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테리알

ma-te-ri-al

신문 신청하기

공개서한

질식자의 편지: 영화문화의 현재에 관한 13개의 질문
질식의 날 - 못다 부친 편지
회신1. 질식자에게
회신2. <비평(권력)에 대하여> 의 질문
회신3. 쉰들러 리스트: 무너진 낙원에서 완전함 찾기

수신인: 씨네21
회신4. 형제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회신5. 답변?
회신6. 창작과 비평의 관계에 대하여.....
등단 = 검증?
회신7. 지리적 계급의 소멸을 함께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회신8. 공개서한에 대한 회신입니다.
ㄴRE: 별로 어렵지 않은 이야기
회신9. 질식자에게

비평? 우리는 웃고 있다




3호 2020년 8월

1. 특집/ 여섯 빛깔 스크린 너머: 한국퀴어영화제 20주년에 부쳐
2. 특집/ CRY, FUCK, BEAT UP(울고 하고 패고)
3. 특집/ “퀴어영화 연구는 정말로 노다지”: 『한국퀴어영화사』 책임편집 이동윤 인터뷰
4. 특집/ 한국 게이/레즈비언 영화와 호모-특정적 난관들
5. 특집/ 샷다 내린 퀴어랜드: ‘디스코팡팡’과 ‘방 탈출 게임’ 사이에서
6. 특집/ 뱀파이어의 딜레마: 누구를 위한 ‘착즙'인가?
7. 정전에 속하기, 정전 밖에 있기: 사프디 형제의 방법
8. 검고도 밝은: 조주현의 ‘흑공’과 스크린 안의 미로
9. 아이돌 기표의 '트랜스' 해부하기: NCT 127의 〈슈퍼휴먼〉과 아이돌 피상성
10. '접촉'에서 '접속'으로: NCT 127의 경우
11. 아직도 굳이 〈무한도전〉을 논할 필요가 있는 건
12. 듣는 여자: 〈그리고 베를린에서〉
13. 박세영의 무한 도시
14. 추상化와 픽션: 이소정의 영상 작업에 대해
15. 이미 흩어진 '밀레니얼 시네필’
16. 비천함, 실패, 나쁜 것에 관한 정직한 성찰(우회하지 마세요)

A BACK NUMBER

2호 2020년 3월  

1.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잠깐!)” 2019 한국 코미디 영화의 ‘비빔면적 경향’과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윤리’: 영화 ⟨극한직업⟩, ⟨걸캅스⟩, ⟨엑시트⟩를 중심으로
2. 봉준호 월드 유람
3. 창문과 창문 ‘너머’—오연진의 《Lace》와 백종관의 ⟨추방자들⟩
4. 갱신과 추동 사이에서 기업가∽노동자∽DIY로서의 작가
5. 구체적 세부: 2019년을 함께한 독립극영화 속 여자들
6. 특집/ 액체의 단상들: 리퀴드(liquid)와 플루이드(fluid), 그 언저리에서
7. 특집/ 15초 곱하기 240의 실험: 이소윤의 ⟨450⟩
8. 특집/ 보여주는 대신 믿게 하기: 박시우의 ⟨변신⟩
9. 특집/ ‘플레이스’와 ‘플레이’로 규명되는 영화 ⟨소녀의 기도⟩
10. 특집/ 연결하고, 순환을 주장하기: 독립영화협의회 낭희섭 대표 인터뷰
11. 영화제가 활짝 피었습니다—대안적 영화제를 상상하기 위한 생산적 망각
12. 디스코팡팡적 시네마: ⟨알라딘2019⟩ 4DX
13. 걷잡을 수 없는/겉잡을 수 있는: 2019년의 영상 작업을 통해서
14. 테니스와 바둑의 신체를 상상하며: 되받아치기와 이중구속의 비평


BACK NUMBER

1호 2019년 9월

1. 환영에 대한 두 가지 입장: ⟨라이온 킹⟩과 ⟨야광⟩
2. 유령의 기술: 차이밍량의 ⟨더 데저티드⟩
3. 괴물, 일레븐, 무전(하)기
4. 장재현의 보이 스카웃은 무엇을 단련하는가?
5. 비체(abject) 생산라인의 작동방식을 드러내는 무빙이미지들: Maotik의 ⟨FLOW⟩와 이은희의 ⟨Contrast of Yours⟩
6. 무한 가정해보기: 류한솔 작가의 ⟨크리크리 메리크리 스마스⟩를 중심으로
7. 픽션의 증언
8. 다음 세기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의 ⟨힘의 한 세기⟩
9. 특집/ 영화평론가 김소영 인터뷰
10. 특집/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한국 영화비평계의 86세대에 대해 반추하며
11. 특집/ 한국영화비평계의 00년대부터 지금까지


0호 2019년 5월

1. 철의 꿈, 믿음의 끝: 박경근의 ⟨철의 꿈⟩
2. 펼치고 다시 조립하기: 백종관 감독론
3. ⟨로맨틱 머신⟩에 대한 짧은 소고: 카메라-눈의 체험을 체험하기
4. 경험되지 않는 영화에 대하여



비평의 비평 2019년 11월

듀나와 이동진과 기타등등‘씨네21식 비평’ 비판오큘로에 대해서반면교사정면교사?



선언문




펼치고 다시 조립하기: 백종관 감독론

정경담



1. 백종관은 실험영화 외에도 인스톨레이션 작업과 안무가들과의 댄스 필름 협업을 병행하는 멀티테이너다. 그가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나와 불안정하기 그지없는 실험영화 작업에 매진하게 된 경위를 살펴보는 일은 물론 흥미롭겠지만, 여기에서는 작품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들 몇 가지만을 단서로 하여 그의 작업을 논해보고자 한다.
        백종관의 포트폴리오 페이지에서 볼 수 있는 최초의 필름 작업은 2008년에 만들어진 <Hammering Film>이다. 이후 그는 단편 <호소런>을 제34회 서울독립영화제에 공개하면서 본격적인 필름 작업 활동을 시작한다. 이즈음까지 백종관은 자신의 일상 주변에 널부러진 파편들을 이어붙이고 재조립하는 방식으로 ‘다르게 보기’ 연작과도 같은 작업들을 진행한다. 2012년작인 <출근>도 그 연장선 위에 있다.
        같은 해 제작된 36분짜리 실험 다큐멘터리 <이빨, 다리, 깃발, 폭탄>에서 백종관은 비로소 그의 장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방식을 구축한다. 조각조각의 사운드 혹은 이미지 클립들을 접붙여 각각의 트랙을 만들고 동시에 재생시키는 것이다. 각 소스의 영역은 얼핏 보았을 때 결코 내적 연관을 갖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소스들은 서로 충돌하여 튀기도 하고 서로의 면에 달라붙기도 하며, 이러한 상호작용을 통해 수용자의 의식을 클립들이 만들어 낸 일정한 리듬에 적응시킨다. 그가 제공하는 수많은 레퍼런스들은 관객 각자의 사적 경험과 일합일리하며 수많은 별도의 각주가 된다. 양화대교의 레이싱 트랙 공사 과정을 담은 <양화>나 유년 시절 친구에게 받은 엽서에서 출발하여 온갖 테마의 영상 클립들을 축적시키는 <와이상>, 햄릿과 ‘운동’ 사진들에서 찾아낸 얼굴들을 동시 상영하는 <순환하는 밤> 까지 그의 독자적인 작업들이 이어진다.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백종관이 안무가, 댄스 씨어터 등과 진행하는 다양한 협업 활동들이다. 이를 백종관은 ‘댄스 필름’이라고 일컫는다. 춤과 무용수, 그리고 그 두 항이 접지하는 공간인 씨어터를 영상으로 담아내며 새롭게 구조화하는 일련의 작품들이다. 그의 포트폴리오에 새로운 하나의 범례로 자리 잡은 이 작업들은 2013년 LG아트센터에서 진행된 프로젝트 무용 공연 <춤, 극장을 펼치다>의 제작 과정을 담은 <극장전개>와 그 준비 단계 격인 <프로메테우스의 불>을 만들면서 시작됐다.

2. 백종관의 유일한 장편 작업인 <극장전개>(Unfold the Theater, 2014)는 백종관이 작업한 여타의 단편과는 조금 달라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을 예외로 두고 백종관을 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의 단편 작업을 모두 관통하는 테마에 접근 가능하도록 하는 힌트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견 이 작품은 의뢰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 그리고 그간의 필모그래피들과 달리 어느 정도 일반적인 다큐멘터리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작품과 묶기는 조금 어려워 보일지 모른다. 반면 여전히 어떤 과정의 기록이라는 연속성을 지녔으며, 지금부터 설명할 ‘전개도 펼치기’가 가장 상세히 기술된 작업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극장전개>의 경우, 다른 단편들처럼 몇 가지의 개별 소스를 동시에 풀어놓는다기보다는 한 공연의 준비과정을 담은 비교적 평범한 다큐멘터리다. 그러나 ‘Unfold the Theater’라는 영문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이 영화는 입체도형의 전개도를 펼치는 듯한 구성을 갖는다. 전개도란 중심이 되는 한 면을 기준으로 하여 사방 혹은 그 이상의 개별적 방향으로 펼쳐져 뻗어 나감을 의미하며, 이때 전개도의 모든 면은 최소한 하나의 다른 면과 닿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의무교육으로부터 배웠다. 입체도형 전개도의 또 다른 특징은 하나의 입체도형에 하나의 전개도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이름에 걸맞게 전개도의 속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극장전개>를 국립극장을 펼쳐 만든 전개도라고 간주했을 때 중요한 것은 이 펼침이 연결 상태의 어느 한 모서리를 선택하여 절개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가능한 일임을 눈치채는 것이다. 어느 모서리를 오릴 것인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심이 되는 면을 무엇으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전개도의 형태는 다양한 경우의 수를 갖게 된다. 이를테면, <극장전개>에서 기준면은 국립극장 로비의 마룻바닥이 된다. 영화의 러닝타임 동안 각 방향으로 뻗어 나간 개별 모서리들의 전개는 다시 한 방향으로 모이거나 종합되며 마무리되지는 않는다. 펼쳐진 채 완성된 영화의 면면을 상상적으로 바로 세워 입체도형으로 만들었을 때 ‘국립극장’이라는 하나의 총체로서 존재하게 됨을 인식할 뿐이다.
        이렇듯, 백종관이 작품을 만들며 유지하는 기조는 전개도의 개념을 빌어 설명할 수 있겠다. 백종관의 작업에서 이미지와 사운드 클립들은 불일치하며 제각각의 목소리를 내는 가운데 우연에 의해 탈부착 되며 간헐적인 의미작용을 이루어낸다. 이 탈부착은 분산되어 있던 주의를 일시적으로 집중시키는 효과를 만든다. 리듬을 형성하여 주의집중을 이어나감으로써 이미지와 사운드가 일치하지 않고 있음을 지속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극장전개> 이외에 그의 단편 작업들을 각각 독자적인 개별의 전개도로 보았을 때, 전개도의 진행 과정 중에 비트의 뭉개짐이나 화질의 저하, 튀는 소리, 우연적인 소리의 접촉 등과 같은 글리치가 속출하고 있으며 이것이 상술한 리듬의 형성에도 상당 부분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지 상에서 발생하는 글리치 뿐 아니라 짧은 길이로 쳐낸 쇼트들 사이사이에 이물질이 끼어들기도 한다. 입체(전체)로서의 원본 기록을 펼쳐 전개하고, 그 과정에서 글리치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다시 이를 접어올려 입체로 조형했을 때 이것은 온전한 본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가?
        원본 기록의 모서리를 잘라 펼친 이후에 발생하는 글리치는 원본 자체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기록 과정, 혹은 감상자의 수용과정 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오류는 틀림없이 감상에 영향을 준다. 특히 서사가 뚜렷하지 않고 쇼트의 연계가 들쑥날쑥한 실험영화에서는 오류와 원본을 구별하는 일이 어렵기 때문에 더더욱 오류를 영화와 접붙여 인식하기 쉽다. 전개도에 글리치가 기입되는 것은 기록을 재차 기록함에 있어 나타나는 이중의 오류이다. 이같은 오류들을 원본으로부터 완전히 걷어내지 못한 상태에서 다시 접어올려 입체로 조형한다면, 조형의 시점에 이미 이 총체는 원본과는 다른 것이 되어있다. 그러나 이것이 원본과 다른지, 원본과 같은지 혹은 얼마나 유사한지 우리는 결코 확인할 수 없다. 이때 총체라 일컬어지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 합의라는 측면에서 메타크리틱과 같은 형질이고, 따라서 원본과 다르다 해도 이것을 원본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원본과의 닮음 정도를 대략적으로 수량화하여 이것의 ‘대부분이’ 원본임에 합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종관의 일련의 작품들은 이 편리한 합의를 거부하고, 원본과 재조립의 결과가 일치하지 않거나 일치할 수 없다고 끊임없이 우리를 설득하는 것처럼 보인다.

3. 일반적으로 영화는 영화 내의 요소들을 접붙여 리듬을 만들고 관객이 그것을 타게 하는 식으로 그들의 주의집중을 유지시킨다. 실험영화와 달리 극영화에서 리듬을 만들어낼 수 있는 요인에는 인물, 플롯을 비롯한 다양한 이벤트가 포함되며, 많은 경우 플롯만으로도 리듬을 조절할 수 있다. 그러나 백종관의 작품 <이빨, 다리, 깃발, 폭탄>에서 사운드 클립과 영상 푸티지들은 일합일리하면서 간헐적인 몽타주를 이루어낸다. (영상-영상, 소리-소리 몽타주는 그보다 조금 더 빈번히 일어난다.) 일반적인 서사영화에서 플롯이 관객의 주의를 관장하는 것과 달리, 백종관의 작품 <이빨, 다리, 깃발, 폭탄>에서는 별개인 줄 알았던 두 레이어를 극미량의 단서를 통해 일시적으로 접탈착시키면서 영화에 박자감을 부여하고 그것으로 관객의 주의집중을 유지한다. <순환하는 밤>은 햄릿의 희곡과 관계없어 보이는 얼굴들을 꿰어 배치하고 미묘한 연결을 이루어낸다. 이렇듯 백종관의 작품은 계속해서 사운드와 이미지 트랙의 관계를 고찰할 수 있게 한다.
        <호소런>과 <출근>, 그리고 <양화>는 백종관의 작품 가운데 입자가 거친 축에 속한다. <출근>은 수백 개의 일출 사진을 초 단위로 접붙여 하루의 일출처럼 보이도록 만들어졌다. 이는 감독이 설명했듯이 매일 출근시간 지나치는 한강 수면의 햇살을 지하철 내에서 촬영한 것들이다. 모든 사진에는 그 사진이 찍힌 날짜와 시간의 캡션이 달려 있고, 이미지들은 거의 같은, 정밀하게 감식하지 않는 이상 그 길이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짧은 텀을 가지고 전환된다. 반면 사운드 클립은 별도의 조작을 거치지 않은 하루 분량의 온전한 상태로 인식된다. 그러나 우리는 (수백 개의) 이미지들이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채집되었고, 때마다 사운드의 양상도 비슷할 것이며, 그래서 이 캡션 없는 사운드 트랙을 출근시간의 평균적인 소리로 무리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결코 수백 개의 일출 이미지들과 사운드들은 동시에 수집된 것이 아니다. 적어도 동시 수집된 짝패는 한 쌍 혹은 그 미만인 것이다. 관객은 이미지의 연속 전환을 통해서도, 온전한 하나의 사운드를 통해서도 '하나의 출근길’이라는 평균의 합의를 이끌어낸다. 그리고 이 합의의 과정은, 합의(合意)라는 한잣말의 의미가 무색하게도 철저히 개별적이고 독자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양화>는 영상과 음성 가운데 어느 한 소스의 속도가 조작을 거친 것임을 인식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이를 감안하도록 한다. 반면 <호소런>의 경우에는 이미지와 사운드가 전혀 일치하지 않음에도 이 일상적인 풍경을 사운드가 통제하고 있는 광장의 변두리나 이면으로 인식하게 되는데, 이 역시 전술한 개별적 합의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작품은 모두 사운드 트랙이 이미지의 현장, 다시 말해 프레임 내부의 소리가 아님을 관객이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보여지는 이미지들을 사운드가 총괄한다고 간주하고 알아서 연결고리를 만들도록 한다. 이 때 관객이 스스로 기워 낸 상상적 이미지-사운드 복합체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으나 영화의 형태로 합본된 새로운 원본의 생산이다.
        2018년 공개된 <#cloud>는 흰 벽으로 둘러싸인 방에서 시작된다. 사다리가 놓여 있고 레일 조명이 천장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공간은 아마도 전시 세팅 전의 갤러리인 듯하다. 숏의 앵글과 사이즈는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반복되는데 대부분 전시장의 사각에서 촬영된 듯한 극단적인 하이/로우 앵글이며, 대부분의 쇼트가 일반적인 사이즈 구분 기준에 따랐을 때 설정 쇼트에 해당할 법한 롱 쇼트 사이즈에 머물고 있다. 이에 미루어 짐작했을 때 영화는 cctv와 유사한 형태로 고정되어 있었던 저화질의 카메라, 혹은 <잠자리의 눈> 처럼 실제 cctv 촬영물을 사용한 교차편집의 결과처럼 보인다. 컷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사운드는 연속성을 가진 하나의 온전한 단위를 유지한다. 이상한 점은, 사용된 쇼트에 수많은 글리치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사운드는 버벅이지 않고 매끄럽게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화면이 완전히 뭉개지는 와중에도 사운드만은 아주 깨끗하다. 그 덕에 관객은 소리와 화면이 일치하지 않는 순간에도 지연되는 이미지를 단순한 버퍼링으로 간주하고, 사운드에 조응하는 매끄러운 영상 이미지를 상상적으로 복원하여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게 된다.
        <#cloud>는 러닝타임이 끝날 무렵 갑작스럽게 전시장 내부의 사람들을 반투명한 유령의 형질로 바꾼다. 픽셀의 뭉개짐, 버퍼링, 노이즈의 삽입이 기록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인 반면, 영상에서 개체의 투명도가 변화하는 것은 임의의 컴퓨터 그래픽 조작 없이는 불가능한 효과다. 그렇다면 혹시 이것은 영화의 에필로그 격으로 인서트된 씬은 아닐까? 그러나 러닝타임과 함께 시작된 사운드가 여전히 분절 없이 이어지고 있는 걸 보면 이 추측도 기각해야 할 듯하다. 유령화된 개체들이 공간에서 사라진 뒤 영화는 전시장 내부를 수리하는 스태프의 모습을 아주 잠시 비추고는 갑작스럽게 그 무대를 전환한다. 자연 풍경을 촬영한 빠른 트래킹 쇼트다. 그러나 이내 풍경 위로 둥근 모서리를 가진 액자 모양의, 정체모를 사각형이 영사된다. 기차의 창문이다. 그리고 덜컹이는 기차 선로 소음 위로 최초의 쇼트에 접붙여져 있던 누군가의 과자 먹는 소리가 겹쳐진다. 카메라 앞에는 분명히 창문이 있었을 것이기에 아마도 풍경 위에 비친 차창은 카메라 앞의 유리창에 비친 반대편 차창이겠다. 그렇다면 카메라 가까이에 닿아 있는 차창의 투명하고 반사되는 성질이 오히려 배경 레이어와 전경 레이어를 전복하여 볼 수 있도록 블렌딩 모드를 변경시킨 셈이다. 다시 카메라의 문제로 돌아오자. 이 쇼트가 본래 찍고자 했던 것은 전방의 차창인가, 차창 너머의 풍경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 위에 영사된 반대편의 차창인가? '원본'은 무엇인가?

4. 으레 형식상의 실험영화들이 불연속편집을 사용하여 관객이 보고 듣는 것 자체의 뒤틀림과 왜곡을 전경화시킨다는 통념이 있어 왔다. 그러나 백종관은 실험영화를 표방하면서도 기술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상업영화에서 주로 사용되는 연속편집을 지향한다. 전형적으로 연속편집은 해당 장면의 전체적인 구성을 조망하는 설정 화면을 롱 쇼트, 혹은 익스트림 롱 쇼트로 보여주고 이후에 세부적인 사항을 보다 조밀한 사이즈로 제시하는 방식을 취하곤 한다. 그러나 <#cloud>에서 백종관은 미디움 쇼트나 클로즈업 등을 사용하지 않고, 디테일이 생략된 롱 쇼트 사이즈만을 연속적으로 제시하며 관객에게 끊임없이 ‘이음매’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고다르로 대표되는 형식 실험 영화처럼 영화 제작 기저의 골조를 드러내 보이는 대신, 백종관은 연속편집이라는 측면에서 기존의 영상문법을 답습하되 영화의 핍진성을 생성하곤 했던 연속편집의 프로세스 자체를 내파시킨다. 중요한 점은 이 내파가 작가의 손에서 먼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용자의 수준에서 뒤늦게 실행된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이 갖는 일종의 따분함은 그의 영화에서 이미지와 사운드 사이의 내적 연관 자체가 인위임을 인지하게 되는 순간을 중심으로 변한다. 이후의 영화는 더이상 서사 전달 체계가 아닌, 영화와 몽타주 자체의 개념을 제고하게 하는 촉매 덩어리로 바뀌고 만다. 이 실마리를 찾는 것은 백종관의 영화를 서사와 단조로움의 굴레에서 벗어나 다시 직시하도록 하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즉, 관객 스스로가 작품에 널부러진 많은 요소들 가운데 균열의 단서를 골라내기 이전까지, 백종관의 기획은 개별 수용자 자신이 일인칭 주인공이 되어 단서를 찾아가는 탐사 스릴러와도 같다. 이같은 시도는 우리가 기록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정말로 온전한 원본 상태의 기록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하고, 내화면에의 집중을 방해한다.
        VR은 상하좌우를 비롯해 나의 시야각 바깥까지 디제시스로 만들며 프레임의 정의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이 빈틈없는 세계에서조차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얼굴에 씌워진 고글의 비뚤어진 각도를 되맞추어야 하며, 이는 물론 내 피부와 고무로 된 접촉면이 만들 가벼운 소음을 동반하는 일이다. 고글을 고쳐쓰며 관객은 이 세계가 가상임을 인식하게 된다. 즉 영화를 보는 일은 디제시스 속으로 깊게 고정되고자 하는 시도임과 동시에, 어떤 식으로든 그 바깥을 인식할 수밖에 없는 숙명적 행위이다. 백종관의 작업은 서사 편집의 실험이 아니라 현실의 조작이 디제시스에 균열을 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하도록 만드는 장치의 실험이다.
        백종관은 그의 작업에서 모든 기록이 글리치 발생 이후 재편집자 혹은 수용자의 입장에서 다시 원본으로 재정위되고자 하는 시도가 불가능함을 보여오고 있다. 그러나 이는 비관론이 아니다. 원본이라는 개념이 완전무결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백종관의 작품을 보는 모든 관객은 영화의 말미에 각자의 새로운 원본을 갖게 된다. 어쩌면 관객은 백종관의 작업을 감상하며 개별적인 각자의 영화를 완성시키는 것일지 모르겠다. 결에 따라 영화를 얇게 찢고, 그 사이에서 힌트를 뽑아내면서, 전개도를 제각기 조립하면서 말이다.