이 일련의 경쟁이 벌어지는 곳이다. 여기에서 이미 높은 문화자본 및 상징자본을 보유한 기성 평론가들은 장 내 진입자를 선별할 권위를 가지고 있다. 누가 비평가인지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권력은 독점적이며, 기성의 비평장을 공고히 하는 기제가 된다.[3] 이러한 인정의 권력은 장 내에서 상대적으로 우위의 위치—더 많은 지면 확보, 더 많은 독자와 관객에게 노출될 기회, 비평 담론 주도 등—를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자본이다. 왜냐하면 이같은 우위는 기성 영화 비평장 내 동료들도 인정하는 비평가가 된다는 것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누가 비평가인지 선정하는 행위는 곧 무엇이 좋은 비평인지 정의하는 것과 직결된다. 그렇기 때문에 장의 경계에 개입해 비평가와 비비평가를 가르는 것은 비평장의 존속과 직결된다.
        이 지점에서 상징폭력이 일어난다. 부르디외는 그러한 비가시적인 권력이 ‘오인’되고 ‘정당성’인 양 ‘인정’되면서 권위에 대한 신념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오인’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사실 이 권력은 보편타당한 가치나 정당성이 아니다. 비평장 내 행위자들이 응당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상호 간에 자의적인 공모가 이루어진 것일 뿐이다. 다만 이것이 위에서 아래로 대물림되면서 이 같은 상징권력—무엇이 비평인가 가르는 권력, 비평의 정의에 관여하는 권력—이 지속된다.[4] 예컨대 기존의 영화 비평 세계에서 “선생님 평론가의 주제의식”[5]이 대물림되는 것이나 등단 제도의 지속에서 ‘권위가 순순히 받아들여짐’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마테리알』을 비롯해 여타의 움직임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더 이상 이러한 기성 비평장을 공고히 하는 자본과 권력의 구조가 오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많은 신진 비평가들이 “등단 제도에 너무 많은 힘이 부여”[6]된 상황에 문제 의식을 가지고있다. 또한 등단하더라도 비평 지면이 저절로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 비평 지면을 보유하지 않은 매체를 통해 등단하면 자신이 지닌 자본을 활용해 장 내 경쟁에 참여해야 한다. 어쨌거나 등단이라는 사회적 공인을 거치더라도 그 세계 안의 자본의 불평등한 분배를 목도하게 되는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자신을 외부에 비평가라 말할 수 있는가? 브런치나 블로그에 글을 쓰는 당신은, 마테리알과 같은 대안적인 지면에 글을 쓰는 당신은 외부에 자신을 영화평론가라 소개하는 것을 꺼리거나 부담스러워 하지 않는가? 만약 그러하다면, 당신도 기존 비평장의 구조 재생산에 암묵적으로 공조하고 있는 셈이다. 더이상 오인하지는 않으나, 그 상징권력을 인정한다. (문화자본으로서 제도화된) 영화비평가라는 타이틀이 지닌 상징자본을, 누군가가 나에게 거머쥐어 줘야 할 것 같은 자격으로서의 권위를, 비평 세계에 진입하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쉽게 무시할 수 없다. 그 권위는 곧 영화 비평 전체의 지위, 다른 분과와는 독립적인 영역으로서의 영화 비평의 정당성 강화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또는 이러한 상징권력을 인정하지 않겠다 해도 불과 몇 명의 의지로는 이미 형성된 집단적 신념을 깨뜨릴 수 없다. 누가 비평가일 수 있는가에 대한 정의가 바뀌려면 이 신념의 축이 옮겨져야 한다. 장 내부에서 훨씬 많은 자들이 자신들이 당연시하고 있는 장의 작동방식과 재생산 구조에 의문을 품고 다른 가치를 향해 모여들어야 한다. 장의 경계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변화 – 독립잡지나 온라인 플랫폼과 같은 지면 창출, 영화 리뷰/비평 유튜브 채널의 활성화 등 – 에 주목하면서 쟁점을 주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평장으로의 진입장벽에 영향을 가할 수 있는, 가장 많은 상징자본을 축적하고 있는 평론가들이 혁신을 주도하거나.


경제 논리와 독자 확보의 고리

문화산업이자 예술인 영화는 경제 논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줄리앙 뒤발은 저서 『20세기의 영화 : 시장의 법칙과 예술의 규칙 사이에서』를 통해 프랑스 영화장, 나아가 세계 영화장이 상업 논리라는 축과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축을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으며 2000년대 이후 이러한 극화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고 진단한다.[7] 여기에 한국의 상황을 놓고 보면,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겠으나 거칠게 볼 때, 예술이라는 축에 위치해 있더라도 상징자본이 많고 적음에 따라 경제자본 배분이 달라지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 세계 영화계와 평단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영화에 대해서는 그것이 그만 한 ‘대중친화적’(이란 말로 구분을 짓는 것이 난감하지만) 영화가 아닐지라도 최소한의 (그리고 때로는 상당한) 흥행이 보장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평단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모든 영화가 상업적으로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또한 모든 영화들이 영화 ‘시장’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그렇지 않은 영화에 비해서 다음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물질적 가능성이 커지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경향은 영화 비평장에서도 발견된다. 영화계와 동료 비평가로부터 높이 인정을 받고 명성을 쌓은 소수의 영화비평가들은 90년대 중후반부터 지금까지도 독자 및 관객과 만날 기회를 많이 얻는다. 더 많은 독자와 관객에게 노출되는 것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많은 경제자본을 유인한다. 소비자는 잡지를 사거나 행사 입장료를 내야 하고, 매체, 영화관, 배급사, 기관 등은 그들의 명성과 인정이라는 상징자본에 걸맞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반면에 신진 비평가들은 ‘신인이니까’ 무급으로 들어오는 기고 요청을 받아들여야 하기도 한다.
        영화 비평이 작동하는 장에 영화 잡지의 자리가 놀랄 만치 축소되고 네이버, 유튜브, 왓챠 등의 플랫폼이 상당한 역할을 대리하면서, 그럼에도 영화를 영화라는 예술로서 사유하고 탐구하고자 하는 일부 비평가는 경제 논리에 상대적으로 좌지우지되지 않기 위해 출판의 주류시장을 벗어났다. 기존의 비평장 진입 구조에 부당함을 느끼거나 지금의 상태가 아닌 대안을 원하는 신진 비평가들은 자신들이 표방하는 독립 잡지를 만들어냈다. 장의 외부 혹은 경계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변화의 관건은 지속가능성이다.
        지속가능성의 조건 중 하나는 너무나 현실적이게도 경제적 조건이다. ‘무사무욕’하게 영화 비평을 온전히 쓰고 싶은 대로 쓰고 잡지를 온전히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들고자 할 때, 그것이 너무나 제한적인 독자를 대상으로 해서 비용과 수익을 맞출 수 없다면, 불가피하게 다른 쪽에서 경제 활동을 하며 더 많은 시간과 노동을 투자해야 한다.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나의 비평을 소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시 말해 독자 확보가 다른 조건 중 하나다. 비평, 즉 작품에 대한 감상, 해석, 평가와 판단은 영화작품에 가치를 부여하고 담론을 이루며, 담론은 무릇 이야기가 주고받아짐을 전제로 하기에 그것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비평이라는 상징재화의 소비자이며, 비평이 일기장 속 글이 아닌 비평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고 담론을 확장시킬 계기를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 독자 확보는 다시금 비용의 문제이거나, 아니면 각자가 지닌 비평적 신념의 타협 문제가 된다. 마테리알이 “정체성이 흐려지느니 당장에 어렵더라도 협소한 타깃층”[8]을 목표하고 시작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비평 생산자에게 경제자본, 나아가 상징자본까지 안겨주기도 한다. 영화를 다루는 많은 유튜버 중에서 ‘15분 요약, 결말 포함’ 유의 영상은 차치하고, 영화에 대한 주관적인 감상과 가치 판단을 담은 영상을 만드는 이들을 고려해보자. 몇십, 몇백 만의 조회수를 기록하는 영상을 만든 유튜버에게는 돈이 따라오고 명성이 쌓인다. 관객도 영화사 관계자들도 그들을 찾는다. 이 경제자본과 사회자본은 문화자본과 상징자본으로 치환된다. 어떤 유튜버들은 기성 미디어에 출연하고 영화와 관련한 책을 출간한다. 책이나 대중매체라는 전통 미디어가 지닌 상징적 권위가 이들에게 전이되면서 이들은 기존의 공인 방식과는 다른 형태로 비평가라는 공식 직함을 얻는다.

비평장은 오늘날 그 구조가 재편되는 과정에 있다. 유튜브도, 독립잡지도, 또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든 흘러갈 수 있는 블로거들과 트위터리안들도 비평 담론의 생산에 참여하고 있다. 당신은 이 모든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 고유한 담론 토픽의 발견 혹은 대중과의 소통, 산업 논리 혹은 예술 논리, 기존의 비평장으로의 편입 혹은 장의 경계 재설정. 마치 대립쌍인 것처럼 나열되었지만 대립이 아닐 수 있는 일련의 쟁점들을 앞두고 당신은 어떤 방향을 지향하는가? 당신의 언어와 실천들이 꾸준히 메아리를 일으키기를 바란다.



[1] 함연선,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한국 영화비평계의 86세대에 대해 반추하며」, 『마테리알』 창간호, 8쪽. https://ma-te-ri-al.online/86

[2] 이 글에서 ‘장’은 문화연구의 틀로 활용되는 개념으로,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장이론을 바탕으로 한다. 부르디외는 사회를 권력 투쟁의 공간으로 인식하고, 개인, 집단 등 각각의 사회적 행위자가 성향체계 및 가능성의 조건에 따라 무의식적인 전략을 발휘하며 동일한 가치와 신념을 공유하는 장 내에서 투쟁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 글에서 사용되는 일련의 개념들—문화자본, 경제자본, 상징자본, 상징폭력 등—은 부르디외의 저작에서 사용되는 의미를 따르고 있다. 부르디외의 주요 논의들, 시사점 및 저작에 대한 정보와 관련하여 국내 서적으로 이상길, 『아틀라스의 발』(문학과지성사, 2018) 참고.

[3] Pierre Bourdieu, Les règles de l’art, Paris, Seuil, 1998[1992]. 본 저서에서는 문학장을 예로 들면서 이것이 문화생산장 전반에 적용된다고 설명한다.

[4] Pierre Bourdieu, 『Langage et pouvoir symbolique』, Paris, Seuil, 2001.

[5] gkd, H, 김혜림, 다함께 박차차, 정경담, 함연선, 「질식자의 편지: 영화문화의 현재에 관한 13개의 질문」 『마테리알』, https://ma-te-ri-al.online/13 

[6] 김혜림, 「등단=검증?」, 『마테리알』, https://ma-te-ri-al.online/19715390

[7] Julian Duval,  『Le cinéma au XXe siècle. Entre loi du marché et règles de l’art』, Paris, CNRS Editions, 2016.

[8] 송경원, 「기성 평론계와 젊은 관객층의 목소리는 구분되어야 마땅하다」, 『씨네21』 , 1252호, 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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