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3
Feature
뱀파이어의 딜레마 : 누구를 위한 ‘착즙’ 인가?

연숙/리타
비평가



1. ‘한남’을 ‘착즙’하는 여자들
로빈 우드는 『베트남에서 레이건까지』(1986)에 수록된 비평인 「버디에서 연인까지」에서, 80년대 미국 헐리웃 영화에서 두 남자 사이의 관계만을 다루는 버디무비가 (양적으로 많이 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독 ‘잘 팔렸던’ 이유에 대해 분석한다. 그가 보기에 버디무비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가정의 부재’인데, 이는 베트남전에서부터 워터게이트를 통과한 백인 이성애자 남성인 미국인들의 애국적인 수치심과 손상된 남성성이 복구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피난처로 기능하게 된다. 더불어, 로빈 우드는 이러한 버디무비들이 짐짓 남성 동성애에 대해 관대한 태도로 (스크린 외부의 이성애자 남성들이 경험했을) 남성 간의 애정을 수용할 수 있게 해주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남성 동성애의 현존을 말살시키려는’ 전략에 공모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로빈 우드에게 버디무비의 유행은 해당 사회가 얼마나 (국가 이데올로기로부터, 남성 동성애로부터) 억압적인지를 측정할 수 있게 하는 지표다. 로빈 우드가 제시한 버디무비의 몇 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여정 : 여기서 핵심은 이 여정이 목표가 없거나 혹시 있더라도 현실성이 없는 환상임이 밝혀진다는 것이다.
2. 여성의 주변화 : 그녀는 클라이막스에 도달하기 전에 내러티브에서 제거된다.
3. 가정의 부재 : 여기서 ‘집’은 단순하게 물리적인 장소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안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4. 남성 러브 스토리 : 이런 영화들에서 정서적 중심, 정서적 무게는 남성/남성 관계에 있다.
5. 공공연한 동성애적 인물의 등장 : 항상 광대이거나 악당이다. (여성의 존재는 종종 똑같은 기능, 즉 주인공의 이성애주의를 보증하는 기능만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진다.)
6. 죽음 : 남성간의 관계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실은 완성될 수 없다). 그리고 죽음은 항상 효과적인 방해물이다.”

2020년인 지금, 우리는 쉽게 한국 영화에서도 이와 같은 특징을 가진 ‘화제작’들을 떠올려볼 수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여성 팬덤’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영화인 〈불한당〉(2017)을 하나의 표본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불한당〉은 전통적인 버디무비에 멜로드라마적인 비극을 더한 변성현 감독의 장편 장르물이다. ‘재호’(설경구)와 ‘현수’(임시완)의 관계는 다른 모든 위장 경찰물처럼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위태롭게 증축되지만, 분명히 그보다 더 에로틱한 욕망(특히, ‘현수’를 향한 ‘재호’의 욕망)이 지글거리며 끓고 있다. 이는 개봉 전 언론 시사회에서 배우들의 발언을 통해 보다 명확하게 제시되었는데*, 이를 통해 ‘재호’의 ‘현수’를 향한 (성애적인) 욕망과 그런 ‘재호’를 짝사랑하는 인물로서의 ‘병갑’이라는 삼각 구도가 공식적으로 승인된 셈이다. 그러나 〈불한당〉 안에서 이들의 관계는 선언하거나 폭로되는 대신 은밀하게 누출된다. ‘재호’의 ‘현수’에 대한 애타는 갈망(‘내가 뭐에 씌었나 보다’)은 ‘BL’의 문법에 익숙한 여성 관객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고, 마침내 스스로를 ‘불한당원’이라 자처하는 ‘여성 팬덤’을 출현시키기에 이른다. 물론 남성 간의 관계‘만’을 다루지만 ‘여성 팬덤’의 호의적인 반응을 얻어낸 영화가 〈불한당〉이 처음은 아니다. 〈왕의 남자〉(2005), 〈신세계〉(2013), 〈검은 사제들〉(2015), 〈아수라〉(2016), 〈독전〉(2018)에 이르기까지, 최근 20년간 마니아층의 지지를 이끌어낸 대부분의 한국 영화가 오직 남성 중심(소위 ‘알탕’)의 영화라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더구나 해당 영화들이 한국 영화의 주된 소재인 ‘조폭’과 ‘부패한 정치인’과 같은 케케묵은(더욱이 퇴행적인) 인물들의 관계를 다룬다는 사실은, 아무런 죄책감 없이 ‘단지’ 영화로서 이들을 소비하기 어렵게 만든다.

왜 하필 지금 이 ‘한남’들인가? 80년대 헐리웃 버디무비를 ‘억압된 것의 귀환’으로 진단한 로빈 우드를 따라, 우리는 2000년대 이후 한국 영화에서의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알탕’을, 연약한 피식민 남성성을 극복하려는 안타까운 허우적거림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더 큰 문제는 다음과 같다. 문화 소비 주체로서의 ‘여성 팬덤’의 본격적인 가시화와 더불어, 한국식 버디무비를 ‘착즙’하는 ‘철 모르는’ 여자들의 존재 또한 가시화된 것이다. 뱀파이어와 같은 왕성한 식욕으로 한 프레임도 놓치지 않고 끈질기게 대상을 ‘착즙’하는 이들을, 우리는 ‘후죠시’, ‘BL러’ 혹은 ‘여성 관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 ‘당신의 사랑을 정당화하라’
2015년 ‘메갈’ 이후 SNS를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촉진된 ‘넷페미’들의 ‘각성’은, 그들로 하여금 남성 중심의 언어를 ‘미러링’하는 것뿐만 아니라 새로운 언어(‘여성들이여, 여성의 말을 써라!’)의 발명을 요구했다. 무수히 많은 신조어들이 페미니즘적 ‘플로우’ 안에서 고립된 채 무한하게 순환하는 작금의 사태 속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착즙’이 어떤 분열적인 위상을 획득했음을 포착할 수 있다. 이러한 분열은, ‘착즙’이 ‘남들이 보기에 그럴 가치가 없고 가치가 있어서도 안 되는 어떤 대상에게 샅샅이 의미를 부여하고 애정을 투여하는 행위’를 가리킨다는 사실로 인해 골칫거리가 된다. 
        먼저 ‘착즙’에 대한 위의 정의에 동의한다면, 강경한 보수적인 페미니스트들에게 ‘남들’이란 곧 ‘(진정한) 페미니스트’이며, 또한 ‘가치가 있어서도 안 되는 어떤 대상’이란 ‘존재 자체가 여성 인권에 심대한 위해이자 공격인 (한국) 남성들’을 뜻하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애정을 투여하는 행위’란 ‘한 여성의 삶에서 끔찍한 손해일 뿐만 아니라 여성이라는 종 전체에 대한 반달리즘’을 의미한다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분열은 ‘착즙 당사자’가 ‘남들’, 즉 세상 어딘가에 존재할 완전무결하고 순수한 페미니스트(프로이트식으로, 그는 페미니스트-초자아다)를 가정하는 장소에서 돌출된다. 그러니 최소한 ‘한남’을 ‘빠는’ ‘착즙 당사자’들에게 이 가상의 페미니스트 대법관을 피할 방도는 없는 셈이다.
        이미 ‘반-페미니즘적 범죄’로서 단죄되고 있는 ‘착즙’을 지속하기 위해, 당사자들은 (자기방어를 위해서건 혹은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건) 몇 가지 논리를 만들어낸다. 하나는 소위 ‘여성 팬덤’이 해당 업계, 나아가 사회/문화 전체에 끼치는 효과를 재조명하고, 일종의 문화적 ‘운동’으로서 ‘착즙’ 행위를 재맥락화 하는 것이다. 이러한 ‘착즙’에 대한 일종의 ‘올려치기’는, 적극적인 문화 소비자로서의 ‘여성 팬덤’을 동시대 한국 페미니즘 운동의 유효한 주체로서 승인하는 (또 다른) 페미니스트들의 우호적인 평가와 긴밀하게 접촉한다. 앞서 살펴본 영화 〈불한당〉은 국내 대형 프랜차이즈 극장에서의 흥행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팬덤’의 (특히, 소비자로서의) 놀라운 역량이 발휘되어 ‘재평가’에 성공한 경우로 널리 언급되었다(’여성 팬덤이 문화 예술계를 살린다!’***). 이 경우 ‘착즙 당사자’가 자신의 ‘착즙’을 정당화하기 위해 해당 논리를 거부감 없이 흡수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두 번째로 ‘착즙’은, 단지 남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여성 간의 네트워크(혹은 ‘연대’)를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여성주의적 ‘운동’의 차원으로 도약할 수도 있다. 이러한 논리는 ‘BL문화’의 향유 당사자들인 ‘동인녀/후죠시/BL러’들의 욕망과 그것의 (잠재적) 가치를 둘러싼 여성주의적 갈등구조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요컨대 미조구치 아키코는 ‘버추얼 레즈비언’(에이드리언 리치의 ‘레즈비언 연속체’와도 비슷한)이라는 개념을 통해, 대다수가 이성애자 여성인 ‘BL 애호가’들이 어떻게 BL을 매개로 서로의 섹슈얼한 욕망(’망상’)을 공유하고, 나아가 어떻게 그들 간의 ‘버추얼 섹스’가 ‘자매애’로 확장되는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미조구치 본인도 의식하고 있듯) 이러한 문화적인 의미확장이 곧바로 페미니즘/레즈비어니즘의 실천으로 등치 될 수 없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 모두가 잠재적으로 레즈비언’이라는 선언은 정체성 정치가 겨냥해야 할 법과 제도에 대한 투쟁에 대해, (당사자들조차) 무관심하게 만드는 일종의 최면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착즙’을 이원적인 성별 대립의 진창에서 구제하기 위한 논리로서, ‘착즙’이야말로 여성 혹은 소수자에게 허락된 유일한 쾌락임을 주장할 수도 있다. 즉 로라 멀비가 정리한 카메라(이자 관객인 남성)와 대상(이자 남성이 아닌 모든 것)의 관계에 대한 공식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여기에 여성 혹은 소수자의 위치성(수행성)에 대한 페미니즘/퀴어 비평의 ‘전복적인’ 관점들을 슬쩍 틈새에 끼워 넣는 것이다. 보기(응시) 행위 자체가 이미 젠더화되어 있다면, 여성 혹은 소수자에게 허용된 쾌락의 몫이란 존재할 수 없으므로, 이들은 남성인 척 가장하거나(조안 리비에르), 오직 매저키스트로서만 즐기거나(레이몽 벨루), 성차에서 발생하는 (관객) 경험의 질적 차이를 믿을 수밖에 없다(매리 앤 도앤). 응시를 통해 주체의 욕망이 구성될뿐더러 응시 속에서 주체가 (매번 새롭게) 태어난다면, 우리는 ‘착즙’하는 일련의 과정이 결코 수동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착즙’은, 소여된 ‘여성 관객’의 위치에 복종하는 대신, 그것에 복종하는 ‘척’ 하면서 자신의 쾌락을 치열하게 협상 테이블에 놓는 능동적인 비평 실천이자 수행이다. 그러니 ‘착즙’할 수 있는 역량이란 (젠더화된) 신체에 우선한다. 이 같은 논리에서 ‘착즙’은, 여성 혹은 소수자에게 주어진 곤란함을 ‘차이’로써 구체화하는 ‘특별함’이 된다.

3. ‘적이 누구인지를 기억하라’
이렇게나 많은 논리로 ‘착즙’을 정당화할 수 있다면 이제는 뭐가 문제인가? ‘착즙 당사자’가 처한 분열적인 위치는 ‘남성 간의 성애’에만 흥분하는 성적 지향에 기인하지 않는다. 분열은 ‘옳은’ 대상을 선택하지 못했다는 수치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아니라 정확히) ‘그녀’는, 자기가 무언가를 욕망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분열되기 때문이다—바깥에서 안으로, 안에서 바깥으로. 오래되고 망각된 질문이 다시 떠오른다. 우리가 거주하는 이 시대에, ‘여성 관객’의 ‘쾌락’은 어떻게 가능한가? 만약 ‘그녀’가 분열의 부산물인 조건에서만 무언가를 즐길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그녀’에게 속한 것인가? 어쩌면 ‘그녀’의 분열은 이성애/남성중심적인 권력의 재현에 복무할 뿐이고, 심지어는, 그들이 ‘그녀’의 분열에 기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주디스 버틀러의 「단지 문화적」(1998)은 낸시 프레이저의 계급으로서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회의에 응답한 것이다. 버틀러는 ‘단지 문화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체성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낸시 프레이저가 재분배를 요청하는) 심급과 깊게 연루되며, 더욱이 왜 우리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계급을 재편성하기를 촉구해야 하는지를 역설한다. 

“…HIV 감염 집단이 영구적으로 일종의 채무 계급으로 생산되고 있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레즈비언 집단의 빈곤율은 경제의 규범적인 이성애 중심성과 관련 속에서 사고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버틀러에게 (낸시 프레이저가 넌지시 암시하는) 포스트 구조주의가 맑스주의적 혁명을 좌초시켰다는 전제는 애당초 수정되고도 남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 버틀러에게 ‘단지 문화적’인 것은 없고, ‘단지 문화적으로 취급’되는 것들만이 있을 뿐이다. 
        버틀러를 따라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녀’의 쾌락이 분열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면, 그것은 ‘그녀’의 ‘진정한’ 쾌락이 불만족스럽게 부인된 채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무비판적으로 ‘분열’의 잠재적인 전복성을 긍정하고 옹호하며 더 많은 ‘그녀’들의 분열을 촉진시켜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모든 일탈이 반드시 전복적인 것은 아니다’). 뱀파이어의 딜레마—‘그녀’가 ‘착즙’하고 있는 대상들이 사실은 ‘그녀’를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에게 기생하고 있을뿐더러 ‘착즙’ 외에 다른 방식으로 사는 방법을 포기하게 만든다면? 스피노자의 ‘독이 든 사과’에 대한 예시처럼, ‘그녀’가 선택한 대상이 그녀를 죽게 만든다면? 우리는 쉽게 ‘그녀’를 비웃거나, 비판하거나, 혹은 연민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뱀파이어 자신이 그러한 딜레마를 발명해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직 우리가 심문해야 할 것은, ‘그녀’ 자신의 쾌락을 분열로써 설명하게 만드는, 여전히 ‘그녀’를 둘러싼 억압적이고 까다로운 삶/섹슈얼리티의 양식들이며, 끝끝내 ‘그녀’의 쾌락을 부정하고 과거에 정박시키려는 멜랑콜리한 문화적 실천들이다. ‘그녀’의 분열이 내부/외부를 오가며 일어난다면, ‘그녀’를 향한 질문들은 또한 외부를 겨냥해야 할 것이다.


*황서연, 「불한당' 설경구·임시완·김희원 "사랑이었다", 뜨거운 브로맨스」, 허핑턴포스트코리아, 2017.05.02, 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4937110891236776008.

**물론 ‘여성 팬덤’에 대해 말하면서 〈아가씨〉(2016), 〈미쓰백〉(2018), 〈걸캅스〉(2019)에 대한 그들의 지지와 애정을 누락해서는 안될 것이다. 다만 이 글은 남성 주연/캐릭터에 대한 ‘여성 팬덤’의 ‘착즙’을 분석하기 위한 바, 해당 영화와 팬덤에 대한 분석은 다음으로 남겨둔다.

***양성희, 「여성 팬덤, 한국 영화를 구하라」, 허핑턴포스트코리아, 2018.11.24, https://www.huffingtonpost.kr/entry/story_kr_5bf901f7e4b03b230fa1a21d.

****미조구치 아키코, 『BL 진화론』, 길찾기, 김효진 옮김,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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