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4
Feature
썼다 지운 질문과 소회
함연선
마테리알 편집인



2020년 11월 6일 오후 3시 50분에 이미지문화 연구자이자 동시대 미술과 영화를 ‘넘나드는’ 필자인 이나라 선생은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이 썼다. “시각예술과 영화 영역의 (매체적이거나 역사-제도적인) 차이와 무관하게 상대를 보며 제 영역의 결핍을 크게 느끼는 이들을 가끔 만나게 된다. 비평이 없다거나 관객이 없다거나 실험이 없다거나 하는 이야기들. (후략)”
        이 포스팅을 보고 무엇보다 내가 “매체적이거나 역사-제도적인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상대를 보며 제 영역의 결핍을 크게 느끼는” 사람이란 반성 아닌 반성을 먼저 해보았다. ‘영화’가 나의 “제 영역”인지 여부는 차치하고, 미술을 보고 듣는 것을 애호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영화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영화계’에 갖는 의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의문들과 같은 선상에 지난 8월 「질식자의 편지: 13개의 질문」이라는 제목의 공개서한을 한창 작성하던 당시에 내가 썼다 지운 질문이 위치할 수 있겠다.
        “[숭배와 사랑에 대하여]: 우울과 불행과 실패와 좌절이 당신을 영화로 이끌었습니까? 혹은 조증과 (일시적인) 행복과 성공(에 대한 덧없는 기대들)과 (이유 모를) 충만함이 영화로 이끌었습니까? 혹은 그 둘 모두였습니까? 영화가 당신을 구원했습니까? 그래서 영화는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까? 영화를 사랑하는 세 단계의 방법에 대해 말하곤 했던 비평가에 해당하는 얘기만은 아닙니다. 왜 영화계에서는 ‘걸작’이란 말이 남발되는 것일까요? 혹은 왜 영화들에 대해 ‘지지 선언’들이 남발되는 것일까요? ‘나는 봉준호(의 영화)를 지지한다’라는 발화에 비해 ‘나는 양혜규를 지지한다’라는 발화는 얼마나 어색합니까.”
        이 질문에 쓰여진 것과 같이 의문은 항상 비슷했다. 왜 ‘시네필’들은 영화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그렇게 난리를 치며 선언하고 표현하는 것일까. 실은 요즘의 젊은 시네필들은 “난리를 치며 선언하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사랑을 표한다. 그래도 그것이 사랑의 표현인 것은 분명한바, 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시네필들은 왜 그토록 ‘영화 팔불출’인가. 질문을 모두 지우기 전에 나는, “영화를 사랑합니까? 그럼 조용히 사랑을 실천하세요. 사랑한다는 말을 영화는 듣지 못합니다.”라는 문장을 썼다.

“영화를 사랑합니까? 그럼 조용히 사랑을 실천하세요. 사랑한다는 말을 영화는 듣지 못합니다.”를 지운 이유는, 시네필들이 왜 그리 (영화에 대한) 사랑을 외치는지 문득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실은 단순했다. 다른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는 것, 만나서 그들로부터 지지받는 것이 시네필들에겐 중요하다. 그들이 단순히 영화를 ‘애호’했다면 영화 애호가지, 시네필이란 호명이 따로 필요하진 않았을 것이다. 헌데 과거의 시네필 잡지들을 보면, 시네필들이 ‘단순히’ 영화 애호가이길 거부하고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함을 알 수 있다. 본업이 의사인 사람이 왜 수천 편의 영화 자막을 만들고 그것을 무료로 배포했겠는가. 영화를 통해 찐득한 우정을 나누는 것, 이너서클의 무언가를 나누고 그럼으로써 소중한 무언가를 영화 밖에서도 쌓아가는 것, 그러나 아주 충실히 영화를 통해서. 그것이 시네필들에겐 중요하다. 나는 그것이 경이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나의 의문은 어째서 미술-인간들은 그렇지 않은 것일까,로 우회한다. 한번은 어떤 국제영화제에서 함께 동행했던 지인이 매 회차마다 영화가 다 끝나고서 관객들이 보내는 박수에 대해 재밌다는 반응을 보인 적이 있었다. 실제로 우리 앞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에도, 박수를 보낸다는 사실이 흥미롭고도 의아하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감독과 스태프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는 것일까? 아니면 영화가 지나간 자리에 박수를 보내는 것일까? 반면, 대체로 무언가가 언제나 ‘있는’ 화이트큐브에서 박수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박수 치는 사람은 없다. 그곳이야말로 ‘현전’의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모두들 눈치챘겠지만 나의 잠정적 결론은, 미술이 산출하는 물질성과 영화가 산출하는 물질성이 다르고 그로부터 기인하여 그것들을 둘러싼 ‘인간들’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보시다시피 나의 구분은 나이브하고 이분법적이지만, 내 질문을 해결하기엔 꽤 쓸모 있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외치는 기묘한 사랑의 표현방식에 의해 비평의 언어도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에 도달한 적도 있었다. 장면 장면에 천착하고, 영화를 지지하거나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선언하고, 상쾌하고 깔끔한 맛이 없는 것. 이에 대한 나의 결론은 조금 비겁하게도 혹은 게으르게도 과문한 나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글을 쓰면 쓸수록, 좋은 것을 만들기란 어려운 일임을 새삼 다시 깨닫고, 다들 그 어려움을 체감하며 묵묵히 글을 쓰고 있겠구나 싶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고통스럽게 새기며.
        갑자기 ‘겸손’해지거나 ‘겸허’해지거나 발을 빼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계’에 대해 말하는 것, 더 나아가 스스로를 안티테제로 위치시키는 것의 피로함과 부담스러움을 겪고 있을 따름이다. 듣는 자들의 피로함은 또 어떻겠는가? 그러면 이제 제도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그만두면 되는 것일까? 묵묵히 글을 쓰면 되는 것인가? 나는 우리의 서한이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이때의 우리는 ‘콜리그’의 두 사람과 h, 그리고 마테리알의 세 편집인이다. 서한에 대한 (비)공개적인 회신들 중 절반은 관전평이거나 조롱이었다. 이는 우리가 예측했던 실패다. 서한을 발표한 후, 우리는 혼잣말로든 회신에 대한 재회신으로서든 우리가 전제했던 것을 다시금 설명해야 했다. 이 또한 예측했던 실패다. 우리의 예측을 비껴나간 실패는 다른 데 있었다. 우리가 우리의 발신전략 아래서 사소하고 구체적인 것들을 무표공간으로 몰아버린 때문에, 우리의 동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을 놓쳐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 ‘전략’을 통해 얻은 것은 트위터-유명세 정도뿐이지 않은가.
        그러므로 제도에 대해 말해야 한다. 더 구체적으로, 사소하게. 그럼 무엇이 바뀔까? 시네필 문화? 영화문화? 그런 것들을 일신하기 위해 우리가 모였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지금은 무엇보다 우리의 글이 바뀔 것이라 생각한다. 묵묵히 글을 쓰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꾸준히 올라오는 영화 블로거의 리뷰가 일정한 지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본 적이 있는가. 열심인 것은 잘하는 것과 다르다. 잘하고자 한다면 큰 뜻을 품어야 하고,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전략이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고통을 새기며 글을 쓰는 것만으로 우리의 글은 (충분히)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나는 도약을 바라며 우리가 그것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때의 우리는 마테리알 편집인 세 명이다.

비평가에게 어쩌면 제도는 하등 상관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좋은 제도가 좋은 작품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고, 제도가 나아진다고 비평/가의 상황이 나아질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gkd의 은유를 빌자면, ‘질식’할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를 ‘질식’시키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 무언가를 구체화하려던 시도가 공개서한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성일 평론가/감독이 ‘질식자’라는 단어를 두고 이런 뜻일지 혹은 저런 뜻일지 고민한 것은, 점잖게 우리를 면박 주려고 한 것에 다름 아니었겠지마는, 실은 질식시키고 질식당하는 그 체계에 대한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서한은 세대론적으로 시작되진 않았지만, 세대에 따라 (대체적으로) 다르게 수신된 것이다.
        그러나 정말 이 질식의 상황이 세대적 책임이냐는 질문에 이르렀을 땐, 조금 다른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우리의 글을 읽으면서도 질식당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이때의 우리는 영화문화를 일구고 있는 넓은 의미에서의 젊은 세대다. (굳이 말하자면, 마테리알에 70년대생은 글을 쓸 수 없다, 쓰고 싶어도.) 어떤 이는 선생님들로부터 회신을 받기 위해 질문을 던졌을지 모르지만, 나는 바로 그 ‘우리 세대’로부터 의견을 듣고 싶었다. 그들의 비전을 듣고 싶었고, 그들이 토로하는 답답함을 듣고 싶었다. 다들 어디선가 쓰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먼 길을 돌아 혹은 오랜 시간을 거쳐 동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을 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시간이 아직 남았다고 생각하면 마음은 편해진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템포러리에서 콘스탄트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가장한 (지역) 영화제의 문제

질식자의 편지에 부치는 소고

[구인공고] 언더커버 혹은 오버커버

아, 감은사 감은사 감은사 탑이여: 때로는 조심하는 것이 문제다

︎ 썼다 지운 질문과 소회

대화(dialog): 퍼포먼스를 위한 카메라-도큐멘테이션에 관한 고민들

보지 않고 보기: 정여름의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아이돌 기표의 ‘트랜스’ 해부하기: 아이돌 서사와 타세계의 시선을 경유하며

'접촉'에서 '접속'으로(2): 〈문명특급〉의 경우

협잡꾼 당신: 「김기영 평전」을 위한 단편

해적을 위한 변명: 위디스크와 ‘리스트’

독백과 방백 사이: 브이로그(VLOG)의 나르시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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