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4
Feature
[구인공고] 언더커버 혹은 오버커버
다함께 박차차
마테리알 편집인



사람을 찾습니다. 이 글은 일종의 구인공고다. 하지만 프로필을 받길 원하진 않는다. 프로필로는 자격요건을 파악할 수 없는 일이거니와 오히려 프로필이 남아서도 안 되는 일이다. 왜냐하면 내가 찾는 사람은, ‘언더커버’이기 때문이다.

웬 ‘낭만’적인 소리냐고 할 수 있다. 맞다. 나도 ‘낭만’이라는 단어에 진저리가 난다. 걷다가 낭만OO이라는 간판만 보여도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고, 한때 전국 시청률이 20%를 웃돌았던 〈낭만닥터 김사부〉(SBS)가 괜스레 보기 꺼려졌던 것도 바로 그래서였다. 닥터면 닥터지 무슨 낭만닥터야.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쿨해지려 해도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런 낭만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할 거라는 거다. 정확하게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진 그런 낭만을 결코 부정하고 싶지 않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낭만이란 오롯이 다음과 같은 항목들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내 생에 처음으로 어떠어떠했던 영화, 누구누구 감독의 영화 세계를 탐닉하며 날 새는 줄도 몰랐던 어느 밤, 그런 감상이 결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하며 숭고함에 젖었던 대화와 글들….

위에서 나열한 예시들은 저명한 누구누구 이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헐벗은’ 낭만이다. 나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면, 모두 과거의 특정 경험에 박제된 낭만이다. 반면 내가 이 구인공고에서 공유하고 싶은 낭만은 어쩌면 더 낭만성이 짙은 단어이자 구인공고에 어울리는 단어인, ‘비전’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덧붙여 어제에서 오늘에 이르게 한 그것이 아니라, 철저히 오늘에서 내일에 당도하기 위해 소요되는 개념이다. 그리고 이 개념엔 반드시 실천이 따라야 한다.

나는 공개서한의 열세 가지 질문 중 ‘창작과 비평의 관계에 대하여’와 ‘실천에 대하여’, ‘창(작)+(산)업에 대하여’ 등 총 세 개를 썼다. 사실 기획 단계에서는 누가 어떤 꼭지를 썼는지를 밝히지 말자는 의견도 있었는데, 각 질문에서 다루는 의제와 그 대답에 대한 비전이 완전한 합치를 이루기는 어려웠기에 결국은 각자 맡은 꼭지에 최선을 다하는 쪽으로 합의가 됐다. 그 선택이 개인적인 기호에 어땠든 간에 우리는 가장 적절한 후속 절차를 고민할 필요가 있었고, 나는 그 최선이 개별 질문이 제기된 경위에 대해 작성자가 소상히 언급하여서 한 페이지에 전부 담지 못한 맥락을 조금이나마 더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공개서한이 다소 불친절한 개념과 시각을 담고 있다는 지적에 십분 공감한다. 어느 정도는 의도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이러한 액션이 장기전이라고,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보기 때문에 지금까지가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회신을 주신 분들 외에도 앞으로 더 많은 분들과 관련해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가지려 한다. 물론 마테리알이 구체적인 실천으로 증명해보이는 게 관건일 테지만.

세 질문 모두 첫째로는 그야말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하는 식으로 어디에든지 토로하고 싶은 절박함에서 출발했고, 다음으로는 아주 당연하게도 우리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창작과 비평의 관계에 대하여’의 첫 문장에서 밝히듯, 마지막으로는 마치 강령과도 같은 그 말이 더욱 당연하게도 ‘자기 자신’만을 향하지는 않았으면 했다. 마테리알이 창간호에서 특별히 언급했던 대로, 그리고 이 구인공고가 의도하는 대로 세 질문은 모두 잠재적 ‘동료’들을 수신인으로 삼았다. (따라서 우리는 질식당한 자이기도, 질식시키려는 자이기도, 그리하여 절반쯤은 스스로 목을 맨 자에 해당하기도 하겠다.)

‘창작과 비평의 관계에 대하여’는 바로 그런 맥락에서 내가 이해하고 있는 마테리알의 출발점과 지향점을 다시 한 번 한 단락으로 정리한 꼭지에 해당한다. 우리가 제창하고 나선 ‘스루패스로서의 비평’이 궁극적으로 이뤄내고자 하는 운동과 효과에 대해서 말이다. 이 꼭지에 대해 특별히 회신을 주신 김지연 님의, “따라서 비평은 끈질기게 어떻게든 길을 모색해보려 하는 것 같다”는 결론에 무척 공감하면서도 여전히 우리에겐 구체적인 전략과 실천방안에 대해 고민할 책임이 남는다. 상업에 가까운 영화일수록 비평과의 관계가 미미해 보이는 게 사실이긴 하지만, 비평과 독자, 대중과 여론, 매스컴과 상업논리는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몰라도 이미 복잡하게 얽혀있다고 생각한다. 정답이라곤 못 해도 이에 대한 나름의 전략과 실천방안은 다음 꼭지를 얘기하며 보충하고자 한다. 다시 영화와 비평의 관계로 돌아가서, 마테리알이 우선적으로 시도하려 했던 것은 조금 더 실질적인 대화가 가능해 보였던 졸업 전시/상영의 창작자와 작품에 말을 거는 것이었다. (《마테리알》 2호, ‘졸업 전시/상영 특집: 학교의 안팎’) 단순히 찬사를 늘어놓거나 훈계질 하는 걸 넘어서, ‘작품’과 ‘창작자’를 정말로 그것으로 대할 때 제기할 수 있는 비평적 질문이 무엇일지 고민하여 특집을 진행했다. 《마테리알》 2호를 발행한 후에는 해당 특집에서 다룬 작품과 창작자를 섭외하여 전시/상영회와 대화 행사를 주최하려고도 했는데, 올해 들어 급격히 나빠진 여러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아쉽게도 무산된 바 있다. 하지만 비슷한 형식의 행사는 동료와 방법론 등을 열어놓고 지속적으로 고민 중이다. “그것이 성립할지는 계속 지켜볼 일이다” 는 김지연 님의 감사하고도 섬뜩(?)한 마무리 발언에 부응하는 실천이 빠른 시일 내에 이행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실천에 대하여’와 ‘창(작)+(산)업에 대하여’는 순서를 바꿔 얘기하고 싶다. 공개서한 발표 이후 온라인으로 두 질문에 대한 회신을 왕왕 받았지만, 오프라인으로도 이들에 대한 간단한 인상에서부터 묵직한 리시브에 이르는 응답을 받은 바 있다. 특히 ‘창(작)+(산)업에 대하여’의 겨우 해당 응답자가 어느 영역에서 어떻게 몸담고 있느냐에 따라 질문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고 받아친다는 점에서 흥미로웠으나, 가끔은 그로 인해 생산적인 대화가 성립하기 어렵기도 했다. 나쁘다는 게 아니라, “아 당신은 그런 점에서 그랬군요” 이상의 무언가를 끌어내기 어려웠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이 질문이 돌출한 경위를 늦게나마 언급하고자 한다. 전제는 대중영화로도 일컬어지는 상업영화, 더 포괄적으로는 내러티브영화와 그 생산 시스템을 겨냥한 것이다.

언젠가부터 영화를 사회적 재화의 측면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비판하는 관점이 도드라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 있었다. 자본주의 비판이라는 오래되고도 비평담론에서는 보편적이라고도 받아들여지는 조류에 더해 비교적 최근에는 정치적 갈등이나 젠더 이슈가 부각됨에 따라 더욱 그런 관점이 힘을 받는 듯해 보였다. 그리고 그 화살의 끝에는 주로 내러티브영화, 그중에서도 대중영화로도 일컬어지는 상업영화가 놓였던 것 같다. (사실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꼭 그랬던 건 아니지만, 다른 것들에 비해 이런 부류의 영화에 쏟아지는 화살이 더 ‘대중적’으로 다뤄지긴 하니까.) 그리하여 그런 영화들을 생산하는 주체나 시스템은 언제나 담론상의 주적이 되곤 했는데, 물론 대부분에 동의하면서도 때론 바로 그 ‘주적’이 지나치게 모호하거나 추상적으로 상정되어있다고도 느꼈다. 〈설국열차〉나 〈기생충〉의 아이러니한 결말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문제적인 상황을 만드는 주적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아는 게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텐데, 아무리 찾아도 주변에는 명쾌한 해설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직접 그 생산 시스템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준비물은 이명박 키드*다운 스펙과 감언이설로 점철된 프로필이었다. (이 글의 첫머리에서 프로필이 소용없다고 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얼떨결에 운 좋게도 나는 주변에서 주적으로 여기는 바로 그 대형 투자제작사에 일 년가량 인턴으로 일하게 되었다. 어떤 영화가 어떤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 어떤 공정에 따라 생산되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다는 사명을 숨기고서. 당시에는 스스로를 언더커버로 정체화하며 은밀하고도 교묘한 작전을 펼치고 있다는 환상과 낭만에 젖었던 것도 사실이다. 몇 편의 상업영화 기획안을 낼 기회가 주어졌고, 나는 도무지 해당 투자제작사에서 다룰 수 없을 것만 같은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를 소재로 하여 받아들이기 불편한 메시지와 코드를 심어둔 기획안을 피칭했다. 물론 해당 투자제작사가 선호하는 가장 대중적인 작법의 외피를 씌워서 말이다. 그런데 웬걸, 소재와 메시지가 참신하다며 다른 동료들을 제치고 해당 인턴십 과정에서 가장 좋은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달콤하더라. 누군가가, 그것도 주변에서 ‘적’으로까지 여기는 권력이 나의 가치를 알아보고 인정해준다는 것이, 참. 자칭 언더커버의 행보가 꼬이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비슷한 무렵, 해당 투자제작사에서 십 년 가까이 몸담은 직원 하나가 슬쩍 다가와 본인도 그런 소재와 메시지에 깊이 공감한다며 실은 지금도 정체를 숨긴 채 독립영화나 지역 영화문화 활성화에 이바지하는 단체에서 부캐 활동을 하고 있노라고 밝힌 적도 있다. 또한, 그런 직원이 본인만이 아니며 자사의 영화 중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특정 측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몇몇 작품들은 그들이 강하게 밀어붙여 진행한 결과라고 귀띔까지 하더라. 세상에. 어디서 많이 본 전개지 않나?

자의 반 타의 반, 지나치게 순진했던 언더커버의 행보는 그 뒤로 얼마 못 가 막을 내렸다. 뭔가 두렵지 않나. 내가 직접 보고 온 상대는, 휴게시간에도 김밥 몇 줄을 배달시켜놓고서 시중의 모든 영화와 작법서를 스터디하는 등 이명박 키드보다 더 이명박 키드답게 성실하고, 심지어는 그들이 주적으로 생각조차 않는 우리에 대해 이미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었다. 물론 나는 지금도 비슷한 일을 하며 자칭 언더커버의 2막을 걷고 있다고 위안 삼곤 하지만, 여전히 수시로 내가 이미 포섭된 건 아닌지, 나아가 적극적으로 재생산에 기여하고 있는 건 아닌지 덜컥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그래도 때마다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생각하려 한다. 그리고 가장 무슨무슨주의적인 단어를 역으로 빌려 ‘비전’을 가지려 한다. 앞서 말했듯 이건 장기전이니까.

일단은 상업 콘텐츠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개입의 여지를 마련할 수 있다. 어떤 소재와 메시지를, 또 어떤 형식을 통해 구현할지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것 말이다. 가령 〈부부의 세계〉(JTBC)에서 지선우(김희애)가 괴한에게 습격당하는 장면을 괴한의 시점에서 FPS 게임처럼 연출한 대목에 미리 언더커버가 개입할 수 있었다면, 과연 그 끔찍한 장면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전파를 탈 수 있었을까. 〈걸캅스〉에서 조지혜(이성경)가 성범죄에 무관심한 남성중심적 광역수사팀으로 돌아가 분통을 터뜨리기 직전, 분주한 남성 형사들의 뒷배경으로 무심코 흘러가는 퀴어퍼레이드에 대한 뉴스보도는 과연 ‘공인된’ 연출이었을까. 물론 이들의 경우 아주 협소한 차원에서의 예시에 불과하다. 더 크게는 한 작품과 참여진, 나아가 세계관, 심지어는 한 세대에 관계하는 문제일 테다. 이를 두고 무슨무슨 코인에 올라탔다든지, 교조적인 프로파간다로서 정치를 미학화한다든지 간단히 일갈해도 괜찮은 걸까. 글쎄.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고유의 습윤하고 퀴퀴한 낭만을 구태여 부정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한 이유는 그게 어떤 식으로든 ‘낭만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조금 유치하더라도 나는 경이로운 소문(조병규, OCN)이가 〈부부의 세계〉와 정반대로 1인칭 시점에서 일진들을 날렵하게 제압하는 그 단순한 감각이 누군가의 과거에 ‘헐벗은’ 채로 박제되길 원한다. 그게 (넓은 의미에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진 낭만이 품을 수 있는 태초의 가능성이다.

언더커버 전략은 끊임없이 ‘참신함’을 요구하는 시장의 논리를 가장 시장적으로 잡채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스루패스로서의 비평’에 준하는 ‘페인트모션으로서의 창작’인 셈이다. 전자가 창출한 공간에서 후자가 발생할 수 있고, 후자가 창출한 바로 그 ‘새로움’에 준거해 다시 또 비평이 틈입할 가능성의 공간이 창출될 수 있다고 본다. ‘창(작)+(산)업에 대하여’는 그렇게 ‘창작과 비평의 관계에 대하여’와 연관하여 두 번째 가능성을 낙관한다.

‘창(작)+(산)업에 대하여’에 대한 회신 중 아무개 님의 답변을 비롯해 몇몇 분들이 ‘(전성기의) 헐리우드’를 언급하며, 영화의 태생적인 산업적 성격과 제작자가 거대자본의 고용인이 될 수밖에 없는 환경, “그러면서도 또 좋은 영화를 만들면 그만 아닌가요?”, “돈은 중요합니다” 등의 의견을 주신 바 있다. 지당한 말씀이다. 돈은 중요하다. 언더커버의 월급은 누가 주나? 그러나 할리우드 중에서도 지난 세기의 시절이 비교대상으로 소환되는 데엔 심히 부정적이다. 디즈니와 마블을 위시해 국내의 몇몇 투자제작사에서도 적극 도입되고 있는, 요즘의 기획 프로듀서팀 주도의 스튜디오 시스템에서는 어느 한 혁명투사적 개인이 무언가를 벌이거나 좌우하거나 바꿀 수는, 죽어도 없다. 메이저씬에서 〈플란다스의 개〉로 데뷔하는 경우가 더 가능하기는 할까. 돈이 중요하고, 생존이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그저 ‘좋은 영화’를 만들기를 꿈꿔서는 안 된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개인의 치기로는 어림도 없다.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언더커버의 진출과 귀순책을 지속적으로 강구해야 한다. 다들 그러다가 저편으로 넘어가 버렸다, 이미 다 해봤던 거 아니냐, 그거야 말로 치기 어린 개인의 낭만 아니냐? 아직 공작이 끝나지 않은 언더커버들이 숱하다.

‘실천에 대하여’는 회신을 받든 못 받든 공개서한의 질문 리스트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앞의 질문들뿐 아니라 공개서한의 모든 질문들이 궁극적으로 닿아야만 하며, 닿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회신의 가치를 무색하게 하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담보로서 말이다. 한편 그 자체만으로는 누군가에겐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꼭지라 구태여 회신할 이유를 찾지 못했을 테고, 누군가에게는 또 그렇기 때문에 강력하게 외면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마테리알 편집진으로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즈음, 어느 영화제의 프로그램팀 스태프 모집에 지원하여 면접을 본 일이 있다. 감언이설보다는 솔직함에 더 점수를 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나름의 소신을 담아 예상 질문과 답변을 준비하던 중 소식이 뜸하던 한 트위터리안 친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친구가 보내준 몇 장의 캡처 사진에는 어느 트위터 유저가 원색적인 욕설을 섞어가며 마테리알에 대해 근거 없는 비방을 게시하거나 타 유저와 그런 대화를 주고받은 내역이 담겨 있었다. 사실 그 정도로는 썩 새로운 경험은 아닌지라 그러려니 넘어가려 했는데, 문제는 이전에 해당 트위터리안이 다른 게시물에서 스스로를 버젓이 어느 영화제의 프로그래머이자 스태프 면접관임을 밝혔다는 것이다. 바로 그는 몇 시간 뒤 내 면접관이 될 인물이었고, 나에게 직접 서류전형에 통과했음을 전한 사람이었으며, 그가 욕설이 담긴 게시물을 올린 시점은 바로 내가 면접을 보기로 한 당일 새벽이었다. 얼마 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리고서 면접장으로 들어서니, 아니나 다를까 면접관의 손엔 마테리알 활동 이력이 적힌 칸에만 형광펜 밑줄 선명하게 그인 내 프로필이 들려있었다. 우린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마테리알에 관한 질의응답만 몇 개 주고받은 뒤 헤어졌다. 그리고 며칠 뒤 그 프로그래머의 트위터 계정에는 이런 말이 올라왔다. “얼마 전 면접 본 사람 중에 스스로 ‘아마추어 비평’을 지향한다던 사람이 있었는데, 너무 멍청해서 자꾸 짜증이 난다.” 내가 한 말은 아니기 때문에 다른 면접자에 대해서도 험담을 했겠거니 받아들였다.

마테리알 편집진 이력 때문에 낙제했다는 근거 없는 자만이나 비애에 젖진 않는다. 다만 당시엔 마테리알이 도대체 뭐라고 이런 경우까지 당하나 싶기는 했다. 그런데 곱씹어볼수록 그만큼 마테리알 활동에 막중한 책임이 이미 부여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마테리알 활동 이력이 그 프로그래머에게 과연 무엇을 증명했는지는 모르지만, 때론 프로필이 생각보다 많은 걸 증명하기도 하는 듯하다. 내가 실천하기 이전에 이름과 소속이 이미 먼저 실천해내고 있는 중인 것들. 다시 한 번 동료가 되는 조건과 되지 못하는 조건을 떠올려본다.

‘실천에 대하여’야말로 앞의 질문을 모두 관통하며, 언더커버의 유일한 자격요건이자 프로필이 채 담아내지 못하는 이력이다. 프로필이 남아서도 안 되는 언더커버가 서로의 동료를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인 셈이다. 게다가 때론 탁월한 귀순책이 되기도 한다. 물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고. 간혹 영화인들의 숨통을 옥죈다거나 염치에 기댄다는 게 지나치게 낭만적이라는 반응도 역시나 있었는데, 줄곧 얘기했듯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렇게 낭만적이기 때문에, 이미 영화와 그에 대한 낭만이 그들의 숨쉬기에 깊이 관여하기 때문에, 조금 더 옥죄어져도 괜찮지 않을까. 이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도리어 앞다퉈 요구해야 할 최소한의 존엄일지도 모른다.

구인공고. 언더커버를 찾는다. 하지만 응답은 기대하지 않는다. 어딘가에 숨어있을 언더커버라면 침묵으로도 서로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고, 반대로 오버커버는 눈과 귀를 가린 채 입만 분주할 테다. 나는 그 소음이 오히려 언더커버의 발소리를 가려줄 거라고 믿는다. 그렇게 0000낭만을 낭만으로 긍정한다. 조금 덜 쿨해 보일지라도 그게 동력이 된다면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장기전 만큼은 낭만이 아니라 냉정한 현실이니까.



*이명박 집권 시기에 학창시절을 보내며 입학사정관제 등의 입시제도하에서 자기계발과 PR에 최적화되었지만 정작 뒷받침해주는 생존 시스템이 없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을의 자세를 학습한 신자유주의의 사생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템포러리에서 콘스탄트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가장한 (지역) 영화제의 문제

질식자의 편지에 부치는 소고

︎ [구인공고] 언더커버 혹은 오버커버

아, 감은사 감은사 감은사 탑이여: 때로는 조심하는 것이 문제다

썼다 지운 질문과 소회

대화(dialog): 퍼포먼스를 위한 카메라-도큐멘테이션에 관한 고민들

보지 않고 보기: 정여름의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아이돌 기표의 ‘트랜스’ 해부하기: 아이돌 서사와 타세계의 시선을 경유하며

'접촉'에서 '접속'으로(2): 〈문명특급〉의 경우

협잡꾼 당신: 「김기영 평전」을 위한 단편

해적을 위한 변명: 위디스크와 ‘리스트’

독백과 방백 사이: 브이로그(VLOG)의 나르시시즘

한국 영화 비평장에 대한 비평 초고: 계속 말해야 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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