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3
Feature
샷다 내린 퀴어랜드: ‘디스코팡팡’과 ‘방 탈출 게임’ 사이에서

다함께 박차차
마테리알 편집인



올해 초 발간된 《마테리알》 2호에서 정경담은, 영화 〈알라딘〉의 4DX 관람 경험을 “디스코팡팡적 시네마”라 빗대었다. 모션체어가 제공하는 소박한 차원의 움직임은 관객의 신체에 눈앞에 펼쳐진 무빙이미지 이외의 또 다른 프레임을 부과함에 따라 그 체험을 〈알라딘〉과 똑같은 러닝타임과 똑같지 않은 스크린(신체)을 가진, 일종의 ‘영화’로 승화한다. 다만 이 디스코팡팡적 시네마는 통상적인 용례의 ‘시네마틱한 것’과는 얼마간 차이가 있는데, 그리하여 정경담은 전자를 “디제이들의 난폭한 운전에 활어 가자미처럼 낭창낭창 파닥이는 관광객들의 월미도 디스코팡팡”으로까지 구체화 혹은 하향조정(?) 함으로써 “(엉덩이에 가해진) 물리적 움직임에서 비롯되는 즐길 거리”로 한정한다. 디스코팡팡에 올라탄 관광객들은 반세기 전의 바르트처럼 가슴이 찢어질 듯하다기보단, 그저 엉덩이가 따끔거릴 뿐이다.
        이같이 정경담이 제기한 화두를 간직한 채, 이번 《마테리알》 3호 한국퀴어영화 특집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자연스레 이런 질문도 던져보게 되었다. 퀴어영화라는 범주에서 ‘디스코팡팡적 시네마’란 과연 가능한가? 그리고 잠정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퀴어영화는 본래 디스코팡팡적 시네마였다고. 더 정확하게는, 늘 디스코팡팡적 시네마로 거듭난다고 말이다. 물론 정경담이 소환한 〈알라딘〉 4DX에 비하여 퀴어영화가 그만한 ‘낭창낭창 파닥이는’을 제공해왔다는 뜻은 아니다. 퀴어영화에 그런 모션체어적 움직임이 도입될 수 있느냐를 겨냥한다면, 차라리 〈겨울왕국〉 시리즈를 퀴어서사로 재독해하는 쪽이 훨씬 속 편할 테다. 그보다는, 물리적 움직임과 불가결하게 이뤄지는 수행의 차원에서 퀴어영화는 비로소 퀴어영화로 거듭난다. 세밀하게 따져보자. 정경담의 디스코팡팡적 시네마에는 두 가지 운동이 있다. 하나는 몸을 들썩이게 만드는 모션체어의 물리적 프레임 부과행위, 다른 하나는 그 제한적 프레임 안에서도 관객 스스로 즐거움을 생산하는 행위다. 즉, 디스코팡팡적 시네마는 모션체어가 촉발한 물리적 움직임을 강제된 노역 또는 퍼스널트레이닝이 아닌, ‘놀이’로 전유하는 관객의 적극적인 수행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사실 이 체험은 꽤 재미있어서 나는 다섯 번씩이나 돈을 내고 미메시스 의자에 올랐다”, 정경담, 「디스코팡팡적 시네마」) 모션체어에 올라타 있는 건, 어디까지나 활어 가자미가 아니라 스스로를 활어 가자미에 빗댈 수 있는 정경담이듯이.
        퀴어영화는 퀴어존재 만큼이나 (어쩌면 이상으로) 소수였으며, 소수자성을 띠어왔다. 이런 사실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지만, 반대로 그로 인해 퀴어영화와 퀴어존재가 맺어온 관계가 특별히 돈독해왔다는 점도 외면할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문에 자괴감을 느껴 하는 퀴어존재들도 드물지 않다.) 퀴어영화는 필름 덩어리 혹은 동영상 파일만으로 퀴어영화가 되지 못한다. 퀴어영화는 언제나 관객의 입으로 “퀴어영화를 보았다” 고  선언되어질 때에만 그것이 된다. 이는 “스릴러를 봤어, 서부극을 봤어” 혹은 “박찬욱 영화를 봤어” 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 놓인 선언이다. 퀴어영화는 그야말로 본 투 비(Born to Be) 디스코팡팡적 시네마다. 적어도 그것이 띠는 소수자성을 놀이로 전유하는, 관객의 적극적인 수행을 수반해왔음에 의거해 말이다. 퀴어영화의 소수자성은 그것이 소수자성으로 인식되는 순간, 즉자적으로 퀴어존재에게 얼마간의 강제된 노역 혹은 퍼스널트레이닝을 부과한다. (퀴어영화를 본다는 건 어느 정도 맷집이 필요한 일이다.) 다시 말해 퀴어영화의 관람료엔 소수자성을 자각하고 한시적으로나마 수용해야 한다는 억울한 수수료가 별도 청구되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문단의 첫머리와 마찬가지로, 반대로 그로 인해 관객들은 더욱 돈독하게(도탑고 성실하게) 영화를 ‘뽑아 먹는’다. 이를테면, 숙박료가 비쌀수록 어메니티를 긁어모아 돌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자유이용권이 비쌌다면, 다음날 다리가 후들거려 걷지 못하게 될 지경이 된다손 치더라도, 기필코 줄 한 번 더 서야만 하는 것이다.
        샷다(shutter) 내려. 퀴어영화의 관객들의 입장을 이보다 적나라하게 대변하는 말이 또 있을까. 다시 한번 정경담의 표현을 빌려 타인에 의해 입력된 혹은 강제된 “씰룩거림에 놀아나” 는 수치심을 견뎌야 함에도 불구하고, 4DX든 퀴어영화든 관객의 적극적 수행에 의해 거듭나는 종별인 이 디스코팡팡적 시네마들은 적어도 그것의 러닝타임 동안에는 개개인의 관객과 반응하며 모션체어 크기만큼의 가로막힌 공간을 형성해낸다. 오로지 스크린하고만 한 면을 공유하는 공간. 앞서 디스코팡팡적 시네마가 갖는 두 가지 운동 중 첫째로 꼽았던 ‘물리적 프레임 부과행위’는 사실 모션체어에 입력된 좌표값들의 연속에 오롯이 기인한다기보다는, 이처럼 눈앞의 스크린을 한 면으로 삼는, 관객마다의 사방으로 가로막힌 공간을  창출해낸다는 점에서 물리적이게 되는 것이다. 분명 디스코팡팡적 시네마는, 옆 좌석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훌쩍거림에 함께 눈시울이 붉어지는 신파와 다 함께 왁자지껄 웃어제낌으로써 더욱 들뜨게 되는 코미디 영화와는 다르게 물리적 작용을 하나 더 전제한다. 그리고 그렇게 관객은 저마다 고유한 프레임의 연속체가 되어 간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운동 혹은 수행이 관객 개인의 차원에 국한되는 ‘자기폐쇄적인 것’이라는 비판은 피해갈 수 없거니와 반드시 제기되어야 마땅하다. 4DX 관람경험이 소극적인 수행에 쉽게 만족해버리는 꼴이라는, 퀴어영화 역시 그냥 체어에서 모션을 소위 ‘착즙’해내는 것일 뿐이라는 비판 말이다. 이는 곧 외연 확장이라는 퀴어문화의 유서 깊은 목표와도 상충한다. 디스코팡팡적 시네마, 그중에서도 퀴어영화와 관객에게 혐의 씌워지는 자기폐쇄성은 아무리 양해한다고 해도 퀴어영화와 관객‘들’이라는 자기폐쇄적 집단이라는 오명의 철창 안으로 구금되어지는 듯하다. 퀴어영화와의 돈독한 관계로 인해 아이러니하게도 자괴감을 느끼는 퀴어존재가 있는 건, 어쩌면 바로 이런 자기폐쇄성을 인지하고 있음에 대한 모종의 죄책감에서 비롯된 일일 테다. 너무 돈독한 나머지 서로의 한계마저 덮어주고 만 것일까.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구린내를 모르는 체 하며.
        한편 퀴어영화와 퀴어영화 관객을 맴도는 이 자기폐쇄성이라는 꼬리표는 퀴어영화로 거듭나기 이전의 필름 덩어리들, 동영상 파일들에서 오랫동안 반복재생산 되어 온 기표들을 통해 이미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가령 퀴어존재들을 재현하는 방식에서 인물들이 자의든 타의든 외부와 차단된 공간 안에만 머문다든지, 레즈비언 러브에는 반드시 교복이 등장해야만 한다든지, 마치 에덴동산처럼 여겨지는 그 제한된 공간과 연령대를 벗어나면 어마무시한 파국이 도래한다는 묵시록적 테마를 고수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때론 이에 대한 거부반응으로 〈아가씨〉(2016) 같은 영화를 예로 들며 이탈과 탈주를 긍정하는 서사를 대안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 역시 머물면 죽음이요, 벗어나면 살 것이니의 묵시록적 제한적 규칙을 수용한다는 점에서 자기폐쇄성을 완전히 떨쳐버린 경우로 보기엔 어렵다. 또한, 이는 디스코팡팡적 시네마의 두 가지 운동을 정확히 빗겨나간다. 탈주를 긍정하며 관객의 호응을 얻고자 하는 서사는, 관객을 스포츠 경기의 관중으로 만든다. 외려 신파와 코미디 영화의 관객성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이때의 호응은 즉자적인 즐거움을 제공하는 탓에 관객의 적극적인 수행, ‘놀이’를 별도로 요하지 않는다. 자기폐쇄적 관객성의 징후를 머물기의 테마로 재현했던 영화들이 개별 관객과 둘만의 가림막을 형성함으로써 그 자체의 한계를 양해받아왔다면, 후자의 벗어나기 테마를 선보인 영화는 도리어 경기장 바깥 전부를 가려버리려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머리만 숨은 타조거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인간이다.
        남들은 잘만 보고 있는 영화보고 타조라니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느니, 어찌 됐든 자기폐쇄적이라느니. 자꾸 이런 얘기를 해대니 정말로 어디선가 벗어나야만 할 것 같은 강박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내가 가장 우려되는 것이 바로 이 강박이다. 강박에선 결코 놀이가 꽃 필 수 없기 때문이다. 자폐를 피하려다 자해로 귀착되지 않기 위해선, 놀이로의 전유를 고수하며 이탈이나 탈주가 아닌, 도약을 꾀해야 한다. 스스로 구금한 자기폐쇄성 안에서 도약을 꾀하는 일, 달리 말해 강박이 볼모로 삼는 바로 그 자기폐쇄성을 긍정함으로써 말이다. 한편 그 모델의 힌트는 ‘디스코팡팡’보다 ‘방 탈출 게임’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자기폐쇄를 수용하는 것을 넘어 즐길 거리로 전유하고, 반복재생산되는 징후들에 연속성을 기입하여 그 변주됨에서 또 한 번 재미를 발견하는 ‘방 탈출 게임’ 모델을 상기해보자. 끊임없이 새로운 시네마를 언명하며 꽤 멀리 온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우리는 이 모델에 대한 시네마적 용어를 이미 알고 있다. 장르화. 샷다 내리고 노는 게 전제인 이 ‘방 탈출 게임’ 모델은 모션체어 없는 퀴어영화가 기꺼이 나아가야 할 미래다.





여섯 빛깔 스크린 너머: 한국퀴어영화제 20주년에 부쳐

CRY, FUCK, BEAT UP (울고 하고 패고)

“퀴어영화 연구는 정말로 노다지”: 『한국퀴어영화사』 책임편집 이동윤 인터뷰

한국 게이/레즈비언 영화와 호모-특정적 난관들

샷다 내린 퀴어랜드: ‘디스코팡팡’과 ‘방 탈출 게임’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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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에 속하기, 정전 밖에 있기: 사프디 형제의 방법

검고도 밝은: 조주현의 ‘흑공’과 스크린 안의 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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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굳이 〈무한도전〉을 논할 필요가 있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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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영의 무한 도시

추상化와 픽션: 이소정의 영상 작업에 대해

이미 흩어진 '밀레니얼 시네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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