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4
Feature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강덕구
비평공유플랫폼 ‘콜리그’ 운영진, 블로거



매일매일 어디선가 환청이 들리는 듯하다. 어느 목소리는 나를 꾸짖는 악마의 환청이고, 어느 목소리는 나를 유혹하는 세이렌의 목소리 같다. 잠에서 일어나면, 이제부터 쓸모없는 나는 나의 쓸모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영화제도 바깥으로 나가기로 결심한 그때부터, 나는 자기혐오에 시달리곤 했다. 끔찍한 시절을 겪고 있는 내게 마크 피셔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Good For Nothing)」은 거의 내 삶과 일치하는 어떤 장면을 보여주었다. 노동계급 출신의 남성이 고등교육을 받고, 교양을 획득해 한 명의 의사-지식인으로 성장해나가지만,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 아카데미는 그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무직-정규직 직장에 속할 가능성도 없는 건 마찬가지다. 사회화의 가능성은 물론, 정신병을 앓는 이가 사회가 요하는 정상적인 삶을 온전히 수행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마크 피셔의 이 글이 내 상황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지만, 내가 겪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었다. 대학에서 영화이론과 영화사를 공부하고, 사회로 진출한 내게 배움은 영광이 아니었다. 영화비평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취급을 받는다. 물론 나는 그보다도 더 쓸모없는 취급을 당하는 것이고.
        「질식자의 편지」 자체의 기획이란 이같은 상황을 재검토하고, 비평과 영화문화의 쓸모를 숙고한 것에 다름없다. 먼저 영화비평은 재검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이에 대해선 마테리알 홈페이지에 기고한 「비평? 우리는 웃고 있다.」를 참고하면 된다). 다시 말해 나는 영화비평이 가지고 있는 쓸모를 어떤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비평? 우리는 웃고 있다.」에서 나는 조금 더 유통적이고, 상업적인 측면에 대해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선 ‘비평’이라는 상품 형식이 유통되기 위해서, 그것이 상품화해야 할 콘텐츠(저주받은 단어!)에 대해 말하고 싶다. 우리(이 우리는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는 보통 ‘비평’ 하면 형식주의 비평을 생각한다. 영화로 따지면, 이 숏은 어디에서 찍혔고, 사이즈는 어느 정도이며, 180도 법칙을 지켰다는 등의 이야기를 끝도 없이 나열할 수 있다. 즉 지금의 비평은 형식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옳거나, 그르다는 말이 아니다. 영화 잡지에 실리는 어떤 비평을 봐도 형식과 구조를 작가의 의도와  연결함으로써, 작가성의 만신전을 구성한다. 이를테면 형식은 작가를 위한 인장인 셈이다. 작가주의 비평에서 형식은 작가의 지문이자 서명으로 인식된다. 물론 나는 형식주의 비평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럴뿐더러 이를 강력히 지지하는 입장이기도 하지만, 이런 형태의 비평이 독자를 창출하는 데 크나큰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지금부터 내가 제기할 형식주의 비평의 한계는 비평의 토픽을 확장시킬 방법과도 연관되어있다.

나는 이제부터 아래의 질문을 고민할 셈이다.

“형식주의는 통제를 위한 장치일까?”

작품론은 하나의 작품을 형식에 의해 해체한 후, 작가라는 대타자의 이름으로 재구성한다. 작품론은 미적 ‘형식’이 지닌 힘을, 온전히 작가에게 할당하는 강제적인 교육이 된다. 이를테면 한 평론가는 어떤 미적 형식, 한 인물이 지나가는 궤적을 담아낸 롱 숏을 한 감독의 특징으로 명명함으로써, 재구성에 나선다. 이는 한 명의 작가에게 어쩌면 역사적이고 제도적으로 구성된 미적 형식을 재산권의 이름으로 할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재산권을 일종의 역사적 몫을 위한 배당금이라 불러도 좋다. 주주는 기업의 주식을 구매함으로써, 그 몫의 크기에 따라 배당금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한 명의 작가는, 예술사의 전통 아래에서 자신의 몫을 받는다. 그 몫이란 만신전 아래 자신의 이름을 박아넣는 것, 헐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손바닥을 넣는 것, 환언하자면 제도가 승인한 ‘고유명사’가 되는 것이다. 형식주의 비평은 작가로 하여금 승인된 고유명사가 되는 데 온 힘을 다해 돕는다.
        이것은 관객이 직면하는 미적 체험을 하나의 통합적 인격과 관계하는 것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관객을 공평무사한 방식의 ‘사심 없는’ 아름다움으로 이끈다. 관객은 제도라는 안전한 위치에서 아름다움을 소비한다. 즉, 예술이 한때 보유했다고 여겨진 치명성, 삶을 뒤흔들고 역사의 내핵을 변환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제도의 네트워크 안에서 안전한 위치로 재편된다. 지금 내가 예술을 ‘실재에의 충동’이라고 규정짓는 우를 범하는 것은 아닐까? 예술=위험. 플라톤이 도시에서 시와 예술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의 고릿적 관념을 곧이곧대로 수용하여 예술을 실재로 진입하는 관문으로 신비화하는 것은 아닐까? 맞다. 나는 영화라는 예술이 가진 폭력적 경험이 시간 차(관람 이전과 이후)를 두고 개인을 분열시켜, 인격 안에 간극을 도입한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관람자의 인격에 불확실성을 도입하는 예술의 공포는, 제도화된 수사학 속에서 평탄해지는 역설에 시달린다. 아감벤의 말처럼 예술의 치명성은 제도 안에서 무력화되어 제도의 수사학에 갇힌다. 예술은 내가 말한 제도에, 즉 미학이라는 형식의 언어에 저항하지만, 이에 의해 포착된다. 
        나는 이때 작품론과 제도를 포기하자고 제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예술이 우리를 향해 외치는 함성을 어떻게든 생생히 되살려야 한다. 이는 온전히 박물관과 미술관, 정전의 제도가 아니라 폭력적이고 비일관적인 방향으로, 즉 자본의 충동과 무의식으로 환류하는 시장의 힘에 의해 가능하다. 예술제도에 익숙해졌던 나는 이 제도 밖으로 한 발자국만 나가도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경험을 한 바 있다.내가 겪은 쓸모없어짐에 대한 경험은 제도에 의해 예술의 치명성이 길들여지는 바람에 일어났다. 이는 점점 대중-관객이 예술을 하나의 공포로, 자신의 일상적 삶을 파괴하는 무기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때 ‘쓸모’를 예술이 개인으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사심에 의해,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방향으로 겪도록 하는 방안이라고 말하고 싶다. 비평은 예술의 치명성을 다중의 삶에, 우리의 무의식에 각인하는 야만의 기술이어야 한다. 작품에 대한 형식 비평을 작가론에 대한 알리바이로 만듦으로써, 작품을 한 명의 작가에 귀속시키는 아카데미 제도 대신에 우리는 시장 자체의 무한한 힘과 협상해야 한다. 그러한 비평이야말로 내가 경험했던 무력감에서 탈출할 수 있는 서킷일 터이다.

쓸모를 위해 시장과의 전투에 나서야 하고, 교묘한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OK, 당신들에게 어떻게 보이건,

우리는 기회주의자가 될 필요가 있다. 







︎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템포러리에서 콘스탄트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가장한 (지역) 영화제의 문제

질식자의 편지에 부치는 소고

[구인공고] 언더커버 혹은 오버커버

아, 감은사 감은사 감은사 탑이여: 때로는 조심하는 것이 문제다

썼다 지운 질문과 소회

대화(dialog): 퍼포먼스를 위한 카메라-도큐멘테이션에 관한 고민들

보지 않고 보기: 정여름의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아이돌 기표의 ‘트랜스’ 해부하기: 아이돌 서사와 타세계의 시선을 경유하며

'접촉'에서 '접속'으로(2): 〈문명특급〉의 경우

협잡꾼 당신: 「김기영 평전」을 위한 단편

해적을 위한 변명: 위디스크와 ‘리스트’

독백과 방백 사이: 브이로그(VLOG)의 나르시시즘

한국 영화 비평장에 대한 비평 초고: 계속 말해야 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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