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3
Critic
이미 흩어진 '밀레니얼 시네필'
박동수
대학생



1999년 〈쥬라기 공원〉 V/H/S
2001년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극장
2002년 〈동굴 대탐험〉 IMAX(63빌딩)
2003년 〈주온〉 케이블 채널
2006년 〈코어〉 초등학교 교실
2007년 〈괴물〉 DVD
2009년 〈새벽의 저주〉 P2P 사이트
2012년 〈분노의 질주〉 아이팟
2013년 〈투 올드 힙합 키드〉 영화제
2015년 〈킬러스 키스〉 시네마테크
2016년 〈데어데블〉 넷플릭스
2016년 〈공동경비구역 JSA〉 블루레이

1. 위의 타임라인은 《씨네21》의 「우리 시대의 시네필」 기사를 관람하며 떠올린 “나의 플랫폼/매체별 첫 관람”을 기록해본 것이다. 지금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시네마테크나 어떤 영화제의 특별전처럼 특정 주제를 가지고 영화들을 몰아볼 기회가 아니라면 감상하는 작품이 제멋대로다. 물론 영화를 보는 플랫폼도 제멋대로다. 이러한 관람 경험은 시간이 흐를수록 뒤섞이고 있다. 물론 V/H/S나 아이팟처럼 지금은 사양 기술이 된 매체나 플랫폼도 있지만, 영화제와 시네마테크를 포함한 극장, 넷플릭스를 위시한 OTT 서비스, DVD 및 블루레이 등의 물리매체,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다운받아 외장하드에 차곡차곡 쌓아 둔 영화 파일들은 수많은 영화를 내 앞에 가져다 놓는다. 이 과정에서 “어떤 영화를 보는가?”라는 문제는 점점 비중이 작아진다. “무엇을 통해 영화를 볼 것인가”라는 질문은 점점 중요해진다. 이는 영화를 관람할 당시의 컨디션, 분위기, 주머니 사정, 일정, 장소를 따르기 때문이다. 특정 시기 동안의 영화 관람 경험을 나열해보면 일관성이라고는 도통 보이지 않는다. 가령 4월의 어느 일주일 동안 나는 지인에게 받은 파일을 통해 오부야시 노부히코와 존 포드의 영화를 노트북으로 봤고, 이어서 넷플릭스로 〈커뮤니티〉를 보다가, CGV에서 〈건즈 아킴보〉를, 씨네큐브에서 〈낭트의 자코〉를 각각 보고 플레이스테이션을 켜 블루레이로 〈쉘부르의 우산〉을 틀었다. 여기엔 일관된 취향도, 목적도, 주제도 없다. 그냥 별생각 없이 눈앞에 놓인 영화를 본다. 어쩌면 이는 P2P나 토렌트 사이트 인기목록에 올라와 있는 영화를 편견 없이 주워 먹던 학창 시절의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자주 보는가?”라는 물음일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통해 보는가?”라는 질문을 가능케 하는 수많은 플랫폼의 존재는 무엇이든 더 많이, 더 자주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환경은 내가 《씨네21》 기사에 언급된 '선배 시네필'들의 영화 리스트를 챙겨보는 데 집중하기보단, 수많은 플랫폼을 통해 내 앞에 쏟아져 있는 영화 더미에서 손에 집히는 무엇인가를 관람하도록 유도한다.
      때문에 나는 영화사의 정전을 탐독하고 작가를 숭배한다는 의미에서의 시네필은 아니다. 이것은 영화사 자체, 혹은 그것을 따르는 관객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오즈 야스지로와 나루세 미키오를 모른 채 구로사와 기요시나 하마구치 류스케, 미야케 쇼와 같은 감독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존 포드나 안소니 만을 모른 체하고 2010년대의 유사 서부극들을 논의하긴 힘들다. 물론 할 수 있기야 하지만, 그것이 갖는 의미는 어느 정도 협소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영화사의 위대한 별들을 극장 관람을 통해 쫓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딘가에서 오즈 야스지로의, 존 포드의 전작전을 기획하고 실행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행여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모두 관람하는 것은 ‘현생’에 가로막혀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신 다른 경로를 통해 나만의 ‘방구석 영화제’를 열고 그런 정전을 탐독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것도 이미 오래된 이야기다. 2010년 토렌트 영화 공유 커뮤니티 ‘카라가르가’가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 59편의 영어자막을 제작해 배포했다던가, 영화를 자주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국내 자막 공유 사이트인 ‘시네스트’에서 활동하는 몇몇 닉네임을 알고 있다는 등의 이야기는 이제 지겨울 정도다. ‘카라가르가’의 사례도 벌써 10년 전의 이야기이다. 위의 사례와 같은 이들의 노력을 통해, 2020년을 살아가는 관객들은 정전을 숭배할 대상보다는 뒤섞인 관람 경험 속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대하게 된다.

2. 카라가르가의 사례를 처음 접한 것은 유운성의 글 「밀수꾼의 노래」를 통해서였다. 그는 같은 글에서 ‘오디오-비주얼 에세이’를 언급하며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들)〉, 톰 앤더슨의 〈로스앤젤레스 자화상〉 등과 함께 로드니 에스처의 〈샤이닝: 237호의 비밀〉을 언급하며, 이러한 경향이 점점 “디지털 영상 저장 매체 덕택에 추억 없는 기억과 망각 없는 비평의 시대”에 “방향 없는 숨은그림찾기 놀이에만 몰두”하게 되는 것으로 향한다고 지적한다.* 반면 말테 하게너는 2014년 발표한 글 「포스트-시네마토그래픽 시대의 시네필리아」**에서 〈샤이닝: 237호의 비밀〉을 다르게 해석한다. 그는 애스처가 어떤 비평을 주장하지 않음으로써 틀릴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그러므로 비평 그 자체를 훼손하게 된다는 조너선 로젠봄의 평가에 반대하며, 그 영화가 애초에 비평 그 자체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정치적 진공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고다르, 하룬 파로키, 크리스 마르케와 같은 수필적 숙고보단 실시간을 모두 시네마로 전치하며 영화를 두 번째 자연으로 만드는 크리스찬 마클레이의 〈시계〉와 더욱 유사하다고 본다. 여기에 〈시계〉 대신 더글라스 고든의 〈24시간 싸이코〉나 가이 매딘과 존슨 형제의 〈녹색 안개〉 같은 작품을 놓아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프란체스코 카세티가 지적한 것처럼 시네마는 일상적 삶의 구조에 침투함으로써 재배치된다. 하게너는 “시네필리아는 개별적 맥락과 상황 안에서 영화를 전용하고 사용하는 데 쓰일 수 있는 도구와 관점을 제공”하고, “시네필리아의 유의미함은 그러한 잠재성을 제시할 때 발견될 것이다.”라며 글을 마친다.
        나는 하게너가 내린 결론을 조금 더 확장해보고 싶다. 아니, 우선 조금은 부정하고 싶다. 하게너의 결론은 결국 ‘시네필’이라는 집단을 상정하게 된다. 반면 극장부터 토렌트까지 온/오프라인의 공간을 가로지르며 영화를 과식하는 지금의 관객 대다수는 스스로를 시네필로 정의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렇게 불리길 거부한다. 「우리 시대의 시네필」 기사의 설문조사 결과를 살펴보자. 57명의 응답자 중 스스로를 시네필이라 대답한 사람은 10명뿐이며, 나머지는 시네필이 아니라고 선을 긋거나 스스로를 시네필로 정의하길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들의 거부는 의식적인 것이라기보단 생리적인 거부라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다양한 매체 및 유통경로의 등장과 함께 ‘선배 시네필’들이 닦아온 영화제와 시네마테크, 영화모임 등의 장소에서 벌어진 (영화 자체 혹은 영화계의 문제를 초과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성폭력이나 집단 내 정치로 인해 심리적인 거리감을 갖게 된 것 등을 원인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이성애주의적, 가부장제적, 위계적 집단 구조를 띠는 기존 시네필리아적 실천의 문제점들을 자연스레 체득하며 벌어진 결과일 수도 있다. 때문에 동시대의 시네필리아는 어떤 실천을 통해 규정되는 집합이라기보단, 각자의 여건에 따라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개인들이 영화를 매개로 한 온/오프라인 공간에서 잠시 스치는 실천으로 다소 불완전하게 정의할 수밖에 없다. 지금 스스로를 시네필이라 정의하는 관객은 영화(cinema)보단 극장(cinema)을 중시하는 이들일지도 모른다.
        다시 하게너가 내린 결론으로 돌아오자. 그는 시네필리아의 유의미함을 기존의 실천과는 다른 전용의 측면에서 구하고 있다. 여기서 하게너가 가져온 전용의 사례들은 기존 시네필의 실천을 계승하는 것이다. 그것이 정전의 전용이든, 비평하지 않는 것을 통해 부유하는 것이든, 그것은 영화의 역사 내지는 미술관에 무빙이미지가 전시된 역사를 따른다. 하지만 우리를 둘러싼 영화를 저장하는 매체들과 스크린들은 이미 실천의 영역에 들어와 있다. 벤야민이 제시한 “기계장치(카메라)의 개입이 없는 현실의 모습은 바로 그 기계장치의 집중적인 상호침투를 토대로 제공”된다는 역설***은, 시네마가 이제 독자적인 영역이 아니며, 우리는 스크린과 카메라 등 시네마를 구성하는 매체들과 착종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그것들과 항상 매개되는 우리의 경험을 그것과 분리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하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비롯해 태블릿PC, 노트북, 전광판, TV, 강의실 스크린, 내비게이션 등 우리를 둘러싼 모든 스크린에서 우리 자신 또는 세계의 이미지를 관람한다.
        하게너가 말한 실천은 관람한 영화의 특정 장면을 캡쳐하거나 움짤로 만들어 SNS나 온라인 커뮤니티에 공유하는 행위와 맞닿아 있다. 기존의 시네필이 영화에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실천을 건져 올리거나 그러한 실천을 영화로 옮겨냈다면, 동시대 관객은 무수한 매체와 스크린에서 쏟아지는 영화 이미지들 속에서 허우적대며 발견한 이미지들을 자의적으로 재구성하고 재편집하여 공유한다. 그것의 형태는 오디오-비주얼 에세이일 수도, 유튜브의 단순한 리뷰 영상일 수도, 왓챠나 트위터의 단평일 수도, 스크린샷이나 움짤로 포착한 몇 개의 장면일 수도 있다. 혹은 틱톡이나 인스타스토리 등을 통해 매일 쏟아지는 수만 개의 무빙이미지들이 그러한 실천일 수도 있다. 시네마를 정의하는 것의 곤란함은 시네필이라는 존재의 곤란함으로 이어지고, 의식적이든 아니든 이미 실천되는 중인 실천들은 이미 시네필의 곤란함을 초과한다. 좀 더 구체적인 예시를 꼽아 보자.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KBO가 미국에 중계되고, 뜻밖의 사태를 맞이한 트위터의 야구팬들은 #KBO_IS_WILD 해시태그를 붙여 올리는 수많은 야구 중계 장면의 움짤과 클립들을 올린다. 그리고 그것들을 수식하기 위해 타란티노의 영화부터 일본 소년만화나 야구를 소재로 한 비디오 게임, 또 다른 움짤이나 클립으로 된 밈 등의 레퍼런스를 붙인다. 그것들로 가득한 타임라인은 이미 시네마와 불가분의 경험 세계를 구성하며, 단일한 작품으로 규정되는 것에서 벗어나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도 기존의 영화 이미지와 상호작용하는 무빙이미지의 파편들이라는 점에서 이미 곤란함을 넘어선 실천이다.

3. 때문에 「우리 시대의 시네필」 기사에서 정의하려는 ‘밀레니얼 시네필’은 이미 불가능하다. 시네마와 시네필리아를 정의하기 곤란해진 상황에서 ‘밀레니얼 시네필’이란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을 하나의 집단으로 호명하려는 시도는 도리어 관객을 정의하는 오래된 관점의 곤란함을 다시금 소환해낼 뿐이다. 《씨네21》이 말하는 '밀레니얼 시네필'은 그 시작부터 각자였으며, 약간 혹은 잠시 겹칠 뿐 역시나 각자이다. 나/그들—'우리'로 호명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아서—이 공유하는 '선배'나 '정전'은 차라리 아트하우스 영화들의 자막을 제작해 시네스트에 올리는 이들과 그들이 자막을 제작해 올린 영화들에 가깝다. 나/그들의 애호 대상은 한 편의 영화임과 동시에 그것을 조각낸 움짤이기도 하다. SNS에서 통용되는 밈의 변화는 이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0년, 15년 전의 밈이 자막과 함께 박제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캡쳐였다면, 올해 온라인에서 유행한 밈은 위에서 언급한 KBO 중계 영상의 움짤이나 ‘관짝소년단’, ‘사이렌 헤드’와 같은 짧은 영상이다. 바인에서 인스타스토리와 틱톡으로 이어지는 짧은 영상의 빠른 소비는 영화라는 무빙-이미지의 단위를 잘게 분해한다. 때문에 나/그들 앞에 쏟아지고 있는 것은 단일한 ‘시네마’라기보단 눈앞에 놓인 모든 스크린의 ‘무빙이미지’이다. ‘시네마’라는 숭배 경험은 사라지고 각자가 마주한 ‘무빙-이미지’의 경험을 통한 나/그들의 재료(영화, 드라마, 뉴스, 예능, 광고, 움짤, 게임, 트위터, 유튜브, 틱톡, OTT 서비스, 블랙박스 영상, 영상 설치 작업, 전광판, 트위치 등)만이 남는다. 나/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시네마테크의 단일한 스크린이 아니라 하나의 자연이 된 복수의 스크린이며, 거기에선 한 편의 영화가 아닌 복수의 무빙-이미지가 동시상영된다. 때문에 '밀레니얼 시네필'이라는 호명보단, 굳이 어떤 말을 붙인다면, 차라리 '잠시 만나고 다시 헤어지길 반복하는 무빙-이미지 필리아'라는 말을 제안하고 싶다.
        영화 관람 기록 사이트인 ‘레터박스’에는 시네마토그래프 이전의 영화들이 등록되어 있다. 누군가 에드워드 머이브릿지가 ‘주프락시스코프(Zoopraxiscope)'로 만든 무빙-이미지를 영화로 등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무빙-이미지의 시초 중 하나인 ‘스트로보스코프(Stroboscope)’가 1833년도의 영화로 등록되어 있기도 했다.**** 누구인진 알 수 없으나, 이를 등록한 사람은 나/그들의 애호 대상이 영화라 불리는 것보단 무빙-이미지에 가깝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유운성, 「밀수꾼의 노래: 다시 움직이는 비평을 위한 몽타주」, 『유령과 파수꾼들』, 서울: 미디어버스, 2018, p.155-177.

** Hagener Malte, 「Cinephilia in the Age of the Post-Cinematographic」, 《CINEA》, 2020년 5월 20일 접속,
https://cinea.be/cinephilia-the-age-the-post-cinematographic/.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제2판)」, 『발터 벤야민 선집 2』, 서울: 도서출판 길, 2007.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영화박물관에서 스트로보스코프를 비롯해 조이트로프, 프락시노스코프 등의 형태로 전시 중인 무빙-이미지이다. 레터박스에서 ‘Incubala of Animation’을 검색하면 확인할 수 있다. 현재는 제작연도가 2018년으로 바뀌어 있다. 반면 머이브릿지의 무빙-이미지들은 여전히 1880년대의 제작연도를 달고 등록되어 있다.






여섯 빛깔 스크린 너머: 한국퀴어영화제 20주년에 부쳐

CRY, FUCK, BEAT UP (울고 하고 패고)

“퀴어영화 연구는 정말로 노다지”: 『한국퀴어영화사』 책임편집 이동윤 인터뷰

한국 게이/레즈비언 영화와 호모-특정적 난관들

샷다 내린 퀴어랜드: ‘디스코팡팡’과 ‘방 탈출 게임’ 사이에서

뱀파이어의 딜레마: 누구를 위한 ‘착즙'인가?

정전에 속하기, 정전 밖에 있기: 사프디 형제의 방법

검고도 밝은: 조주현의 ‘흑공’과 스크린 안의 미로

아이돌 기표의 '트랜스' 해부하기: NCT 127의 〈슈퍼휴먼〉과 아이돌 피상성

'접촉'에서 '접속'으로: NCT 127의 경우

아직도 굳이 〈무한도전〉을 논할 필요가 있는 건

듣는 여자: 〈그리고 베를린에서〉

박세영의 무한 도시

추상化와 픽션: 이소정의 영상 작업에 대해

︎ 이미 흩어진 '밀레니얼 시네필’

비천함, 실패, 나쁜 것에 관한 정직한 성찰(우회하지 마세요)





마테리알(ma-te-ri-al)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로 132-1 | 사업자등록번호 633-94-01282 | ‌통신판매업신고번호 2020-서울서대문-1730 | ‌발행인 다함께 박차차·정경담‌·함연선 | 편집인 다함께 박차차·정경담‌·함연선 | 문의 ‌carolblueagassi@gmail.com | C‌OPYRIGHT © 2019~. 마테리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