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4
Feature
질식자의 편지에 부치는 소고
한대호



나는 지난 9월부터 마테리알과 젊은 청년 필자들이 기획했던 「질식자의 편지」의 한 필자로 참여했다. 「질식자의 편지」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동시대 문화에 대한 열망과 동시에 의문을 가진 이들이 던진 질문이었다. 이 기획을 통해 필자들은 동시대 아트하우스/ 독립영화/ 시네필리아/ 아방가르드 등 조금은 다르지만 그래도 교집합을 찾을 수 있는 향유 집단이나 초창기부터 이같은 자장을 형성한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도 듣고자 했다. 그리고 같은 관객으로 취향을 공유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청취하고자 했다. 
        막상 서신 교환이 이뤄지면서 내외적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서신이 공개된 이후 여러 건의 회신이 왔고, 일부 필자의 경우 못다 쓴 편지를 공개하면서 논의를 확장할 수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제도권 영화언론을 접촉해보려고 현재 업계에서 영향력이나 책임을 가졌다고 생각했던 분들에게 접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여전히 이같은 시도에 배타적이거나 시도 자체를 가볍게 생각하는 이들의 모습에 실망하기도 하였다.
        이 경험들에서 나는 어쩌면 우리가 있는 그대로 소멸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라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다. 과연 이 서신 교환이 우리에게 남긴 흔적은 무엇일까. 

- 질식이 아닌 소멸로 
서신과 회신, 그 회신에 대한 또 다른 회신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내가 느낀 것은 근본적으로 여러 갈래로 묶여있는 일군의 공동체에 다양한 형태의 트라우마가 가득하다는 점이다. 영화산업과 제도에 관한 질문이 주가 되어 출발한 서신은 다양한 차원의 개인적 트라우마, 특정 공동체 또는 인물에 대한 선입견을 환기하게 했다. 그렇기에 우리가 던진 질문의 궤도에서 벗어난 답신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이 회신자의 문제라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근본적으로 이런 소통 문제는, 일정한 관점과 취향, 이슈를 아우르고 유통할 플랫폼이 우리가 속한 장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 기인하여 발생한다. 더군다나 이를 지탱할 산업 역시도 시네필리아보다는 멀티플렉스 중심의 극장과 상업 배급사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 영역 밖에서는, 서로 이슈를 나누고 취향을 공유하기보다 유명한 평론가의 프로그래밍 위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우리는 놓여있다. 그렇기에 서한은 파편화된 조각으로, 각 개인이 인지하는 개별적 감수성에 의해 끊임없이 오독되고 재생산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지만, 편지와 회신이 오가는 동안 질식자들이 상정했던 자장은 기하급수적으로 축소되어갔다.
        사실 질식자의 질문은 이제 시네필리아 또는 독립문화의 취향과 문화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에 이르기도 한다. 그동안 우리가 부분적으로 속한 공동체는 ‘우정’이나 ‘가치’ 등의 수사로 이를 주로 불렀던 것 같다. 이를 바탕으로 유무형의 공적 지원이 있는 행사도 꽤 여럿 있었다. 때로는 이를 ‘컨템포러리’ 등으로도 부르며 일종의 문화 자본이 주는 허영을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질식자의 편지」 서신 교환 과정에서 드러난 이 문화의 토대는 철저히 관변적이다. 자가 자본과 스폰서십을 통해 이뤄지는 문화는 매우 제한적이며, 실질적인 유동성은 공적 지원을 통해서만 이뤄진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수준이 되었다. 독립적 경제체제를 갖추지 못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제도적 문제에 대한 회신은 그렇기에 대부분 결국 이 문제점을 인정하거나 개인적 차원의 취향과 트라우마를 환기하며 무기력한 관객으로서의 면을 강조하는 것이 주가 되기 쉽다. 우리가 질문하던 시점에서 질식되던 공동체의 일부는 자연스레 소멸로 향하는 분기에 와 있다.

- 우리는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개개인의 취향 또는 트라우마 차원으로의 환원도 문제지만, 표면적인 문화의 토대도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 근래 들어 KT&G 상상마당과 CGV 아트하우스의 철수를 비롯하여 여러 사안이 급작스레 일어났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문제가 아니라 이를 소구하고 향유하는 사람들이 더이상 활동하거나 새롭게 양성될 수 있는 필드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 시네마테크 운동이나 독립문화 운동이 태동하던 시기에 비해 지금은 많은 것이 보충되고 향상되었다. 운동이자 가치지향 공동체로 거의 무급 봉사로 이뤄지던 영화제나 독립문화 운동은 이제 철저한 제도권의 보호장치 속에서 운영된다. 더이상 독립영화계에서 종사한다고 4대 보험도 없이 무급 봉사로 일하는 것이 훈장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제 영화제와 독립영화를 좋아한다고 어떤 남다른 취향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최근에 있었던 ‘Save our cinema’ 캠페인은 이처럼 산업 자본(또는 공적 자금)에 완전히 종속되어버린 여러 기관과 단체의 실제 모습을 보여준다. KT&G 상상마당의 철수는 정상적인 기업논리로 본다면 사실 매우 올바른 결정이다. 그 자체가 독립문화를 풍성하게 하는 무형적 가치가 있다면 다른 상황이겠지만, 상상마당이 영향력 있는 다른 역할을 하는 극장이자 배급사였는지 냉정하게 묻는다면 나는 회의적이다. 물론 존재만으로도 다양성 기여에 도움은 되겠지만, 이미 수많은 대체재와 OTT채널과 플랫폼을 통해 콘텐츠가 범람하는데, 전혀 상관없는 산업에서 매출을 올리는 회사가 이를 왜 지켜야 하는지는 누구도 쉽게 설명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무형적인 문화자본의 가치가 있다면 이를 증명하는 것은 누구의 몫일까? 그 문화를 향유하는 향유자의 몫인가, 그저 자본만 투여하는 공급자의 몫일까.
        이는 CGV의 부분적인 철수에 있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트하우스가 큰 역할을 차지하는 대학로와 명동점이 가장 먼저 철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매표수익 이외에 가장 큰 수익을 차지하는 매점 등 기타 수익이 가장 형편없다는 점을 하나의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많은 상업 극장이 더이상 매표사업만으로 극장을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있다. CGV에게 어쩌면 영화는 팝콘을 팔아서 수익을 올리는 미끼 상품일지도 모른다. 이 상황에서 ‘Save our cinema’는 어떤 의미일까? 정말 어떤 교집합과 취향을 공유하는 공동체로서 이 문화적 가치를 지키려는 캐치프레이즈일까. 아니면 이곳에 남은 이들이 생존하기 위한 발판일까?
        나는 이 글을 쓰기 전 한 평론가의 회신을 보았다. 현재와 같은 자장이 형성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한 이로 난 생각한다. 그는 일부 질문 자체가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지 않고 강박적인 대답을 되레 강요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나는 그 질문 자체는 개인의 취향을 물은 것이 아니라 형성된 제도와 체계를 묻는 것이라고 한다. 거대 담론으로서 현재 자신이 설계에 참여한 자장에 대해 물었는데, 개인의 취향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말아달라는 것은 대답일까, 도피일까.
        여러 사람들은 이런 질문 자체에 의의를 두며 이 질문을 키워나가자고 말하지만, 궁극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회피한다. 우리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왜 굳이 이런 문화적 자장 안에서 가치를 공유하고 어떤 공동체가 있는 것 같은 모양새를 취해야 할까. 물론 누군가는 이런 고민에 굳이 특정한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서 사고할 필요는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굳이 개인으로서 취향과 문화적 허영을 즐기고 싶은데 그런 고담준론이 왜 필요한지 조소할 수도 있다.
        좋다, 그렇다면 이제 그 제도와 자장을 유지하고 있는 공적 자금은 말끔히 폐기하는 것도 동의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개인적 차원으로 환원되는 취향에 왜 공기업이 극장을 유지해야 하고 공적 자금으로 문화적 가치를 유지해야 하는가? 그리고 굳이 왜 공공기관이 시설 투자를 통해서 극장을 유치해야 할까? 1천만 시민 중 연간 누적 이용자가 3만 명이 안 되는 곳(이 중 대부분은 동일 이용자다)에 왜 공공의 개입이 필요할까? 현재 우리 사회에는 공적 개입이 필요한, 그보다 시급한 현안이 산적해있다. 영화 보는 게 내일 아침의 끼니를 때우는 것보다는 덜 중요한 일이 아닐까.
        취향 공동체로 발돋움하기 위해서 철저한 재정적 독립과 스폰서십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우러러봤던 많은 문화적 풍토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진정 우리가 우정과 가치를 나누는 하나의 취향 공동체라면 아주 작은 영역이어도 스스로 자생할 수 있는 공간에서 떳떳하게 숨 쉴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의 자생은 정신적인 개인의 영역이 아닌, 재무적 측면이라는 공적 영역에서의 자생이다.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내가 가는 극장의 상황이 내일은 더 나빠질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이는 비관적이지 않다. 어쩌면 이제 기존의 제도와 극장을 벗어나 스스로의 취향과 가치를 지킬 수 있는 공간을 찾아 떠날 시간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우리의 달콤쌉싸름한 성장통이길 희망한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템포러리에서 콘스탄트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가장한 (지역) 영화제의 문제

︎ 질식자의 편지에 부치는 소고

[구인공고] 언더커버 혹은 오버커버

아, 감은사 감은사 감은사 탑이여: 때로는 조심하는 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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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dialog): 퍼포먼스를 위한 카메라-도큐멘테이션에 관한 고민들

보지 않고 보기: 정여름의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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