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테리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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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서한

질식자의 편지: 영화문화의 현재에 관한 13개의 질문
질식의 날 - 못다 부친 편지
회신1. 질식자에게
회신2. <비평(권력)에 대하여> 의 질문
회신3. 쉰들러 리스트: 무너진 낙원에서 완전함 찾기

수신인: 씨네21
회신4. 형제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회신5. 답변?
회신6. 창작과 비평의 관계에 대하여.....
등단 = 검증?
회신7. 지리적 계급의 소멸을 함께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회신8. 공개서한에 대한 회신입니다.
ㄴRE: 별로 어렵지 않은 이야기
회신9. 질식자에게

비평? 우리는 웃고 있다




3호 2020년 8월

1. 특집/ 여섯 빛깔 스크린 너머: 한국퀴어영화제 20주년에 부쳐
2. 특집/ CRY, FUCK, BEAT UP(울고 하고 패고)
3. 특집/ “퀴어영화 연구는 정말로 노다지”: 『한국퀴어영화사』 책임편집 이동윤 인터뷰
4. 특집/ 한국 게이/레즈비언 영화와 호모-특정적 난관들
5. 특집/ 샷다 내린 퀴어랜드: ‘디스코팡팡’과 ‘방 탈출 게임’ 사이에서
6. 특집/ 뱀파이어의 딜레마: 누구를 위한 ‘착즙'인가?
7. 정전에 속하기, 정전 밖에 있기: 사프디 형제의 방법
8. 검고도 밝은: 조주현의 ‘흑공’과 스크린 안의 미로
9. 아이돌 기표의 '트랜스' 해부하기: NCT 127의 〈슈퍼휴먼〉과 아이돌 피상성
10. '접촉'에서 '접속'으로: NCT 127의 경우
11. 아직도 굳이 〈무한도전〉을 논할 필요가 있는 건
12. 듣는 여자: 〈그리고 베를린에서〉
13. 박세영의 무한 도시
14. 추상化와 픽션: 이소정의 영상 작업에 대해
15. 이미 흩어진 '밀레니얼 시네필’
16. 비천함, 실패, 나쁜 것에 관한 정직한 성찰(우회하지 마세요)

A BACK NUMBER

2호 2020년 3월  

1.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잠깐!)” 2019 한국 코미디 영화의 ‘비빔면적 경향’과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윤리’: 영화 ⟨극한직업⟩, ⟨걸캅스⟩, ⟨엑시트⟩를 중심으로
2. 봉준호 월드 유람
3. 창문과 창문 ‘너머’—오연진의 《Lace》와 백종관의 ⟨추방자들⟩
4. 갱신과 추동 사이에서 기업가∽노동자∽DIY로서의 작가
5. 구체적 세부: 2019년을 함께한 독립극영화 속 여자들
6. 특집/ 액체의 단상들: 리퀴드(liquid)와 플루이드(fluid), 그 언저리에서
7. 특집/ 15초 곱하기 240의 실험: 이소윤의 ⟨450⟩
8. 특집/ 보여주는 대신 믿게 하기: 박시우의 ⟨변신⟩
9. 특집/ ‘플레이스’와 ‘플레이’로 규명되는 영화 ⟨소녀의 기도⟩
10. 특집/ 연결하고, 순환을 주장하기: 독립영화협의회 낭희섭 대표 인터뷰
11. 영화제가 활짝 피었습니다—대안적 영화제를 상상하기 위한 생산적 망각
12. 디스코팡팡적 시네마: ⟨알라딘2019⟩ 4DX
13. 걷잡을 수 없는/겉잡을 수 있는: 2019년의 영상 작업을 통해서
14. 테니스와 바둑의 신체를 상상하며: 되받아치기와 이중구속의 비평


BACK NUMBER

1호 2019년 9월

1. 환영에 대한 두 가지 입장: ⟨라이온 킹⟩과 ⟨야광⟩
2. 유령의 기술: 차이밍량의 ⟨더 데저티드⟩
3. 괴물, 일레븐, 무전(하)기
4. 장재현의 보이 스카웃은 무엇을 단련하는가?
5. 비체(abject) 생산라인의 작동방식을 드러내는 무빙이미지들: Maotik의 ⟨FLOW⟩와 이은희의 ⟨Contrast of Yours⟩
6. 무한 가정해보기: 류한솔 작가의 ⟨크리크리 메리크리 스마스⟩를 중심으로
7. 픽션의 증언
8. 다음 세기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의 ⟨힘의 한 세기⟩
9. 특집/ 영화평론가 김소영 인터뷰
10. 특집/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한국 영화비평계의 86세대에 대해 반추하며
11. 특집/ 한국영화비평계의 00년대부터 지금까지


0호 2019년 5월

1. 철의 꿈, 믿음의 끝: 박경근의 ⟨철의 꿈⟩
2. 펼치고 다시 조립하기: 백종관 감독론
3. ⟨로맨틱 머신⟩에 대한 짧은 소고: 카메라-눈의 체험을 체험하기
4. 경험되지 않는 영화에 대하여



비평의 비평 2019년 11월

듀나와 이동진과 기타등등‘씨네21식 비평’ 비판오큘로에 대해서반면교사정면교사?



선언문




경험되지 않는 영화에 대하여

정경담



내가 영화 내에서 아주 당연하게 멈춰 섰던 순간들에 대해 회고해 본다. <파이트 클럽>이나 <비디오 드롬>처럼, 정신분석학적 차원에서 너무나 명징하게 도식적으로 정리되는 영화들과 그 ‘정리’의 지점마다 멈춰 섰던 순간들이 나의 정지 경험들이었을까? 아니면 유사하게, 구조주의를 처음 배운 이후 이항대립 구조가 보일 때마다 멈춰 서던 순간들이? 아닌 것 같다. 나의 자의적 멈춤이 아니라, 분석 틀을 미리 내재시키고 그것에 의해 반자동으로 멈춰선 것뿐이기 때문이다. (‘초자아’를 만나면 일단 멈춰라! ‘이드의 날뜀’을 만나면 멈춰라! 같은.) 말하자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화적 경험으로서 ‘멈춤’은 도로에서 인터체인지나 신호등처럼, 모든 운전자가 멈춰서야 하는 시스테믹한 차원이 아니라 ‘나’의 차원에서 멈출 수 있는 아주 사적인 장애물에 의해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혹은 내가 ‘여기서 멈춰야 한다’는 강력한 정신적 작동 때문에 스스로 브레이크를 잡은 것이거나. 그 두 가지 차원에서의 ‘멈춤’만이 진정 나와 영화 사이에서의 정지의 순간, 영화적 경험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의식적으로 멈춰서는 순간에도 영화의 운동은 그 멈춤을 통과하여 계속 앞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 달려나가는 영화를 잡아채고 그 자리에 멈추도록 하는 것은 보통은 스페이스 바, 혹은 터치스크린을 통해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르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고, 이것은 새로운 매체 등장 이후의, 멀비가 이야기한 ‘멈춤’의 순간을 촉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손 안에 들어오는 플랫폼 이외에 일반적인 극장에서의 상영 중에서도 수시로 의식의 작동을 멈추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달려가는 영화의 운동-이미지를 우리가 잡아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상영 중에 정지되는 사고에 의해 우리의 의식이 어쩔 수 없이 놓치게 되는 영화 운동에의 손실을 뒷받침한다. 의식이 완전히 정지하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이미지와 함께 페이스를 맞추어 달리면서도 멈춤의 순간, 즉 영화적 경험을 지속시켜나갈 수 있다. 그러나 멈춤의 순간에는 사적인 감정과 감흥이 개입하며, 서사에 발맞추어 나가던 그 동시적인 전진의 행로가 조금 변형되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제어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닐 것이다.
         비평의 무력감 앞에 좌절해서는 안된다고 하지만, 어떤 영화 앞에서는 무언가 한 줄을 적는 것에조차 실패하고 무너지기도 한다. 나에게 있어 그것은 주로 고다르의 차가운 실험들 앞에서였다. 여타의 실험영화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나는 고다르의 영화를 볼 때마다 차갑고, 건조하고, 냉소적이고, 더불어 그런 기운으로부터 비웃음당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가끔은 비웃음당하는 대상이 나뿐만이 아닌 영화라는 매체 그 자체이기도 했다. 고다르를 시도하고자 할 때마다 나는 흡사 벽에 부딪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늘 영화를 정지시키고 돌아 나오곤 했다. 나는 내가 고다르의 실험에 대해 호기심과 지적 탐구의 열망으로써 반응하는 사람이었으면 했으나 그런 도전정신 혹은 지적 허영심만으로 그와 친해질 수는 없었다. 영화이론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혹은 시네필 워너비로서, 나는 조금 종교적인 차원에서 고다르에게 열광하고 그를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이를 위해서는 내 힘으로 영화를 정지할 수 없는 환경에 스스로를 몰아넣어야만 한다는 판단이 섰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누군가는 영화 비평이 정지나 반복 없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크게 안도했다. 때때로 개봉에 임박하여 영화를 보고 며칠 상간에 리뷰를 작성해 달라는 요구를 받으면 나는 언제나 그것이 부당하다고, 심지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런 일이 두 가지 이유로 곤란했다. 첫째, 한 번 본 영화에 대해 나의 능력으로는 최소한의 상세한 분석조차 곁들일 수 없기 때문에 글의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고, 둘째, 최소한 어떤 영화를 처음 볼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늘어져서 그저 ‘보고만’ 싶기 때문이다. 이전에 다른 곳에서도 얘기한 적 있는 것이지만 나는 영화를 덩어리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처음부터 회처럼 포를 떠서 보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영화 이론을 공부한다는 것과 비평을 쓰고 싶어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이러한 ‘포 뜨기’ 활동에도 분명히 열의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영화를 한 번 경험한 이후에 이차적으로 다시 보면서 수행되는 과정이어야 한다. 왜냐면 나는 영화를 해체해서 매뉴얼대로 분석하는 기술자가 되고싶은 것이 아니라, 영화에 대한 글을 쓰면서도 이전처럼 영화 보기를 즐기고 영화에 감응하고 영화가 주는 총체적인 기쁨을(때로는 불쾌함을) 그대로 받아내는 사적인 경험을 지속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시 하던 얘기로 돌아와서 어쨌든 빠른 마감을 요구하는 활동에 있어 나는 그에 알맞는 수준이나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급기야는 영화관에 수첩을 들고 들어가서 깜깜한 와중에 지렁이 같은 메모를 하며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쓸 만한’ 것, ‘분석될 만한’ 것들이 보이면 닥치는대로 메모를 하고 인상적인 대사를—본문에 인용할 것이 필요했기 때문에—받아 적고, 그러다 보면 영화에 전혀 집중할 수 없었다. 이 하나의 개별적인 영화를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만나는 것인데 그런 기계적 방식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힘들었다.
         예전에 나는 내가 더 이상 극장에만 국한된 영화 경험이 아닌 영화를 보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고 좋아할 수 있게 되었다고 썼다. OTT 서비스나 유투브 같은 플랫폼에 대한 나의 태도는 긍정적이다. 이것은 유효하다. 하지만 다른 차원에서 새로운 감상 방법들을 조금 공격해 보자면, 새로운 매체 등장에 즈음하여 영화 감상 방식의 패러다임 자체가 완전히 옮겨갔다 할지라도 ‘영화를 중간에 끊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보는’ 것의 중요성은 여전히 큰 것 같다.
         멀비가 말하는 정지, 중지, 멈춤은 앞서 말한 대로 영화를 한 번 이상 본 이후에 대두되어야 하지 않을까? 자크 오몽은 『영화 작품 분석』에서 비물질적으로만 존재하는 ‘영화’에 있어 굳이 원본을 정의하자면 그것은 감독[창작자]이 의도한 최적의 상태에서 영사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일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즉,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영화 감상의 세태가 달라지기는 했지만 그것을 영화의 원본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필요할 때마다 영화를 멈추면서 ‘끊어 보는’ 경우에 말이다. 문득 내가 현재 ‘보는 중인’ 영화가 몇 편인지 궁금해져 세어 보았는데 무려 스물네 편이나 되었다. ‘보는 중인’이라는 말은 정확히 말해서 보다가 중단한 영화, 하지만 곧 마저 볼 것이라고 마음먹고 있는 영화라는 의미이고, 즉 그런 영화가 지금의 시점에서 동시에 스물네 개나 된다는 것이다. 꽤 여러 편일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충격적인 숫자였다. 중단의 이유는 별 것 아니었다. 당장 이 영화를 보는 것보다 다른 일이 급해서, 혹은 배가 고파져서, 전화나 문자가 와서 그것을 받느라, 아니면 지루해서, 집중력을 잃어서. 극장에서 원본 상태—자크 오몽의 관점에서—로 본 것이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십 분 정도 보다가 만 영화도 있고 십 분 정도만 남겨놓고 감상을 완성하지 못한 영화도 있다. 중단한 지 하루 된 것도 있고 반 년이 넘게 지난 것도 있다. 반 년째 중단한 영화를, 당시에 일시정지 눌렀던 시점에서부터 다시 보는 것이 유의미할까? 실제로 나는 얼마 전에 <경복>을 무려 삼 개월 만에 다 보았다. 며칠에 한 번씩 재생시켜 놓고 때로는 오 분씩, 때로는 십오 분씩 끊어서 보았다. 다 보고 나니 이걸 ‘봤다’고 할 수 있을까 저어되었다. <경복>은 내가 좋아하고 열광할 만한 요소가 많은 영화였는데 스스로 너무 잦은 버퍼링을 만들어서 유려한 감상이 가능하지 않았다. 영화가 (드디어) 다 끝나고 크레딧 롤이 검은 화면 위에 올라가고 있는데 아무 감흥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스트리밍 서비스는 사실 온전한 영화 경험을 저해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많은 영화에 간편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저 많은 중단들을 언제 다 만회할 수 있을까.
         사설이 길어졌지만, 어쨌든 그래서 ‘중단에의 차단’을 위해 극장에서 처음 본 고다르의 영화는 <언어와의 작별>이었다. 상영 중에 관을 뛰쳐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모든 러닝타임을 견디기는 했으나, 영화가 끝나고 3D 안경을 벗는 순간 언어고 자시고 당장 고다르와 작별하고 싶었다. 화면을 찢고 이어 붙이고 겹치고 사운드를 산산이 쪼개고, 음악은 결정적인 순간에 사라진다. 모든 씬이 별개의 옴니버스 같아서 장면이 곧 시퀀스가 아닐까 고민하다가 이내 그런 고민조차도 무용할 만큼 내가 아무것도 ‘통과시키지 못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영화는 여자와 남자의 불안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 같지만, 이 흐릿한 서사마저도 아무 감흥을 자아내지 못하고 곧 텅 비어버리고 말았다. 모든 장면은 아주아주 작은 극미량의 단서들로만 느슨하게 연결되었다. 혹은 전혀 연결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모든 푸티지는 근사한 칼로 유려하게 베어놓은 것이 아니라 도루코 면도날로 난도질 된 듯했다. 사실 나는 이 영화를 본 뒤에 무언가 써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언어와의 작별> 이전에 고다르의 영화를 제대로 보는 것에 단 한번도 성공한 적 없었기 때문에, 나는 영화관 입장 전부터 애초에 마음을 상당히 비워낸 상태였다. ‘많은 것을 바라지 말고 단 한 가지의 쟁점만 잡아 내서 짧게라도 써 보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가 모두 끝난 이후에 정리된 문장으로 머릿 속에 남은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짤막한 메모 수준의 감상도 남길 수 없었다. <언어와의 작별>은 컬러와 흑백 이미지를, 파운드 푸티지와 푸티지를, 사운드와 침묵을, 단어와 문장을, 동물과 사람을 끊임없이 연결하며 마치 충돌 몽타주 같은 대립쌍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지만 또 동시에 이러한 대비가 유의미하지 않음을 밝히려 시도하는 것 같기도 했다. 같은 맥락에서 고다르는 3D라는 첨단 기술을 끌어와 전혀 3D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전유해 버린다. <언어와의 작별>에서 3D가 주는 효용은 혼란의 가중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3D 영화라는 스펙터클에서 기대해왔던 ‘더 생생한 입체감’ 같은 것은 구경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3D가 영화에의 몰입을 굉장히 공격적으로 방해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몇 번이고 3D 안경을 벗고 영사 상태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지 확인해야만 했다.
         말하자면 내가 느끼기에 <언어와의 작별>에서 그는 영화, 그리고 영화가 분석되는 일 자체에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관객에게 영화적 경험을 간신히 허락(물론 이것은 막는다고 막아지는 영역은 아니지만)하고는 있지만, 그것을 언어로 구체화시키지는 못하도록 모든 국면에서 미리 손을 써 둔 것처럼 느껴졌다. 이래서 언어와의 작별이라고 이름 붙인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기도 비평가였으면서 이렇게 치사할 수가! 싶었다. 심지어 오히려 그런 이력 덕에 그는 자신의 작품이 분석 ‘당할’ 여지를 충분히 파악했을 것이고, 그래서 그 가능성들을 철저히 그리고 원천적으로 제거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은연중에라도 내 것을 쓸 때 참고하게 될까 봐 남의 글을 미리 읽지 않는 걸 항상 원칙 삼아왔는데, 그 날은 별 수 없이 이것저것 찾아보게 되었다. 적어도 장면들에 담긴 최소한의 서사에 대해 안내받고 싶어서였다. 그러면 애매하고 언어화되지 않은 짧은 순간들이라도 그 서사에 끼워 맞춰 설명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를 해석해 놓은 글들 역시 이해되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나는 <언어와의 작별>에서 그들이 말하는 한 톨의 위대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체 이 영화에서 무엇을 ‘읽어 낼’ 수 있다는 말인가? 모든 시퀀스는—<언어와의 작별>에서 시퀀스의 구분이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해석되거나 분석되거나, 적어도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모든 순간에 관객으로부터 전속력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영화가 나에게, 나와 관계맺기를 원하는 ‘그 무엇’을 매달고 질척거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가 영화를 향해 “제발 내 사정거리에서 벗어나지 말아달라” 애원하면서 쫓아가야 했고 그럼에도 잡히지 않는 형국이었다. 자칫하다 영화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면서,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해 하나마나한 말이나 괴발개발 써내게 될까봐 겁이 났다. “내적 경험, 특히 공연에 대한 내적 경험의 금지” 라거나, “이미지라고 불리는 것이 현재의 살인” 같은 대사들은 영화를 통해 무엇도 해석하거나 경험하도록 두지 않겠다는 고다르의 직접적인 선언처럼 들렸다. 이 선언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끈질기게 미끄러지거나, 아니면 애초에 들어맞지 않는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 모든 씬이, 아니 모든 쇼트가 통과되지 않고 몸에 부딪혀 발 밑 여기저기에 대충 놓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내가 영화에 대해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는 거리는 충분히 확보되었지만, 역으로 그 영역이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드넓었고 자력으로 좁힐 수도 없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내가 그 사이에서 허둥지둥하는 와중에 영화는 이미 멀리 지나가고 그 자리에서 떠나버린 뒤였다.
         글을 완성하기 위해 나름대로의 해결책이라고 내세운 것은 라깡 같은 이론을 끌어와서 영화에 끼워 맞추고 어거지로 글을 끝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더 큰 질문이 남아있었다. 기성 영화 언어에 저항하는 실험을 지속해온 고다르가 급기야 기존하는 이미지와 언어가 더 이상 아무 효용도 가지지 못한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는 마당에, 이 영화에 대해 구구절절 첨언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언어와의 작별>은 어떤 분석이나 리뷰로도 설명되거나 안내될 수 없고 직접 경험하는 것만이 방법이지만, 경험한다고 해서 뭔가를 알게 된다는 보장도 없는 것으로 보였다. <언어와의 작별>에 대해 뭐라도 써내려고 애를 쓰면서, 나는 (고다르와 고다르의 영화로부터) 비평이라는 것 자체의 몰가치함을 강요받는 듯한 메스꺼움을 느꼈다. 정말 괴로운 것은 내가 이 강요에 전혀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말 그대로 고다르는 영화를 통해 내가, 그리고 나아가 모든 관객과 비평가가 자신을 헤집고 분석하는 것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비평의 효용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고민한 적이 있다. <언어와의 작별>이 준 좌절감은 나의 오래된 고민을 다시 질질 끌고 와서 다시 내가 그 질문과 마주하게 만들었다. 영화에 대한 비평을 쓰는 것도 읽는 것도 모두 한 집단에서 일어나는 제한적인 작용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는데, 계속해서 “우리는 중간자”라고 믿으며 애를 쓸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비평을 쓰는 사람들은 마치 이 영화를 분석하고 이를 통해 어떤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것이 임무이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인 것처럼 여기지만, 대중은 사실 관심도 없고 ‘나 말고 다른 비평가’들이 읽을 뿐인 것은 아닐까? 그리고 심지어 많은 창작자는 비평가를 흰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를테면 <아티스트: 다시 태어나다>에서, 그리고 <버드맨>에서, 집 앞 카페 옆 테이블의 이야기 소리에서조차 비평가들에 대한 반감을 읽을 수 있다. 그럼 이미 중간자 역할을 상실한 게 아닐까? 우리는 영화와 관객 사이를 이간질하는 훼방꾼, 아니면 잘난 척하는 소피스트, 그것도 아니면 그냥 그들만의 리그에서 행복한 영화 오타쿠들처럼 취급받고 있는 게 아닐까? 혹은 그게 마냥 억울할 일이 아니라 정말로 피해를 주는 일이거나 무용한 일인 것은 아닐까? 일전에 누군가 자신과 주변인들이 겪는 창작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긴 산문으로 써서 호소하듯 발표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그것을 들으면서 정말로 슬프고 무서웠다. 일차적으로 그 글과, 그것을 읽는 당사자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슬픔에 감정적으로 영향받은 것이었고, 나아가 “비평이 어쩌면 텍스트를 산출하는 자들에게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것인지도 모른다”라는, 처음 겪는 질문이 닥쳐왔기 때문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내가 영화를 설명하고 분석하고 싶어 하는 것이 남들을 위한 것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건 그냥 나의 정신적, 지적 만족을 향한 것이었다. 이 질문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서사가 있거나 분석의 여지가 있는 영화의 경우라면 비평은 어떤 새로운 관점의 제시로 기능할 수도 있고, 내가 겪은 경험의 공유로서 꽤 의미 있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나에게서 통과되지 못한 어떤 부분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언어와의 작별>처럼, 그 어떤 것도 나를 통과하지 못하고 나자빠지는 영화를 나는 대체 어떻게 써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어떻게든 텍스트를 헤집고 뭐라도 말하는 것이 정말 건강한 비평일까. 생산적이거나 새롭거나, 적어도 괜찮은 글로써 담론에 기여하는 것이 비평가의 역할이라면 말이다. 써 나가다 보니, 그런 비평은 심지어 자기충족적인 글조차 될 수 없는 게 아닌가 싶다.
         우리가 영화를 보며 찍을 수 있는 방점의 집합은 선형적이지 않다. 그것은 여기저기에 방향성 없이 산재해 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방점의 공통분모를 엮어 성좌를 그리는 것이라고 배웠다. 그렇다면, 성좌 그리기에서 탈락한 단독적인 방점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필요 이상의 분량만큼 길게 쓸 수 없다면 그것은 성좌에 편입될 수 없고, 단상이나 상념이나 궁금증 같은 것들로만 남는가, 혹은 한 성좌의 뒤에 한 문단으로 뭉뚱그려 ‘남은 질문들’로서 서술될 수 밖에 없는가. 이것은 <언어와의 작별>을 보며 찍은 그 어떤 방점들에 대해서도 성좌 그리기에 실패하고 남은 잔여의 고민이다. 통과하지 못하는 지점에서 멈춰서고 이에 대해 고찰하는 것을 영화적 경험이라고 한다면, 아무것도 통과되지 않는 영화가 제공하는 것은 과잉된 영화적 경험인가, 아니면 경험되지 않는 허탈함인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