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4
Feature
템포러리에서 콘스탄트로
: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가장한 (지역) 영화제의 문제
김혜림
비평공유플랫폼 ‘콜리그’ 운영진



영화에서, 더 넓게는 영화 문화에서 지역의 문제를 고찰하면 필연적으로 문제의 화살은 지역의 문제 테두리 바깥을 향할 수밖에 없다. 여러 가지 질문을 제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1) 지역의 영화 애호가들에게 열린 영화적 공간은 좁은가. 2) 그렇다면 서울 및 수도권, 대형 도시에 살고 있는 애호가들에게는 열린 영화적 공간 풀이 넓은가. 3)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이 영화 경험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가. 4) 만약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면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법은 (지역) 영화제 개최인가. 공개서한에서 내가 제기한 지역 영화제에 대한 질문, 혹은 의문은 결코 지역 영화제 개최의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논지가 아니었다. 더불어 이 문제는 실상 비판 없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수많은 영화제를 향한 질문에 가까웠다. 나에게 떠오른 의문은 과연 일시적으로 개최되는 지역 영화제가 커뮤니티의 형성 및 관객층 확대와 고착화를 정상적으로 수행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나의 경우, 대학에 진학하기 이전까지 꼬박 19년을 한 지방의 소도시에 살았는데, 그곳은 ‘영화관’이라 불리는 멀티플렉스마저도 한 곳(떠날 때즈음엔 두 곳)밖에 없었다.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물론! 보고 싶은 영화의 대부분은 멀티플렉스에서 상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한적한 지방 소도시에서 자란) 나에게 있어 영화 경험은 용돈을 받아 간간히 사 보는 영화 디브이디와 미로와 같은 인터넷망을 서칭하면서 구할 수 있는 영화가 전부였다. 내가 내 개인적인 경험을 꺼내는 이유는, 극장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함이다. 정성일 평론가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계급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영화를 경험할 권리”라고 말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영화를 보러 ‘가는 것’ 자체가 보편적 경험이 아니다. 실제 극장에 가서 영화를 즐기는 것에는 내가 언급한 지역의 문제 이외에도 너무나 많은 문제가 존재한다. 바깥에 쉽게 나갈 수 없는 이들, 수중에 한 푼도 없는 이들, 영화관의 어둠과 답답한 의자에 막연한 두려움을 가진 이들. 더불어 지금이라면? 보이지 않는 감염에 대한 두려움이 문제가 된다.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극장이라는 한정된 공간은 그 탄생에서부터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대도시와 대도시가 아닌 곳 사이의 지역적 차이 이전의 문제들이 존재한다. 영화 관객 형성의 어려움을 비단 지역의 문제만으로 한정할 수는 없다. 관객층은 부서질 수밖에 없고, 관객은 관객 개인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영화 문화는 더이상 ‘영화 보기’를 중심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영화 문화 및 관객 문화가 비교적 서울과 부산에 더욱 열려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 관련된 교육이나 강의, 그리고 더불어 다양한 영화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아카이빙 기관 역시 서울과 부산에 집중되어있다. 한국영상자료원, 서울아트시네마, 다양한 예술/독립영화 상영관, 영화의 전당 등이 그 예시가 될 것이다. 이러한 몇몇 기관을 예시로 드는 것은 단순히 그들이 보기 힘든 영화를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다. 해당 기관들은 다양한 교육과 강의를 진행하고, 개인으로 파편화된 관객을 다시 하나의 커뮤니티와 공동체로 모여들게 한다. 물론 이 공동체는 ‘관객’이라는 이름으로도, 혹은 ‘학생’, ‘동료’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커뮤니티 형성이 중요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개인으로 분열되어 경직된 관객 문화로 남았을 때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커뮤니티의 부재는 영화를 둘러싼 담론을 빈약하게 만든다.

영화를 보는 것은 물론 개인의 경험, 그러니까 누구와도 함께할 수 없는 철저한 자신만의 경험이지만 그 경험이 커뮤니티, 혹은 일종의 네트워킹을 통한다면 유의미한 담론을 만들어낼 수 있다. 앞서 넓은 의미의 교육과 강의를 언급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영화를 보는 이들, 예술을 즐기는 이들은 자립적으로 영화의 감흥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이때 말하는 되새김질은 특정한 결과물로 산출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블로그에, 혹은 SNS에 영화에 대한 생각과 감흥을 적을 수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이러한 네트워킹은 자신만이 소유한 일기장에 적는 것이나 친구에게 말 한마디 건네는 것으로도 가능하다. 영화를 둘러싼 담론과 토론, 감흥을 지식으로 번역해내는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커뮤니티가 개입한다. (그리고, 오해를 줄이기 위해 계속해서 덧붙이지만 이 커뮤니티는 시네필인지 아닌지의 여부나 출신 학교 혹은 전공, 그리고 나아가 계급적 차이나 성차와도 무관할 수 있다.) 이러한 되새김질과 교육, 관객 간 교통은 예전에나 활발하게 가능했던 일처럼 보인다. 역설적으로 대화의 장이 무한하게 넓어지자, 사람들은 쏟아져나오는 무수한 글들과 부재한 네트워킹에 피로감을 호소한다. 더 나아가 (모든 것을 팬데믹으로 환원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은 자연스럽게 그러한 커뮤니티의 형성과 네트워킹의 기반 자체가 불투명해진 상태다.

이런 흔들리는 영화 문화의 불안정한 기반 위에서, (지역) 영화제가 과연 유의미하게 작동하고 있느냐고 자문할 때도 되었다. 그리고 이 의문은 어떠한 개인을 지적할 필요 없이, 모두가 성찰하고 되짚어야 할 문제다. 단순히 새로운 영화를 관객이 접할 수 있도록 열어둔다는 것을 영화제가 마땅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근거로 세울 수는 없다. 또한 배급과 마켓의 역할을 한다는 것으로도 지역 영화제의 필요성을 보증할 수는 없다. 영화제는 무엇보다 관객의 문화여야만 하고, 익명의 사람들을 네트워킹 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지역 영화제는 지역의 문화적 기반이 부재한 것까지 해결하진 못한다. 진정으로 지역의 문화적 기반을 탄탄하게 하고 싶다면, 오히려 필요한 것은 지역 시네마테크나 다양한 영화를 접할 수 있게끔 네트워킹하는 연계성이다. 이 기반을 통해 선택의 자유와 취향의 폭을 넓힐 수 있고, 비로소 temporary의 방식에서 constant의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내가 제기한 질문의 의도는 결코 지역에 영상 문화가 필요치 않다거나 혹은 영화제가 열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내가 성인이 되기 이전 소도시에서 느꼈던 영화를 접할 때의 막막함, 혹은 답답함은 단순히 새로운 영화 𝑥를 접하기 힘들다는 문제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여건과 담론이 부재하다는 것이었고, 나는 소도시에 살던 19년간 단 한 번도 ‘영화제’라는 일시적으로 구축된 연약한 공간이 이 답답함을 해결해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겪어온 영화제는 소도시의 내가 느낀 답답함을 해결해주기보다는 일종의 소풍 혹은 축제와 가까웠다. 결국 나는 서울에 있는 학교로 왔고, 서울에서 살고 있다. 나를 서울로 이끄는 중력을 끊어내는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과연 지역 축제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 템포러리에서 콘스탄트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가장한 (지역) 영화제의 문제

질식자의 편지에 부치는 소고

[구인공고] 언더커버 혹은 오버커버

아, 감은사 감은사 감은사 탑이여: 때로는 조심하는 것이 문제다

썼다 지운 질문과 소회

대화(dialog): 퍼포먼스를 위한 카메라-도큐멘테이션에 관한 고민들

보지 않고 보기: 정여름의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아이돌 기표의 ‘트랜스’ 해부하기: 아이돌 서사와 타세계의 시선을 경유하며

'접촉'에서 '접속'으로(2): 〈문명특급〉의 경우

협잡꾼 당신: 「김기영 평전」을 위한 단편

해적을 위한 변명: 위디스크와 ‘리스트’

독백과 방백 사이: 브이로그(VLOG)의 나르시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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